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반야심경

법륜스님 반야심경-제17강 대승의 공사상 입장에서 본 소승교설의 비판

Buddhastudy 2017. 6. 13. 21:27


  

안녕하세요. 오늘은 공사상의 입장, 대승 보살사상, 대승의 공사상 입장에서 소승의 교설을 봤을 때 소승의 가르침에 무엇이 문제인가? 좀 비판적인 입장에서 소승가르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승이 있고, 소승이 따로 있다기 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이해한 소승수행자들에게 대승보살인 관자재보살님께서 그 잘못 이해된 부분에 대해서 비판을 하면서 바로 잡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오온설/

소승의 가르침은 이 세계, 나와 이 세계가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오온설이 있고, 12처설이 있고, 18계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오온설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드리면요, ‘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에 일부분이다. 그렇습니까? .

 

이 무한한 세계 가운데에서

라고 하는 것은

정말 티끌같이 작은 존재입니다.

동시에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내가 인식하는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그려진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계를 각자 달리 그리고 있습니다.

이 세계가 똑같은 거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이 세계에 대해서 달리 그리고 있다.

 

옛날 사람이 알고 있던 세계와

지금 사람이 알고 있는 세계는 다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아는 세계다.

 

이런 얘기에요. 그러기 때문에

각자 자기가 아는 만큼의 세계,

또 자기 식대로 알고 있는 세계,

이것이 각자가 알고 있는 세계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내 속에 있습니다.

나는 이 세계의 일부고,

이 세계는 다시 나의 일부입니다.

정말 묘한 도리요.

 

세계는 한없이 많은 티끌로 구성이 되어있습니다.

티끌이라는 것은 이 세계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 티끌 가운데

이 세계가 또 다 포함이 되어있다.

라고 하는 일미진중함시방.

 

하나의 아주 작은 티끌 가운데에

시방세계가 다 포함이 되어있다.

이 세계는 내 마음 가운데 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일체라고 한 것은

결국은 나와 이 세계를 통털어 일체라고 하는 것은

첫째가 물질세계다.

이 세계는 물질세계로 구성이 되어있죠.

또한 그 물질로 이루어져있는 나의 육신이다.

이것을 //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색이다.

 

그러나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곧 내가 알고 있는 세계,

내 마음 가운데 그려진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이러한 물질과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니면 물질을 대표해서 이 육신이라면

육신과 마음으로 구성이 되어있다.

 

그래서 이 물질세계 또는 육신을 색이라 하고,

그러면 정신세계, 이 세계를 그리고 있는,

이 세계를 담고 있는 그 정신세계,

그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4가지로 나눕니다.

 

_감수작용

우리가 이 세계를 그릴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세계를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있습니다.

 

첫째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런 것으로 해서 나에게 받아들인다. 이 말이오. 이것이 오감이죠. 다섯 가지 감각기관. 여기에다가 하나 플러스해서 머리로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받아들이는 작용, 외부의 정보를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작용, 이게 //입니다. . 감수작용.

 

2. _생각, 표상작용

그 다음에 이것을 받아들여서 그 정보를 저장을 한다. 저장. 그러니까 통과해버리는 게 아니라 들어오면 여기 쌓이게 된다. 저장을 하고 저장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시 기억해 낸다. 저장했던 것을 도로 꺼내 쓴다. 기억해 낸다. 그 기억해 내는 것,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생각을 하는 거요. 이것이 //이다.

 

3. _의지작용

바깥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저장해서 다시 이것이 바깥으로 나간다. 정보를 생산하는 작용을 합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작용에서는 의지작용이에요. 무엇을 해야지 하는 의지작용. 뭘 하고 싶고, 어떤 충동에 의해서 하고 싶은 것도 있고, 또 상당히 지혜롭게 행하는 것도 있고, 이렇게 의지 작용이 있다. 중생의 의지작용은 대부분 충동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하고 싶은 것, 하기 싫은 것, 이런 것에 따라서 행하죠. 이게 //이에요. .

 

4. _요별작용

그 다음에 이러한 결과로 소위

정보를 담는 그릇인 동시에

정보가 분별되어있는 하나의 그릇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이것을 //이라 그래. 그러니까 이 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컴퓨터로 말하면 프로그램 같은 거요. 정신작용에 있어서의 가장 토대입니다. 토대. 이 프로그램이 어떠냐에 따라서 똑같은 정보가 들어와도 똑같은 기억을 해도 달라집니다. 그래서 외부로부터 정보가 들어오는 것도 감수작용이지만, 이 기존에 깔려있는 식, 업식이라고 그러죠. 이 프로그램과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반응을 하면서 쾌 불쾌가 일어납니다. 몸에도 감각이 일어나고 마음에도 필링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라고 말해요.

 

수는 바깥에서 정보가 들어오는 것도 되지만, 그러나 이 기본토대, 업식이 없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정보가 들어오면 똑같이 반응을 해야 되는데, 반응이 다 달라집니다. 그것은 각자 자기 업식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 토대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미 형성되어진 토대가 있다. 이미 형성되어진 토대가 있다 하더라도 외부에 정보가 자꾸 달리 들어가면 반응이 달라집니다. 토대가 없다면 외부에 동일한 정보가 들어오면 동일하게 반응할 거고,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달리 반응하죠. 그러나 토대가 있다. 토대가 있다 하더라도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달라지면 반응을 달리하겠죠.

 

그래서 우리가 동일한 곳에 가서, 동일한 것을 보고, 동일한 것을 듣고, 동일한 것을 냄새 맡고, 동일한 것을 맛보고 동일 한 것을 감촉해도 그 사람의 느낌이 다릅니다. 왜 느낌이 다를까? 이미 그에게 형성되어 있는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여러분이 동일한 업식이 갖고 있는데, 여러분이 이곳을 갔을 때와 저곳을 갔을 때와 느낌이 다르죠. 그것은 왜 그럴까? 밖에서 들어오는 정보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바깥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 이것도 수고, 그에 반응하는 느낌, 몸에는 감각이고, 마음에는 필링, 이것도 수다. 또 이 업식이, 이 기본 토대인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정보가 들어와서 일으키는 생각도 다르다. 또 그 느낌에 반응하는 맹목적인 충동인 이 행도 달라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밖에서 어떤 정보가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안에 있는, 거기에 반응하는 기본 토대, “업식이 어떠냐?”도 중요하다. 그래서 이 색하고 다음에 뭐가 와야 된다? 식이 와야 되겠죠. ----. 이렇게 순서를 매길 수도 있다.

 

그러나 왜 색----식이라고 했냐하면 이렇게 반응을 하고, 생각을 하고,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행동을 한, 그렇게 생산되어진 것이 또 저축되는 것이 어디다? 식이에요. 그래서 이 업식이 조금 바뀌게 되는 거요. 그 과보가, 그러니까 그 행위의 결과물로 다시 쌓여서 그 프로그램이 조금 변화가 된다. 다시 말하면 프로그램이 조금 업그레이드된다.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색----식 이라고 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일체는 오온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오온 밖에서 따로 진리를 찾아서는 안 되고,

라고 하는 것도 바로 오온이기 때문에,

라고 하는 어떤 독립된 실체,

그런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이렇게 구성이 되어 있고, 이것이 계속 변한다. 바깥경계도 변하고, 쉽게 얘기하면 우리 몸도 변하고, 우주도 변하고, 우주는 성주괴공 한다. 이 육신은 생로병사 한다. 우리의 마음은 이 느낌도, 시시때때로 변하죠. 일어나고 머무르고 사라지고. 그리고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의지도 항상 일어나고 머무르고 사라지는 생멸을 거듭한다.

 

그러면 이것의 토대인 마음작용의 토대인 식은 어떤가? 이것도 사실은 형성되어지고, 현재 이렇게 머물러 작용하고 있고, 또 업식은 앞으로 바뀌어 나간다. 그러니까 담배를 피우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업식이 있는 사람은 바깥에 담배가 있고,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그러면 아주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그러면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그러면 피우게 되고, 그러면 다시 그 결과물로 담배습관이 더욱더 형성이 되고. 그러면 이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는 이 기본은 담배를 피운 습관이 내면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반응을 일으킨 거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불변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사라질 수도 있다. 소멸시킬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식이라는 것도 항상 한 것이 아니다. 원래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셨어요.

 

불법에서 말하는 열반, 지고한 행복이라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러분들이 말하는 이런 행복과 다른 거예요.

 

우리는 욕구가 있어서 바라는 바가 있어서 그것이 이루어지면 그것이 굉장히 좋죠. 그 기분이 좋은 게 뭐요? 행복이요. 그런데 바라는 바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는 기분이 딱 가라앉고 나쁘다. 이게 불행이란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이 불행은 싫고, 행복은 원하는 거요. 이 불쾌는 버리고 쾌만 얻으려고 한단 말이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이 들뜹니다. 기분이 좋을 때는 마음이 들뜬다. 팔짝팔짝 뛰잖아. 너무 좋으면 그죠? 만세를 부르고.

 

그런데 바라는 바에 근거해서 이루어지고 이루어지지 않고 하는 게 아니고, 이 바라는 바, 자체가 사라져버렸을 때, 바라는 바에 내가 전혀 내 마음이 구애를 받지 않을 때, 그때는 쾌도 없고 불쾌도 없고, 행도 없고 불행도 없는 세계, 그런 내 욕구에도 구애받지 않고 경계에도 구애받지 않는 상태. 그러니까 그때는 마음이 들떠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고요하다. 마음이 평정된 상태에 있다. 그래서 적정이라 그런다. 고요하다. 열반적정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게 지고한 행복에 속하는 거요. 이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지 않는 행복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이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는 행복이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행복을 열반을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행복과 동일하게 이해한다. 동일하게. 그러니까 우리가 복을 구하잖아요. 불교를 통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그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 버림으로 해서 욕구의 속박에서 벗어나버림으로 해서 지고한 행복인 열반에 들어야 되는데, 그 욕구가 충족이 되어서 얻는 그 기쁨과 혼돈하기 때문에 부처님, 내 바라는 대로 좀 해주세요.” 그게 이루어지는 게 극락이라고 잘못 이해한다.

 

그러니까 이게 기복화 되는 거요. 그러니까 기복적인 게 좋다 나쁘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불법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이루어졌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이 세상에 사는 중생은 자기가 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래요.

이렇게 말하는 스님도 바래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은 다 드는 거요.

이것은 중생의 세계.

이것은 늘 고와 락이, 행과 불행이

그러기 때문에 되풀이 된다. 윤회의 세계다.

 

그럼 여기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은 바로 자신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되고,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경계로부터도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거기에 마음이 구애받지 않게 된다.

 

그래서 행도 불행도 동시에 사라져 버린다.

쾌와 불쾌가 함께 사라진다.

그것이 열반이라고 하는 거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행과 불행이 되풀이 되는 윤회로부터 벗어나버린다.

이 행복은 불행으로 바뀌는 그런 행복이 아니다.

 

이것이 열반인데, 열반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를 우리식대로 이해한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런 방식으로 해석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의 어떤 사고의 근저, 사물을 보는 세계관, 어떤 철학, 여기에는 언제나 우리는 변하지 않는 그 어떤 것, 그리고 그것만의 그것이라고 하는 그 어떤 요소, 이것을 기초로 두고 이 세상을 이해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러한 자신의 업식, 자신의 세계를 보는 그런 눈을 버리고, 깨달음의 세계로 들어와야 되는데, 그 안경을 끼고 불법을 본다. 이 말이오. 그렇게 해서 이렇게 요소설에 빠졌다. 그래서 이것은 잘못되었다. 그래서 첫 번째 오온설에 대해서 앞에 무자를 붙여서 그 법에도 실체가 없음을 다시 깨우치고 있다.

 

/12처설/

두 번째 소승교설의 중요한 것 하나가 12처설 입니다. 일체라고 하는, 이 세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내가 아는 세계에요. 그러면 내가 아는 세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 이것은 눈이 있고, 바깥에 모양과 빛이 있어서, 눈과 빛이 만나서, 봄으로 해서 아는 거다. 귀가 있고 소리가 있어서 들어서 아는 거다. 코가 있고 냄새가 있어서 냄새 맡고 아는 거다. 혀가 있고 맛이 있어서 맛보고 아는 거다. 몸이 있고 감촉이 있어서 아는 거다. 뇌가 있고 또는 머리가 있고, 뜻이 있어서 알음알이를 해서 아는 거다.

 

그래서 이 바깥 세계를, 사실은 내 몸에 있는 6가지 감각기관이 중요하죠. 이것을 근본이다. 뿌리다. 그래서 이것을 육근이다 그래요. 6가지 감각기관이 뭐요? -----. 6가지요. 그러면 여기에 대응되는 인식의 대상, 객관세계죠. 이게 뭐요? 이것을 육경이라고 그래. 육경. 6가지 경계다. 6경이 색, 이때 색은 물질이다. 또는 몸이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이대 색은 빛이에요. 모양과 빛. 그러니까 색-----법이라고 그래요. 6가지 경계, 6경과 6가지 인식기관 6근이 만나서 결국은 우리들의 앎이, 우리가 아는 세계가 형성되어진 거다. 이 세계라는 것은 별거 아니다. 이렇게 형성되어진 거다.

 

여러분들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냄새 맡지도 못하고, 맛보지도 못하고, 감촉도 못하고, 생각도 못하면 그런 세계는 있어요? 없어요? 없어. 여러분들이 뭐라고 뭐라고 해도 다 그것을 눈을 봤거나, 귀로 들었거나, 코로 냄새 맡았거나, 혀로 맛봤거나, 손이나 몸으로 감촉이 되었거나, 아니면 머리로 생각을 했거나. 그밖에 따로 세계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일체라고 하는 것은 이 12가지다. 그래서 이것을 12처다.

 

그런데 이 두설, 오온설과 12처설, 이게 핵심인데, 이 오온설은 주로 마음작용, 정신에 주로 더 비중이 높여져 있습니다. 그런데 12처설은 일종의 유물론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12처설 대로 하면, ‘라고 하는 것은 별거 아니에요. 내가 아는 세계라는 것은 뭐요? 바깥 세계가 눈으로 들어오고, 귀로 들어오고, 코로 들어오고, 혀로 들어오고, 몸으로 감촉되고, 머리로 알음알이 한 그거에요. 요것만 갖고 설명을 하면 우리가 동일한 환경에 가면 우리들은 동일한 세계가 형성된다. 이렇게 얘기해야 되겠죠.

 

그러니까 동일한 환경에서 사람을 키우게 되면, 동일한 인격이 형성된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낳자마자 이 말이오. ? 본 게 똑같고, 들은 게 똑같고, 냄새 맡은 게 똑같고, 맛본 게 똑같고, 감촉한 게 똑같고 그러니까. 어이 보면 이것은 유물론적 변증법하고 비슷하죠. 우리의 의식은 형성되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의식을 아무리 바꾸려고 노력해도, 바깥세계가 바꾸어지지 않으면 늘 거기에 영향 받기 때문에 안 된다. 그러니까

 

이 세계가 사회가 바뀌면

인간의 의식은 따라 바뀐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적인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력보다는 사회를 정의롭게 바꾸어버리면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다 올바른 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사회혁명을, 사회를 바르게 하는데 집중을 하는 거요.

 

그에 비해서 종교인들은 세상이 어떻든 간에 네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 그러니까 세상문제를 갖고 얘기하지 마라. “네가 어떻게 할 거냐?” 그러니까 너만 잘하면 너는 구원을 받는다. 그러니까 종교는 주로 개인문제를 중요시 다루죠. 여기에 대해서 반대로 사회주의는 사회문제를 주로 중요시 하고.

 

그러니까 이 둘이 앙숙으로 싸웠죠. 한쪽에서는 유신론 무신론으로, 기독교 쪽에서는 사회주의를, 우리는 유신론이고 너희는 무신론이다. 이렇게 말하고. 사회주의 쪽에서는 자기들은 유물론이고 이쪽 종교는 관념론이다. 이렇게 해서 갈등을 일으켰다.

 

그러니까 불법은 그렇게 둘로 나누지 않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서 형성되어진다. 이런 요인도 있다. 반대로 자기 업식이 어떠냐에 따라서 똑같은 환경에서도 달리 반응을 한다. 이런 요소도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다 있다.

 

그래서 원리를 설명할 때도 인연과보라고 그러죠. _직접적 원인, _간접적 원인, 조건. 그러니까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라, 원인이 작동하는 주위 환경이 어떠냐? 여기에 영향을 받는다. 내가 성냥불을 그어서 버렸다. 이게 화재의 직접적 원인이죠. 이것만 갖고 되는 게 아니에요. 그때 주위에 인화물질이 있었느냐? 주위가 시멘트 바닥이냐에 따라서 내가 원인을 제공해도 그 조건이 달라지면 결과가 달라진다.

 

또 똑같은 조건이 원인이 달라지면 결과도 달라진다. 똑같은 인화물질이 있는 그런 환경이었지만, 성냥불을 버리지 않으면 불이 일어나지 않는 거고, 성냥불을 버리게 되면 불이 일어난다. 한가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존재도

나로부터 세계에 영향을 주는 게 있고,

세계가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게 있다.

이 양자가 동시에 작용한다.

 

그런데 이 세상의 철학은 그 중에 한 개를 가지고 자꾸 논한다. 그래서 인간성에 대해서도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 “아니야, 악하다.” 이렇게 대립을 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인간의 불성은 선한 요소도 있고 악한 요소다 있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불교를 조금 덜 이해한 거고, 둘을 동시에 다 본다는 것은 맞는데,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본질에는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따로 없다.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선하다고 말하고 악하다고 말한다. 선과 악은 우리들의 의식에서 형성되어 진 것이다.” 이렇게 사물을 꿰뚫어 보는 거란 말이오.

 

*

그러니까 12처설은

환경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세계가 우리의 의식에 영향을 주는 측면을 설명한 거예요.

 

*

반대로 오온설은

이 식이 느낌과 생각과 의지에 영향을 준단 말이오.

그러니까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달리 반응이 일어나는 거요.

그러니까 주로 우리들의 내면의 세계,

여기에 주로 더 초점이 맞추어져서 이것을 설명했다.

 

*

그래서 이 둘을 보완해서,

사실은 이것도 그대로 설명이고

이것도 그대로 다 맞는 얘기요.

그러나 이것을 보완해서 다시 설명한 게 18계설이오.

 

18계설은 첫째 근본은 우리의 감각기관, 인식기관입니다.

6가지 인식기관인 육근이 있고,

그에 대응해서 6가지 경계인 육경이 있다. 인식대상이 있다.

그러면 이 두 가지만 갖고 설명되는 게 아니고

이미 우리에게는 형성되어진 뭐가 있다? 업식이 있다.

 

그래서 이 12처설만 갖고 설명하면 동일한 환경에서

, 동일한 것을 보면 동일하게 느껴야 되는데 안 그렇잖아.

왜 그러냐? 보는 놈이 있다.

 

그 보는 놈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고 보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것을 봐도 다르다.

이미 각자에게 형성되어진 업식이 있다.

 

그러니까 보는데 작용하면 안식이라 그러고, 듣는데 작용하면 이식이라 그러고, 이렇게 6가지 식을 갖고, 이렇게 18가지로 이것을 설명을 하면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할 수가 있다. 그게 뭐라고? 18계설이다.

 

*

그래서 식에는 보는 식_안식, 듣는 식_이식, 냄새 맡는 비식, 맛보는 설식, 감촉하는 신식, 생각하는 의식. 그래서 이 다섯 가지는 주로 몸뚱이에서 바로 작용하기 때문에 이것을 전오식이라 이렇게 말해요. 오식이라 그래요.

 

그런데 제6번째 식, 6번째 식인 의식, 이 의식이 우리가 말하는 의식이 있다. 의식이 없다.” 이것을 말합니다. 의식. 그래서 6가지 식이다. 식에는 6가지가 있다. 이게 6식이라 그래요. 6가지라 할 때 6식이다. 이 말이오. 그런데 제6, 앞에 자가 붙으면 6번째 식이다. 이런 얘기요. 6번째 식이다 할 때는 그것은 의식을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의식=6.

6번째 식이다.

 

그런데 식에는 이렇게 의식만 있느냐? 6가지 식만 있느냐? 아니다. 식에는 7번째 식, 8번째 식이 있다. 그러니까 이 6번째까지 이 식을 표면의식, 드러난 의식이라고 하고, 보이지 않는 잠재된 식이 있다. 거기에 제7식이 있고, 8식이 있다. 7식을 말라식. 8식을 아뢰야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작용하는, 이렇게 듣고 보고 하는 이런 6가지 식 말고, 7번째 8번째 숨겨진 식,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이 있는데, 그것도 잠재의식 무의식이라고만 말하지 않고, 7식과 8식으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이 잠재의식이 있다. 이것을 서양철학에서는 18세기 들어와서 알은 거죠. 프로이드가 꿈의 해몽이다.’ 이렇게 얘기했지 않습니까. 19세기에 와서 잠재의식, 무의식의 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은 의식 밖에 따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의식의 영향을 주는 보이지 않는 어떤 마음의 작용, 이것을 뭐라고 그랬다? 신의 시로다. 신의 소리라고 그랬단 말이오.

 

그런데 이런 서양에서 진행되어 온 과정을 보면, 부처님께서는 이미 우주는 성주괴공하고, “뭐 내가 운행한다.” 이런 말 하신 적이 없죠. “우주를 누가 만들었다.” 이런 얘기 한 적도 없으시단 말이오. “우주는 이러한 법칙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 다음에 생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생로병사는 이런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결국은 정신작용이죠.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이 마음작용이라는 것은 형성되어진 거요.

 

까르마라 그래서 전생으로부터 와서 너는 요렇게 살아라.” 하고 정해지면 그렇게 살아야 된다는 거요. 지금까지 신의 뜻에 의해서 살아야 되는데, 태어날 때 사주팔자에 의해서 살아야 되는 것, 전생에 네가 한 행동에 의해서 벌 받듯이 살아야 되는 것, 이게 다 숙명론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업이라고 하는 것은 형성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소멸되어진다. 쉽게 얘기하면 팔자를 바꿀 수 있다는 거요? 없다는 거요? 있다는 거요.

 

나의 운명을 내가 바꿀 수가 있다.

내가 이렇게 괴로운 것은 어쩔 수 없이 괴로우라고

누가 정해줘서 괴로운 게 아니다.

내가 마음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다.

그러니까 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지금 이렇게 보듯이 또 오온설, 12처설, 18계설, 다 마찬가지오.

 

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하는 원리를 앎으로 해서

우리는 여기서부터 이 고통에서부터 벗어날 수가 있는 거요.

 

이런 것들을 우리가 수행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 전단계입니다. 이거 자체는 수행법은 아니에요. 이런 것들을 이해해야, 여기 기초해서 이제 우리가 수행을 해나가는데 있어서에 소위 사성제 수행법 같은 것, 팔정도 수행법 같은 것은 이런 세계, 이런 인간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해서 나아가게 된다.

 

여기에서 핵심은 이러한 것들을 잘못 이해해서 마치 12처설을 12요소설처럼 이해했다. 이 말이에요. 이 세계는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하는 12개의 요소로 구성이 되어있고, 그것에 관계로 이 세계는 이루어진다. 이렇게 이해할 때 각각을 불변의 요소로 이해해 버리면 어떻게 된다? 요소설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불법이 아니다. 그래서 앞에 뭐가 붙었다? ‘자가 붙은 거요. 무안이비설신의, 여기도 앞에 뭐가 붙었어요? ‘공중이라고 붙었습니다. 공중, 공의 세계에서, 본질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볼 때는 이라 할 것도, ‘라 할 것도, 그런 근본실체는 없다.

 

그러니까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 12처설을 잘못 이해한 것에 대한 비판이라면, 무안계내지 무의식계는 18계설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러면

 

18계란 뭐요?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

거기에 하나의 세계를 설명하기 때문에 자가 붙었단 말이오.

 

그러면 안계-이계-비계 이렇게 되잖아. 그죠? 그러니까 다 가 붙었으니까, 첫 번째 안이비설신의의 첫 번째 안계하고, 그 다음에 색성향미촉법은 다 생략이 되고 그 다음에 안식부터 의식까지 다 생략이 되고 맨 끝이 의식 아닙니까? 의식에 가 붙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무안계 내지/ 내지 하는데 16개가 생략이 된 거요. 그리고 무의식계. 그러니까 안계로부터, 안계에도 실체가 없고, 그리고 다 생략하고 마지막에 의식계에도 실체가 없다.

 

이렇게 해서 오온-12-18계에 대한 아견과 상견의 관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한 부분을 바로 대승보살의 입장, 깨달음의 입장에서 다시 교정을 했다. 그래서 앞에 가 붙었어요.

 

그러니까 소승교설이 잘못되었다가 아니라,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을 일부 수행자들이 잘못 이해했다. 그 잘못 이해한 사람을 뭐라고 이름 붙였다? 소승이다. 이렇게 이름 붙였단 말이오. 잘못이해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된다. 그런 관점에서 비판하고 있다. 여기까지 오늘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