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즉문즉설을 통해서 스님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부분에 관심이 많았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솔로몬 왕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 주라 했을 때 '뭐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는데
알고 보니까 그게 명쾌한 해답이듯이 스님의 말씀 속에 뭔가 깊이가 느껴져 가지고
금강경 해설하고 지금은 반야심경 해설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질문은 많지만 다른 분들도 있으니까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질문은
스님은 왜 결혼을 안 하셨는지? 제가 부연해서 질문을 조금만 더 드리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속세의 표현으로 하면 처자식을 버리고
수행 길을 떠나셔서 깨달음을 얻으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들도 결혼을 대부분 안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결혼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는 것인지?
저는 깨달음을 얻고 싶고 지금 있는 아내를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결혼을 안 해야 하는 것인지?
결혼을 하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그게 지금 가장 궁금합니다.//
결혼을 하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결혼을 안 하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결혼을 해도 못 깨달을 수 있고
결혼을 안 해도 못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결혼하는 거 하고 깨듣는 거 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부자라도 깨달을 수 있고, 가난한 사람도 깨달을 수가 있다.
부자와 가난한 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
또 교회 다녀도 깨달을 수가 있고
절에 다녀도 못 깨달을 수가 있고,
교회 다니냐 절에 다니냐 하는 것과 깨닫는 거는 아무관계가 없다.
한국 사람도 깨달을 수 있고, 일본 사람도 깨달을 수 있고
한국 사람도 못 깨달을 수 있고, 일본 사람도 못 깨달을 수 있고
그래서 일본 사람 한국 사람, 국적, 인종, 남녀, 양반 상놈, 신분, 재산이 있느냐 없느냐 빈부, 결혼했느냐 안 했느냐 하는 결혼 유무,
이런 거 하곤 아~~~~ 무 관계가 없습니다. 깨달음 하고는.
그러니까 결혼하고도 깨달을 수 있고, 결혼 안하고도 깨달을 수 있고.
아내도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어서 훌륭한 비구니스님이 되었어요.
어머니도 깨달음을 얻어서 훌륭한 비구니스님이 되셨는데
이 가족 중에 못 깨달은 사람이 딱 한 명이 있어요.
아버지에요.
아버지는 못 깨달았어요.
못 깨닫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부처님 그 석가족은 왕족이잖아. 그죠?
왕족의 머리를 깎아주는 사람은 하인이겠죠.
인도에서 말하면 천민이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왕족의 머리를 깎아주는 사람도 왕자들이 전부를 출가를 하니까, 그 출가하는 머리를 자기가 깎다가 생각한 거요.
“저런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도 버리고 출가하는데, 난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출가 못할 게 뭐 있나? 나도 출가한다.” 이렇게 출가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어.
그런데 왕국에서는 누가 제일 존경을 받습니까?
왕이 제일 존경을 받잖아.
그러니까 왕국에서는 만약 북한같이 저렇게 왕국 비슷한데는, 제일 똑똑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왕이라고 생각하죠.
그럼 왕이 제일 먼저 깨달아야 될 거 아니오.
그런데 신하들도 깨닫고, 여자들도 깨닫고, 하인도 깨닫는데 왕이 못 깨닫는단 말이오.
너무너무 궁금한 거요.
그래서 어느 날 부처님께 여쭈었어요.
이런 사정을 얘기하면서 “왜 정반왕은 못 깨닫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웃으시면서
“정반왕에게는 부처가 없다.” 그랬어요.
정반왕 눈에는 석가모니가 부처님으로 보였을까? 아들로만 보였을까? 아들로만 보였어.
그래서 제가 경전을 다시 한 번 뒤져봤어요.
그랬더니 이분은 시종일관 아들로서만 부처를 봤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부처가 되었다 하면 법문을 들을 생각을 안 하고 늘 관심이
“오늘은 무슨 법문을 하셨느냐” 이런 생각은 한 번도 기록에 없어요.
사람들한테 시켜서 “오늘은 뭘 먹었냐? 옷은 뭘 입더나? 잠자리는 어떻게 하더나?”
“아이고, 어떻게 우리 아들이 그런 음식을 먹을 수 있냐,
어떻게 그 거지같은 분소의를 입을 수 있느냐,
어떻게 나무 밑에서 우리 귀한 아들이 잘 수 있느냐”
늘 이런 관심만 있고.
가필라성인 고향에 돌아왔을 때도 침상도 좋게 마련하고 음식도 차려놓고 이랬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왕궁 안에 안 들어왔어.
그래서 왕궁 밖으로 나가서 부처님을 만났는데, 부처님이 대중들을 데리고 걸식을 한 거요.
가난한 집에 가서 거지처럼 얻어먹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왕이 너무너무 아들한테 속상한 거요. 창피하고.
“아니, 이 나라의 태자가 남의 집에 와서 밥을 얻어먹다니.”
그래서 그걸 항의하는 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대왕이시여, 이것은 우리 가문의 전통입니다.”
“석가족 가문에 걸식하는 전통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출가사문의 전통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왕족이다. 나는 양반이다.’ 이런 의식이 전혀 없는 거요.
난 그냥 다만 수행자일 뿐이다. 이런 얘기에요.
그래서 궁중에다 이렇게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이렇게 잠자리를 좋게 봐놨는데도 전혀 들어오시지 않으셨어요.
부처님은 출가한 이후로 이 나라든, 저 나라든,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 왕의 존경을 받아도 왕궁출입은 안하셨어요.
물론 식사초대를 안 받은 건 아닙니다.
장자들, 즉 부자들 집에 식사초대하는 거는 받아가신 적이 있는데 궁에는 안 들어가셨어요.
그러면 궁에 들어가면 안 된다. 그런 말씀은 하셨냐?
그건 아니에요. 그런 말은 안하셨어요.
“걸식을 하는 게 좋다. 그러나 때로는 식사초대를 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막아놓은 건 아니에요.
그러나 본인 스스로는 출입을 안 하셨어요.
그러니까 정반왕은 부처님을 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뵙지도 못하고 부처님의 말씀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에 깨달을 수가 없었던 거요.
아들밖에 본적이 없어요.
그런데 부처님의 아들이나 부처님의 전의 부인이나, 어머니는.
그런데 어머니는 왜 그랬을까?
어머니는 권위주의가 아니죠.
그러니까 어머니는 아들을 넘어서 부처로 본 거요.
그런데 어머니도 아들로만 보지 부처로 못 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게 남성중심의 사회, 특히 왕이었기 때문에 더 심했어요.
어머니는 나중에 부처로 보고 법을 청해 듣고 깨달았어요.
어머니라는 분은 생모개념이 아니고, 생모는 돌아가셨고, 일주일 만에 키운 사람이 어머니 아니겠어요?
사람이 짐승이라면 어머니가 아니지만, 사람은 짐승이 아니잖아요. 기른자가 엄마니까.
그러니까 어머니는 나중에 깨달음을 얻어서 아라한과를 증득했어요.
깨달은 비구니스님이 되었다.
그러니까 ‘돌아와서 다시 결혼 생활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돼요.
집을 이미 떠났기 때문에.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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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고 안하고는 저의 자유입니다.
그것은 깨닫는 거 하곤 무관해요.
그런데 여러분들 같이 살아보면, 짜증내고 욕심내고 이런 게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면 더 심해져요? 더 약해져요? 예.
그러면 수행을 좀 더 열심히 해야 되요.
여러분들은 더 열심히 해야 되고, 저는 조금 덜해도 되요.
그래서 저는 약간 게을러서 높은 장벽을 넘지 않고, 조금 낮은 장벽을 넘으려고 이렇게 혼자 사는 거요.
혼자 사는 게 반드시 유리하다. 이건 아니에요.
부처님은 수행의 길에 두 가지 일을 열어주셨어요.
출가해서 수행하는 길과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하는 길을 두 개를 다 열어주셨어요.
그래서 예를 들면 야사라고 하는 젊은이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본인이 출가해서 수행하는 길을 갔어요.
그러니까 부인이 있는데 버리고 출가를 갔고,
야사의 아버지, 구리가장자는 재가의 길을 가셨어요. 출가를 안 하고 그냥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자의 길을 가셨다.
세속에 있으면서 수행자의 길을 가서 어떤 출가 스님보다 더 위대한, 십대제자와 동급이 되는 재가수행자들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은 사위성의 수닷타장자, 금강경에 나오는 급고독장자 있죠?
급고독장자. 기원정사를 지은 분이에요.
그다음에 동원정사를 지은 베사카부인. 그 다음에는 구리가장자.
이런 사람들은 거의 아라한과를 증득하셨어요.
출가한 비구니스님들도 아라한과를 증득한 비구니들이 많이 있습니다.
깨달음의 최고의 경지까지 이른 분들이 있다.
그런데 점점점점 후대로 내려오면서
출가한 수행자들인 스님은 사제, 제사장으로 되고,
재가한 수행자들은 신자가 되는,
불교가 종교화 하면서
스승인 붓다는 신이 되고
출가한 승려는 사제가 되고
재가한 수행자는 신도가 되는
종교의 길을 가버린 거요.
그래서 복을 빌고 하는 이런 불교라고 하는 종교가 생긴 거요.
원래 붓다가 가르친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수행이지.
수행자의 길이다.
그러니까 종교가 불교든, 종교가 기독교든 그래서 그것은 상관없다.
누구든지 다 깨달음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수행자의 길로 와야 됩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산다.
괴로움이 없는 삶이 뭐냐?
열반, 니르바나, 열반이라고 하는 거요.
원래 그 길을 다 열어놨어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자꾸 복을 추구하니까,
부처님은 왕위를 버렸는데 세상 사람들은 왕 되게 해달라고 빌잖아요.
부처님은 재물을 버렸는데 재물 구해달라고 빌잖아요.
부처님은 결혼생활도 버렸는데 좋은 여자 좋은 남자 만나게 해달라고 부처님한테 빌어요.
나는 딴 데 가서 비는 건 이해가 되는데, 그걸 왜 부처님한테 비는지 모르겠어.
부처님은 결혼 했다가도 그만뒀는데, 부처님보고 결혼 시켜달라고 빌고,
부처님은 아들도 버렸는데 아들 낳게 해달라고 빌고
부처님은 아들 탁 나았을 때 “장애구나” 이렇게 말했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라훌라’. 이렇게 말했다는데 부처님하테 가서 “아들 낳게 해주세요.”
코를 베어 먹으면 아들 낳는다.
이건 앞뒤가 안 맞아요.
부처님은 재물을 버렸는데 재물을 얻게 해 달라.
부처님은 왕위를 버렸는데 나 시장되게 해 달라, 대통령 해달라고 부처님한테 빈다면
원래 불교하고는 안 맞아요. 논리적으로 안 맞다. 이 말이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불교에서는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건 어떻게 된 거냐?
종교화된 불교에요.
그러면 원래 불교는 뭐냐?
어떻게 하면 괴로움 없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이게 부처님의 수행의 목표에요.
그걸 갖다가 해탈과 열반이라고 그래요.
해탈이라는 말은 어떤 속박도 받지 않는, 남의 눈치든 뭐든 이런 거 안 보는 자유로움
아주 자유로운 상태, 그러니까 완전한 자유 이게 해탈이고
열반이라는 것은 어떤 괴로움 번뇌 번민도 없는 행복한 상태. 이걸 열반이라고 그래요.
수행의 목표는 해탈과 열반이지, 천당에 태어나고, 극락에 태어나고, 예쁘게 태어나고 이런 게 아니요.
수행의 목표는.
종교의 목표는 죽어서 천당 가고, 극락 가고, 다음 생에 부자로 태어나고, 왕으로 태어나고 이런 거요.
불교 안에는 두 종류가 있어요.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있고,
종교로서의 불교가 있는 거요.
그럼 종교로서의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원래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랬지만, 종교화한 불교가 있는 거요.
그런데 오늘 여러분과 제가 만나는 건 종교로서의 불교로 만나는 거요?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얘기하고 있는 거요?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얘기하고자 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무슨 종교를 가졌든 그건 저하고는 관계가 없다. 이 얘기에요.
불교는 틀렸다.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불교는 좋다. 이런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의 종교가 무엇이든
여러분들은 행복할 권리가 있다.
여자든 남자든, 한국 사람이든 일본 사람이든, 결혼했든 이혼을 했든, 신체장애든, 어릴 때 성추행을 당했든, 어릴 때 폭행을 당했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든, 어떤 경험을 했든, 아들이 어제 죽은 사람도, 남편이 죽은 사람도 뭐 할 권리가 있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
누구나 다 열반을 증득할 수가 있다.
그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 모인 거요.
종교얘기를 하려면 내가 절에 있지 왜 여기에 와요.
절에 있으면 내가 법상에 앉아있고 여러분들은 바닥에 앉아야 되요.
그런데 여기 오니까 여러분들은 의자에 앉아있고 나는 이렇게 벌서듯이 서서 얘기하잖아요.
자, 그럼 어떻게 하면 괴로움 없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아까 저 여성분의 얘기를 들어보면 둘이 좋아해서 연애를 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떠났다.
그러면 이 분은 나는 더 만나고 싶은데 떠났다. 하니까 내 원하는 대로 안 되었잖아.
그러면 괴롭죠.
그런데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볼 수 있는데, 제가 볼 때는 그놈이 떠나줘야 진짜 내가 앞으로 더 나은 남자를 만나니까, 이거는 가주는 게 좋아요.
그래서 그건 슬퍼할 일도 아니고, 울 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박수치고 웃을 일도 아니고,
그냥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듯이.
가을이 되면 낙엽이 떨어져줘야 봄에 새 잎이 피워요? 그게 봄까지 붙어있는 게 좋아요?
떨어져 줘야 돼.
떨어질 건 떨어져줘야 봄에 새 잎이 나지.
‘사람이 만약에 계속 안 죽고 산다’ 하면, 이건 사람한테 좋을까요? 안 좋을까요?
지금 100세만 되도 사회가 노령인구 때문에 난리인데, 500세까지 살아버리면 어떻게 될까?
세상 망해요.
그러니까 적절하게 늙으면 죽어줘야 되요.
죽는 건 좋은 일이에요.
태어나는 것만 좋은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봄에 꽃피고 잎피고 좋죠.
꽃피고 잎이 피려면 낙엽이 되어 떨어져 줘야 되요? 붙어 있어야 되요?
떨어져줘야 되요.
그러면 오래 살면 나쁘냐? 그 얘기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오래 산다고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저 일찍 죽으면 죽는 대로 좋고
늦게 까지 살면 사는 대로 좋고
이렇게 생각해야 되고,
또 좀 아프다가 죽으면 또 아픈 대로 좋고
안 아프고 팍 죽어버리면 그것대로 좋아요.
그런데 안 아프고 팍 죽어버리면 가족들한테 좋을까? 죽는 사람한테 좋을까?
죽는 사람한테 좋아요.
그런데 가족들한테는 너무 가슴 아파요.
그러니까 가족을 위한다면 좀 아프다가 죽어야 되요. 아시겠어요?
좀 아프다가 죽어서 가족들이 “아이고, 귀찮다. 죽지.” 이럴 때 죽으면 형식상으로 울지, 속으로는 안 울어요.
그걸 뭐란다? ‘정을 땠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항상 늙어서 조금 골골하다가 죽어야 되요.
자식을 사랑하는 노인이라면.
잠자듯이 폭 죽고 싶다.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팍 죽는 거 보고 울 필요가 있나? 없나? 없어요.
부모님이 주무시다 죽었다 그러면 울 필요가 없어요.
부모한테 좋은 일이에요? 나쁜 일이에요? 좋은 일이에요.
부모한테 좋으면 됐지 뭐 내가 섭섭한 거 갖고 울고 난리 피우면 안 된다 이거요.
그래서 이래 죽어도 좋고, 저래 죽어도 좋은 거요.
도를 알면.
이치가 그래요.
이피를 모르면 늘,
헤어지면 헤어져서 나쁘고
붙어 있으면 붙어 있어서 나쁘고 이러는데
이치를 알면
헤어지는 건 헤어져서 좋고
같이 있는 건 같이 있어서 좋다.
그래서 혼자 있으면 귀찮지 않아서 좋고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 이렇게 되는데,
여러분들은
둘이 있으면 귀찮고
혼자 있으면 외롭고
그래서 이래도 문제고 저래도 문제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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