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반야심경 8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번에 관세음보살님께서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에 오온이 모두 공함을 깨달으시고,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났느니라. 이 가운데에서 오온개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그냥 일체가 다 공하느니라. 이렇게 하지 않고, 왜 오온개공이라고 그랬겠느냐? 왜 앞에 소승교설을 써서 공을 표현했느냐? 요런 문제도 우리가 한번 살펴볼 필요는 있습니다.
첫째는 오온은 일체이기 때문에 일체가 다 공하다. 즉, 제법의 본성이 텅 빈 공성이라고 것. 이게 첫째고요.
두 번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라고 하는 것마저도, 그것이 진리다라는 어떤 생각으로 모양을 지어버리면 이것이 진리다라고 하는 어떤 진리의 절대성을 가져버리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것을 우리가 공상이다. 공이라고 하는 상을 지어버렸다. 법상이다. 법이라고 하는 진리라는 상을 지어버렸다. 그럼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런데서 ‘일체는 오온이다.’ 하는 그 교설을 하나의 진리로서 이것을 고정화 시켜버렸다. 이렇게 되면 법상이 된다. 그 법상을 깨뜨리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오온개공이다. 제법이 모두 공하다. 라고 하지 않고, 오온이 모두 공하다고 표현을 썼다. 즉, 이것은 소승교설이 즉, 그 당시에 소승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고 하지만 실제는 부처님의 중도사상, 무유정법의 사상에 이미 어긋나 있다.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을 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어요.
자, 제법이 공한 줄 깨닫자.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할 때 이 /일체고액/에 대해서 조금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 괴롭지 않습니까? 그죠? 그런데 괴로울 때만 있습니까? 즐거울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어떠냐?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굳이 세분하면 괴로울 때도 즐거울 때도 있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그런 경우도 있다. 그러니까 고가 있고 락이 있고, 고도 아니고 락도 아닌 이런 상태도 있다. 이렇게도 말 할 수 있어요. 이 고락의 사이로 오고감을 윤회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고락의 사이로 오고가는 윤회=고. 그래서 우리가 락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 락이 영원한 것이 아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거나 상황이 바뀌면 곧 고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 락의 본질도 사실은 고다. 그래서 고락을 합해서 철학적으로 뭐라 한다? 고다. 이렇게 말해요.
일체는 고다. 인생은 고다할 때,
그 고는 고락의 고가 아니고,
고와 락을 포함해서 둘을 다 동시에 지칭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은 어리석기 때문에, 어리석어서 알지 못해서, 락을 추구하지만 고를 받기도 하고, 고에 떨어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또 락을 맛보기도 하고, 그래서 고는 싫어하고 락을 구하는데 그 락이 구해지지도 않고, 구해 진다해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늘 고에 허덕거리게 된다. 그래서
중생세계의 일체는
다 결과적으로는 고로 귀착이 된다.
그래서 일체가 다 고다. 이런 얘기요. 우리들의 어리석은 마음에서 행하는 그 어떤 결과도 다 고로 나타난다. 그래서 일체가 고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일체가 다 고로 나타는 그 원인은 뭐냐?
근본이 무지에서 출발합니다. 무지. 무명. 알지 못함.
설령 안다하더라도 잘못알고 있어요. 이런 것으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니까 강도에 쫓기는 사람의 두려움, 그 고는 강도가 그를 헤치려고 하는 데서부터 고가 일어난 게 아니고, 없는 강도를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 착각한 게 뭐요? 이게 우리가 전도몽상 할 때 몽상이지 않습니까? 그죠? 꿈속의 생각이다. 없는데 있다고 환영에 사로잡혀 있다. 환영. 그러니까 자기 착각 속에서 도깨비에게 홀리는 것 같이 환영 속에 휩쓸려 있습니다.
남이 나를 해치려고 하지 않는데도 해친다고 잘못생각해서 두려움에 빠져있거나, 이것은 남편과 자식, 부모와 형제, 이웃, 이웃나라. 다 마찬 가지오.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볼 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업식에 투영되어서 거짓된 모습, 어떤 환영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단 말이오. 그 환영을 우리는 진실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요. 이게 전도몽상이란 말이오. 여기로부터 우리의 인생의 고가 일어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몽상에서 깨어나야 된다. 이 환영에서 깨어나야 되요. 환영에서 깨어나려면 첫째 환영을 환영인 줄 알아야 된다. 꿈을 꿈인 줄 알아야 된다. 그 두 가지에요. 우리가 꿈에 강도를 만났을 때, 깨어나서 그 두려움에서도 벗어나지만, 그 꿈속이라도 “이게 꿈이다.”라는 것을 확실히 알아버리면 안 두려워요. 꿈인 줄 알면 눈 뜨려하지 도망가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 악몽 꾸다 경험 없습니까? 같은 꿈이 되풀이 되면 도망을 가다가 “아, 이게 꿈이다”해서 눈 뜨려고 노력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눈뜨려고 노력할 때는 그 눈 뜨려고 노력하기 이전에 “이게 꿈이다.”하는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런 거요. 그래서 우리가 꿈인 줄 먼저 알아야 되는 거요. 꿈인 줄 알아야 눈을 뜨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꿈을
꿈인 줄 모르고
현실로 알고 있다.
이게 전도몽상이오.
그래서 꿈을 꿈인 줄 아는 것, 이것이 제법이 다 꿈같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환영 같고, 금강경에 나오죠.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_같을 여. 몽 환 포 영. 이것이 바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 모두 다 허망하다. 허망하다는 것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허망하다는 뜻은 텅 빈 거다. 이것은 환영과 같은 거다. 그것을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한 게 꿈에 비유해서 꿈같은 거다. 환영 같은 거다. 물거품 같은 거다. 그림자 같은 거다. 아침 이슬 같은 거다. 번갯불 같은 거다. 이렇게 6가지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거란 말이오.
응작여시관, 이렇게 봐야 한다.
꿈을 꿈인 줄로 봐야 꿈에서 깰 수가 있다.
허망한 줄을 아는 것,
그래서 꿈에서 깨는 게 뭐다?
깨닫는 거다.
그게 곧 부처를 보는 거다. 이런 얘기요.
그래서 이 고는 우리가 깨어나지 못하면 이 괴로움에 휩싸여요. 그러면 그 괴로움의 종류, 깨어나기 전 세계로 돌아가서 괴로움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냥 일체는 고다. 이게 첫 번째 표현이에요. 한 단어로 표현하면 고, 이렇게 하죠. 이것을 조금 나눠서 표현하면 4고, 이렇게 말해요. 4가지 고다. 생로병사_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이것이 고다. 이것도 역시 인생살이가 고다, 이런 얘기죠.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그것을 늘려서 표현하면 몇 고라고? 8고. 이런 말이 있어요. 이 생로병사는 육체적 한계로부터 오는 거라면 나머지 4고, 여기 정신고통이오.
첫째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것은 꼭 사람을 말하는 것은 아니에요. 자기가 좋아한다. 좋아하면 뭐하고 싶어요? 갖고 싶죠. 보고 싶고, 먹고 싶고, 가까이 하고 싶고, 좋아했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란 말이오. 뭐뭐 하고 싶다. 그런데 그게 다 뜻대로 됩니까? 안 돼요. 저 남자하고 결혼하고 싶다. 저 여자하고 연애하고 싶다. 하는 데 그게 안 돼요. 왜? 그 사람은 나를 안 좋아해. 나는 좋아하는데 그 사람은 나를 안 좋아하는 거예요. 이런 경우 많아요. 내가 좋아하면 저 사람도 마땅히 나를 좋아해야 되는데 안 그래.
그러면 억울한 것 같지만, 뒤집어 보세요.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고 얘기 들은적 좀 있죠? 그런데 나도 그 얘기 듣자마자 좋아지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때도 많이 있었죠. 그런데 내가 안 좋아하는데 그 사람 자꾸 나를 좋아한다 그러면 괴로워요.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그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될 수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가버린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게 나에게 괴로움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아하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에요.
좋아하면 갖고 싶기 때문에
그것은 뜻대로 안 되는 거요.
좋아하는 것은 문제가 없어요.
그러니까 좋아하는 것, 바다를 좋아한다. 이것은 안 괴롭습니다. 바다는 내거다. 이런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배를 보고 괴로워한다? 그런데 괴롭지 않아요. 그것을 내가 가지려고 안하기 때문에. 그런데 바닷가에 가서 바다가 좋다고 그 해변가를 가지고 싶으면 돈이 없으면 괴로워지죠. 그러니까 좋아하는 데에서 괴로움이 생기는 거 아니에요. 좋아하면 어떤 심리현상이 일어난다? 갖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고, 그것이 뜻대로 안되기 때문에 괴롭다. 그래서 이것을 애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이렇게 말해요.
두 번째 원증회고_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이런 거죠. 이 말은 내가 싫어하면 멀리 하고 싶죠. 싫어하면 안하고 싶죠. 그런데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안할 수가 없는,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한 집에 안 살 수가 없는, 한 직장에서 같이 일을 안 할 수가 없는 조건에 처할 때 괴로움이 생기는 거요. 미워한다. 싫어한다. 그러면 같이 안 있으면 되요. 안 하면 되요. 그것은 괴로움은 안 됩니다.
그러니까 좋아한다고 다 괴로움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좋아하기 때문에 갖고 싶은 데 뜻대로 안되면 괴롭고, 미워하는데 싫어하는데 그게 다 괴로움은 아니에요. 싫어하면 우리는 멀리하고 싶고, 헤어지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안 되는 거요. 이 세상은. 그러니까 길 가던 사람이 만나서 좋아해서 만나 차 한 잔 마시다 싫어하는 마음에 일어나면 자리에서 일어나서 헤어지면 되죠. 그런데 결혼하면 그렇다고 헤어질 수 없지. 부모나 자식일 때는 헤어질 수 없죠. 같은 직장에서 있는데 약간 싫다고 직장에 사표내고 나올 수가 없죠. 왜? 먹고 살아야 되니까.
그러니까 거기에 있게 될 때 일어나는 괴로움. 원증회고에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괴로움도 아프지만, 미운 사람과 같이 있어야 되는 괴로움, 이것도 굉장합니다. 어쩌면 이게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 다음에 세상에서 뭔가 내가 얻고자 하는, 이루고자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아요. 어쩌면 앞에 것도 이 속에 다 포함된다고 하지만, 이것은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요. 얻고자 하는데, 이루고자 하는데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괴로움. 이것을 구부득고다. 이렇게 말해요.
그 다음에 일체는 뭐로 이루어져 있다? 오온으로 이루어져있다. 오온의 쌓임이다. 그랬죠? 그래서 실체가 없어요. 다만 5가지의 쌓임에 불과해요. 이 5가지 쌓임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게 오온성고에요.
그래서 4개를 포함해서 이것을 8고라고 그래.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해서 수를 더 늘리면 108번뇌다. 이런 말 쓰죠? 108번뇌다.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하면 8만4천 번뇌 망상이다. 이 8만4천 번뇌 망상이라고 할 때는 한 가지 한가지 다 헤아리면 그 고뇌는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 이런 얘기에요.
이런 모든 고뇌가 잠을 깨면 눈을 뜨면 제법이 공한 줄을 깨달으면, 그냥 사라져버린다. 어떻게 사라지느냐? 그것은 악몽에 시달리는 사람이 잠에서 깼을 때 그 꿈속에 있었던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것과 같다. 이 사라진다는 용어 때문에 또 착각을 합니다. 있다가 사라지는 거예요? 본래 없었던 거요? 본래 없었던 거요. 사라진다는 용어 때문에 ‘있다가 사라졌다.’ 자꾸 이렇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고뇌가 사라졌다는 것은 본래 없음을
즉, 괴로워할 일이 있는데 이러이러해서 괴로움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본래 괴로워할 일은 없는 거다.
그런데 괴로움이 없다는 얘기는 아니에요.
꿈속에서 괴로웠어요. 그 괴로움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꿈속에서 괴로운 것은 강도 때문에 괴로웠다는 거예요.
그런데 강도는 없어. 강도가 없다면 괴로울 일이 없는 거요.
지금 우리는 눈을 뜨면 괴로울 일이 없어. 그러니까 안 괴로울 수 있는 길이 쉬워. 괴로울 일이 있어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굉장히 힘들지만,
본래 괴로울 일이 없기 때문에
안 괴로운 게 정상이에요.
괴로운 게 정상이 아니고 안 괴로운 게 정상이다.
화가 나는 게 정상이 아니고
화가 안 나는 게 정상이오.
그러니까 이 괴로운 것이라는 것은 마치 악몽을 꾸듯이 어떤 착각 속에 빠져서 일어나는 현상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착각 속에 빠지지 마라.
순간순간 깨어있어라.
눈감지 마라. 이 말이오. 그래서 우리의 이상은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거요. 괴로움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천신만고 끝에 되는 게 아니고, 누구나 될 수 있는 거요. 우리가 지금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착각에서만 깨면 바로 괴로움 없는 경지로 가는 거요.
그러니까 사람을 95명이나 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꿈 깨듯이 그냥 깨버린 거요. 그러니까 그 전에 있었던 모든 악행이 꼭 악몽과 같은 거요. 그러나 이 사람은 이렇게 꿈을 깨어서 모든 고뇌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꿈꾸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죠. 그러니까 산모가 애기를 낳다가 앙굴리말라가 왔다하니까 애기 낳다 기절해 버린 거요. 그래서 앙굴리말라가 부처님께 가서 이것을 하소연을 했더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했어요.
앙굴리말라여. 그때는 아임사비구여. 그 여인에게로 가서, “나는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한 번도 살생한 적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시오. 살생을 엄청나게 했죠? 여기서 이 세상에서 태어난 이래로, 이게 무슨 말이오? 꿈에서 깬 이래로, 그것은 그 전에 꿈속을 얘기한 거요. 꿈속을. 자, 이렇게 우리가 꿈에서 깨어나듯이 이렇게 우리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이것이 바로 깨달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강도로부터 도망가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강도를 잡아서 그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이게 우리가 말하는 복을 구하는 겁니다. “돈이 부족해서 괴로우니 돈 좀 주세요.” “출세를 못해서 괴로우니 출세를 하게 해주세요.” “우리 어머니 돌아가셔서 괴로우니 우리 어머니 살려주세요. 우리 아들 살려주세요.” 이렇게 해서 그 위기를 극복하는 거란 말이오. 이것은 꿈속에서 강도로부터 보호받는 거요.
그런데 눈을 딱 떠버리면 본래 강도도 없어요. 그러면 괴로워할 일이 없고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어요. 도울 자도 없고. 이것이 우리가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고뇌로부터 벗어나는 거요. 자, 그러면 스님이 아무리 이런 얘기를 해도, 그게 우리 현실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이 들죠? 그럼 현실적으로 한번 이것을 적용해 보십시다. 제법이 공하다 하는 이 꿈 깨는 소식이 우리 일상 작은 일들과 한번 적용해 봅시다. 가장 여러분들이 저한테 많이 묻는 거요. 일반적으로 어디 갔을 때 많이 묻는 게 뭐요?
“스님, 올해 이사 가려는데 언제 가는 게 좋습니까?” “올해 이사를 가려는데 북쪽에 대장군이 있었다는데 가도 됩니까?” “이장을 해야 되는데 올해 삼재가 들어서 못하게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문제까지도 우리가 진리로 접근해서 해결 할 수가 있다.
지난번에 어떤 분이 저에게 이렇게 물었어요. 부모님 산소를 문중산에 썼는데, 그 문중에 장손이 그 문중산을 팔아버렸다는 거요. 그래서 거기가 개발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산소를 이장을 해야 된다. 그런데 어디 가서 물어보니까 올해 삼재가 들어서 산소를 이장하면 안 된다는 거요. 이장하면 안 된다. 이거요. 그런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첫 번째가 “이장하지 마세요.” “왜요?” “안 좋다니까.” 이유 불문하고 안 좋다니까 이장 안하면 돼. 어떻게 하면 좋겠냐니까 “하지 마라”는 거요.
그러니까 이분이 다시 묻는 질문이 “이장해야 되는데요.” 그래. 왜?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럼 이장하세요.” 즉, 이장 안할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을 필요가 뭐가 있어요. “이장하세요.” 내가 이장하라고 그래서 이장하는 거요? 저절로 이장이 되는 거요. 나한테 물을 필요가 없어요. 저는 대답이 아주 간단합니다.
안 해도 되면 “하지마라” 이거요.
할 수 밖에 없으면 “하라” 이거에요.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어요. 질문의 요지는 “이장은 안 할 수가 없고, 이장하니 나쁘다 그러고, 그래서 이장도 하고 나쁘지도 않는 무슨 비법이라도 있습니까?” 지금 이 얘기 하려는 거죠. 그럼 질문을 그렇게 해야지. 어떻게 하면 좋겠냐하니까 쉽게 대답하죠. “나쁘다. 하지마라.” 갈 수 밖에 없다. “가라.” 이렇게. 이장은 해야 되고 이장하면 재앙이 따른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래서 제가 “반야심경을 칠독하고 이장을 하십시오.” 내가 그랬어요. “아니, 스님, 그렇게 하면 됩니까?” 네. 내가 만약에 받고 이런 비방을 가르쳐줬으면 다시 안 물을 거요. 그런데 이렇게 무료로 가르쳐주니까 믿기지가 않나 봐요. 너무 쉬워서.
“7독하면 왜 되는데요?” 반야심경의 핵심사상이 공사상이죠. 우리가 잠 속에서, 아니면 눈감고 흐리멍텅한 상태에서는 실체가 있는 것 같다, 이 말이오. 그러나 눈을 뜨고 잠에서 깨어서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보면 다 그것은 허깨비고, 환상이고, 실제는 아무것도 없다. 이게 색이 공한 도리란 말이오. 동쪽으로 가면 서쪽으로 가면 남쪽으로 가면 북쪽으로 가면 재수가 있다, 없다. 이게 뭐요? 꿈속의 생각이란 말이오. 꿈에서 깨어버리면 재수가 있고 없고 동이고 서고 다 없는 세계란 말이오. 거기는 불생불멸의 세계요, 불구부정의 세계요, 부증불감의 세계란 말이오.
그러니까 반야심경을 독송한다는 것은 제법이 공함을 확연히 보고 있는 텅 빈 세계란 말이오. 그 텅 빈 세계에서 옮겨버린단 말이에요. 그러면 텅 빈 세계에서는 오고감이 있어요? 없어요? 없지. 옮겼으되 옮긴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거긴 재앙이 붙을래야 붙을 수가 없어. 또 텅 빈 세계는 재앙이 있고 재앙이 없음이 있어요? 없어요? 불구부정이에요. 그러니까 텅 빈 세계에서 옮기면 거기는 재앙이 붙을 수가 없다. 재앙이라는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그러니까 반야심경의 7독하고 옮기면 된다.
그런데 여러분은 법에 대한 믿음과 귀의가 없기 때문에 지금 반야심경을 입으로 독송하고 있어도 그 법에 실상, 그 공상에 여러분들이 노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럼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어요. 그럼 생활에 바로 적용이 된다.
또 그분의 질문이 “화장을 해야 됩니까? 매장을 해야 됩니까?” 그래, “땅이 있으면 매장을 하시고, 땅이 없으면 화장을 하십시오.” 내가 그랬어요. “이장을 하면 안 된다던데요.” 그래. “지금 내가 되는 도리를 얘기했지 않습니까?” “자기가 오래 살던데 있다가 딴 데로 가면 문제가 있다면서요?” 그래. 오, 그래요? 그러면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죠.
이 세상에 살고 있다가 오늘 죽었다. 이 세상에 내가 50년 60년 살다 오늘 죽었단 말이오. 그래서 그 사람 3일 만에 장례를 치르죠. 이 밝은 세상에 있다가 땅속에 묻어놓죠. 깜깜한 세상에 있었죠. 그런데 묘 쓴지가 30년이 되었데요. 그러면 밝은 세계에 있다 깜깜한 세계에 묻어도 항의하는 경우가 없죠? 그럼 30년이나 깜깜한데 있다가 깜깜한 데로 잠시 옮겼다. 이것은 왜 항의를 합니까? 항의를 한다면 처음에 묻을 때 항의를 해야지. 어떻게 생각하세요? 맞아요? 아니, 스님이 말하니까 맞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 이 말이오.
그러니 이렇게 육신이 다 있는 상태에서 밝은 대낮에 살다가 죽어서 그것도 3일 만에 깜깜한데 묻었다. 그래서 살이고 다 썩고 뼈만 남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다가 그것을 옆으로 옮겼다. 그런데 왜 항의를 하겠냐 이거에요. “땅이 없는데요.” 이러면 땅이 없으면 매장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 그럼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그럼 화장을 해야 된단 말이오. “화장을 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왜 괜찮을까요? 죽은지 3일 밖에 안 되는 사람도 화장해도 항의하는 사람 없잖아 그죠. 그런데 땅속에 30년 있어서 뼈밖에 안 남았는데 그 사람을 화장한다고 특별히 항의를 하겠어요?
종교를 떠나서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봐라. 그러니 화장을 해도 되고 매장을 해도 된다. 형편 따라 해라. 그러면 이렇게 스님이 비유를 들어서 자세히 설명할 때 여러분들이 듣고 동의를 한다. 이게 뭐요? 깨어있는 상태에요. 깨어있는 상태는 이게 환히 보인다, 이 말이오. 그런덴 문 열고 밖으로 나가면 여러분들은 자기 생각 속에 빠진다. 그 업식에 사로잡힌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아무것도 안 보여. 그러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거요. 흔들어 깨워놓으면 강도가 없는데, 또 눈을 감고 자면 또 나타난단 말이오.
그러니까 깨어있어야 한다. 이렇게 생활에 적용이 되는 거요. 여기에 금이 이렇게 동그랗게 그어져 있어요. 가운데 개미가 한 마리 있어. 이 개미가 금을 통과하지 않고, 이 금 밖으로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어요. 개미는 하루 종일 한 달 내내 1년 365일 돌고돌고돌고 돌아도 이 금 밖으로 못나갑니다. 그런데 개미가 나한테 부탁을 하면 내가 이 금을 지나지 않고도 내가 밖으로 내 보내줄 수가 있죠. 잡아서 위로 들어서 밖으로 내 놓으면 되요. 왜 이게 가능한가? 개미는 2차원 평면에 살고 있고, 나는 3차원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차원을 높여서 2차원은 높이가 없단 말이오. 3차원은 높이가 있잖아. 그죠? 그러니까 그 높이, xyz, z축으로 이동해서 옮겨 놓는단 말이오.
3차원 공간에서 바닥 위 양 측면이 다 막혀 있는 공간에 있는 사람이 바깥으로 나가려면 벽에 구멍을 뚫지 않고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여기 갇히면 365일 10년을 애써도 나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4차원에서는 금방 내버릴 수 있습니다. 시간 축으로 이동해 버리면 되요. 그러면 벽을 통해서 나갑니까? 그 자리에서 사라집니까? 그 자리에서 사라집니다. 이와 같다. 이거야. 우리는 지금 2차원에 갇혀서 살고 있는 거요.
자기 생각이라고 하는 거기에 딱 갇혀서 살고 있단 말이오.
그런데 눈을 뜨면 한 차원 다른 세계로 간단 말이오.
그러니까 재앙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거 다 쓸데없는 소리다. 이런 얘기가 아니에요. 그런 것을 부정하고 이런 게 아니라, 이것은 제법공한도리에서 우리가 나아가는 길이란 말이오. 그랬더니 이분이 아주 좋아하면서
“하나 더 물어봐도 되요?” “더 물어보세요.” 그때 그 안에 방이 하나 있었는데, 방문을 열고 중학생쯤 되는 남자애가 하나 나왔어요. 그러니까 “스님, 쟤가 우리 아들인데요, 우리 아들 어떻게 잘 되겠어요?” 이렇게 나한테 물어. 그런데 사람들은 스님은 늘 관상 보는 사람, 이렇게 생각을 해요. 어디를 가나.
그래서 내가 애를 물끄러미 쳐다봤어요. 그래서 내가 대답을 안 하고 “남편은 어디 갔어요?” 이러니까 대답을 안 해. 또 물어봤어. 그랬더니 “없어요.” 그래. “아, 네. 돌아가셨어요?” “아니오.” 그런데 더 이상 안 묻고, “아들 잘 안 되겠는데.” 이랬어요. 그러니까 “아니 왜요?” “오, 아들 별로 안 좋다.” 그러니까 딱 의자를 당겨서 “스님,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아들을 위해서 당신이 헌신할 생각이 있습니까?” “예,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무슨 짓이라도 해야죠.” “요번에는 조금 힘이 든다.” “힘이 들어도 하겠어요?” “그러면 오늘부터 하루에 108배씩 절을 하면서 참회를 해라.”
“아~ 예. 어디에 참회를 합니까?” “남편한테 참회를 하세요.” “예? 그 인간한테는 참회를 못해요.” “왜?” “아니 그 인간이 나한테 참회해도 내가 받아줄까 말까한데 내가 왜 그 인간한테 참회를 해요?” “그럼 하지 마세요. 그러면 자식은 안 돼.” “왜 그래요?”
아이 입장에서는 이 분은 내 아빠고 이분은 내 엄마요.
엄마 아빠가 다투고 원수가 되면
아이는 엄마 말을 들으면 아빠가 나쁜 인간이고,
아빠 말을 들으면 아빠가 나쁜 인간인데,
이 세상에 남이 “우리 아빠 나쁜 사람이다.” 할 때는 그 사람 말 안 들으면 되는데,
엄마가 말하는 데는 안 들을 수가 없잖아요.
엄마가 거짓말 하면 자식한테 거짓말하는 엄마가 나쁜 사람이죠?
엄마의 말이 진실이라면 진짜 우리 아빠가 나쁜 인간이오.
그러면 자기 아빠가 나쁜 인간이오.
나쁜 인간의 자손이 자긍심이 있을 수 있겠냐? 없다.
굉장한 열등의식을 갖고 살아야 되요.
아빠가 훌륭해. 엄마가 나빠. 이러면 나쁜 엄마를 둔 아이가 자긍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말도 믿을 수가 없고, 어느 것을 믿어도 문제가 발생하는 거요.
이게 정신분열이 일어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아이는
어쩌면 공부는 잘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행복해질 수는 없어요.
앞으로 결혼을 해도 가정생활이 원만하기가 힘듭니다.
직장생활해도 직장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정말 아이를 아끼고 사랑한다면
장사해서 돈 좀 벌어서 애한테 과외 시키고 좋은 옷 사주고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남편한테 참회기도 하시오.
“여보, 제가 어리석어서 내 생각만 가지고
당신을 바라보고,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해서 미워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부처님 법 만나서 알고 보니
이게 다 내 생각이네요. 내가 지은 것일 뿐입니다.
꿈속에 내가 강도를 미워한 것과 같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렇게 참회를 해야,
그래서 당신 마음속에 남편에 대한 나쁜 이미지가 사라져야,
그 다음에 아들에게 내가 말하거나 행동하거나 어떤 경우에도 아들이 오히려 아빠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면 “그런 소리 하지마라. 너의 아빠는 훌륭한 사람이다.” “그런데 엄마는 헤어졌어. 엄마가 성질이 나빠서 그래. 너도 나하고 살아봤잖아. 엄마가 성질이 안 나쁘잖아. 그러니까 어떤 남자가 이런 여자 좋아하겠니? 너희 아빠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다.”
이렇게 해줘야 이 아이는 자기 아빠의 훌륭한 것을 가지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고, 또 엄마에 대해서도 어떠냐? “아, 우리 엄마는 성격은 좀 모났을지 몰라도 정말 훌륭한 사람이구나. 아빠에 대해서 저렇게 애정을 갖고 있구나.” 이렇게 느껴서 아이가 부모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가 있다.
이것도 다 공입니다. 남편이 나쁘다. 이것은 색이에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일 뿐이다. 그것에 좋고 나쁨은 내 마음이 지는 바다.
제법이 공하다. 이렇게 사물의 공성을 우리가 꿰뚫어보면,
이 부부간에 갈등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바로 아이를 잘 키울 수가 있다.
“그러면 다시 재결합해야 됩니까? “스님은 재결합하라는 소리 한 적이 없어. 살고 안 살고는 우리가 간섭할 일이 아닙니다.”
같이 살아도 미워하지 말아야 하고,
헤어져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미워하지 않는 것, 이것이 중심과제이지,
살고 안 살고가 중심과제가 아니다.
그러니 그렇게 기도하시오. 그래야 앞으로 아이가 사춘기를 지나고, 성년이 되고, 결혼을 하고 해서 나타날 많은 재앙을 이게 미연에 방지하는 거다. 이게 우리가 불법을 믿는 태도고, 이 불법을 믿음으로서 우리가 받는 가피다, 이 말이오.
이렇게 해서 우리가 현재 받고 있는 고통을 소멸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받을 가능성이 있는 고통도 미연에 방지할 수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부처님을 믿고 따름으로 해서 우리가 얻는 무한한 축복이고, 가피고, 이 힘은 참으로 묘하기 때문에 가피지 묘력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은혜를 다 입으셔야 되요. 그런 가피를 받으셔야 된다. 그럴 때 내가 불자임이 너무너무 자랑스럽고, 내가 불법만난 게 너무너무 기쁘다. 그래야 우리가 부처님 형상만 봐도 소리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하고 귀의하는 마음, 찬탄 공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렇게 신앙을 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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