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반야심경

법륜스님 반야심경-제14강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2)

Buddhastudy 2017. 6. 8. 21:53


  

안녕하세요. 오늘은 반야심경 14번째 강의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번 시간에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가 불생불멸이고, 두 번째가 불구부정이고, 세 번째가 부증불감이다. 물론 더 많이 얘기 할 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으로 3가지를 들었습니다. 지난 번 시간에 불생불멸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불구부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깨닫지 못한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깨끗하고 더러움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목욕을 좀 안하면 더럽다고 그러죠. 또 목욕하고 세수하면 깨끗하다. 이렇게 깨끗하고 더러운 위생적인 문제의 깨끗하고 더러움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여기서 말하는 것은 엄격하게는 구. , 구 정인데 이 정이라고 하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을 포함하는 더 근본적인 것은 여기서는 신성하다는 뜻입니다. 성스럽다는 뜻입니다. 정의 의미가. 성스럽다.

 

그러면 그 반대되는 개념의 두는 뭐요? 성스럽지 못하다는 개념이에요. 더럽다 이런 위생적인 문제도 들어가지만, 더 철학적인 의미에서서는 부정하다 이런 뜻이오. 우리 여기 쓰는 말 중에 부정 탄다. 이런 말 아세요? “아이고, 그것하면 부정 타할 때 그 부정의 용어입니다. 네팔에 가면 쿠마리사원이라고 있습니다. 쿠마리템프. 거기에는 어린애가 한 7살쯤 전후되는 여자아이 중에 선발을 해요. 여신으로 선발을 합니다. 쿠마리라는 말은 소녀라는 뜻이에요. 여신으로 선발을 합니다.

 

그러면 그 소녀는 갑자기 가장 성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그 템플의 신이 되는 거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복을 빌 때, 쿠마리템플 마당에 가면 보시함이 잇습니다. 거기 돈을 얹고 자기 복을 비는 거요. 그러면 살아있는 신이니까 조그마한 창문으로 얼굴을 요렇게 내 밉니다. 그것을 보면 부처님을 친견한 것처럼 신을 친견한 게 된 거요. 그러면 복을 받는 거예요. 왕도 1년에 한 차례 가서 성스러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소녀가 초경이 있으면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이 신의 지위에서 폐해집니다. 그러면 폐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오. 그러면 이 여인은 이 세상에 제일 더러운 존재가 된다. 부정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그 여자하고 접촉이 있으면 뭐에요? 재수 없어지는, 부정타버리게 된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이 세상에서 살 수가 없어요. 모든 사람이 재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결혼도 할 수 없고 당연히.

 

그래서 나중에는 다 거리의 여인으로 전락하고, 그 지역에서 못 살아서 저 인도 어디로 팔려가서. 그런데 만약에 자기 신분이 과거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면 정말 맞아죽습니다. 재수 없다고. 그러면 어떤 존재가 어떤 것을 경계로 해서 성스러워지고, 부정해지잖아요. 그런데 이 성스러움과 부정함, 이게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이것은 인식상의 오류다. 무지에 의해서 생겨난 거다. 깨달음의 눈으로 보면, 성스럽다 하는데 사실은 성스럽다 할 아무 것도 없다. 부정하다 하는데 사실은 부정하다할 게 아무 것도 없다. 굉장한 소식이오.

 

만약에 성스럽다 할 것도 없고, 부정하다할 것도 없다면 정월 초하룻날 여자가 제일 먼저 첫손님으로 와도 막을 이유도 없고 소금을 뿌릴 이유도 없죠. 가게에 첫 손님으로 와도, 인삼밭에 첫 손님으로 들어와도, 배 출항할 때 여자가 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풍속이 생긴 것은 여자가 부정하다는 근거에서 생긴 거요. 그런데 붓다는 부정함이 없다는 거요. 그러니까

 

브라만이라고 하는 그 인간들은 성스럽다 하는데

붓다는 성스럽다 할 것이 없다.

 

이 얘기에요. 그러면 저 불가촉천민들 천한 것들, 더러운 것들, 부정한, 그런데 그들은 아무도 부정하다 할 것은 없다. 그 소녀가 초경이 있기 전에 성스럽다 하다할 이유도 없고, 초경 있은 후에 부정하다 하지만 부정할 이유가 없다. 바위가 하나 크게 있는데, 바위로 있다. 그런데 그것을 사람 모양으로 조각을 하면 즉, 불상으로 조각을 하면 성스러워진다. 그러나 깨달음의 눈에서는 성스럽다 할 것도 없고, 거기 십자가를 그려놓는다 해서 성스럽다 할 것도 없고, 여기 나무가 두 개 있어요. 그냥 하나하나 따로따로 있을 때는 그냥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오줌이라도 눴다하면 부정한 나무토막이오. 그러나 그것을 십자가로 새끼줄로 묶으면 성스러워지는 거요.

 

그러면 언제 성스러워지느냐? 이 성스럽다는 생각, 성스럽다는 한 생각이 일어나면 뭐해야 된다? 성스러워지는 거고, 부정하다는 한 생각 일어나면 부정해지는 거지, 존재 자체에는 성스러움도 부정함도 없다. 옛날에는 남자가 처녀의 손만 잡아도 나는 이미 버린 몸이 되죠. 그래서 그 남자에게 시집을 가야 됩니다. 그런데 요즘은 애 둘 낳고 살다가도 헤어져 와서도 또 딴 사람하고 결혼을 하죠. 옛날에는 이것은 더러운 여자가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성스러울래야 성스러울 수도 없고,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도 없다. 몸은 공한 것이기 때문에.

 

이 도리를 안다면 어릴 때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강제로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당한 많은 분들이 이 몸이 더러워졌다하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사실은 괴로움 속에 불행 속에 살아가는데, 제법이 공한 이치를 탁 깨닫는 순간 이 몸은 더러워질래야 더러워질 수가 없구나.” 그러면 일순간에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 부처님의 거룩한 말씀은, 이 깨달음은 고통 속에 사는 우리를 해방시키는 거요. 그 불가촉천민들이 나는 태생이 하늘의 벌을 받아서 이렇게 천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이렇게 숨어 살아야 되는데,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보니 눈을 뜨고 보니 천하다 할 것이 본래 없어. 그래서 부처님은 천민도 출가를 허용했고 여성도 출가를 허용했죠. 당시에 어림도 없는 얘기요.

 

지난번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우리 달마선종의 3대 조사, 위대한 스승이신 승찬도사가 원래 문둥병 환자였는데, 옛날에 이 문둥병 환자는 천벌을 받았다.” 그래서 병도 괴로운데 사람을 피해서 숨어서 살았다. 그런데 그가 이조혜가 대사를 찾아가서 내 죄를, 이 무거운 죄를 좀 사해주십시오. 그랬을 때, 스승께서 그 무거운 죄를 이리 내놔라.” ‘그 무거운 죄를 이리 내놔라.’ 이게 밖으로 향한 눈을 안으로 돌이켜 놓은 거요. 제법이 공한 것을 꿰뚫어 봤다. 내놓을 것이 없습니다. 이게 바로 죄라는 것이 본래 없음을, 그것이 인식상의 오류임을 꿰뚫어봤다.

 

이것이 다 공의 도리에요. 제법이 공하다 하는 이 생각, 이것은 망념에 불과한 거요. “제법은 공한거야.” 이것은 망념에 불과하다. 제법이 공한 이치를 체득을 해야 되요. 그런데 우리는 생각으로, 망념으로 지어서 공을 논한다. 그러니까 해탈이 안 된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도리를 안다면, 이거야 말로 뭐다? 만년부적이죠. 그죠? 신년이 되면 부정한 것을 막기 위해서 부정을 타지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 우리는 올해는 대장군이 어디 있었다. 어디 있었다.” 그러면 그 방향은 부정 타는 방향이 됩니다. “이 산은 가면 안 되고. 원래는 뭐하면 안 되고, 3재가 들었다 해서 원래는 이장을 하면 안 되다. 올해는 뭘 하면 안 된다.” 이게 다 정부정관에서 나온 겁니다.

 

우리들의 어리석은 세계, 중생의 세계에서는 정부정이 존재한다. 그러나 깨달으면 정부정이라는 것은 하나의 전도몽상에 불과한 거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천하가 다 트여 있어. 이 천하가 성스럽지 않은 곳이 없어. 그 말은 성스럽다 할 것도 없고 부정하다 할 것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존재를 성스럽다고 거기에 숭배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 거기에 미혹되지 마라. 어떤 존재를 보고 부정 탄다고 도외시하고 외면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지 마라. ? 부정하다 할 것이 본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모든 존재로부터, 여러분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옛날에는 애기를 갖게 되면 초상집의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 이런 얘기 있죠? 그런 것도 다 뭐 탄다 그럽니까? 부정 탄다. 이런 얘기를 하죠. 사실은 애기를 가진 산모가 사람이 죽는 그런 얘기를 듣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 마음에서 슬픔이 일어나죠. 마음에서 슬픔이 일어나면 애기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러나 거기에 있는 음식이 그게 무슨 부정한 게 있는 것은 아니다. 떡집에서 똑같이 떡을 만들어서, 전화 받고 배달해주는데, 절에 배달해주면 성스러운 떡이 되고, 초상집에 배달해주면 부정탄 떡이 되는 거요. 이것은 다 우리들의 인식상의 오류에서 빚어진 거다. 이 정과 부정이 없는 도리를 여러분들이 알게 된다면 얼마나 많은 걸림, 속박, 여기서 우리가 해방될 수 있게 됩니다.

 

또 하나는 이 정과 부정은 단순히 신성하고 부정한 것만 포함하는 것은 아니에요.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라고 하는 것도 우리들의 인식상에서 생겨난 것이지 본래 존재에 옳고 그름이 없다. 맞고 틀림, 이런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귀하고 천함. 신분이 양반은 귀하고, 상놈은 천하다. 이런 것도 존재에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런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현실에서 그것이 있다고 느낄 수가 있겠죠. 마치 꿈속에 있는 사람은 강도가 분명히 있고 도망을 가야 되요. 두려움이 생겨요.

 

아무리 깨어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사람 귀에는 안 들려.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옆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그게 들리지를 않습니다.

그것은 잠꼬대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이 못 알아 듣는 거와 똑같아.

말은 알아듣는데 이해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아예 못 알아 들어.

소리가 안 들려. 일상세계에서 얘기하면 소리는 들리겠지.

그러나 그것이 그냥 새소리 바람소리 같은 소리이지,

어떤 이해를 동반하는 소리가 될 수가 없어.

저사람 미친 소리 한다. 정신 나간 소리한다.

현실에 안 맞는 소리, 비현실적이 소리 한다.” 이렇게 되요.

 

왜냐하면 우리는 사고체계에 갇혀서 지금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가지 업식에 딱 사로잡혀서 살고 있다.

그것으로 감옥을 만들어서,

그것으로 색안경을 만들어서 세상을 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유의 길이 있다고 해도 가지 못한다.

 

옛날에 이런 것은 비유해서 이렇게 말한다. 눈이 안 보이는 장님이 있었어. 그래서 그분은 업고 다닌다. 길이 안보이니까. 눈이 안보이니까. 그러다가 어느 날, 그 업고 다니는 사람이 화장실 좀 갔다 올 테니까, 나뭇가지를 좀 잡고 있어라. 이렇게 해서 손을 올려 나뭇가지를 잡도록 했단 말이오. 그런데 발을 뻗쳤어. “조금만 매달려 있어. 내 화장실 다녀올 테니까.” 그러면서 말하기를 손 놓으면 큰일 난다. 밑에 천 길 낭떠러지다. 조심해야 돼.” 그리고 가버리고는 안 오는 거요.

 

팔이 빠지려고 그러는데도 사람이 안 와. 그래서 살려 달라 살려 달라아우성하는 거요. “나 살려 달라. 길가는 사람이 보다가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있는데 땅하고 발이 한자도 안 떨어졌어요. 그런데 살려 달라 아우성인 거요. 그래서 여보게, 손만 놓으면 돼.” 그런데 그게 귀에 안 들어오는 거요. 손 놓으면 죽는 줄 알고. 욕을 하는 거요. “그래서 나보고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으라는 거요.” 이렇게 아우성을 치는 거요.

 

여러분이 뭔가 집착해서 아우성을 칠 때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집착만 놔버리면 돼.” 그러면 이게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줄 안다. “세상 물정 모르고 스님이 저런 소리한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렇게 하면 되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거와 같다. 그러나 그 봉사가 손만 놔버리면 다시는 매달릴 필요가 없는, 영원한 안락, 대지에 두 발을 딛고 살 수 있는 거와 같다.

 

그것처럼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그것을 놔버리게 되면,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가 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웃으면서 살아갈 수 있고,

설령 순간순간 생각에 사로잡혀서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외로워하더라도

, 내가 한 생각에 사로잡혔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면

다시 편안한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꿈에서 깨어나 보지 못한 사람, 한 번도 색안경을 벗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런 얘기 하면 할수록 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헛소리 한다.” 이런 소리 합니다. 그런데 한번이라도 눈을 떠본 자, 안경을 벗어본 자는 이해할 뿐만 아니라, 설령 다시 안경을 끼거나 눈을 감았다 하더라도 괴로움에 잠시 지쳤다가 하고 눈 뜨는 쪽으로 가게 된다. 잠에서 깨는 쪽으로 가게 된다. 이것이 큰 차이요.

 

그래서 한번 적어도 눈을 떠봐야 된다. 선에서는 초견성을 해야 된다. 성문4과에서는 수다원과에 이르러야 된다. 그래야 여기서부터 수행이라고 하지, 그 밑에 것은 수행이라고 이름 하면 안 된다. 이 이치, 이 법의 이치는 일단 자각을 해야 되요. 이것을 도에서는 견도라고 그래요. 견도를 증득해야 돼. 삼도, 견도, 오도, 무학도 할 때는 견도를 증득해야 돼. 이치는 꿰뚫어야 돼. 그것이 다 실천은 안 되더라도. 선에서 초견성은 해야 돼. 소승으로 말하면 수다원과는 들어야 돼.

 

그다음부터는 수도라고 그래. 그다음부터는 닦아나가야 돼.

 

이치를 꿰뚫어 알았지만,

현실 속에서 지난 생에 다생겁래로 살았던 습기 때문에

자꾸 순간순간 사로잡히게 된다.

그러니까 넘어졌다 일어나고, 넘어졌다 일어나고,

이런 수도를 해야 된다. 연습을 해야 된다.

 

그런데 이 법에 대한 이치 자체를 꿰뚫지 못한 상태에서 행하는 것은 수행이라고 이름 할 수가 없습니다. 헤매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방향을 잘못 잡아서는 아무리 열심히 가도 목적지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자는 /첫째, 정법을 만나야 된다. 법의 이치를 꿰뚫어야 된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거 아니오. 언하에 깨치기도 하고, 3일 만에, 석 달 만에, 3년 안에는 적어도 꿰뚫어야 돼. 3년이 넘었는데도 아직 이치를 못 꿰뚫었다? 그러면 이것은 장판 때를 묻히는 거요. 불교라는 이름의 형식에 젖어서 도무지 꿈에서 못 깨는 거요. 꿈속에서 불법을 만난거와 같아요. 꿈 얘기 하고 있어요. 꿈에서 깨는 길을 가야 된다.

 

이런데서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 물을 마시고 깨쳤다.” 이런 말하잖아. 그것도 이거와 같은 얘기요. 저녁에 깜깜해서 목마를 때는 더듬어서 바가지 하나 잡고 물을 떠 마실 때는 그렇게 달콤하고 맛있더니 아침에 그 바가지를 보니까 해골이었어. 그랬을 때 토했다. 그러면 토했다는 것은 더럽다는 거요? 깨끗하다는 거요? 더럽다는 얘기지. 그러니 같은 바가지 이고, 같은 물인데 어제 저녁에는 깨끗했는데, 오늘은 더럽다 할 때는, 더럽고 깨끗함이 바가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물에 있는 것도 아니다. 마음에 있다.

 

그러면 이런 이론은, 이런 설명은, 이런 이치는 원효가 이미 경전을 보고 알았어요? 몰랐어요? 알았어. 화엄경에 일체가 다 일심처소다 하는 것을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골을 보는 순간 아는 것은 온데 간데없고 더럽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니까 토했다. 그런데 토하면서 깨쳤다. 토했다는 것은 경계에 걸렸다는 거요. 어리석다는 거요. 미혹하다. 이거요. 그런데

 

미혹함에 빠졌을 때 바로 뭘 알았다?

자신이 미혹한 줄을 알았다. 이게 중요한 거요.

 

그런데 우리는 꿈을 꿈인 줄 모르고,

미혹함이 미혹한줄 모르고,

어리석음이 어리석음인줄 모른다.

꿈속을 현실로 알고 있다.

오류를 진실로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것을 움켜쥐고 고집을 하는 거요.

 

미혹을 미혹으로 알았다. 오류를 오류로 알은 거요. 딱 토하면서 !”하고 자기 자신의 상태를 알아차린 거요. “, 깨끗하고 더러움이 마음에 있는 것이구나.” 그래서 한 생각 일어나니 만법이 일어나고, 한 생각이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지네.’ 이렇게 노래했다. , 일체가 다 유심조다. 그러니 이 진리가 중국이나 인도라고 하는 어디 땅에 있는 것도 아니고, 장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경전에 있는 것도 아니다. 책속에 있는 게 아니다. 결국은 다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러니 이곳저곳, 이산 저산, 이사람 저사람, 이 책 저책, 밖을 찾아 헤맬게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이라는 것은 신라라는 말도 되지만, 고향이라는 것은 마음의 당처로 돌아왔다. 더럽고 깨끗함이 일어나는 그 본 곳에 돌아왔다. 거기로부터 문제를 보기 시작한 거요. 그러니 여러분들도 토하다가 깨치듯이 화를 내다가 깨친다, 이 말이오. 아시겠어요? 화를 벌컥 내다가 , 똑같은 말인데, 이런 상황이라면 웃을 일이 왜 오늘은 화를 내게 되는가? , 이것이 다 마음 가운데 있구나. 저 사람한테 있는 게 아니고, 저 말에 있는 게 아니고, 내 마음가운데서 이러나구나.” 이렇게 탁 깨달으면 해탈하는 거요.

 

이런 것들을 여러분이 이치를 하나하나 경험 속에서 체득해 나가야 됩니다. 이런 이치를 깨닫는 게 중요하지, 밥을 한 끼 굶느냐? 뭘 어떻게 하느냐?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밥에 집착하면 물론 밥도 끊어야 되지만, 그러나 굶으면 뭐가 해결이 될까? 절을 많이 하면 해결이 될까? 무슨 음식을 가려서 안 먹으면 해결이 될까? 이런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치를 정확하게 꿰뚫어 알아야 돼. 그래서 불법은 단순한 믿음을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 법의 이치를 알아야지.

 

, 그러면 우리가 불구부정은 성스럽고 부정함이 이것이 다 마음에서 지은 바이지, 장소나 어떤 사람이나 어떤 존재에 성스러움과 부정함이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여성도 천민도 다 평등하게, 브라만이라고 신성하게 보지 않았다. 다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보신 거요. “모든 인간은 다 똑같다.”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오. 본질 자체에 성스러움과 부정함이 없다. 이것은 나아가서 옳고 그름도 없고, 귀하고 천함도 없다. 이렇다면, 시일체처에 여러분들은 그런 정부정으로 인해서, 옳고 그름에 의해서, 귀천에 의해서 여러분이 분별심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또 분별심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줄, 내가 일으키는 줄 금방 알아차려야 된다.

 

그런 도리에서 본다면 사실은 자식이 없으면 낳을 수 있으면 낳아서 키우면 되지만 입양해서 키우면 되지. 그런 거 아무 문제가 없어요. 재혼을 한다고 해서 그게 무슨 큰 잘못입니까? 아니에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어쩔 수 없이 닥친 것은

그것은 그냥 하나의 사건이고 사고일 뿐이다.

그것을 가지고 괴로워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 자기를 괴롭히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제1의 화살은 맞을지언정,

2의 화살은 맞지 마라. 이렇게 말한다.

 

그다음에 다음 문장, 뭐에요? /부증불감/이다. 그대로 해석하면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다. 이런 얘기에요. 늘어난다. 줄어든다. 이것은 많아진다 적어진다, 커진다 작아진다, 넓어진다 좁아진다. 이런 거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저, 장단, 대소, 이런 거 다 포함하는 거요. 그러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보면 여러분들 재산도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하죠. 그런데 왜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다고 그럴까?

 

, 이 방안에 있는 사람이 저 방으로 두 명이 나갔어요. 그러면 이 방안만 기준하면 분명히 줄었죠. 그런데 이 건물 전체로 보면 줄지도 않고 늘지도 않았다.

 

비행기를 타고 갈 때, 그 부엌에 음식이 많이 있죠. 그런데 그 음식을 꺼내 사람들한테 다 먹여서 텅텅 비었어. 그럼 비행기 무게가 줄어야 되잖아. 같죠. 그럼 사람들이 그것을 먹고 배가 불렀는데 다 화장실에 가서 똥도 누고 오줌도 누면 비행기가 가벼워져야 되잖아. 그래도 같죠.

 

그러니까 부분적으로 좁은 안목으로 하나하나를 나누어서 보면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사실은 전체적으로 보면 는다 하지만 는 것도 아니고, 준다 하지만 준 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느는 것도 아니고 줄은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떨까?

 

, 한 가정에서 한번 얘기해 봅시다. 엄마 아빠 거기에 부부가 있고, 거기에 아들딸이 있다. 4명이 집에서 오락게임을 했어요. 내기를 했다. 돈 내기를 했어. 그래서 남편이 따기도 하고 아내가 따기도 하고 큰애가 따기도 하고 작은애가 따기도 하고 재미있게 놀았다. 그런데 끝날 때 애들은 싸워요? 안 싸워요? 싸워요. 딴 애는 좋아하고, 잃은 애는 괴로워해요. “내 돈 내놔라.” 이렇게 다투어요. 울고 웃고. 그런데 엄마 입장에서는 어때요? 그렇게 애들이 다투면 뭐라고 그래요? “다투지 마라.”고 하죠. ? “다 그 돈이 그 돈 아니냐. 왜 그것을 갖고 다투냐?” 이렇게 말해요.

 

그러니까 엄마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본다. 집안 전체로 볼 때는 돈은 늘어난 것도 아니고, 줄어든 것도 아니오. 늘어난 것도 아니고 줄어든 것도 아닌 사람은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은 늘어났다고 좋아할 일도 아니고, 줄어들었다고 슬퍼할 일도 아니에요. “그것을 갖고 왜 난리를 피우느냐?” 이렇게 얘기하지만, 아이들은 자기 것밖에 모르니까, 그것이 아무리 형 동생이라도 네 것은 네 거고 내 것은 내것다. 그러니까 여기서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생기는 거요.

 

오늘 우리 사회도 마찬 가지오. 여러분들이 가정에서도 아내와 남편이 각자 자기 것을 주장하게 되면 부부간에도 네 거 내 것을 가지고 재판할 때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부모자식 간에도 가끔 보면 법원에 가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웃과 얘기를 할 때는 부모 것도 내거고, 남편거도 내거고 자식거도 내거죠. 그죠? 그 안에 하나에요. 그러니까 가장은 전체를 하나로 보는 거고, 아이들은 별개로 보는 거고. 그러니까 형제간에 다투는 거요. 그런데 나라에도 애국자라는 거요? 우리나라 안에 있는 것은 네 거 내 것을 안 가르는 거요. 경상도 전라도도 안 나누는 거요. 자본과 노동자, 이렇게 안 나눕니다. 한나라를 하나로 보는 거요.

 

그런데 그 한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각각 자기 것이 있는 거요. 그래서 나라를 위해서는 자기 재산도 내고 자기 목숨도 버리죠. 그런데 부처님은 이 나라 저 나라를 넘어 서 있다. 그런데 우리는 내 나라 네 나라만 따지니까, 만약에 한국하고 일본하고 전쟁한다면 한국 불교인들은 부처님께 우리가 이기게 해 달라, 일본사람은 절에 가서 일본 사람이 이기게 해달라고 할 거 아니오. 만약에 이렇게 이기고 지는 게 부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부처님이 한국불자들 기도를 듣고, 일본 사람 죽이고, 일본 사람 기도를 듣고 한국사람 죽이고, 부처님이 이게 하실 일이에요? 아니겠지.

 

이것은 불법이 그렇지 않지만, 우리가 이 울타리, 이 아상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야 해탈을 하는데, 그 울타리 안에서 지금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모순이 발생하는 거요. 그렇게 해서 부처님은 이 전체 인류를 본다. 이거야. 전체 인류를 본다면 지금 한국에서는 음식이 남아 돌아서 쓰레기 치운다고 골치인데, 저 북한에서는 음식이 없어서 애들이 영양실조 걸리고 사람이 죽는다 그러면, 우리 독립운동 했던 조상이 내려다 볼 때 , 그거 버리지 말고 좀 주지.” 이런 생각 들까? 안 들까? 부처님까지 안 가더라도.

 

그런데 우리는 저거 나쁜 놈이다이래서 싸우니까 저놈 굶어죽어도 좋다.” 이런 생각으로 가버린단 말이오. 이게. 이게 같은 민족이다 아니다. 이런 것을 넘어서는 얘기요. 그러니까 전 인류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인도의 불가촉천민, 아프리카에 병들어 죽거나, 음식이 없어서 죽거나, 애들이 학교도 못 다니거나 하면, 전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이게 다 하나로 보는 사람입장에서는 당연히 어떻게 해요? “, 그거 너무 욕심내어서 혼자 먹고 버리지 말고 저기 좀 나눠줘라.”이런 말은 자연스럽게 나오겠죠.

 

부모가 장난감을 동생 안주고 형이 다 가지고 있으면, “야야, 너 혼자 다 가지지 말고, 동생 하나 줘라.” 이 얘기와 똑같은 거요. 그러니까 어떤 부처의 마음이라는 것은 어떤 딴 마음이 아니고, 진실을 진실대로 보는 마음이오. 사실을 사실대로 알면 자연스럽게 이런 일어나는 거요. 여러분이 지금 이런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 거요.

 

왜 깨달음이 중요하냐를 아셔야 되요. 깨닫는다는 것은 이런 장애, 이런 한계를 극복한다 이 말이오. 그러면 자연히 우리가 부르는 자비심이 저절로 나오는 거요. “남을 도와야지.” 이래서 생각이 일어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이 환경문제가 생긴 거요. 그럼 이렇게 될 때, 하나로 연결되어있는데, 사람 중심으로 생각해서 다른 생명을 해치 게 되면 결국 한 몸이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 사람에게 해악으로 돌아온다. 우리 생존을 위협하게 된다.

 

부부지간에 나만 생각하고 아내나 남편을 구박하면 결국은 자기 불행으로 다가오고, 한 나라에 살면서 자기 이익만 취하고 나라가 망하든지 신경 안 쓰면 나라가 망하면 결국 자기도 망하게 되는 거요. 그와 같은 이치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나만을 생각하는 데에서 가족전체로, 가족만을 생각하는 데에서 이웃도 함께. 이웃만 생각하는데서 지역공동체, 우리지역 전체를. 우리 지역만 생각하는 데에서 다른 지역까지 포함해서 나라 전체를. 남한만 생각하는 데에서 북한까지 포함해서 민족전체를, 우리나라만 생각하는 데에서 이웃나라까지 생각해서 인류전체를, 사람만 생각하는 데에서 인류만을 생각하는 데에서 뭇생명을 함께 생각하는 만중생을 생각하는 이런 생명공동체 의식으로 가야 된다.

 

여기서 살아있는 것만, 살아있는 것이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그냥 우리가 이렇게 선을 그은 것이고, 사실은 이 생명이라는 것은 다 물질이 유전인자에서 결합된 거 아닙니까? 그죠? 물질이 오염되면 이 생명도 오염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되겠지. 그러니까 생명 중심으로만 이 살아 꿈틀대는 이것만 중심으로 보면 안 된다. 요것만 중생으로 보는 것이 중생상이다. 이 말이오.

 

이것을 넘어서서 물과 바람과 태양과 공기까지 다 포함해서 하나의 삶으로, 생명으로 봐라. 더 나아간다면 우리 눈에 보이는 이런 물질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도 있어요? 없어요? 소립자나 이런 것은 보이지 않죠. 그러니까 이런 눈에 보이는 것, ‘있다라는 생각, 있다 없다 하는. 이 생각까지 넘어서야 되요. ‘있다라고 하는 이런 유한한 존재들은 다 뭐요? 생멸하죠. 그러니까 거기에는 목숨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불생불멸이기 때문에 있고 없음을 넘어서는 존재의 본질의 세계가지 우리가 인식의 폭이 넓어져야 된다. 이게 우주적인 인식. 우주적인 존재가 되는 거요. 그러면 내가 그만큼 큰 존재가 된다. 이 말이오. 내 자신이. 여기는 이미 나니 너니 하는 것을 넘어 설뿐만 아니라, 일체로 나눔의 세계를 넘어가버린 세계. 그래서 요것만 특별히 떼어서 이것은 나다.”라고 할 것이 없다. 이 말이오. ‘라는 게 없다. 의미를 정확하게 알아야 되요.

 

요것만으로 나를 삼을 게 없다.

이 전체가 나이기 때문에.

 

, 이런 인식의 폭을 넘어가야 우리가 뭘 할 수 있다? 부증불감인 줄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부증불감인 줄을 알게 되면 우리들의 이 자잘구래한 시비분별에서 다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게 되면 즉,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어리석은 세계에서는 생하느니 멸하느니 하지만, 생한다 멸한다 할 것도 없고, 어리석은 이 중생의 세계에서는 성스럽니 부정하니 하지만 성스럽고 부정하다 할 것도 없고, 옳다 그르다 할 것도 없고, 이 말이오. 또 내거니 네 거니, 늘어났니 줄어들었니 난리를 피우는데, 사실은 존재의 참모습에는 그렇지가 않다. 바로 우리가 그것을 인식을 하기 때문에 조견오온개공 하니까 어떻게 되더라? 도일체고액.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 이런 얘기에요.

 

이것은 실제로 여러분들이 다 누구나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린 지금 사실은 좁게좁게 경험을 하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불법을 공부해서 이치를 알고, 그것을 자기 경험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해나가게 되면 삶이 달라지는 거요. 운명이 바뀝니다. 남편이 뭐라고 하거나 아내가 뭐라고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따지다가 , 알겠습니다. 그러죠 뭐.” 이거 하나만 연습해가지도 현실에서 한번 해 봐요. 그냥 뭐라고 그러면 알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그러죠 뭐.” 이렇게 한번 해봐요.

 

그럴 때마다 늘 마음속에서 그렇게 안 되죠. 그러면 집안이 망해버릴 거 같아.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아무 문제도 없어요. 꽉 나만 옳다는 것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이거 놓치면 큰일 나는 줄 알아. 그러니까 이것을 내려놓는, 그런 공부들을 우리가 해 나아가야 참으로 우리가 불법만나서 붓다의 가피를 입었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었다라고 하는 행복을 얻을 수가 있다. ,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