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0)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624회] 장애 아이인데요 어떡해야 아이의 마음의 소리를 잘 따라갈 수 있을까요?

Buddhastudy 2020. 8. 6. 20:22

 

 

 

저의 아이가 장애아인데

아이 마음이 특수학교로 가고 싶다 하더라고요

아이 마음의 소리를 따라서 특수학교에 왔어요

괴롭히지는 않지만 지루하다 하더라고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만 학교를 가게 되었습니다

어떡해야 아이의 마음의 소리를 따라 잘 갈 수 있을까?//

 

 

지금 학교 안가는 게 문제에요? 뭐가 문제에요?

아이의 마음을 따라가겠다.

그럼 자기가 따라가면 되지 그걸 나한테 물어볼 필요가 없잖아.

무슨 답?

 

대답 없어요.

자기 엄마가 자기 아이를 잘 알지. 그래.

내가 어떡해 알겠어. 난 아이 보지도 못했는데.

내가 처음부터 질문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덜썩 앉기는... 아이고...

끈기가 그래서.. 무슨...

 

제가 스님 말씀 듣고 보니까

이런 애 얘기를 애도 없는 스님한테 묻는다는게 조금 창피합니다.

제가 제 역할을 잘 못하고 있다는 거 인정합니다.

그런데 뭐.. 장기둘 때 바둑둘 때 꼭 당사자만 잘하는 게 아니고

훈수 두는 사람이 가끔 더 잘할 때도 있다는 소리 들을 때도 있으니까

스님께서 어깨 너머로 보시고 훈수 한마디 해주시면 어떻겠어요?”

요렇게 물어보면 안 될까?

 

가장 중요한 게 엄마의 마음이에요.

아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요, 자기...

모든 엄마는 자기 아이가 남보다 뛰어나기를 원합니다, 첫째가.

 

그런데 두 번째는 남보다 뛰어나지는 못하지만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

남만큼은 됐으면 좋겠다. 평균적으로 되었으면 좋겠다.

이게 엄마들의 마음이란 말이오.

 

그런데 이건 내 바람이에요.

일등했으면 좋겠다는 내 바람이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중간했으면 좋겠다이건 내 바람이지, 아이에게는 아니에요.

정상수준이 되었으면 좋겠다이건 내 바람이지, 아이의 바람은 아니라는 거에요.

 

그러면 내 바람으로 아이를 맞출거냐.

아이의 상태에 내 바람을 맞출거냐.

내 바람에 아이를 맞춘다면 내 욕망의 수단이에요, 아이는.

아이가 젖달라고 우는데, 그 아이의 배고픔에 엄마가 맞추기 때문에

이 사람을 엄마라 그러고, 어른이라고 그러고,

자기욕구만을 주장하는 것을 아이다, 이렇게 말한다는 거예요.

 

만약에 부부가 헤어졌다. 그래서 아이하고 헤어졌다.

내가 애가 보고 싶어서 애를 찾으면 내가 아이고

내가 보고 싶음에 응해준 아이가 어른이에요.

내가 젖달라는 사람이고 아이가 젖 주는 엄마다, 이거요.

전부 수준이 지금 그렇다는 거요.

 

나도 아이를 만날 권리가 있다재판하고 주장하고

이게 여성의 권리라 그러고, 남성의 권리라 그러고...

그건 맞아, 그 권리는...

그거는 아이에 대한 엄마·아빠의 태도는 아니다.

부모는 아니라는 거요. 그런 수준은...

 

아이가 엄마를 보고 싶어해서 정말 내가 거기 갈 수가 없어. 갈 형편도 안 돼.

그렇지만 나는 직장을 그만두고, 나는 빚을 내서라도 그 아이가 원하니 내가 가야 하겠다.

아이를 위해서.

그럴 때 그게 엄마요.

 

여러분들 얘기 들어보면 전부 자기 욕구를 위해서에요.

그래서 내가 요즘은 부모가 없고, 이웃집 아줌마다만 있다.

 

이웃집 아줌마는 어떤 거예요?

이웃집 애가 인물도 잘났고,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듣고 하면

이웃집 자식이라도 좋아해.

그런데 말도 안 듣고 신체장애에다가 공부도 못해,

그러면 모든 사람이 다 싫어해.

그럴 때 그래도 그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딱 한 명 있어요. 엄마다.

관점이 그래야 그게 엄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공부를 잘하고 신체장애고, 그런 거를 따질 필요는 없다, 이거야.

딴 사람은 그걸 따져. 오직 엄마는 그걸 따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요즘은 엄마가 없고 이웃집 아줌마만 있다, 이렇게 말하는데.

 

아이가 보지를 못한다. 듣지를 못한다.

안그러면 걷지를 잘 못한다. 팔을 잘 못움직인다.

안그러면 정신적으로 좀 부족하다.

이러면 그건 뭐냐?

 

이거는 전생의 죄의 값도 아니고, 하나님의 벌도 아니고, 사주팔자도 아니다, 이거야.

장애라고 하는 것은 다만 불편하다, 조금 불편하다.

팔이 없으면 불편해. 불편하니까 불편은 극복의 대상이에요.

그럼 의수를 해넣으면 극복이 된다,

아직 기술이 부족해서 원래 팔만큼 해넣는 기술이 아직 작동이 안 되니까 그런데

앞으로 전자팔이 나오면 이 팔보다 전자팔이 더 힘도 세고, 기능도 더 뛰어난다 그러면

사람들이 멀쩡한 팔 자르고 전자팔로 끼워넣는 사람이 있어.

?

 

원래 성형은 화상을 입었거나 다쳐서 그걸 치유하기 위해서 나온 기술인데

이렇게 이렇게 고치다보니 원래 보다 더 잘 고쳐질 수도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멀쩡한 게 나도 콧대 고쳐줘, 턱 깍아줘, 이래서 지금 성형이라는 게 나왔잖아.

성형이 나온 것을 생각하면 앞으로 의안이 전자눈을 넣어서 벽뒤도 확...

 

그러니까 눈이 안보이거나 팔이 하나 없거나하는 장애라는 것은

이게 전생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징벌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거다.

이건 다만 불편할 뿐이다, 현재...

 

인식이 이렇게 딱 되어야 한다는 거요.

그럼 불편하다는 것은 극복의 대상이기 때문에.

걸어다니는 게 불편하니까 차를 만들었잖아요.

차 갖고도 불편하니까 뭘 만들었다? 비행기를 만들었잖아요.

 

그런 것처럼 인식이 딱 바뀌어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고래부터 장애아를 낳으면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런 애를 낳았나?”

그게 죄의 나쁜 것의 결과물로 생각하는 것, 이거 자체가 인권차별이고 침해다, 이거야.

이 종교가 이런 짓을 한다.

 

우리가 여기 세뇌되어 있어. 나도 모르게 어릴 때부터.

그러기 때문에 이 욕망하고 결합이 되어

아이가 지능이 100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지능이 80이다.

그러면 학습을 하는데 다른 아이를 못 따라간다.

그런데 엄마는 이 아이를 어떻게든 훈련을 시켜서 100에 맞추려고 그래.

이걸 엄마의 사랑이라고 생각해.

그럼 이 아이는 아무리 노력해도 100이 되기가 어려워.

그러면 무슨 의식이 생긴다? 열등의식이 생기는 거요.

나는 부족한 사람이다. 나는 모자라는 사람이다.

이렇게 열등의식이 생긴다.

 

이 열등의식을 누구 심어주느냐?

부모의 욕심이 열등의식이 심어주는 거요.

 

애들이 같이 놀면서 애가 스스로 열등의식을 갖는다 하더라도 부모는

괜찮아

달리기를 빨리하는 사람이 있고 천천히 하는 사람도 있고

셈본을 빨리하는 사람도 있고 천천히 하는 사람도 있고

운전시험을 한번에 붙는 사람도 있고, 열 번에 붙는 사람도 있듯이

이것은 차이다, 차이.

 

지능이 100인 사람도 행복할 수 있고, 지능이 80인 사람도 행복할 수 있다.

네가 존재로서 행복하냐, 너도 행복할 수가 있어.

그럼 80인 사람은 80에 맞게끔 아이를 훈련시켜야 한다. 80에 맞게끔.

 

자꾸 100을 만들려고 하면

이게 부모의 사랑이라 하지만 이게 엄격하게는 부모의 욕망이다.

부모 때문에 아이가 결국 상처를 입게 된다.

 

이 관점이 가장 중요한 거요.

이게 안 고쳐지면 딴 건 아무리 해봐야 안 돼요.

 

그래서 먼저 아이 상태를 봐서 지능과 신체조건, 여러 가지를 딱 체크해서

이게 정상 아이들과 함께 있으면서 조금 뒤처지는 정도냐?

좀 늦다. 학습이 좀 늦다. 조금 처진다. 이런 정도라면

이것은 일반학교에서 다니게 해줘야 하고 보충을 해줘야 해.

보충을 할 때 똑같이 맞추려고 하면 안 돼.

조금 처지는 그 자체에, 아예 못 따라가면 안 되는데

그냥 좀 등수가 꼴찌를 하더라도 어쨌든 같이 갈 수가 있으면

그냥 정상 아이가 있는 일반학교가 좋아.

 

이유는 내가 장애가 있다고, 장애인하고만 같이 살아야 할 이유는 없잖아.

불편하지만 다른 사람하고 같이 살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학교 교육에서는 도저히 이거는

이렇게 가르쳐서는 문자를 해독할 수도 없고, 셈본도 할 수도 없고...

따라갈 수가 없어.

 

그러면 이런 아이들에게 또 공부를 할 수 있는 소위 특수교육이라는 게 있다는 거요.

눈이 안 보이면 안보이는데 따라서 수업이 있고, 안 들리면 수화가 있고 하듯이.

이런 경유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 특수학교를 보내야 하는 거요.

 

정상아이들에 맞춰진 교육에서 이 아이는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럼 이건 특수학교에 보내야 한다.

 

그런데 눈이 안 보이는데 우리 아이는 정상학교에서 공부시키겠다.

귀가 안 들리는데 정상학교에서 공부시키겠다.

이렇게 되면 이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가...

이 아이도 뭔가 배우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의 기초인 셈본도 하고

글도 쓰고 할 수 있는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 버린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이건 특수교육을 받아야 한다.

 

여기에 시각장애나 청각장애뿐만 아니라 지체부자유아도 다 포함이 되는데

이 정도가 어느 정도냐를 객관적으로 체크를 해서 전문가하고 의논을 했을 때

정상학교에서 조금 애들이 놀리고 못 따라가고 하더라도

그런 심리적인 좀 자극을 받더라도 그래도 여기에서 하는게 낫겠다.

아니면 이건 아무리 그렇게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아이도 자기 인생을 지식을 습득하고 살아갈 권리가 있기 때문에

특수교육을 받아야 하겠다.

 

그런데 그 특수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시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부모가 돌보는 것보다는 특수교사가 돌보는 게 낫겠다하면

아무리 보고 싶어도 아이를 위해서 떨어져 줘야 된다. 이거야.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에게 도움이 되면 누가 돌봐야 하고 내가 돌봐야 하고

아무리 보고 싶어도 내가 돌보는 것 보다는 다른 데 보내서 돌보는 게 낫다하면

부모는 보내야 한다.

 

내가 보고 싶으냐?

내가 힘드냐?

이걸 자꾸 기준을 잡으면 안된다.

 

이렇게 딱 관점을 잡아서 내가 돌볼 때는 내가 돌보고

아이를 위해서 떨어져 있는게 좋으면 내가 가슴이 아파도 떨어져 있고

조금 차별을 받아도 정상아 속에 있는게 아이의 미래에 낫다면

그걸 보충하면서 차별받는 걸 이미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보내고

남을 욕하면 안 된다. 다른 아이들은 지혜가 없으니까.

 

아무리 정상학교에 보내고 싶더라도 학습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으면 특수학교에 보내야 하고.

아이를 위해서 관점을 딱 세워야 한다.

 

그러면 어느 학교에 보내야 하나? 그건 스님이 조언할 일이 아니고

전문가하고 의논하고 자기가 판단을 해서 여기에 자꾸 욕심이 끼어들면 안 된다.

관점을 이렇게 잡고 판단을 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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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정상이라는 게 없어요. 이 세상에.

분포를 만약에 뭘 집어 던지거나 뭘 하면 분포가 포물선 곡선을 그립니다.

그러면 이쪽저쪽을 잘라서 가운데를 중심으로 해서 일정한 범위를 정상이라고 그러고

양쪽으로 떨어진 건 뭐라고 그런다? 비정상 이렇게 말한다.

 

이건 우리들의 관념이에요.

존재에는 정상 비정상이 없습니다.

모든 존재는 다 그대로 존엄한 거예요.

 

눈이 안보인다고 비정상이 아니에요. 시각이 고장난 거에요.

차가 고장나면 고치면 되는 거요.

그런 것처럼 장애가 있으면 시정을 하면 되는 거요.

 

원래 정상이라는 게 있었다.

그래서 고장났으니까 원래대로 돌아간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에요.

 

원래라는 게 없어.

원래라는 것도 다 천차만별이에요.

 

살아있는 모든 생명, 좁혀서는 모든 사람은 다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얼굴이 검다고 불행해야 할 이유도 없고

아버지가 없다고 불행해야 할 이유도 없고

내가 장애아를 가진 엄마라고 해서 불행할 이유가 없어요.

 

그런데 옛날에는 집안에 장애아가 하나 있다.

그러면 부모가 보살핀다고 자기 삶을 제대로 못사는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보상제도라는 건 뭐요? 이것을 우리가 공동으로 책임을 지자.

 

그래서 부모가 자기 자식이라도 엄마하고 같이 사는 게 이 아이에게 좋다 하면

사회가 그 엄마가 이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고

이 아이가 떨어져서 딴 데 가서 있는 게 좋겠다하면 거기에 따른 지원을 하고

이게 우리 사회에서 부족하죠.

 

부모가 중풍으로 쓰러졌거나 아이가 장애아면 그 가족 전체가 힘드는 거요.

우리가 이런 문제를 안전,

누구나 다 이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이럴 때는 사회적인 보장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이게 사회안전망 구축이라고 그래.

 

가난할 때는 이게 잘 안되지만, 이 정도 먹고 살면 이게 다 갖추어져야 하는데

1인당 GDP 3만불 수준의 나라에서 봤을 때 이런 안전망 구축이 굉장히 떨어집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아직도 그저 돈돈돈돈. 그저 성장성장성장만 주장하잖아.

 

그러니까 부모님은

첫째는 자기가 행복해야 해.

이런 아이를 가진 엄마도 뭐 할 권리가 있다? 행복할 권리

자기가 행복해야 돼.

돌봐도 행복하고 떼어놔도 행복하고.

 

두 번째는 우리 아이도 행복할 권리가 있어.

아이 때문에 내가 불행해도 안 되고

엄마 때문에 아이가 불행해도 안 된다.

 

그러니까 이이의 객관적 상태를 전문가들과 의논해서...

요즘 조금 바뀌었어요.

옛날에는 장애가 있으면 사회적으로 안전망 구축이 없고 개인이 경쟁을 해야 하니까

이런 아이는 경쟁력에서 뒤처진다고 사회적으로 팽개쳤다.

소위 말해서 버림받았다. 보호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사회가 발전하면서 이런 사람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해서

이런 사람을 모아서 보호시설에서 보살폈다.

그런데 보호시설을 잘 만들고, 보호시설을 아무리 잘 해도

엄격하게는 이거는 수용이다.

 

그래서 지금 최신의 보살피는 방법은

다시 이것을 아주 그냥 움직이지도 못하고, 똥오줌 받아내야 되고,

아예 못하는 사람들은 시설보호를 해야 하고

 

자기가 움직이고 자기가 어느 정도 하면 어떠냐?

3~4명을 한 그룹으로 만들어서 이런 이들을 보살피는 사람이

대략 큰 시설에 있는 게 아니고 한 사람씩 해서 아파트나 들어가서

정상사회 속에서의 일원으로 생활하는 게 지금의 추세에요.

 

전에는 고아들만 모아놓고 하는 추세에서

지금은 입양을 시켜서 각 가정에서 하는 추세에요.

노인들을 한꺼번에 모아놓은 노인요양시설에서

자기 부모하고 두 명 정도

간호사자격이 있는 사람이 집에다 모시면 정부에서 월급이 나오는

미국 같은 데서는 이런 추세로 빠르게 확산이 되죠.

이렇게 바뀌어 가고 있다.

 

장애가 있더라도 정상으로 하는 거예요.

요즘 신호등도 시각장애자를 위해서 소리를 낸다.

휠체어를 위해서 뭐한다? 계단을 전부 바꾼다.

 

장애도 정상사회 속에 우리의 한 사람의 이웃으로 똑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사회가 자꾸 변해가고 있는데

우리들의 의식은 어떠냐?

 

아직도 자꾸 옛날생각, 부모도 그렇고 사회전체..

우리도 그렇고 옛날 생각을 갖고 있다.

뭔가 부족하다.

그래서 부모 같으면 과잉으로 보살피려고 한다.

 

그들도 자기가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과잉으로 보살피려고 한다든지

안 그러면 외면한다든지, 버린다든지, 과잉으로 보살피는...

 

부모가 주로 하는 일은 힘들어 갖다 버리거나

그건 자기 인생을 버리고 그냥 거기에 헌신하거나

이런 건 다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나도 한 사람으로 행복할 권리도 있고,

이 아이도 행복할 권리가 있는 거요.

그러니까 거기서 어떻게 역할하고 보살피는 게 가장 이 아이에게 좋으냐?

여기에 따라서...

 

그런 건 법륜스님보다 누가 더 전문가다?

역할과 신체와 모든 걸 체크해서

특수교육을 받는 게 좋다, 정상학교에 다니는 게 좋다판정이 나는데

아이의 행동은 당연한 거요.

 

정상학교에 가면 뒤처지죠. 그러니까 왕따 당하니까 심리적으로 타격을 받겠죠.

특수학교에 가면 어때요?

거기 있는 애들보다 내가 얘기를 들어보니 조금 나은 것 같아.

나으니까 재미가 없잖아요.

 

좋게 말하면 거기서 잘하는 축에 들어가고

나쁘게 말하면 별로 배울 게 없다. 이렇게 되니까 약간 지루하게 느껴지고.

이런 게 나타나니까, 아이에게 엄마가 어떻게 교육을 해야 하냐?

 

정상학교에 다닐 때는 열등의식을 갖지 말고

신체장애가 있어서 불편해서 생기는 문제니까 이걸 감수하도록

심지어 상처를 안받도록 엄마가 도와줘야 하고.

 

조금 더 특수학교 교육을 받아서 약간 지루해할 때는

그게 자기만 생각해서 지루하지,

장애가 있는 자신이 더 큰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도와주도록

역할을 훈련을 시키면 지루할 여가가 없다.

그리고 굉장한 자부심을 갖게 된다.

 

정상적으로 볼 때는 보살펴야 하는 사람이지만

더 어려운 사람에게는 이 아이도 베풀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거요.

 

그래서 제가 지도할 때는

약간 좀 부족한 아이들의 심리치료, 열등의식의 심리치료를 제가 지체부자유아 시설에 가서 봉사하도록 시키거든요.

거기 가서 봉사하면 심리치료가 굉장히 됩니다.

 

, 내가 좀 뒤뚱뒤뚱 걷지만 못걷는 아이에 비해서 내가 엄청나게 좋구나.”

말을 좀 더듬더듬 하지만 말 못하는 아이보다 내가 월등하게 혜택을 받았구나.”

이러면 열등의식이 치료가 되는 거거든요.

 

그런 것을 살펴서 엄마가 욕심내지 말고, 지도도 하고 전문가들하고 상담도 하고

그런 것도 자기 인생이에요.

힘들게 생각하지 말고 그런 거 하는 것도

자식 때문에 이런 것도 공부하네..”

그래서 자기 인생을 즐기고

또 장애자 권익을 위해서 투쟁도 하고 하면서 자기 사회활동도 하고

 

애 때문에 나를 희생한다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고

이 아이로 인해서 내가 세상에 눈을 뜨고, 인간의 평등을 생각하고

인간의 지나친 욕망이 갖는 이런 부작용을 생각해서

자기가 점점 성인이 되어가는...

 

그럼 나중에 다 아이가 나에게 준 복이다.”

이렇게 해야 자기 인생이 행복해지지 않을까.

그렇게 한번 관점을 가져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