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0)

법륜스님의 희망세상만들기_자기 어리석음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Buddhastudy 2020. 9. 1. 19:34

 

 

 

부처님이 이야기하신 탐진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탐진치라는게 처음은 탐욕이고 진은 화내는거고 치는 어리석음인데 이게 탐욕하고 화내는 마음은 바로 알 수 있는데 이 어리석음은 그렇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가 첫 번째 질문이구요

 

두 번째 질문은 욕심이 나면 그 욕심에 대해 반성을 하고 제어를 하면되고 화가 나면 그걸 지켜보면 된다고 그렇게 얘기 하셨는데 내가 어리석은 짓을 한다는걸 어떻게 알아차린다는거고 그걸 알아차렸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화를 자초한다고 그러죠.

자가기 자기의 고통을 자초하는 거에요.

이걸 자업자득이라고 그래요.

 

화를 자초하는 3가지

욕심 때문에 결국 자기에게 고통을 자초하고

성질 때문에, 성냄 때문에 자기 화를 자초하고

어리석음 때문에 자초한다.

그래서 탐진치 3독이라고 하는데

그걸 하나로 말하면 치에요. ().

 

나누면 탐진치(貪瞋癡)이고

하나로 말하면 치, 어리석음이에요.

 

12연기에서 우리의 모든 고통의 근본 원인을 뭐라고 한다?

무명, 무지 이렇게 말하잖아. 그죠?

 

욕심을 내는 것도, 사실은 뭣 때문에 욕심을 내는 거다?

무지 때문에 욕심이 일어나는 거고

성질을 내는 것도 무지에요.

뭐에 무지냐? 자기 성질이 작동할 그 찰나에 알아차림을 놓쳐버리면 무지에요.

알지 못함이라는 거에요.

그 순간에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까 이 치라는 것은 삼진치 셋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그건 더 근본적으로는 모든 것의 원인이 뭐다?

치다. 또는 무명이다. 무지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무명과 무지라는 것은 크게는 둘이에요.

예를 든다면 근본 무지(=무명)가 있고 찰나 무지가 있는데

근본 무지라는 것은 연기,

이 세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함이에요.

그것은 다시 둘로 나누면 무상과 무아,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에 대한 무지.

이것이 모든 고통의 근원이다.

12연기의 근원이 무지이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찰나무지라는 게 뭐냐?

이치를 알았는데도

이건 이런 거야, 저건 저런 거야해서 이치를 다 알았는데도

경계에 부딪히는 그 찰나에는 과거의 까르마가 성질대로 가버리지

이치를 그 순간에 놓치게 돼요.

그러면 바로 화가 일어나든 욕심이 일어난단 말이오.

 

놓쳤을 때

놓쳤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무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놓쳤을 때

놓쳤구나, 알아차림을 놓쳤구나.”

이걸 알아차리는 거죠.

 

다시 얘기하면

무지는 이치, 사물이 작동하는 이치에 대한 무지거든요.

그 이치는 배워야 되는 거예요.

마음은 어떻게 작동한다. 물질은 어떻게 작동한다.

예를 들면 이렇게 이치를 하나하나 배우는 거예요, 그게 부처님의 법이죠.

 

그러나 그 이치를 첫째 먼저 알아야 하고

그 이치를 아는게 견도라고 그래.

도를 안다. 이렇게 말해요.

 

이치를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치를 모르는 무지는 해결책이 없고

이치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현실에서는 이치를 순간 놓치게 돼요.

그러면 이치를 알았는데 현실에서 이치를 순간 놓치게 될 때는

놓쳤다는 것을 그다음에 알아차리게 되죠.

, 내가 또 놓쳤구나이렇게...

 

그래서 역시 마찬가지로

알아차림은 무지에 대한 해결책이에요.

 

화를 놓친 거를

, 내가 화가 났구나것을 알아차리는 거와 역시 마찬가지에요.

, 내가 욕심을 냈구나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처럼

모든 것의 근본은 알아차림이에요, 수행방법은.

 

..

항상 이래요.

참회라는 것은

그냥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는 게 참회가 아니고

 

예를 든다면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는 것은 잘못이다하는 것은 윤리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에 내가 어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게 되면 그 사람에게 원한을 사잖아 그죠?

그럼 내가 때릴 때는 주먹 한 대였는데, 그 사람이 받는 상처가 아까 원리가

나는 10을 가한 것 같은데 그 사람은 100으로 기억한단 말이오.

그 사람이 나한테 보복을 할 때는 100을 하겠죠.

 

그러면 작은 잘못을 저지르고

돈을 꾸기는 10원 꾸었는데 갚기는 100원을 갚는 거는 어리석은짓 아니오?

크게 근본적으로 보면.

 

그러니까 이런 어리석음에 의해서 우리는 계속 고통을 겪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성질대로 하고 싶지만 이 과보가 너무 손실이 크니까

이런 걸 하지 마라이런 얘기란 말이오.

 

그런데 그 순간에 사람의 감정이 확 휩쓸릴 때는 죽든지 살든지 손익계산이 안 일어나는 거요. 머리라는 게...

사람이 보통은 칼이나 총을 가져오면 도망을 가잖아요, 살려달라고 싹싹 빌잖아.

그런데 성질이 나버리면 도망을 안가고 어떻게 합니까?

오히려 배를 휘떡 까뒤집어서

찔러라 찔러라이렇게 나오잖아요.

 

이건 미친증상이거든요.

까뒤집은 옷도 찔릴까봐 싶어 퍼떡 내려야 되는데

이거는 자기가 휘떡 자기가 벗어서 가까이 가서

찔러라 찔러

성질이 탁 나면 뒤집어진단 말이오. 무지상태에 빠진단 말이오.

 

그러듯이 항상 우리가 까르마에 딱 휘둘리면 이게 무지상태로 넘어가기 때문에

일단 안 넘어가도록 찰나에 깨어있어야 되고

나도 모르게 넘어갔을 때, 이게 찰나고, 나도 모르게 넘어갔을 때, 넘어간 뒤에라도

, 내가 놓쳤구나이렇게 다시 알아차림을 유지하고

이미 행해진 뒤에 알아차림일 때는 참회를 해야 하는 거요.

 

제일 중요한 것은 행해지기 전에 알아차리는 거고

행해져버린 뒤에 알아차리면 참회를 해야 하는 거요.

 

그럼 행해지기 전에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성질이 작용할 때, 마음알아차리리고

그럼 그걸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면 느낌이라고 그래요. .

느낌이 일어날 때, 성질나기 전에 먼저 반응이 먼저 일어납니다.

기분이 좋고, 기분이 나쁜 필링이 먼저 일어나는데

그때 알아차리면 감정 자체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게 위빠사나라는 거요.

자기에게 깨어있어서 자기의 미세한 감정이 일어날 때 바로 알아차리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훈련이 안 되어 있고

성질대로 사는 습관만 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로는 알아차림이 어렵죠.

그것은 꾸준히 연습을 해야 해요.

 

...

 

듣고 배운다는데 지식을 쌓는다는 게 아니라

이해, 원리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해야 돼요.

그러면 연기법을 이해해야 하고, 제행무상을 이해해야 되고 제법무아, 사념처, 사성제를 이해해야 되고, 중도를 이해해야 되고, 계율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해요.

 

, 원리가 이렇구나. ... ”

우리 지금 원리 모르고 산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걸 이해하는게 첫째, 그래서 견도가 먼저 되어야 해요.

 

견도라는 것은 딱 상황을 보면 내가 하든못하든 이치는 딱 꿰뚫는 거요.

여러분들이 질문하면 스님이 어느 정도 이치는 꿰뚫어서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나 그렇다고 하는 걸 스님이 다 실천할까? 못할까? 여러분들이

스님은 다 아나?” 이러죠.

못해 나도.

그건 왜 그러냐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이 있기 때문에 그래.

 

그러면 두 번째는 그것을 꾸준히 연습을 해야 되는 거요.

연습을 할 때는 늘 실패를 많이 하니까 연습이 필요하겠지.

실패를 안하면 왜 연습이 필요겠어요.

 

꾸준히 연습을 해야 되는 게 수도에요.

닦아가는 과정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견도가 없이 수도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계율을 받지 않고는 참회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듯이...

 

그래서 먼저 불법의 이치,

불법의 이치라는 것은 종교교리를 안다는 게 아니라

이 심리가 어떻게 작동하며 어떻게해서 괴로움이 발생하는지 하는

요 이치에 대한 먼저 공부를 하고

두 번째 그것을 실천하는, 체험하는 과정에서는 그게 배운대로 안 된다 이 말이오.

찰나무지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늘 놓치면 다시 하고, 놓치면 다시 하고...

이렇게 꾸준히 연습을 하면 내가 경험적으로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지만

옛날에는 10번 화를 냈다면 5번 화내고

옛날에는 주먹질을 했다면 욕설하는 거로 끝나고

욕설했으면 이제는 침묵하는 거로 끝나고

 

이렇게 자기 변화, 남이 볼 때는

저 자식 수행하더니 아직도 화내네하지만

자기는 이미 이렇게 꾸준히 변해간다.

이걸 수도라고 그래.

 

그래서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미 항상 찰나에 깨어있어서 까르마의 작동이 일어나지 않도록 한다.

그러면 무학도,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해.

거기에 도달하면 아라한이다. 번뇌가 없는 자다 이렇게 부르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