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네. 오늘은 반야심경 13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리자야, 시제법공상/ 시라는 것은 ‘이것’ 이런 얘기에요. 이 제법이라는 것은 모든 법, 모든 존재라는 뜻이오, 이 모든 존재들이, 이 모든 법들이, 공상_공의 모양, 공이라는 것은 존재의 참 모습이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드러난 모양이 아니고, 이 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참모습, 본질의 세계, 그것은 곧 텅 비어 있음. 공이다. 이 말이오.
그러난 드러난 현상의 차원에서, 중생의 눈으로 본 세계를 갖고 논하는 게 아니고, 제법이 다 공하다는 그런 차원, 제법 실상의 차원,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이런 데에서 본다면, 이런 얘기에요. 그러니까 드러난 이 현상계에서
우리가 볼 때는 분명히
태어나고 멸하고, 태어나고 사라지고,
이런 것이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의 세계에서 볼 때는
깨달음의 눈으로 볼 때는
태어난다 하지만 사실은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생겨난다 하지만 사실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죽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다.
사라진다고 하지만 사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비유를 들어 말한다면, 여러분들이 바닷가에 가서 바다를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파도가 수도 없이 밀려오죠. 파도는 생겨나고 사라지고, 생겨나고 사라지고, 생겨나고 사라진다. 어떤 때는 크게 치고, 어떤 때는 작게 치고. 어떤 대는 길게, 어떤 때는 짧게. 헤아릴 수 없는 파도가 바다에는 치고 있습니다. 그 파도 하나하나를 본다면 “어, 파도가 생겼다.” “파도가 사라졌다.” “어, 파도가 생겼다.” “파도가 사라졌다.” 이렇게 생멸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바다전체를 본다면,
파도가 생겨나고 파도가 사라지는 것인가?
아니다. 물이 출렁거릴 뿐이다.
생긴다 하지만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진다하지만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출렁거릴 뿐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불생불멸이라는 말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이 불생불멸을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근본 교설인 제행무상과 불생불멸은 서로 모순이 아니냐? 이렇게 오해를 합니다. 바로 제법이 무상하기 때문에 불생불멸이다. 변하기 때문에, 무상하다는 것은 변하는 거죠. 파도가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출렁거리고,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물이 되는 것은,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생겨나고 물이 없어지고 얼음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얼음이 변해서 물이 되고 물이 변해서 얼음이 된다.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할 뿐이다.
그래서 제행이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함으로 항상 함이 없이 변하므로 사실은 생겨난다 하는 말도 맞지 않고, 사라진다는 말도 맞지가 않다. 생겨난다. 그렇지 않다. 불생이다. 사라진다. 그렇지 않다. 사라짐이 없다. 불멸이다. 사라지지 않는다가 아니에요. 사라진다라고 할 수가 없다. 생겨난다 하지만 생겨난다고 할 수가 없어요.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진다고 할 수가 없다. 생겨난다 사라진다는 것은 사물을 잘못 관할하기 때문에 그렇다.
차원으로 얘기해 봅시다. 2차원의 세계가 있다. 2차원이라는 것은 평면, 평면이라는 것은 x축과 y축만 있지 여기에 높이가 없다. 가로세로는 있는데 높이는 없다. 그러면 평면상에 원을 그리고 그 원 안에 개미를 한 마리 넣어 놨다. 개미가 이 원을, 이 선을 가로지르지 않고 원밖에 나올 수 있느냐? 없다. 불가능하다. 어떤 궁리를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3차원에서는 그 개미는 금을 가로 지르지 않고도 문 밖에 나올 수 있다. 그것은 개미를 들고 그 선을 넘어서 밖으로 내 놓으면 된다. 그러나 사실은 개미는 생겨난 것도 아니고, 개미는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만 이동했다. 어디로? 높이로. z축이, 높이가 제로인 상태가 평면이다. 그것이 1일이나 2이나 3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사라진 게 아니다.
다른 비유를 들어서 말한다면 1차원이라는 것은 수직선이에요. 오직 앞뒤만 있다. 좌우고 없다. 오직 일직선이란 말이오. 그것은 마치 파이프 속과 같은 거요. 파이프 속에서는 오직 앞뒤만 있지, 옆으로 나갈 수가 없죠. 이게 수직선 이런 말이오. 그런데 두 개의 구슬이 부딪혔다. 그 파이프 속에 꽉 찬 두 개의 구슬이 부딪혔다. 그럼 피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죠. 불가능합니다. 하나가 이기고 하나가 지는 것처럼, 하나가 뒤로 가고, 안 그러면 하나가 앞으로가고, 밀고 당기는 것 밖에 없어요.
이 1차원의 세계에서는 너 죽고 나살든지, 내가 죽고 네가 살든지, 내가 이기고 네가 지고, 네가 이기고 내가 지고, 오직 이길 밖에 없다. 내가 전진하기 위해서는 넌 죽어야 한다. 그러나 2차원에서 볼 때는 그 구슬이 옆으로 피할 수가 있다. 옆으로 이동하면 된다. 만약에 관속이 아니라면 옆으로 비키고 지나가고 다시 와서 지나가면 된다. 해결 불가능한 것 같은데, 해결이 너무너무 쉽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너도 너 볼일 보고 나도 내 볼일 볼 수 있다. 차원을 달리해서.
그런데 우리는 자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치 수직선 같은 그런 1차원에서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거요. 그래서 우리는 갈등이 생겼을 때, 해결을 못하는 거요. 죽고 사는 문제가 된다. 이기고 지는 성패의 문제가 된다. 그러나 한 차원 높여서 내려다보면 하나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 슬쩍 비키면 된다. 상대가 나를 향해서 욕을 할 때, 우리는 “네가 욕을 하니 나도 욕을 할 수 밖에 없다. 네가 화내니 내가 어떻게 화낼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은 1차원의 생각이오.
부처님께서는
상대가 욕을 하고 화를 내니 빙긋이 웃었다.
그것은 그거보다 한 차원 높은 세계.
부처님께서 걸식을 갔는데, 한 바라문이 음식을 주기는커녕 화를 내고 욕을 했다. 저 같으면 그 비난이 듣기 싫으니까, “야, 음식을 주기 싫으면 안주면 되지 욕은 왜 해?” 이렇게 대응을 할 수 밖에 없다. “네가 그렇게 나오니 나도 이렇게 대응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또한 대응을 할 거요. “네가 왜 아침부터 내 집 앞에 서 있었냐? 네가 내 집 앞에서만 서 있지 않아도 내가 너에게 욕을 할 이유가 없다. 네가 먼저 여기 와서 서지 않았느냐?” 그럼 나도 할 말이 있죠. “길이 네 길이냐? 대문 앞에 서 있지도 못하냐? 내가 달라 그러지도 않았지 않느냐? 다만 나는 서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왜 욕을 하냐?” 이렇게 하는 것이 시비다. 옳고 그름이다.
우리는 늘
옳고 그름의 세계에
빠져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그렇게 화내고 욕설하는 바라문의 모습을 보고 빙긋이 웃었다. 우리는 웃을 수가 없어요. 그것은 마치 1차원에서 옆으로 비킬 수가 없는 거와 같다. 그런데 부처님은 비켜섰다. 앞에서 화를 내고 오니까 슬쩍 비켜 서준 거요. 지나가라고. 지나 보내고 그냥 가면 되는 거요. 빙긋이 웃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웃는 걸 갖고 시비한다. “왜 웃냐?” 이거야. “왜 나를 비웃느냐?”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그 말에 대꾸를 안했다. 이 말이오. 그러면 저 같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야, 웃지도 못하냐? 그럼 네가 욕하니까 내가 욕하면 좋으냐? 웃으면 낫지?” 뭐 이렇게 하는 것은 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거다. 게의 안한다 이거야.
“당신 집에 손님이 가끔 옵니까?” 물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오죠.” 화제가 바뀌었어요.
“올 때 선물 가져옵니까?”
“네. 선물 가져오죠.”
“그 선물을 안 받으면 그 선물 누구 거요?”
“가져온 사람 거죠.”
그러니까 그 사람이 “아니, 갑자기 손님 얘기는 왜 하느냐?”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당신이 나에게 욕설의 선물을 줬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욕설은 누구 거냐?” 그때 그 바라문이 탁 깨쳤다. “아, 죄송합니다. 부처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리 들어오십시오.” 그러면서 공양을 접대했다. 여기에 이기고 지고,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한반 슬쩍 비켜서니까 철천지원수가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되어 버렸다. 차원이 다른 얘기요. 그러니까 우리는 생멸의 세계에 빠져 있다. 그러나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게 되면 생이 생이 아니며 멸이 멸이 아니다. 우리는 시비 속에 지금 갇혀있다.
그러나 한 차원 높이면
옳다 하지만 옳은 것도 아니고
그르다 하지만 그른 것도 아니다.
옳고 그럼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세계, 제법이 공한 세계.
그 차원에서 보면 이렇다.
그러니까 오늘 범부중생의 세계는 1차원과 같다면 깨달음의 세계는 한 차원 높은 2차원과 같고, 범부중생의 세계가 2차원과 같다면 깨달음의 세계는 3차원과 같다. 범부중생의 세계가 3차원이라면 깨달음의 세계는 4차원과 같다. 한 차원 높여서 보는 거요. 같은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범부중생은 1차원에서 고와 락이 있다. 그런데 고는 없고 락만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옥은 싫고 천당은 좋아한다. 그러나 한 차원 높여서 보면, 고와 락은 다 고다. 고만 고가 아니라 락도 고다. 그러니까 고락이라는 것은 고이기 때문에 취 할 바가 없다. 둘 다 버린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중생이 보는 1차원의 세계에서의 고락의 락이 아니라, 고락을 여읜, 고락을 떠난 그 한 차원 높은 세계의 즐거움이다. 중생의 세계에 있어서 이기고 짐. 성패, 여기서 패하기는 싫고 이기고 싶지 않습니까? 그죠? 그래서 이겨서 얻는 그 즐거움이 아니고 성패를 떠난,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비켜주면 되니까.
욕을 했을 때 맞받아서 욕을 하는 것, 그래서 상대를 굴복시켜서 내가 이겼다 하는, 상대가 굴복해서 내가 이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나한테 사과를 해서 내가 이긴, 이런 기쁨이 아니고 성패를 떠난 옭고 그름을 떠난 세계. 그래서 그도 살고 나도 사는. 그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는. 바라문은 깨달아 기분이 좋고, 그래서 그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고, 부처님은 공양을 드셨다. 그는 깨달아서 좋고, 공양을 올려서 복을 지어서 좋고, 부처님 같은 훌륭한 스승을 둬서 좋고, 그런 눈이 어두워서 어리석어서 붓다를 비난했지만, 붓다는 그에게 그 비난의 과보로 화를 준 게 아니다. 그를 깨우쳐서 기쁨과 복을 줬다. 붓다가 준 게 아니라 그가 스스로 얻었다. 이 차원이 다른 세계에요.
단순히 생멸이 없다. 생멸이 있다의 문제가 아니다. 생멸이 있다는 것은 바로 중생의 세계를 말하는 거고, 깨달으면 생이라 하지만 생이 아니고, 멸이라 하지만 멸이 아닌 세계. 그것은 곧 비유를 한다면 중생은 고락의 세계에 빠져있고, 깨달음은 고락에서 벗어난 윤회에서 벗어난 열반의 세계에 이르게 된다. 그 열반의 즐거움이라는 것은 고락의 락이 아니다. 전혀 차원이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중생의 차원에서 늘 이 문제를 바라보기 때문에 이해를 열반을 고락의 락처럼 이해를 한다.
승패가 없는 세계에서 붓다의 위대한 승리를, 승패가 있는 세계에서의 승리와 동일하게 이해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불법을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이해하는 게 아니에요. 항상 자기 식대로, 자기 생각대로 이해한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 불교가 기복의 울타리를 못 벗어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 기복이라고 말할 때의 복은 행과 불행의 행이다. 그러나 진정한 복은 행과 불행을 떠나버린 행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차원이 다른 얘기에요. 우리는 어리석기 때문에, 법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늘 착각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래서 앞에 조건이 붙어 있죠. 뭐라고? /시제법공상/ 이 모든 법이 공한 그런 세계에서, 그런 차원에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부처의 세계에서 보면. 쉬운 말로 하면 여러분들이 악몽을 꿀 때 강도에게 쫓기고 있다면 그 강도에게 쫓기고 있는 그 꿈 안에서 꿈의 상태에서는 분명히 강도가 있고, 나는 두려움을 가족 있고, 도망을 가고, 구원을 요청하고, 관세음보살이나 나타나서 나를 구원해주면, 그분은 고마운 존재고 이렇다. 이것은 꿈속의 얘기다. 그런데 눈을 뜨면 “아, 꿈이구나. 꿈이구나.” 이것으로 끝나야 된다. “꿈이구나” 이 말이 뭐요? 제법공상, 이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 참의 세계, 공의 세계, 공의 모습에서는 이 말이오.
눈을 뜨면, 강도도 없고, 그러니까 두려워할 일도 없고, 도망갈 일도 없고, 도움을 요청할 일도 없고, 도와줄 자도 없다. 그게 뭐다? 불생불멸의 뜻이에요. 존재의 본질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만 변화할 뿐이다. 그 변화가 여러 종류의 변화다. 물질 같으면 상태의 변화가 있다. 그때는 분자에는 변화가 없고, 화학변화가 있다. 그럴 때는 분자가 변하고 원자의 변화가 없고, 핵변화가 있다. 그러면 원자까지도 변하는 거요. 이 변화에 여러 차원이 있다. 신진대사를 하는 생명의 변화, 우주에는 별들의 변화, 지구상에 있는 바위들은 바위대로의 변화, 지형은 지형대로의 변화, 여러 차원의 변화가 있다.
그러니까 생하느니 멸하느니 하는 것은 인식상의 오류다. 시간적으로 너무 짧게 관찰하거가 공간적으로 아주 좁은 범위만을 관찰함으로 해서 무상과 무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제법이 공한 줄을 모르기 때문에 생겨난 인식상의 오류다.
그럼 정신적인 측면에서 보면 어떠냐? 저는 북한 난민들을 많이 도왔기 때문에 그러다가 국군포로들도 만나게 되고, 그 분들 고향에 올 수 있도록 조용히 도와준 적도 있는데, 그분들 얘기를 듣고 고향에 찾아가보면 어떤 경우에는 전혀 안 믿어요. 그분이 살아있다 해도. 제가 어떤 분 한분 찾아갔는데, 어제 저녁에 그분의 47주기 제사를 지냈다는 거요. 그런데 어떻게 믿어요. 그러니까 돌아가셨다고 통지 받고, 유품 받고, 유품이 거의 없어져서 제대로 챙기지를 못했다고 그러고. 그 다음에 국가보상 거기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40몇 년 동안 연금도 받았다. 매년 제사 지냈다. 그런데 살아 있다.
그러면 살아 있다, 이 말 듣기 전까지는 죽었어요? 살았어요? 죽었지. 그분한테는 확실히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저기 살아 있어. 그런데 내가 ‘살아 있다.’ 라는 정보가 제공되고 부터는 다시 살았어요? 안 살았어요? 살았어. 그런데 이 정보를 제공할 때는 이미 그분은 또 돌아가셔버렸어. 그리고 죽었다는 사실을 내가 다시 통보 안하면 살아있어요? 안 살아있어요? 살아있어요. 그러니까
살았다. 죽었다하는 것도
정확하게 말하면 정보의 입력이에요.
내가 낳아서 내 아이들이다 하는데
낳아서 내 아들이 아니에요.
내 아이들이다 하는 인식이 내 아들이오.
병원에서 애기 바구니가 바뀌면 그냥 모르는 거요. 내 부모다 하는 것도 마찬 가지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히 정보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이 사물을 인식하는 프로그램, 프로그램과 그에 따른 정보,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나고 죽고의 문제에요. 그러니까 인식상의 문제에요. 다. 어떻게 인식하느냐. 그러니 오늘날 우리는 인식상의 문제가 잘못된 정보가 제공이 되면 그냥 죽은 사람도 살았다가 되고, 살은 사람도 뭐가 된다? 죽은 사람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인식상의 오류로 생멸이라는 것이 있는 거지, 인식상의 오류가 사라져버린다면 사실은 난다 할 것도 없고, 난다하지만 난 것도 아니고, 죽는다 하지만 죽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우리가 이 생멸로 일어나는 우리의 모든 괴로움은 다 무지로부터 생겨나는 거요. 이것을 확연히 깨쳐야 불생불멸, 생사가 없는 도리를 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생사가 없는 도리,
불생불멸의 도리라 그러면
영원히 안 죽는 것을 생각하죠.
즉, 무상과 정 반대되는 항상함,
영원을 생각한다. 영원의 개념이 아니에요.
난 것은 반드시 어떻게 해야 된다? 멸해야 돼.
파도가 일어나서 사라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파도가 일어난 것이 안 사라지는 것이 불생불멸이 아니라,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생멸을
전체의 차원에서 딱 내려다보면
그것은 다만 출렁거릴 뿐이지, 생기고 사라짐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도 출렁거려요? 안 출렁거려요? 출렁거려. 그것을 좁게 인식하면 뭐한다? 파도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거요. 지금도 전 세계 바다에서 하루에도 파도가 얼마나 생겨나고 사라지겠어요. 끝도 없이 파도가 생겨나고, 끝도 없이 사라지죠? 바다에서는. 그런 것처럼 전 지구상에 있는 이 생명의 바다에서는 어떨까? 수많은 생명의 물결이 끝도 없이 지금 출렁거리겠죠. 마치 파도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많은 수가 생하고 멸하고, 생하고 멸하고 하지만, 전체의 세계에서 볼 때는 이것은 생명의 바다가 출렁거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한 파도가 일어났다고
기뻐할 일도 아니고,
한 파도가 사라졌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다.
간다하지만 간 곳도 없고,
온다하지만 온 곳도 없고,
다만 변화가 있다.
이런 데에서 오늘 우리들은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야 됩니다.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뭐요? ‘너는 누구인가?’ 이죠.
나에게 돌아와서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 말이오.
우리는 이렇게 가상의 환상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서
마치 꿈속에서 강도를 만나서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밤새도록 쫓기는 거와 같이,
우리는 어떤 환영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지금 쫓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 환영에서 깨어나야 된다.
그래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 “너는 누구인가?” Who are you? 또는 “나는 누구인가?” 그렇지 않으면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중국어로 하면 “시삼마. 이 뭐꼬?” 이 말이오. 이 본질적인 질문에 들어갈 때 우리는 환상에서 깨어날 수가 있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여기부터 파생된 게 뭐요? ‘나의 것’이라고 하는 아소, 또 ‘내가 옳다’라고 하는 아집,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이것 또한 본질적인 질문을 받고 탐구를 해야 된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가? 정말은 누구의 것인가?
네가 옳다하지만 정말은 옳은 것인가? 어째서 옳은가? 이것을 끝없이 탐구해 들어가면, 우리는 내 것이 할 것도, 네 것이라 할 것도, 우리 것이라 할 것도, 자연의 것일 할 것도, 하늘의 것이라 할 것도 없는, 누구의 것이라 할 것이 없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름 붙이든, 그것이 나의 것이든, 너의 것이든, 우리 것이든, 자연의 것이든, 하나님의 것이든, 우주의 것이든 그것은 다 우리들의 망념에 불과한 거다.
옳다 그르다 하는 것도 마찬 가지오. 이 꿈을 깨는 거요. 이것은 단지 꿈을 깨는 소재에 불과하다. 바로 이런 본질적인 질문을 받음으로 해서, 그것을 우리가 참구, 그게 화두다. 참구함으로 해서 우리는 꿈에서 깬다. 그런데 우리들은 늘 꿈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꿈과 같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또 이런 질문도 받죠. 불생불멸과 관계가 있다면, ‘넌 누구인가?’도 있지만, ‘넌 어디서 왔는가?’
넌 어디서 왔는가?
제가 불법에 입문한 것은 바로 이 질문이었어요.
너 어디서 왔는가? 학교에서 왔다.
학교 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느냐? 집에서 왔다.
집에서 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추적해 가면 결국은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전에는 어디서 왔는가? 모른다.
넌 어디로 가느냐? 학교에 간다.
학교에 갔다 어디로 갈 거냐? 집에 간다.
집에 가서 어디로 갈 거냐?
자꾸 묻는다면 결국은 죽는다.
죽은 다음에는 어디로 가는가? 모른다.
결국, 어디서 온지도 모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우리의 인생은 이렇게 바쁘다. 바쁘다 바뻐.
온 곳을 알고, 갈 곳을 알아야 바쁘든지 할 텐데,
우리는 온 곳도 모르고 갈 곳도 모르면서 바쁘다.
마치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그러나 이런 것도 결국은 깊이깊이 탐구해 들어간다면 어떻겠어요? 불생불멸의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런 이치를 깨닫는다면, 원래 올 곳이 없고 갈래야 갈 곳이 없는, 오고감이 없는, 불래불거_온다 해도 온 것이 아닌 간다 해도 간 것이 아닌. 오고 갈 수가 없어. 그래서 우리가 붓다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붓다를 호칭하는 칭호가 뭐요? 타타카타, 옴도 없고 감도 없는 자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여여히 오고, 여여히 간자다. 부처님께서 “고타마시여” 하고 오비구가 부르니까 부처님께서 “나를 더 이상 고타마라 부르지 마시오. 나를 타타카타, 여래라고 부르시오.” 이렇게 말했단 말이오. 나를 높여라 이 얘기가 아니에요. 오고감이 없는 자. 이게 바로 불생불멸의 길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꿈을 깨듯이, 악몽을 꾸다 깨듯이,
오늘 우리들의 이런 인식상의 오류, 이것을 무지라 그래요.
이 무지에 우리가 사로잡혀 있다.
여기서 깨닫게 된다면, 여기서 깨어나게 된다면, 눈을 뜨게 된다면,
여러분들이 지금 고뇌하고 있는
“이것 때문에 죽겠다.” “저것 때문에 죽겠다.” 온갖 아우성.
초조하고 불안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고, 방황하고, 들뜨고 하는
이런 모든 괴로움이,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지만,
쨍쨍한 해가 나게 되면 다 고요해지듯이
이런 번뇌로부터 벗어나서 편안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설령 다시 꿈속에 빠지더라도, 헤매다가도 이제는 금방 자각하게 된다.
“오, 이거 꿈이야.” 도망가다가도 “오, 이거 꿈이야.”
“꿈이야!” 하는 생각이 들면 도망가지 않고 눈 뜨려고 한다.
“망념이야!” 하는 것을 알게 되면 희로애락에 빠지지 않고
금방 정신을 차리게 된다.
경계에 사로잡힌 것뿐이다.
“오, 내가 또 경계에 사로잡혔구나.”
“오, 내가 또 내 생각에 빠졌구나.”
그래서 우리는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는 속에서도
그 물결에 빠지지 않고, 허우적대지 않고
이제는 금방 정신을 차려서 원상태로 돌아올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똑같아 보이지만 그렇지가 않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하고
“물에 빠진 김에 조개나 줍자.” 하고 주워오는 사람하고는
삶의 태도가 다르다.
이 세상에서 보면, 겉으로 보면 똑같은 세상을 사는 것 같은데,
전혀 다르다.
그는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고 행복하고,
남을 괴롭히지 않고 도움을 주고,
세상에 온갖 중생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것이 바로 대승보살의 삶이다.
바로 그런 대승보살의 삶을 보고
사리부트라가 너무너무 존경해서 관자재보살에게 물었고,
관자재보살은 이러한 대승보살의 삶은
법의 실상이 공한 줄을 꿰뚫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삶이 나올 수가 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인생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머니머니 해도 머니가 제일이다.” 이런 생각이나
“아이고, 그래도 출세가 제일이다.” 라거나,
“인기가 제일이다.” 라고 하거나,
“건강이 제일이다.” 라고 하거나,
이런 생각에 빠져서 지금 진정한 행복의 길로 못 간다.
그런 거 필요 없다가 아니라,
그것으로는 해탈의 길을 갈 수가 없다.
번지수가 잘못되었어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부처님 이름을 빌어서 계속 그것만 구하잖아요.
그러니 정말 불법만난 이 인연이 소중함을 안다면,
여러분들이 깨달음을 얻어서 니르바나를 성취해야 된다.
그러면 이런 세상의 복은 부차적으로 따라오는 거요.
그 부수입이 여러분들이 죽자 살자 그것을 향해서 구하는 주수입보다
결과적으로 더 많다. 이런 얘기요.
그런 부수입은 없어도 좋고, 또 필요하면 따르게 된다.
이것이 진정하게 복을 구하는 법이다.
정말 복을 구하려면
해탈과 열반이라는 참다운 복을 구해라.
고락에 빠질 수밖에 없는
노력은 적게 하고, 이익은 많이 보려고 하는
그런 좋지 않은 심보,
설령 그렇게 해서 복을 얻었다 하더라도
인과의 법칙에서 다시 빚을 갚아야 하는
그런 유루복, 이것을 구하지 말고,
이제 정신을 차려서
붓다의 진실한 가르침에 귀의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다
참다운 자유인 해탈과 참다운 행복인 열반을 성취 하자.
이것이 반야심경의 가장 핵심 된 요지입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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