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네, 반야심경 16번째 강의 시간입니다. 지난번 시간에 이어서 반야심경을 내용적으로 분류하면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가 대승의 공사상을, 두 번째가 그 공의 세계에서 바라봤을 때 소승교리의 잘못된 이해, 법집을 비판하고, 3번째 대승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드러낸다. 그런데 지금 오늘 우리가 공부해야 될 부분은 바로 소승의 교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는 그런 내용이 되겠습니다.
/시고/ 시고라는 것은 이런 까닭으로, 이런 말인데, 이런 까닭으로, 앞에 내용이죠. 이런, 이런이 뭐요? 제법이 공하다. 이런 얘기요. 제법이 공하다. 그 공의 세계에서 볼 때는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다. 즉, 불생불멸이고 불구부정이고, 부증불감인 그런 세계에서 본다면 이런 얘기에요. 이런 까닭으로
/공중/ 공 가운데에서는, 이 말은 공의 세계에서는 이런 얘기요. 공의 차원, 공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에서 본다면 이런 얘기요.
소승 교설의 첫 번째 오온설입니다. 이체는 오온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
/무색/ 색이라 할 것도 없고 무수상행식, 수라 할 것도 상이라 할 것도, 행이라 할 것도, 식이라 할 것도 없다. 즉, 오온설에 대해서 오온의 교설에 대해서 실체가 없음을, 오온의 교설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그 부처님의 가르침을 형상화하는 게 법상이오. 바로 그 법상을 비판하는 거요. 그 법에도 실체가 없음을, 법도 공함을 하는 얘기다. 그래서
/무색무수상행식/ 오온에 대한 얘기입니다. 그 다음에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이것은 12처설입니다. 일체는 12처다. 인식의 주체인 6가지 감각기관. 육근이라 그래요. 안이비설신의. 그리고 그 육근의 대상인 육경이라고 그래요. 색성향미촉법, 이 육근과 육경의 접촉에 의해서 우리가 인식작용을 하는 거요. 일체라는 것은 딴 게 아니라 이것에 불과하다. 이것이 12처설이오. 그 앞에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그 다음에 세 번째가 18계설입니다. 18계설이라는 것은 우리 몸의 감각기관인 6개, 육근. 안이비설신의. 그리고 인식 대상인 경계, 육경, 색성향미촉법. 이것의 단순한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있는 인식작용인 6가지 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만 갖고 한다면 어떤 사물을 볼 때 누가 보나 똑같아야 되겠죠. 다른 이유는 뭐요? 인식주체가 다르기 때문에, 각각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래서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이게 6가지 식이다.
이 6가지, 6가지, 6가지. 18계에 의해서 바로 바로 우리가 아는 세계가 전개 된 거다. 일체는 18계설이다. 여기에 대해서 비판하는 거요. 이것은 앞에 무가 다 붙어야 되죠. 무색, 무수, 무상, 무행, 무식. 이렇게 되어야 되는데, 앞에 것 하나만 해서 무색 하고 무수상행식, 이렇게 썼다는 것은 앞에 색을 띄어 무색했다는 것은 각각 다 ‘무’가 붙어있다 이 말이오. 그 앞에 뭐가 붙어있어요? 공 가운데어서 공의 세계에서 보면 이게 전제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오온설에도, 12처설에도, 18계설에도 앞에 공중에서는, 공중에서는, 이렇게 되어있는 거요. 그러니까 안_눈도 공하다. 이_귀도 공하다. 하나하나의 무를 붙일 것을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이랬어요. 그러면 18계는 안식부터 법식까지 18개로 되어있으니까 너무 길어, 18계이기 때문에 안계, 이계 이렇게 나가고 색계, 성계 이렇게 나가고, 그 다음에 안식계, 의식계 이렇게 나가야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 18계 가운데 첫 번째 거와 끝번 째만 쓰고 중간에 것은 생략해 버렸어요. 그래서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이게 맨 끝에 겁니다.
기본 골격을, 이것은 18계설을 비판하고 있다. 이게 다 소승교설입니다. 소승교설의 법집에 집착함을 비판한다. 그래서 법도 공함을, 지금 깨우친다. 이런 얘기에요.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그 다음에 12연기입니다. 연기법을 관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거요. 연기법 가운데 12연기가 뭐요?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 이래요. 이것은 그때 가서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일단 기본 골격을 얘기해야 되니까. 기본 구조를 말씀 드려야 되니까. 그러니까 무명이 있으므로 행이 있고, 행이 있으므로 식이 있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유가 있으므로 생이 있고, 생이 있으므로 노사가 있다. 다시 무명을 타파해 버리면 무명이 없다면 뭐가 없어진다? 행이 없어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사라지고 이렇게 해서 생이 사라지면 노사도 사라진다.
이렇게 해서 무명을 타파함으로 해서 생로병사에서 벗어나는, 모든 고뇌에서 벗어난 그런 수행법이란 말이오. 그런데 여기 무무명, 그랬어요. ‘무명이라는 것이 있어서 없앤다.’ 이렇게 소승은 알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무명이라고 하는 것에도 무명이라고 하는 실체가 없다. 그러니까 무명이 없으므로 무명을 없앤다라고 할 것도 없다. 무명에 다함도 없다. 그게 뭐요? 무무명 역무무명진 가운데 10개를 생략하고 무노사, 노사가 없음으로 또한 노사의 다함도 없다. 이렇게 해서 12연기에 대해서 쓰여지고 있습니다. 4가지.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그 다음에 5번째 소승가운데 성문승의 기본수행법은 사성제입니다. 연각승은 12연기입니다. 성문승은 사성제. 사성제라는 것이 뭐요? 고, 집, 멸, 도.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 그런데 ‘괴로움이 있는데 괴로움을 없앤다.’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아직 깨닫지 못한 소식이다. 그러니까 괴로움이 없다. 괴로움이라 할 실체가 없다.
여러분이 밤에 잘 때 강도에게 쫓기는 꿈을 꾸면 꿈속에서 괴로움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 그러니 우리가 괴로움이 있어요. 눈을 뜨고 나서 보니까 사실은 괴로워하기는 했는데, 괴로울 일은 있었어요? 없었어요? 괴로울 일이 있어서 괴로운 게 아니고, 그냥 환영에 휩싸여서 괴로운 거요. 그러니까 괴로워할 일이 없다. 본래. 이것은 여러분이 뭔가 깨달음의 맛을 봐야 돼. 괴로워할 일이 없다는 것.
괴로움은 있지만 괴로워할 일은 없어요.
괴로워할 일이 있으니까 괴롭다?
그렇지 않습니다.
괴로워할 일은 없지만,
우리는 어떤 착각에 의해서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데,
깨닫고 보면 “아, 괴로워할 일이 없는 거구나.”
괴로워할 일이 없다면
괴로움도 있어요? 없어요? 없어.
괴로워하는 것은 비정상이오. 정상이 아니다.
그래서 무고_괴로움이 없다.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도 없으며, 괴로움도 없으며, 소멸에 이르는 길도 없다. 이게 무고집멸도요. 우린 ‘깨닫는다’ 라고 하는데, 이것이 깨달음이라고 할 실체도 없다. 깨달음도 없고, 우린 깨달음이 있으니까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을 쓰죠. 깨달음을 얻는다라고 하는 것도 없다. 그게 뭐요? 무지역무득이요. 이것이 소승의 교설과 수행체계에 대해서 한마디로 비판하는 거요. 그런데 그 비판을 할 때 그냥 비판하는 거요? 어떤 차원에서 보는 거요? 어떤 차원에서 보는 거요.
쉽게 예를 들면 사람들이 산골짜기에서 이게 크니, 저게 크니, 이게 높니 저게 높니, 이게 맞니 저게 맞니, 아무리 토론해도 끝이 안나. 사실은 이 골짜기 밖에만 나가면 이거보다 훨씬 더 넓은 거 있고, 훨씬 더 큰 게 있고, 훨씬 더 높은 게 있다. 우물 안의 개구리요. 이런 논쟁은 이 마을 밖을 벗어나버리면 논쟁할 필요가 없는 거요. 그래서 “저 높은 산에 올라가봐라. 저 높은 산에 올라가면 넓은 세계가 보인다.” 그럼 이런 논쟁은 그냥 저절로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손가락이 가리키는 그 꼭대기에 올라갔다. 올라가서 보니까 세계가 다 보이고, 정말 우리들의 그 시비분별은 하잘 것 없는 거다.
거기가 세계라고 앉아있다. 여기가 정상이라고. 여기가 부처님이 가르친 곳이라고. 그런데 우리 산에 다녀보면 알지만, 밑에서 볼 때는 정상인데, 거기 올라가보면 더 높은 봉우리가 있을 때가 가끔 있죠. 당연히 밑에서는 이곳이 보였기 때문에 이곳에 왔지만, 그러나 올라가보니까 더 높은 봉우리가 있다면 부처님이 “저 높은 봉우리로 가라”할 때는 자동으로 저 높은 곳으로 가야 되는데, 부처님의 손가락, 이것을 가리켰다. “저 높은 봉우리로 가라.” 그랬다. 이곳이다. 이렇게 그곳에 주저앉는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 1/4밖에 못 본다. 아니면 반밖에 못 본다.
더 높은 봉우리, 뒤편은 보지를 못하죠. 그래서 더 높은 봉우리, 최고봉에 서서, “거기 정상 아니다. 그거 버리고 이리와라.” 이런 얘기요. 그러면 이것은 근본 교설 자체를 비판하는 거요? 근본 교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는 거요?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는 거요. 그러니까 대승교설과 근본교설이 다른 게 아니고, 잘못 이해한다. 그것을 법을 법상으로, 공이라 하면 모양 없는 도리를 그냥 깨치는 게 아니라, 공이라는 모양을 만들어서 이해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미 공이 아니다. 공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사가 해결이 안 된다. 번뇌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알아도.
그러니까 아무리 절에 열에 열심히 다니면서 제법이 공한 도리를 얘기하고,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금강경을 외우고, 매일 천배를 해도, 자식을 미워하고, 남편을 미워하고, 이것을 버리지를 못한다. “내가 어릴 때 성추행을 당했다.” “내가 돈을 빌려줬는데 못 받았다.” 이렇게 해서 괴로워한다. 그러니 제법이 공한 도리를 바로 깨달으면 이런 것이 다 한여름 밤의 꿈같아요. 그것이 마음이 그냥 지은 바다.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다. 그래서 이것은 법을 잘못이해 했다. 법에 모양을 지었다. 그래서 법상이다. 법집이다. 이렇게 부르는 거요. 그러니까 그 법집을 타파하고 법마저도 공하다. 법에 대한 집착마저도 버려라. 이게 부처님의 뗏목에 대한 비유다.
자, 이렇게 해서 이 교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비판하면서 사리자로 대표되는 소승을 바로 대승보살의 세계로, 깨달음의 세계로, 지금 인도를 하고 있다. 이런 형식을 갖추고 있다. 자,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은 다음시간에 다시 하더라도 ‘이 법집을 떠난다. 법집을 벗어난다.’ 참 중요한 겁니다. 내 생각을 고집하는 이것을 아상 또는 아집이라 그러죠. 이것은 진리다 하고 고집하는 것을 법상, 또는 법집이라고 그래요. 여기는 법의 상을 만들기 때문에 짓기 때문에 법집이 생기는 거요. 거기에 집착하는 거요. 내가 집착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고집하고 싶어서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집착을 하게 되는 거요.
자, 그러면 한 예를 들어서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여러분들 열반경에 보면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일체중생은 다 불성이 있다. 더 나아가면 ‘모든 중생은 다 부처다.’ 이 말이오. 왜? ‘부처가 될 씨앗을 가지고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경전을 공부하면서 “아, 그렇구나. 모든 중생에게는 이런 불성이 있구나. 참으로 소중하게 여겨야 되겠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생명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 여러분들은 죽이지 말아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한 수행자가, 우리처럼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어느 날 양지바른데 딱~ 앉아서 명상을 하고 있었어요. 우리 성으로 말하면 참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뭔가 자꾸 따그닥따그닥 소리가 나는 거요. 무슨 소리인가? 궁금한 거요. 옆에서 따그닥 거리면 궁금해요? 안 해요? 궁금하지. 집중도 안 되고. 그런데 딱 화두를 갖고 참구를 하는데, 이렇게 보면 되요? 안 되요? 안 되지. 여러 사람이 대중이 같이 수행할 때는 마음은 보고 싶지만 안보죠. 신경이 쓰이지만 마음을 딴 데 잡고 하는데, 혼자 있다고 생각하자. 아무도 없는데 자기 혼자 있다 그러면 볼까? 안 볼까? 보겠죠. 요렇게 봤더니 강아지 한 마리가 마른 뼈다귀 살점이 한점이 없는 마른 뼈다귀를 가지고 와서는 딱딱딱 깨물고 뱉고, 강아지 그런 거 봤죠? 그것을 물끄러미 봤다. 이거야.
보니까 저거야 말로 천하 쓸데없는 짓이다. 이 말이오. 살점이 있으면 의미가 있지만, 그 마른 뼈다귀를 계속 깨물고 하는 것은 한점 살점이 없지 않습니까? 그죠. 아무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 저 왜 그렇게 쓸데없는 짓을 할까? 그 생각이 딱 드는 순간에 한번 보자. 개가 하는 행동이 강아지가 하는 행동이 쓸데가 없다. 천하 쓸모없는 짓이다. 아무 이득이 없는 짓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것을 부처의 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을까? 할 수 없겠지. 부처가 아무 쓸데없는 짓을 하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안되겠지.
그러면 현실 위에서 말이요. 그렇다면 저 강아지는 부처겠어요? 아니겠어요? 아니겠지. 강아지가 불성이 없다는 게 되잖아. 그죠? 그런데 경전에 있다고 되어있어요? 없다고 되어있어요? 있다고 되어있단 말이오. 그러니까 의심이 딱 든 거요. 그냥 지금까지는 모든 생명체는 다 불성이 있다. 그냥 믿었단 말이오.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오늘 강아지 하는 행동을 가만히 보니까, 저 쓸데없는 짓을 한단 말이오.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은 불성이 없는 거다. 그런데 경전에 있다고 그러니까 의심이 들어요? 안 들어요? 든다. 이 말이오. 이렇게 의심이 들면 “믿음이 부족하다.” 이렇게 말하는데, “어디에 부처님 말씀을 안 믿어.” 그런데 불가에서는 의심이 들면 물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실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의심이 일어나는 거요. 실제 일어나는 것을 보고 의심이 들어야 활구가 됩니다. 살아있는 화두가 되는 거요. 의심이 들어서 물었어요. 스승님께. “스승님” “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것을 조금 더 정나라하게 말하면 “저 쓸데없는 짓을 하는 저 마른뼈다귀를 무는 저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 질문은 내가 볼 때는 없다. 그러나 지금 열반경에는 뭐라고 해 놨다. 있다고 해 놨다. 그래서 질문을 한 거요.
“있습니까?” 이러니까, 스승이 그래. “아무리 작은 미물이라도 불성이 있느니라.” 이렇게 대답을 했으면 어떻게 될까? 아, 저렇게 쓸데없이 하는 것 같지만 내 눈에 그렇게 보이지, 그래. 맞아. 다 불성이 있구나. 이렇게 돌아가면 되겠죠. 그런데 “스승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럴 때는 딴 것은 다 생략이 되었어요. 이런 사유로 의문이 들어서 질문을 한 거요. 그러니까 스승이 딱 하는 소리가, “야, 이놈아, 개한테 무슨 불성이 있노?” 점잖게 말하면 “무” 이랬단 말이오. 없다.
그때 이 말을 듣고 스승의 이 말을 듣는 순간에 눈이 멀어버리고, 귀가 먹어버렸다. 멍해져버렸어. 완전히 하나도 안보이고 깜깜해져 버리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그런 눈 멀고 귀먹은 상태에 빠졌다. 왜 그럴까? 여러분들은 이 말 들어도 그렇게 안 되죠. 여러분들은 진지하게 고민해서 물은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는 이것이 나의 것으로, 나의 인생의 심오한 과제로 안 되어있기 때문에 이것은 남의 얘기에요. 이분은 이게 진지하게 관찰하고 궁금해서 물었기 때문에. 그런데 여기에 대답이 스승이 “없다.” 하면 첫째 나타날 현상이 뭐요? “스님, 열반경에는 있다고 써놨는데요”, 이렇게 말하겠죠. 그러겠지? “열반경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니 저 개에게도 마땅히 불성이 있다고 써 놨다. 그런데 왜 스님은 없다고 합니까?”
자, 이 질문은 이 의문은 진지한 의문, 궁금해서 물은 질문이에요? 스승님 말씀이 틀렸다는 얘기요. 틀렸다는 얘기요. 경전에는 있다고 써 놨다. 그러니 “스님 말씀 틀렸습니다.” 자, 그러면 선에서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서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냥 책보고 공부하는 게 아니에요. 이심전심으로 그렇게 마음과 마음이 교감을 하는 거요. 그런데 스승을 불신하고, 스승을 믿지 않는데 내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지. 그러니까 “스님, 열반경에는 있다고 그러던데요.” 이러면 이미 그것은 틀렸어. 이것은 스승을 불신하는 거요.
두 번째, “하, 스님 그렇습니까? 스님 말씀이 맞습니다.” 이렇게 믿었다. 스님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누가 거짓말 한 게 됩니까? 부처님이 거짓말 하게 된 거요. 부처님이 틀렸다. 이거야. 열반경에는 왜 있다고 잘못기록 했을까? 그러면 불자가 부처님의 말씀을 안 믿고 그것을 부정하고 의심을 하면 깨달을 수 있어요? 없어요? 없어. 그러니까 ‘없다’하는 이 말을 들었을 때, 우리가 나타내는 태도, 우리들의 기본 마음은 부처님을 불신하거나 스승을 불신하거나 둘 중에 하나에요. 그래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세 번째, 나오면서 “아이고, 경에는 써놨고, 스승님께서는 없다고 그러고, 어느 게 맞을까?” 이렇게 혼자서 궁리를 한단 말이오. “어느 게 맞을까? 누구 말이 맞을까?” 이것은 둘 다 부정하는 거요. 둘 다 못 믿는 거요. 제일 하수요. 부처님도 안 믿고 스승도 안 믿고.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90%가 항상 이래요. 둘 다 부정합니다. 여러분들은 늘 “이 스님은 이렇게 말하고 저 스님은 저렇게 말하고, 이 경에는 이렇게 써놨고, 저 경에는 이렇게 써놨고.” 이건 믿음이 부족한 거요. 둘 다 부정 하는 거요. 이경 저경, 이 스님 저 스님 다 못 믿는 거요.
그러면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부처님 말씀도 믿고. 스승님 말씀도 일점, 일획 의심 없이 믿는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 “무!”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눈이 멀고 귀가 먹었다. 왜? 여기 한 생각을 낼 수가 없어. 한 생각 냈다하면 바로 의심이지. 그러면 스승님의 말씀도 맞고 부처님의 말씀도 맞다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무!” 할 때는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무!” 없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이게 무슨 의미인가? ‘무’라는 말이. 그냥 우리는 ‘무’라는 글자로 그대로 해석하면 없다는 뜻이죠. 여기서 ‘무’는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알음알이 아무 소용이 없어져. 그러니까 “무라. 무. 무라.” 이게 목구멍에 생선가시가 배겨서 꿀꺽해도 안 넘어가고, 헥헥 해도 안 뱉어지고, 물을 마셔도 안 빠지고, 밥을 먹어도 안 빠지고, 전화를 받아도 따곰따곰 하고, 얘기를 해도 그렇고, 자도 잠시 놓친 거 같지만 따꼼따꼼하고, 마치 목구멍에 생선가시가 걸려서 무슨 일을 해도 늘 거기에 신경이 가는 것처럼 이 “무”라. 여기에 콱, 목구멍에 가시배기듯이 배겨서,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 일체 다른 알음알이가 다 끊어지고 오직 “무”라. “이 도대체 무슨 소식이냐? 이게. 없다니, 없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냐 이게.” 이렇게 참구해 들어가야 됩니다.
그래서 놓을래야 놓을 수가 없어야 되고, 그래야 되는데 “스님, 화두하나 주세요.” “나는 무자 화두 받았습니다.” 무라 하고 앉아 있다가 내 딴생각하다가, 무라 하다가 밥 먹다가 잊어버리고, 잠자다가 잊어버리고, 얘기하다가 잊어버리고. 그래서 하는 얘기가 뭐요? “스님, 화두가 안 들리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안 들리는데 뭣 때문에 자꾸 들라고 그래요? 놓을래야 놓을수가 없어야 화두다. 내려놓을래야 내려놓을 수가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다시 관념의 세계에 빠진다. 탐구의 세계에 들어가는 게 아니라, 분별의 세계, 어떤 자기 생각 속에 빠지게 된다. 그럼 이게 뭐가 된다? 사구가 된다.
그러니까 이 스님은 그런 진지한 고뇌위에서 스승의 말씀을 듣자마자 그대로 탁 거기에 몰입이 되었다. “어떤 스님이 그래서 깨쳤다” 하니까, 나도 무자 화두 들다 깨친다고 무라 하다가 잊어버리고 무다 하다가 놓쳐버리고. 이게 자기 밥을 먹어야 되는데, 자기 밥상을 챙겨야 되는데, 남이 먹다버린 쓰레기통을 뒤진다. 이책 저책 뒤져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한다. 이것을 사구라 그래. 이것은 죽었어. 살아있는 활구가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삶에 있어서 진지해야 돼.
진지해야 참구가 된다. 연구가 된다.
모방하고 답습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잘못하면 참선을 하면 부처님 말씀을 부정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믿되,
우리는 그 글자에 매이면 안 된다.
진짜 깊은 해석적 의미로 깊은 게 아닙니다.
참구해 들어가야 된다.
실제와 결합해서.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실제와 결합하지 않는다. 그러면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 불성이 있나보다.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아이고 불성이 있구나.” 이것은 그냥 하나의 상에 불과하다. “절에 다니면 좋다.” “부처님 믿으면 복 온다.” “많이 베풀면 좋단다.”
이것은 “하느님 믿으면 천당 간다.” “아미타 부르면 극락 간다.” 이 범위를 못 벗어나는 거다. 이것은 믿음의 분상, 종교의 분상의 얘기요. 이것은 꿈속의 소식이다. 강도에게 쫒기는 사람이 “부처님 나 살려주세요.” “관세음보살님 나 살려 주세요.” “하느님 나 살려주세요.” 해서 살려줬다. 나를 구원해줬다. 너무너무 고마워. 아무리 고마워도 이것은 어디 세계다? 꿈속의 세계다. 눈을 뜨면 강도도 없고, 관세음보살도 없다. 이게 붓다의 가피이며,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가피며,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다.
바로 눈을 떠야 한량없는 가피를 여러분들이 얻게 된다. 바로 내가 부처님과 다름없는 그런 자유, 행복의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천금을 주고도, 어떤 지위를 주고도, 삼천대천세계에 칠보로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비교가 될 수가 없는 거요. 그것은 다 꿈속의 얘기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깨달음의 맛을 봐야 한다. 이게 바로 내가 불자인, 내가 불자일 수밖에 없는 정체성 identity. 그래서 불교라는 이름도 형식마저도 뛰어넘는 세계에 있다.
그런 상에 대한 집착을 떠나서 다시 그런 형식마저도 다 수용하는 뭇중생들의 온갖 복을 구하는, 그 어리석고 애절한 마음도 다 수용하는, 다시 이 세상으로 오게 된다.
생사가 본래 없는 도리에 서지 마라.
그러나 죽었다하면 울고 태어났다하면 웃는,
봄여름가을겨울이 돌고 돌기 때문에
봄이라 한다고 특별하다 할 것도 아니지만,
가을이라 한다고 특별하다 할 것 아니지만,
봄은 봄대로 좋아하며
여름은 여름대로 좋고,
가을은 가을대로 좋고,
겨울은 겨울대로 좋은 이런 세상에 노닐 게 된다.
그러니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하는 말씀은 여기서 뭐하고 같다? “일체는 오온이다.”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을 하나의 상으로 지어서 “이것은 진리다.” 라고 하는 상으로 지어서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내 삶에서 작용은 안 한다. 그러니 그것을 깨뜨리기 위해서 스승이 뭐라고 그랬다? “무”라. 그랬다. 그런데 분별심으로 “없구나.” 이렇게 가면 안 된단 말이오. “틀렸구나.” 이렇게 가면 안 된다. “소승교설은 틀리구나.” 이렇게 가버리면 그럼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는 대립된다. 네가 옳으니 내라 옳으니가 된다. 지금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 여기 우리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할 때 “없다”라고 하는 스승의 말씀을 그 법집을 지적한다. 그때 다시 우리는 이쪽으로 치우치면 안 된다. 그 의미, 그것이 갖는 의미가 뭐냐? “무”라. 이게 무슨 소식이냐? 지금까지 아는 알음알이 그런 것으로는 답이 안 나오는 얘기에요. 그래서 눈 멀고 귀먹었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여기에 바로 이 깨달음의 세계, 공의 차원에서 볼 때, 일체는 오온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이다. 색은 뭐다. 뭐다. 이런 얘기로는 안 되는 얘기에요.
그래서 바로 무색 무수상행식이라고, 그러면 이것에 곁든 의미가 뭐냐? 무슨 소식이냐? 이렇게 들어가야지 “아, 오온설을 틀리구나.” “이것은 수준이 낮은 거구나.” 이렇게 가면 안 된다. 그래야 회통이 된다. 소승과 대승의 선이, 이상과 현실이 번뇌와 보리가 통일되는 둘이 아님을 아는 이런 경지로 우리가 나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 설명을 할 때, 우리가 소승교설을 알고 소승교설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을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법상이 된다. 바로 법상을 짓고, 법집에 빠진 사람에게 앞에 실체가 없음을, “무”라. 함으로 해서 화들짝 깨어나도록 한 거다. 이게 바로 반야바라밀다다. 꿈에서 깨는 소식이다. 꿈속에서 복 받는 얘기 하는 게 아니고, 꿈속에서 구원받는 얘기 하는 게 아니라, 꿈에서 확 깨어나는 소식이다. 여러분, 불법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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