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사담 14화 - ‘녹두꽃’은 절대 지지 않았다

Buddhastudy 2019. 6. 3. 20:17


정책과 역사가 함께하는 시간

전우용의 사담입니다.

 

지난 219일 국무회의에서 동학농민혁명 125주년 맞이해

이 날을 국가기념일로 정하는 안건이 통과했습니다.

125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이죠.

 

올해는 특히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해서

동학농민혁명으로 시작된 이른바

근대화를 향한, 근대사를 향한 발걸음,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 더욱 뜻 깊게 다가오는 그런 한 해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 국민의 역사 선생님,

진짜 역사 선생님이라고 말씀드리는 게 낫겠죠.

 

개인적으로 제게도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던 이이화 선생님을 모시고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의미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1987 6.10. 민주항쟁

1980 5.18 민주화 운동

1960 4.19. 혁명

1919 3.1 운동

1894 동학농민혁명

 

125년 함성의 시작

 

, 선생님 먼 길에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온 국민이 다 아는 진짜 국민 역사 선생님이신데, 한학을 기반으로 역사 공부하셨잖아요?

양반의 철학, 이런 것들 중심으로 한문학이나 이런 것들을 공부하셨는데,

선생님 예전에 허균의 생각부터 시작해서 민란의 사태, 반란의 욕망을 품었던 사람들의 글을 많이 보시고, 그러면서 동학연구에서 또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해오셨는데.

 

<동학에 천착한 계기>

야산 이달,

주역의 대가인 이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난 이이화

아버지에 대한 영향과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소홀하다는 것을 느낀, 이이화

역사적으로 소외되었다는 거는 기록에서도 소외되었다는 거니까요.

 

그렇지. 역사적 소외가 특히 심한 동학농민혁명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대학 다닐 때도 동학난이라고 보통 썼어요.

그러면서 탐관오리에 학정에 반대하여 일으킨 농민의 저항이었으나

결국은 이로 인해서 외세의 침략을 끌어들이는 그런 역할도 했다.

 

뭐 이렇게 하면서, 쉽게 말하면 불의한 권력에 항의하는 것 자체가 나라를 망치는 일일 수 있다는 식의 경고를 주는 형태로 그렇게 결론을 맺었었거든요.

그게 많이 달라지기는 했는데, 가장 중요한 게 뭐랄까요?

이름 붙이는 문제였던 것 같아요. 성격이 어떠냐에 따라서 이름이 달라질 텐데, 선생님은 어떤 이름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십니까?

 

<‘동학농민혁명이란 이름이 되기까지>

동학란을 일으킨 사람들은 무식하고 왕조에 반항하는 사람들이다

동학, 농민군에 대한 표현 무식한 상것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글에서 두 가지 결함을 발견한 이이화

 

동학농민혁명을 전개한 분들에 대한 연구가 거의 되어 있지 않은 상황

동학농민혁명을 전개한 인물은 무식인이 아닌 지식인

신분제 평등, 토지제, 반침략 등을 내포한 개혁안

혁명이라는 이름 붙일 수도 있는 용어

 

역사문제연구소,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사업회 발족

갑오농민전쟁용어를 사용하자는 논의

역사학자 이이화 왈: 동학은 이념 간 중심, 평등을 의미함으로 동학을 제외할 수 없다.

 

1894, 이 사건과 봉기는 무력과 폭동으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왕권에 맞서 봉기를 했다는 점을 들어 의 개념으로 일반화/동학난 또는 동학당의 난

1945, 이후 북한에서는 갑오농민전쟁으로 명명

1905, 남한 동학난 명칭 사용 후 70년대 농민적 지향과 계급 투쟁적 의식 반영 갑오동학혁명으로 사용

1989, 역사문제연구소에서 농민적 지향을 본질로 보고 동학농민전쟁으로 합의

1990, 갑오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1894년 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이라는 4가지 명칭 사용

1996, 간행한 국가교과서 동학농민운동으로 명명

2019, 511동학농민혁명국가기념일로 제정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에서 진행된 남북용어 통일을 위한 논의

남북용어 통일 합의 중 하나의 결과 동학농민혁명

 

혁명이란 용어 사용은 정치변혁의 피해 여부에 따른 것

3.1운동을 놓고 운동혹은 혁명을 이야기할 때

민주공화국, 주권재민 지향으로 3.1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것

 

평등 지향, 토지문제 해결을 주장한 동학농민혁명

봉건 구체제를 타도하고 새 체제를 만들자

 

(*집감소 1894: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의 계급적 입장을 대표하면서 폐정개혁의 실시를 지향한 농민군의 지방 자치기구)

 

쟁점, 동학농민혁명은 직접적인 왕조교체를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

 

진전에 따라 왕조교체 혹은 왕정타도로 이어질 수 있는, 운동자체의 이른바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얘기다.

그런 말씀도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핵심은 그거였죠.

실제로는 이 사건을 이게 혁명이냐? 민란이냐? 아니면 농민전쟁이냐? 이렇게 규정하는 것이 있고, 첫 번째로는.

두 번째로는 이것이 어떤 성격이든 간에 여기에서 동학이 사상면에서, 철학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느냐? 아니면 그냥 농민들의 반란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이론적 지침정도만 가볍게 제시한 정도냐.

 

<여전히 빛나는 동학정신>

“‘종교적 외피설’ 80년대에도 있었던 논쟁

독일 농민전쟁은 종교적 요소를 배제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결론

종교 개입보다는 인권에 주목한 프랑스 혁명

 

다른 종교와 달리 신을 섬기지 않는 동학

종교를 표방했다 하더라도 사회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동학

 

동학의 고민, 인간이 살아서 얼마나 바른 혹은 대우받는 사람이 돼야 할까,

전 역사를 통틀어 민중의 참여도가 높았던 동학농민혁명

 

농민이 대다수였던 시대에 사민평등, 반상차별, 외세침략이라는 침략주의 배경,

그 당시 19세기 말에 범지구적인 시대적 요구들을 다 반영한, 그러면서 그것을 농민의 자발적 의지로써 이루고자 했던 운동이다. 그런 의미에서의 동학농민혁명이다.

이렇게 정의를 해주셨구요.

(*사민평등四民平等: 모든 백성이 평등하게 자유와 권리를 가지는 일)

 

이 사건으로 농민희생자수가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가 되었을까요?

 

<동학농민혁명의 수난사>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당시, 텐진 조약에 의해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

청일 양국 군대의 조선 주둔 한 달 뒤 경복궁 점령한 일본

그다음에 두 번째 1894년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일어난 청일전쟁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일본에 할양된 대만

결국 조선을 점령한 일본

 

동학 농민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우금치 전투

동학 농민군 잔여세력이 가담한 을미의병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인한 1차 을미의병

을사조약 체결 이후, 2차 을사의병과 3차 정미의병까지 이어진 항일의병

항일의병운동과도 비교 불가한 동학농민혁명의 규모

 

동학농민혁명 희생자에 대한 통계 자료가 없는 상황

동학농민혁명의 희생자는 30만 명에 달한다 -박은식<한국독립운동지혈사>

 

기록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동학농민혁명 희생자

(동학농민혁명) 희생자 수 5, 6만 명 -일본인 기록

 

총알이 아까워 농민들을 일렬로 세워 살상을 택하고

살아있는 사람에게 화형을 가하고

동학 농민군에 협조한 양민들에게까지 강행된 무참한 학살

동학농민혁명의 희생자 10만 명으로 추정

 

참여 인원에 참여 규모로 보자면 적어도 전국적으로 일어난 호남에서만 10만 이상이 참여했다고 보고 계신 거 아닌가요?

 

정확한 숫자가 아니지만 역사학자로서의 상식이라 생각하는 이이화 선생

 

지금 사건 자체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첫째로는, 그래서 선생님이 보시기에, 또 그 이전에 선학들의 다른 연구를 보더라도

한국농민 전체의 10분의 1 정도는 참여한 대규모 사건이고, 적게 잡아도 10~ 20만 사이가 희생된 엄청난 사건이었다. 이렇게 이해하실 것 같고요.

 

전봉준 장군 동상건립 위원회 위원장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서울에 전봉준 동상이 있었어요.

종로 영풍문고 역 쪽에 섰는데, 왜 그 자리에 전봉준 동상이..

 

<녹두꽃은 지지 않는다.>

조선시대 죄수를 수감하였던 감옥, 전옥서

죄인을 관할하던 의금부와 전옥서 좌포도청, 우포동청 등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핵심 동학군 4명은 종각에 있던 전옥서에서 교수형으로 순국

특별한 의미가 서려 있는 자리

 

서울시 소유지 땅은 거의 없는 서울 시내

 

서울 시민 중에도 서울에 전봉준 동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분들이 많고, 있어도 왜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는 분들도 더 많거든요.

이 참에 서울에도 동학농민혁명을 기념할만한 장소가 있고, 아이들 데리고 가서 전봉준 동상 앞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전봉준의 공식 호칭은 하고 계십니까? 전봉준 열사 합니까? 장군입니까? 아니면 혁명가입니까?

 

전봉준 계열이 사회 변혁을 지향할 때 사용한 두 가지

동학의 인간평등사상,

실학자 역시, 반상차별 타파는 기초

 

(*포접제: 동학에서 교도들을 관리하기 위해 만든 조직으로 이로써 지역적 한계를 넘어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확대)

(최시형: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포교활동과 교단 정비를 통해 동학을 크게 성장시킨 인물)

힘든 상황이 예견되는 조직의 형태

 

호남보다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에서 극렬했던 상황

당시 전면 대항전을 벌이기 시작할 때

전봉준 계열의 반봉건적인 시각이 강렬했으나,

남북접 화해와 남북접 연합군 형성

 

장군이란 호칭은 민중에서도 추대한 장군이 다수

황의장군 곽재우, 국가에서 임명하지 않았던 장군호칭

따라서 전봉준 장군 역시 올바른 호칭!

 

구체적으로 이 사건, 이 혁명 운동을 겪으면서 어떤 사람은 혁명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도 있고, 이걸 반대하는 여러 사람들, 굉장히 많은 사람이 참여했던 만큼, 이 사건 이후에 여러 사람들의 행보 중에서 흥미로운 행보를 보인 사람들이 많을 텐데요, 몇 분의 사례만 들려주시죠.

 

<동학에서 비롯된 인물들>

동학농민혁명에 선봉에 나서 아기 접주라는 별명도 얻은 김구 선생

평양 출신의 포수, 홍범도 장군이 함경도에서 활동할 당시, 전봉준의 사형 소식을 접하게 된 홍범도 장군

황범도 장군 왈: 내가 포수만 해서 되겠느냐. 이제 싸워야 하지 않겠느냐!

 

여운형: 독립운동가로서 독립운동에 투신하며 구한말 평등사상을 수용하여 노비들을 해방시킨 인물

 

당시 몽향 선생이 양평에서 자기가 상속 받자마자 노비들한테 그것도 그냥 해방시킨 게 아니고 생활 밑천까지 대주면서 노비를 해방시켰다는 것이 당시에 신문에도 나도 크게 화제가 되었어요.

 

여운형의 행동에서 느낄 수 있는 동학 정신

 

동학농민혁명은 이후 일어난 민족운동과 신분타파 운동에 실제로 사상적으로뿐만 아니라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다.

 

동학농민혁명 25년 뒤 일어난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천도교 대표 16

천도교 대표 16명 중 9명이 동학농민혁명의 참여자

 

북쪽을 중심으로 일어난 3.1운동

역사적 사건으로 3.1운동이 약할 수밖에 없었던 호남 지역

 

그 뒤를 이은 의병 전쟁, 남한대토벌작전 등으로 많은 희생이 일어난 호남 지역

(*남한대토벌작전 1909.07.01~10.30: 대한제국기 의병세력 진압 목적으로 의병세력의 주요 근거지 전라남도 및 외곽지대에서 펼친 군사작전)

 

의기가 있는 사람들은 살아있지 못한 상황

또 그에 반해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는데 일본협력자가 된 그런 사례들도 있지 않습니까?

 

아주 얄미운 친일파 이용구

일본에게 협력하여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이용구

전봉준을 이용하려고 했던 이용구

그러나 오히려 죽음을 무릅썼던 전봉준

 

/나는 다른 말이 없다.

나를 죽일진대

종로 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피를 뿌려 주는 것이 옳거늘

어찌 컴컴한 적굴 속에서 암연히 죽이느냐/

일본 신문에도 게재된 전봉준의 의지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전봉준 사진이잖아요.

 

조선의 독립보다 반봉건, 반상타파에 중요성을 외친 이용구

 

그 사람 생각은 일본보다 양반이 더 밉다 이런 거잖아요. 철학적으로 생각이 다른 거였죠.

 

결국 일본에서 거대한 장례식을 치른 이용구

친일파 이용구, 씁쓸하고도 서글픈 민족사 이야기

 

구체적으로 100주년, 몇 년 전부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을 주도해오셨잖아요.

100주년으로부터 25주년이고, 30년이에요.

올해 겨우 결실을 맺은 거잖아요. 소회가 남다르실 거 같은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지정의 의미>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지정에 가슴이 먹먹한 이이화 선생

젊은 연구자들과 답사팀을 꾸려 유적지를 탐방했던 이이화 선생

끼니를 거르기도 하며 다녔던 연구 기행

이이화 선생과 함께 한 추억이 많은 지금은 중견 교사가 되었을 사람들

그 분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며 감회에 젖은 이이화 선생

 

오랜 시간이 걸린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데 굉장한 시간이 걸렸잖아요.

어떤 의미를 부여하셔서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일을 시작하셨나요?

 

특히 일본인들에 의해서 동학당을 얕잡아보는 인식이 존재

또 하나는 역적이라는 관념

 

오랫동안 그랬죠.

역사학계 내에서도 지속한 관행

 

이이화 선생이 보는 국가기념일 제정이 갖는 의미

제주 4.3사건, 5.18 민주화운동의 국가기념일 제정

대통령 혹은 국무총리에 의한 의미를 되새기는 기념사

국가기념일 제정은 범정부적 행사 의미

지역자치단체 역시 지역에 있는 역사를 기념하고 선양하는 모습

 

사건의 의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기념일로 정하지 않고, 역사 교과서에서도 불분명하게 가르침으로 일반 국민이 잘 모르는 역사적 사건, 그걸 알리기 위해서는 기념일 제정과 지속적으로 되새기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런 취지에서 계속 하셨던 거잖아요.

 

동학농민혁명을 국가기념일로서만 끝내는 것이 아닌

남북통일의 원동력으로서 북핵 문제 해결, 남북교류를 위한 실현

서로를 위해주는 그 자체가 평화통일 실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한

묵은 역사가 아닌 산 역사로 만들어가길 당부하는

우리들의 영원한 역사 선생님 이이화

 

정말 오랜만에 저도 개인적으로 반가웠고요, 좋은 얘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재미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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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법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이란 구절로 시작합니다.

우리의 유구한 역사는 우리 민족적, 국민적 자부심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가 길면 불편한 점도 있습니다.

 

역사 교과서가 두꺼워지고 기억해야할 사건들이 늘어납니다.

대한민국의 국경일 이외에 국가기념일이 50여 개가 됩니다.

 

그리고 이 50여 개의 기념일은 함께 기억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동질성, 역사적 기억의 공유, 이런 것들에 대한 국민적 합의의 바탕을 이루게 됩니다.

 

동학농민혁명 기념일이 (511) 국가기념일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 정신과 의미를 올바로 계승하는 방안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그런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전우용의 사담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KTV 유튜브로 보실 수 있고요, 구독과 좋아요로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