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반야심경 강의 11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 시간에 무상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우리의 육신은 생로병사하며, 우리의 마음은 생주이멸 한다. 그것이 물질적이든 그것이 생명체의 것이든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항상 하는 것은 없다. 다 변화한다.
/무아/
오늘 두 번째 무아, 我아라고 할 것이 없다. 먼저 我아라고 하는 것이 뭐냐? 이것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인도말로는 아트만이라 그래요. 첫째는 我아다 할 때, 제일 쉽게는 ‘나다’하는 거요. 여러분들 각자 ‘나다’하는 게 있죠. ‘내가 말이야, 내가 말이야, 나다.’ 하는 거요. 이 나라고 하는 그 어떤 것은 남과 분명히 구별되는 나겠죠? 남하고 구별 안 되는 ‘나’라는 것은 나의 의미가 없죠. 남과 구별되고, 나만의 나이고, 변하지 않는 나이고, 그래서 윤회라고 할 때도 내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가거나, 이것에서 저것으로 갈 때 모양은 바뀌고 형태는 바뀌더라도 뭐는 바뀌지 않는다? ‘나’라고 하는 영혼, 근본은 바뀌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바꾸어버린다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그 ‘나’라고 하는 것은 우리는 있다고 지금 생각하고 있다. 그것을 전제로 해서 이 모든 것들이 다 성립합니다. 창조설 같은 것도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하며, 윤회설도 ‘나’라고 하는 남과 구별되며, 나만의 나이고, 단독의 나이고, 불변하는 나이고, 그런 나가 전제되어야 의미가 있다. 그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우리가 탐구해 봐야 됩니다. 우리는 탐구하지도 않고 ‘있다’라고 전제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철학사상이 그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불가에서는 과연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근원적으로 탐구가 되어야 됩니다.
어떤 스님이 산 넘고 물 건너,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진리를 찾아 수 없는 길을 걸어서 스승을 찾아왔다. 스승을 찾아와서 진리에 대해서 묻고, 배울 것이 한없이 많았다. 드디어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스승의 처소에 왔다. 그래서 스승께 인사드리기 위해서 스승의 방에 들었다. 문을 열고 한발을 딱 들여놓는데, 스승이 벽력같이 고함을 쳤다.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느냐?” 오기는 왔죠. 산 넘고 물 건너, 온갖 난관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육신이 왔습니다.” 시체가 왔다는 거요? 아무개라는 이름을 대며 “아무개가 왔습니다.” 이름이 왔다는 거요? “정신이 왔습니다.” 귀신이 왔다는 거요? 우리는 물론 쉽게 대답을 합니다. 보통 이름을 대죠. “아무개가 왔습니다.” 그러나 잘 따져보면 그것으로는 올바른 말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넌 누구냐?”하는 거와 같은 거요. 할 말을 잃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뭔가? 나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진리를 논할 수가 있느냐? 그는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7년 만에 다시 찾아왔다. 스승께 인사를 드리고 스승님, 설령 한 물건이라고 불러도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설령 한 물건이라고 볼 수도 없다. 우리 선종에 초기 스승들의 면담에 보면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입니다.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세요. 나나나나 라고 하는데. 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아닙니다. 남편입니다. 자식입니다. 딸입니다. 아들입니다. 사장입니다. 그 어떤 것도 그것은 다만 조건 속에 주어진 거요. 여러분들 한번 보세요. 버스 타면 뭐에요? 승객이죠. 가게 가면 손님이죠. 집에 가면 아내죠. 친정에 가면 딸이죠. 애하고 만나면 엄마죠. 학교 가면 학부형이죠. 이렇게 수도 없이 여러분들은 인연을 따라서 여러분들의 존재가 규정이 됩니다.
모양 없는 물이 그릇 따라 모양이 정해지듯이, ‘나’라고 하는 것이 있어서 이런 저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인연을 따라서 다만 이렇게 저렇게 불릴 뿐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내다, 엄마다, 자식이다. 승객이다. 그 순간순간에 집착해서 거기에 의미 부여를 함으로 해서 여러분들이 마치 그것인양 착각한다. 그래서 온갖 괴로움이 생겨나는 거요. 나, 이게 아트만이라고 그래요. ‘나’라고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영혼 영혼 하지만, 영혼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두 번째는 이제 생명에게다 적용, 이 我아라고 하는 것은 종자입니다. 종자.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콩을 심어서 팥이 날 수가 없고, 팥을 심어서 콩이 날 수가 없죠. 콩을 심으면 또 콩이 나오고, 또 심으면 또 나고, 또 심으면 또 나고, 개가 새끼를 낳으면 개고, 또 개가 새끼를 낳으면 개고, 종자에요. 종자. 이 종자는 바뀔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 ‘그 종자에 그 종자다.’ 이런 말이 있잖아. 그죠? 그런데 옛날에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양반의 자식은 양반이고 상놈의 자식은 상놈이다. 이랬죠. 절대로 상놈의 자식이 양반 될 수가 없고, 상놈의 자식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아도 상놈이고, 양반의 자식이 아무리 가난해도 양반입니다.
마치 사람 종자, 개종자처럼 서로 다른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에게 양반 종자, 상놈종자가 있는 거요? 그것은 실제로 이 육신에는 그런 종자가 없습니다. 본래 없지만 우리는 있다고 믿었고, 다만 믿은 게 아니라 그런 믿음 속에서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살아왔다. 그러나 알고 봤더니 그것은 몸뚱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에 있는 거죠. 마음이 짓는 바일뿐이다. 이런 것은 종자가 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종자가 없는 거요. 그러나 개종자, 사람종자 할 때는 종자가 분명히 있죠. 그래서 그 실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개는 개고 사람은 사람이다.
그런데 오늘날 점점점점 연구를 해 봤더니 그 종자라는 것이 뭐에요? 유전자다. 유전자라는 것은 아주 정밀한 설계도다. 그 설계도에 따라서 지어진다. 옛날에는 이것을 몰랐다. 그리고 설계도를 고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이것이 설계도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설계도면을 수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다보니까 종자가 바뀔 수 있다는 거요? 바뀔 수 없다는 거요. 바뀔 수가 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불변하는 종자라는 것은 없는 거요.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의 경험 속에서, 내가 경험한 세계 속에서는 그것의 변화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거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우리들의 유한한 경험에서 빚어진, 그것을 고집한데서 빚어진 하나의 오해일 뿐이다. 감자는 감자고, 토마토는 토마토인데, 이제는 유전자 조작을 하면, 위에는 토마토가 열리고, 뿌리에는 감자가 달린다. 그럼 이건 뭐에요? 이건 감토에요?
그러니까 이러한 종자설은 지금까지는 맞다고 생각해 왔다. 왜? 그것의 변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는 이것의 변화를 보게 되더라. 첫째가 자연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이것을 돌연변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왜 돌연변이가 일어나느냐를 연구 하다가 결국은 유전자를 발견하게 되고 오늘날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게 됐다. 그러니까 종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거요? 그것도 바뀌는 거요? 그것도 바뀔 수가 있다. 바뀔 수가 있다는 말은 바뀐다는 뜻이오? 안 바뀐다는 뜻이요? 바뀐다는 뜻이오.
다시, 물질세계에 가보자. 물질세계는 아트만이 뭘 지칭하느냐? 물질의 근원적 요소, 물질을 이루고 있는 가장 근본적 알갱이, 이것을 지칭한다. 옛날부터 이 천하 만물의 근본 요소가 뭘까? 이게 많은 연구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이다. 어떤 사람은 뭐다. 이렇게 많은 주장을 했는데, 그때 이 물질의 근본적 알갱이를 아무튼 이름을 원자로 붙였어요. 아톰. 원자다. 이렇게 불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 물질의 근원적인 알갱이, 요소, 이것을 우리가 원자라고 부른다.
인도 철학사에서도 보면, 만물의 근원은 4가지 요소설, 4가지 요소의 결합니다. 이게 4요소설이에요. 7요소설, 12요소설, 이런 말들이 있습니다. 4요소설은 가장 대표적인 게 지수화풍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것, 이 세상 만물은 크게 나누면 4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흙의 기운, 하나는 물의 기운, 하나는 불의 기운, 하나는 바람의 기운. 이런 4가지 요소의 결합일 뿐이다.
그러나 과학의 세계에서는 예를 들어서 물이다. 할 때, 물의 근본 알갱이, 한 바께스의 물은 한 방울의 물의 오임이죠. 한 방울의 물은 더 잘게 잘게 쪼개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근본 알갱이, 이것을 우리가 물 분자라고 부른다. 물 분자. 물은 물을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알갱이인 물 분자의 수없는 쌓임. 모임이다. 그 물 분자는 더 이상 쪼갤 수가 없는가? 아니다. 쪼갤 수가 있다. 그럼 물 분자를 쪼갤 수 있다는 말은 물 분자는 물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요소가 아니다.
그래서 물 분자는 뭐로 구성이 되어 있느냐? 산소원자와 수소원자로 구성이 되어 있다. 산소원자 하나, 수소원자 2개, H₂O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 결합의 방식이 가운데 산소원자가 있으면 수소원자가 결합이 되었는데 그 각도가 105도다. 이런 것까지 다 밝혀져 있다. 그러니까 물 분자가 분자보다 더 작은 만물의 근원이 원자라고 지칭되는 그 두 개의 원자의 결합이다. 그 원자의 결합이라는 말은 쪼갤 수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쪼갤 수 있다 이 말이지. 그래서 물 분자를 분해하면 수소와 산소로 나눠진다. 그래서 두 개의 물 분자, 2H₂O를 분해하면 두 개의 수소 2H₂ + 한 개의 산소 O₂, 이렇게 나누어진다. 여기서 분자를 구성하고 있는 근원은 결국 원자다. 이 원자가 만물의 근원이다.
그래서 돌턴은 원자설을 제창합니다. 원자는 만물의 근원인데 이 원자는 더 이상 쪼갤 수도 없고 변하지도 않는다고 정의를 했어요. 여기에 전제해서 모든 화학변화를 설명한 거요. 다시 말하면 H₂+O 하면 H₂O가 되는데, 또는 그 분해도 가능하고 화합도 가능한데, 이럴 때 양쪽이 화학방정식의 양쪽 원자량은 변화가 없다. 이게 질량불변의 법칙입니다. 일정한 성분비로 결합을 한다. 일정성분비의 법칙. 배수비례의 법칙. 이게 화학변화에서의 상대법칙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제 물질은 한 가지 순수한 것으로만 이루어진 게 아니고, 물 같으면 두 가지 다른 원자가 결합해서 만들어졌다. 이런 것을 화합물이라고 그래요. 그 다음에 금같이 오직 금 원자로만 구성이 되어 있다. 이런 단체와 화합물, 두 가지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러면 그 물질을 이루고 있는 근원인 원자는 어떤가? 우리는 오랫동안 이 원자는 단독의 알갱이라고 알고 있었고, 이것은 지구상에 92개가 있고, 그것을 질량에 따라서 순서를 나열했다. 그런데 더 연구를 연구를 거듭하다가 결국은 톰슨이 원자에는 하나의 단독적인 알갱이가 아니고, 전자라고 하는 것이 결합되어 있다. 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 다음에 핵을 발견하게 되고, 레드포드가 양성자를 발견하게 되고, 결국 보어가 원자의 모형을 발견 했다. 원자라고 하는 것은 가운데 핵이 있고 바깥에 전자가 돌고 있다. 원자는 단독자가 아니다. 무엇인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핵을 들여다보니까 거기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결합되어 있다. 그 양성자가 결합이 되어 있으면 이것은 법칙에 맞지 않습니다. 즉, +전기와 –전기는 서로 잡아당기고, +전기와 +전기는 서로 밀어내는데, 양성자와 양성자가 거리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그렇게 결합되어있다면, 이 쿠롱법칙이라 그래서, F=k(q1q2/r2) 이렇게 계산한단 말이오. 그러면 분모가 제로가 되면 힘이 무한대가 되니까 이것은 결합이 있을 수가 없어.
그러니까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법칙으로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왜 이것이 일반법칙으로 성립하지 않는 것이 강력하게 결합하고 있는가? 이것을 일본인 학자가 발견을 해냈다. 소위 핵력이라는 거다. 양성자와 중성자 사이에 중간자라는 것이 움직이면서 강력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법칙과 전혀 다른 새로운 힘, 핵력에 의해서 결합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이렇게 자꾸자꾸자꾸 깊이 들어가면서 결국은 원자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더 작은 것들, 전자, 양성자, 중성자, 중간자, 이런 것들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런 것들을 뭐라고 부른다? 소립자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원자는 소립자들의 결합이다. 자, 이런 데에서 결국은 정리해보면 부처님께서 무아를 얘기할 때는 우리들의 마음, 이것을 중심으로 연구하신 거요.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은 본질적인 실체가 있다는 전제 위에 온갖 철학이 성립 했다. 하늘에는 브라만이 있고, 개개인에게는 아트만이 있고, 그 아와 브라만이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해탈이다. 브라만 윤회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깊은 명상과 탐구 속에서 我아라고 할 실체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신에게 음식을 잘 차리고 불을 피우고, 정성을 기울여서 공양을 올리면 인도 말로 뿌자라고 그래. 뿌자. 뿌자를 올리면 바로 신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서 해탈할 수 있다. 그러나 붓다께서는 뿌자를 통해서는 해탈할 수가 없다. 마치 과학자들이 보통 사람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섣부르게 관찰하고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관찰하셔서 사실을 밝히신 것처럼, 붓다는 우리의 괴로움이 어떻게 해서 형성 되며, 우리가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하는 것을 너무나 분명하게 밝히셨다.
이런 불교의 무아의 법칙은 오늘날 과학의 발달과 견주어서 이것을 물질에다가 적용하고, 이것을 생명에다 적용을 했을 때에도 무아의 법칙이 그대로 성립한다. 부처님이 물질을 연구해서 설명하고, 부처님이 유전인자를 연구해서 다 설명하고 이랬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붓다의 이 법칙은 사람의 영혼, 사람의 마음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모든 생물에도 적용되고, 이것은 모든 물질계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오늘 많은 사람들이 “아, 불교가 너무너무 과학적이구나.” 이런 얘기요. “이것이 종교적으로 보면 일리가 있지만, 과학적으로 보면 일리가 없다.” 이런 얘기가 아니라, 이것은 어떤 관점에서 보든지 이것은 진실 그대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경험적으로 내가 태어나서 내가 경험한, 내가 믿고 있는 종교, 내가 사는 나라, 내가 사는 지역,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고 한 것으로 우리는 진리로 삼는데, 그것은 진리일 수가 없다. 그곳을 떠나서 다른 곳에서 보면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옳고 그름이 생긴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여기 산이 하나 큰 게 있다. 큰 산이 있는데, 이 산에 왼쪽 기슭에 사람이 살고 있다. 이 왼쪽 기슭에 사는 사람은 그 지역에서 봤을 때는 해가 그 산에서 떠오른다. 그래서 이 산을 동산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산에 오른쪽 기슭에 사는 사람은 그 산을 서산이라고 불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이 마을에서 벗어나서 딴 마을에 가 본적이 없다. 그런 두 사람이 모여서 대화를 할 때, “저 동산에서 말이야” 그러니까 한 사람이 “동산이 어느 산인데?” “저산” “야, 그게 어떻게 동산이야 서산이지.” “뭐라고? 그게 서산이라고?” “야, 해가 뜨는데 서산이야?” “해가 뜨는데 어떻게 서산이야?” “거기서 해가 뜬다고? 거기서 해가 지지.”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은 동산이라고 그러고, 한 사람은 서산이라 그러고, 밤새도록 논쟁을 해도 해결이 안 난단 말이오.
상대편이 정신 이상자 같단 말이오. 보통 이렇게 논쟁을 하면 눈이 삐었다든지, 미쳤다든지, 제정신이 아니라든지,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든지, 아이고, 참자라든지. 이렇게 된다. 그래서 서로 증거를 보이기로 했어. 그래서 한 사람이 증거를 보이는데, 첫째 해가 뜨는지 안 뜨는지, 자연현상으로 관찰해 보자. 아 보니까 분명히 해가 떠. 역사책을 한번 뒤져봤어. 자기 마을에 있는 기록을 보니 다 동산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 자기 동네 사람에게 다 한번 물어봤어. 전부 동산이라고 대답을 해. 우선 다수가 동산이라고 하고, 옛날 역사책에도 동산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아침에 나가서 봐도 동산에서 해가 떠. 동산이 틀림없어.
그런데 이쪽 사람도 증거를 찾아 봤더니 모든 역사책에 서산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고, 동네 사람한테 다 물어봐도 서산이라고 말하고, 해가 서쪽에서 지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아무리 논쟁을 해도 해결점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두 사람이 누구냐? 아내와 남편이오. 그러니까 아내는 아내대로 너무너무 답답한 거요. 남편을 보면. “아니 이거 탁 보면 알 수 있는데, 왜 이것을 모를까?” 남편의 행동이 도무지 얘기가 안 되는 거요. 그런데 남편도 마찬가지에요. 아내의 어떤 잔소리도 이해가 안 되는 거요. 그런데도 같이 사는 것은 싸우면서도 “싸워 봤자, 소귀에 경 읽기지.” 포기하고 그냥 지내는 거요.
그래서 우리들 사이에는 진정한 이해는 없습니다.
그냥 적당하게 논쟁해봐야 시끄럽기만 하고,
득이 없기 때문에 그냥 적당히 사는 식이란 말이오.
이 두 사람이 한 사람은 남한 사람이고 하나는 북한 사람이오. 그래서 여기 남한에서 북한을 얘기할 때 이해가 안 되잖아. “야,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오.” 저쪽은 저쪽대로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오.
또 한 사람은 한국 사람이고 한 사람은 일본 사람이오.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그러면 이해가 되요? 안 돼요? 안 되지. 그런데 저 사람은 저 사람대로 또 주장해요. 다수결로 하면 누가 많아요? 일본사람이 많잖아. 그죠? 일본 옛날 역사책에 저희 땅이라는 기록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 저희는 저희대로 있어. 여기는 또 여기대로 있어. 그래서 이게 서로 안 되는 거요.
이게 한 사람이 불교고 한 사람이 기독교인이오. 얘기 들어 보면 이해가 안 되잖아. “야, 그것이 믿어져? 그것을 믿어?”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또 저 사람들이 볼 때는 우리가 하는 행동이나 이런 게 이해가 안 되는 거요. 어떻게 사람으로 태어나서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이 자기 주인도 몰라보느냐? 이거야. 이런 관점에 본단 말이오.
이게 정치로면 뭐요? 하나가 여당이고 하나가 야당이오. 하나가 진보파고, 하나가 보수파고. 지역으로 말하면 하나는 경상도고 하나는 전라도고. 자기들끼리 모이면 항상 옳습니다. 경상도 사람은 모여서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전라도 사람은 모여서 자기들끼리 얘기하고, 야당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여당이 어떻고. 여당은 또 자기들이 모여서 야당이 어떻고. 불교도인들은 자기들끼리 모여서 기독교가 어떻고, 기독교도 자기들끼리 모여서 불교가 어떻고 이렇게 얘기하고.
책을 봐도 옳고 여론을 들어도 옳고, 얼마나 자기 의견이 옳은지를 얘기할 때 뭐라고 그래요? “길가는 사람 잡고 한번 물어볼까?” 이런 말이 있죠. 이게 다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 이런 얘기요. 이것이 오늘날 인간 사이의 갈등이오. 옳고 그름의 문제요. 이렇게 수십 년, 수백 년, 수천 년을 논쟁하고 싸워도 해결이 안 되던 일이 다만 이 마을에서 나오기만 하면, 이 두 사람이 자기가 살던 마을에서 나오면 어떻겠어요? “오? 동산 아니네.” “오? 서산 아니네.” 이렇게 금방 알 수 있다. 나오기만 하면.
바로 그 마을에 갇혀 있는 게 아상이오. 거기에서 나오기만 하면 알 수 있어. “동산이라고 했지만, 동산이 아니구나.” “서산이라 했지만 서산이 아니구나.” 그러니 이 산은 동산이라 하지만 동산도 아니고 서산이라 하지만 서산도 아니야. 남산이라 하지만 남산도 아니고, 북산이라 하지만 북산도 아니야. 큰 산이라고 하지만 큰 산도 아니고 작은 산이라 하지만 작은 산도 아니야.
그것은 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이야. 그냥 다만 산일뿐이오. 그런데 동산 서산 논쟁에서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라고 했더니, “아 알았다. 이 산은 동산도 아니고 서산도 아니고 비동비서산이다.” 이렇게 진리를 깨쳤다고 하면 이것 또한 아니다. 비동비서산이냐? 이거야. 동도 아니고 서도 아닌 산이냐? 그러면 이 사람은 동산이라는 사람과 또 논쟁을 하고, 서산이라는 사람과 또 논쟁을 합니다. 너는 모른다. 너는 못 깨쳤다. 못 깨쳤다고 깨치고 못 깨치고 갖고 또 논쟁을 해요. 이 비동비서산이라고 하는 것이 법집이오. 법상이에요. 이것도 버려야 한다.
이 사람은 누가 동산이다 하면 “오, 그래?” 대답을 합니다. “동산 아니야”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누가 서산이다하면 “서산 아니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 그래?”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왜? 저 사람이 동산이다 하면 “오 저 사람은 왼쪽 동네에서 왔구나.” 서산이다 하면 “오 저 사람은 오른쪽 동네에서 왔구나.” 이렇게 알아버려요. 오히려 상대를 알아버려요. 그러기 때문에 아무런 갈등이 없는 거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동산이다 하는 것을 불법이라고 알고 있다가, 동산 아닌 줄 알았어. 그래서 동산 아닌 줄 아는 것을 불법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럼 동산인 사람하고 또 싸운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불법을 깨달으면 누군가 “동산이다” 하면 “오, 저 사람은 저런 생각을 하구나.” 이렇게 알아야 돼. 이것이 걸림 없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동산이다 서산이다, 옳다 그르다 이것이 我아에요. 我아. 그러나 我아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이것이 우리가 법에 있어서의 무아다. 무아.
무아는 단순히 무아라고 하는 지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아라고 하는 지식만을 갖고 있으면 비동비서산이라는 것과 똑같습니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삶속에 체험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체득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금강경으로 가면 뭐가 될까? 무유정법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다 할 것이 없는 줄을 아는 것은
이 세상 온갖 사람들이 “이것이다”라는 것까지 다 포용해 낸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것을 깨닫게 되면
여러분들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는 온갖 사람들과
걸림 없이 살 수가 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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