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반야심경 18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지난번에는 오온, 12처, 18계설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구요, 오늘은 12연기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2연기/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살아가는데 작용을 하는데 잘 분석을 해보면 12가지 연결고리로 되어있다. 그래서 연기법은 ‘꼭 12연기다.’ 12개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10연기설이 있을 수도 있고 8 연기설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각자에게 ‘이것은 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하기 싫습니다.’ 이런 욕구가 일어나죠. 여러분들 지금 일어나요? 안 일어나요? 일어나죠. 그럼 이 욕구,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했으면 좋겠다.’ 하는 이 욕구가 뭐냐? /애/에요. 애. 애라 그래. 애. 이 애는 하고 싶은 것만 애가 아니에요. ‘하고 싶은 것’ 이것은 욕망이라고 그러죠. ‘하기 싫다.’ ‘나는 싫다.’ 이것을 한문으로 뭐라고 그래요? 혐오라고 그래요. 혐오. 혐오스럽다. 이런 말 하시죠?
그러면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즉 갈애, 욕망뿐만 아니라 혐오도 다 어디에 들어갑니까? 애에 들어갑니다. ‘하고 싶다.’ ‘하기 싫다’를 포함하는 거요. ‘하고 싶은 것’만 들어가고 ‘하기 싫은 것’은 안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이것은 동일한 거요. 애라. 여기서부터 제가 설명을 할게요.
하고 싶으면 여러분들 어떻게 합니까? 하죠. 즉, 그것을 말로 하거나 행동으로 한단 말이오. 하고 싶은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요. 그런데 그것을 행하는 것은 말이나 행동으로 행해버린다. ‘담배가 피우고 싶다.’ 애에요. 그럼 피워요. 그럼 이것을 뭐라고 하냐? /취/라고 그래요. 취. 용어. 아시겠어요? 취. 애-취. 하고 싶은 것을 행한다.
그럼 하고 싶은 것을 행해버리면, 말이나 행동으로 행해버린다. 이 행한다는 것은 말과 행동에 다 포함이 됩니다. 행해 버리게 되면 그 결과물이 남습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피워버리면 그것을 끝나는 게 아니라 결과물이 남는다. 그 결과물을 뭐라 한다? /유/라 그래요. 유.
이 결과물이 남아 있으면 이것은 다음 행위 동작에 출발점이 된다. 씨앗이 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식물이 자라서 꽃이 피면 반드시 뭘 맺습니까? 열매를 맺게 되죠. 그러면 그 열매는 다음에 그 식물에 싹이 트는 뭐가 된다? 씨앗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 /유/라고 하는 것은 그 앞의 단계에서 볼 때는 결과물이니까 열매에 속하고, 그 다음단계에서 볼 때는 이것은 출발점에 속하죠. 이렇게 볼 때 이것은 씨앗이 되는 거요.
그러니까 결과물의 관점에서 볼 때는 단어를 부르기를 뭐라고 부른다? 열매라고 부르고, 시작의 관점에서 볼 때는 씨앗이라고 부르는데,
씨앗이라 불리나
열매라고 불리나
그 존재 자체는 동일합니다.
동일한 존재를
결과물로 볼 때는 열매라고 그러고,
출발점으로 볼 때는 씨앗이라고 부른다.
이런 씨앗이 있으면 즉, 이 유는 열매인 동시에 뭐가 된다? 씨앗이, 이쪽에서 보면 유, 열매고, 저쪽에서 보면 씨앗이오. 씨앗이라고 볼 때는 사실은 나중에 용어가 바뀝니다. ‘식’이 됩니다. 이 씨앗이 있으니까 이 열매로서 맺어진 것이 씨앗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것은 다시 싹이 틀 수 밖에 없다. 새로운 동작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즉, 이런 게 있으면 동작을 불러일으키는 앞에 뭐가 일어나요? 욕구가 먼저 일어나겠죠. 욕구가 이러나고 또 새로운 동작이 행해진다. 그러니까 이것을 새로운 것의 시작을 식물로 말하면 싹이 텄다. 이것을 /생/이라 그래요. 태어났다. 일어난다.
일어나면 결국은 또 일정하게 머무르다가 결국은 뭐하겠어요? 또 끝이 나겠죠. 그것을 뭐라고 한다? ‘사’라고 그래요. 그럼 그 과정에서 ‘생’이 있으니까 노병사가 있겠죠. 그러니까 이것을 끝을 ‘사’라 그래. 그래서 /노사/ 이렇게 말해요. 늙고 죽는다. 그럼 이것이 되풀이 된다. 이 말이오. 미래에 계속.
그러면 이 출발점이 현재와 미래로 볼 때는 현재의 출발점이 뭐가 되고? 애가 됩니다. 욕구가 일어나고, 욕구를 따라 행하게 되고, 그러게 되면 결과물이 남고, 즉, 습관으로 남는다. 이 습관이 또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또 행동을 하게 되고, 또 결과물이 남고, 그 결과물은 또 새로운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이렇게 해서 미래에 되풀이 된다. 미래에 수없이 되풀이 되는 것을 미래를 딱 줄여서 노사. 생-노사. 딱 두 개로 말했어요. 생-노사.
그래서 요것만 갖고 설명하면 애-취-유-생-노사. 그러니까 애-취-유. 애가 뭐요? 현재의 원인을 제공하죠. 원인을 제공하면 열매가 맺었다가 다음에 결과물로 나타난 게 생-노사에요. 미래에 이것이 과보로서 나타나는 거다. 만약에 지금 ‘애’가 없다면 여기서 꽃이 피었는데, 이것이 만약에 행위를 하지 않으면 뭐가 된다? 열매를 맺지 않겠죠. 열매를 맺지 않지만 씨앗이 없으면 생-노사가 되풀이 될 수가 없는 거요. 그러니까
제일 중요한 게 ‘애’에요. 애.
하고 싶더라도
나쁜 결과가 올 것 같으면
안해야 된다.
하기 싫더라도
좋은 결과가 예측이 되면
어떻게 된다? 해야 된다.
그러니까 자동으로는 하고 싶으면 뭐하고? 하고, 하기 싫으면 안하고. 이게 제일 쉬운 길인데, 하고 싶은 거 했는데 결과가 나빠지고, 하기 싫어 안했는데 손해다. 그러면 이 지혜로운 자는 뭐다? 하고 싶더라도 참고 안해야 돼. 하기 싫더라도 해야 돼. 그러니까
하고 싶고
안 하고 싶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마땅히 할 바인지,
마땅히 안할 바인지가 중요해요.
그럼 지혜가 있어야 이런 판단을 하죠.
이 지혜는 성인으로부터 우리가 배우는 거요.
즉, 앞선 경험자들에 의해서 우리가 이것을 배우잖아요. 어린아이가 뜨거운 볼을 쥐고 싶잖아. 예쁘다고 쥐려니까 경험자가 “쥐지 마라.” 이런 단 말이오. “쥐고 싶지만 쥐지 마라.” 이렇게 말한다.
지나가다가 어떤 여자가 너무너무 예쁘다. 어떤 남자가 먼저 너무너무 멋있다. 그러니까 가서 안고 뽀뽀를 해버린다. 하고 싶다. 한다. 그러면 과보가 어떻게 되요? 굉장하죠. 그런데 옛날에는 하고 싶다고 한사람이 있었는데, 이거 처벌을 해도 야단치는 정도가 되니까, 이 하고 싶은 것이 야단치는 정도의 과보를 능히 이겨내고 각오하고 한단 말이오. 그래서 이 처벌이 자꾸자꾸 커져서 지금은 굉장하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제는 누구나 다 “어이구, 저거 하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라는 것을 아니까, 자제를 하게 된다. 참는단 말이오.
그러니까 술이 먹고 싶다고 먹고, 전에는 운전 다 했지 않습니까? 그죠? 그런데 그저 경고정도 주니까 안 고쳐지죠. 그다음에 벌금 정도 물어도 안 고쳐지죠. 요즘은 운전면허증 뺏어버리고, 벌점 아주 많이 줘버리고, 이렇게 되니까, 먹고 싶더라도 참고 안 먹잖아요. 또 먹었으면 운전을 안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지혜가 생겼다.
하고 싶다고 다 할 수가 없는 거요.
하고 싶다고 해서 결과가 반드시 좋다는 보장은 없다.
하기 싫다고 안한다고 해서 결과가 좋은 게 아니에요.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싫더라도 회사에 가는 사람, 학교 가는 학생은 일어나야 되요? 안 일어나야 되요? 일어나야 되요. 안 일어나면 손해가 많으니까. 일어나기 싫더라도 일어나야 돼. 이것을 나에게 이익이 되도록,
이익이 되면
싫어도 해야 되고,
또 하고 싶더라도 손해가 예측이 되면
안해야 되요.
이것은 나를 위해서 에요.
남을 위해서 가 아니고.
첫째 나를 위해서.
남을 위해서도 안 해야 되고
나를 위해서도 안 해야 되고.
이것이 ‘계율’이라고 그래.
여러분들은 계율을 자꾸 속박처럼 생각해.
“왜 하기 싫은데 하라고 그럽니까?”
“왜 하고 싶은데 못하게 합니까?”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거 아니에요.
그것은 억압하고 독재하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손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이익을 증장시키기 위해서.
그런데 하고 싶은데 안 한다. 즉 담배가 피우고 싶은데 피우면 건강에 나빠지니까 안 피운다. 또 입에 쓴 약이지만 먹기 싫어도 먹어야 된다. 이렇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과로 나중에 나한테 좋다는 것은 안다. 이 말이오. 그래도 참는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에요? 괴롭지 않은 일이에요? 괴롭고 힘든 일이에요. 그러니까 이것만으로 완전한 해탈, 열반의 경지, 이렇게는 말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하면 참 슬기로운 사람이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내가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들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또 의지가 약한 사람은 이것을 잘 못해요. 그러나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왜 이 하고 싶고, 하기 싫고 하는 이 갈애가 일어날까? 이것을 연구해야 돼. 갈애가 왜 일어나느냐? 이것을 잘 분석해보면, 내가 어떤 사물을 본단 말이오. 보는 순간에 마음이 이게 내가 의식을 해서 일으키는 게 아니고,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딱 보면 기분이 좋은 게 있어. 그래? 안 그래? 어떤 것은 딱 보면 거부반응이 딱 오는 것이 있단 말이오. 이것은 하고 싶다, 하기 싫다 와는 좀 다른, 그것보다 훨씬 이전에 무의식적으로 자동으로 일어나는 케이스요. 그런데 잠깐 일어났다 사라져요.
그러니까 처음 보는 사람도 어떤 사람도 보자마자 호의적인 사람이 있고, 보자마자 싫은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상대가 부자라니까 이익을 생각해서 가는 것, 이것하고는 다릅니다. 이것은 거의 자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이에요. 이것을 우리가 여러분들이 뭐라고 그래요? 필링이 좋다. 이러죠. 느낌이 좋아. 탁 느낌이 그냥, 느낌이 쾌, 싹 기분이 좋고, 불쾌_뭔가 모르겠지만 불쾌하다. 아니면 덤덤하다. 이 덤덤하다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쾌가 반응이 강하면 쾌로 느끼고, 불쾌가 반응이 강하면 불쾌를 느끼는데, 쾌인지 불쾌인지 반응이 아무튼 약하면 내가 잘 못 느끼죠. 쾌인지 불쾌인지. 쾌가 약하나 불쾌가 약하나, 약하면 잘 못 느낀단 말이오. 그럼 대충 그 가운데 있는 것을 덤덤이라고 한번 이름을 붙여놔 보자. 쾌도 아니고 불쾌도 아니고, 3개에요. 하나는 쾌, 불쾌, 쾌도 아니고 불쾌도 아닌.
사실 쾌도 아니고 불쾌도 아니라는 것은 없습니다. 수직선에서 제로라는 것은 잠깐 한 점에 불과하죠. 그러니까 플러스 이상은 쾌, 마이너스 이하는 불쾌, 마이너스2 에서 플러스2 까지는 내가 잘 못 느끼니까 쾌도 아니고 불쾌도 아니다. 이렇게 대강 정해놓자. 그랬을 때, ‘하고 싶다.’ 하는 마음은 쾌에서 일어날까? 불쾌에서 일어날까? 쾌에서 일어나. 쾌는 순간적으로 싹 일어나고는 바로 그게 뭐로 바뀌냐? 마음으로 탁 바뀌어서 ‘보고 싶다.’ ‘갖고 싶다.’ ‘만나고 싶다.’ 하고 갈애로 딱 변해버려요. 불쾌가 일어나면 싫다 쪽으로 금방 딱 반응이 가버려요.
자, 쾌로부터 작용한 게 뭐다? 갈애에요. 또는 욕망, 또는 집착, 이렇게 가고, 불쾌로부터 반응한 게 혐오, 이렇게 가고. 그러니까
하고 싶다, 하기 싫다.
호불호의 좋고 싫고의 앞에
쾌, 불쾌가 있다.
이것을 느낌이라 그래.
몸에서 딱 거부반응을
무의식적으로 일으키면 이것은 뭐라 한다? 감각,
마음에서 일어나면 뭐라고? 느낌.
다 같은 거요.
감각과 느낌을 뭐라고 하냐? /수/라고 그래. 수. 그러니까 수는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아시겠어요? 수의 맹목적으로 딱 충동적으로 반응을 해서 일어난 게 뭐다? /애/에요. 그런데
우리는 이 ‘수’와 ‘애’를 구분을 못합니다.
왜? 그것이 순식간에 이전되기 때문에.
굳이 분리를 한다면
2개의 부싯돌로 딱 쳤을 때
불이 반짝하는 것은 뭐가 되고? ‘수’가 되고,
그것이 솜이 옮겨 붙은 게 뭐다? ‘애’에요.
그러면 아무리 부싯돌이 부딪혀서 불이 팍팍팍팍 일어나도 옮겨 붙지 않으면 그것은 안 커집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수는 순간에 일어나는 거요. 느낌이 지속된다. 이런 말은 잘못된 거요. 느낌이 일어나고 일어나고 일어나고. 그러니까 부싯돌이 반짝반짝반짝 한다고 그게 불이 붙은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솜에 옮겨 붙었다. 옮겨 붙으면 그것은 아무리 작은 불이라도, 아무리 작은 불이라도 그것은 뭐가 아니다? 부싯돌불은 아니에요. 이것은 커질 수 있는 불이에요.
그러니까 옮겨 붙은 게 ‘애’에요. 그러니까 부싯돌을 부딪쳐서 아무리 크게 번쩍해도 그것은 ‘수’고, ‘수’가 강하게 일어난 거고, 아무리 적어도 솜에 옮겨 붙은 것은 ‘애’에요. 그러니까 이게 커지는 것은 ‘애’가 커지는 거요. 이것은 지속이 되는 거요. 그러면 여기서 이 ‘수’는 어디에서 일어난다고 그랬어요? 바깥 경계를 봐야 일어나야 될 거 아니에요. 여러분이 뭔가 접촉해서 일어나겠죠. 눈으로 보든, 귀로 듣든, 코로 냄새 맡든, 혀로 맛보든, 감촉하든, 뭔가 생각을 하든, 해야 느낌이 일어날 거 아니오. 그죠.
그럴 때 이 부딪힘, 만남이 있어야 돼. /촉/이 있어야 돼. 부딪힘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이 부딪힘이 있어야 수가 일어나지 그냥 일어나는 게 아니오. 즉 두 개의 부싯돌이 부딪혀야 반짝하고 불이 일어나는 거지, 그냥 불이 안 일어난다. 그래서 이것을 /촉/이라고 그래. 촉. 두 개의 부싯돌이 부딪혔다. 그래서 불빛이 일어났다. 그러면
두 개의 부싯돌이 뭘까?
하나가 몸에 있는 육근이에요.
다른 하나는 밖에 있는 육경이겠죠. 그죠.
눈으로 뭘 보고? 빛을 보고 일어나는 거란 말이오. 그래서 근본은 우리 몸에 6가지 감각기관이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는 거란 말이오. 이것을 뭐라고 한다? /6입/이다. 이렇게 불러요. 육입이다. 외부의 정보를 받아들이려면 바깥에 존재가 있어야 됩니까? 없어야 됩니까? 이 존재는 /명색/ 이라고 불러요. 이때
명_이름이고,
색_물질이에요.
이름과 물질이 합해 있어요.
그러면 여기 나무토막이 하나 있어요. 그런데 이것을 ‘목재’라고 부를 때하고, ‘장작’이라고 부를 때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르지. 그러면 색은 같아요? 안 같아요? 같지. 명이 다르죠.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나를 기준해서 볼 때는
물질만으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그것은 항상 명색으로 존재합니다.
물질과 이름으로 존재해요.
똑같은 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음료수나 세숫물이냐? 다 다르죠.
그러니까 거기에는 그게 하나의 생명이죠.
그 물질에 어떤 생명이 있어요.
용도에요. 용도.
그거에 따라 이름이 붙어있어요.
그러니까 똑같은 여자인데 엄마라고 불릴 때하고, 아내라고 불릴 때하고, 딸이라고 부릴 때 다가오는 개념이 같아요? 달라요? 달라요. 그러면 왜 바깥 대상을, 인식 대상을 명색이라고 하는지 이해하시겠어요? 그냥 색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명색이라고 불러요.
그러면 이런 두 개의 부싯돌이 부딪혀서 결국은 불이 반짝하고 솜에 옮겨 붙는데, 이때 똑같은 환경에 처하면 이 반응이 다 똑같을까? 여기 담배 연기가 있다. 이 말이오. 담배 연기가 있으면 그 담배 연기 냄새를 맡으면서 피우고 싶은 사람도 있고, 즉, 갈애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고 혐오를 일으키는 사람도 있죠. 그래요? 그러면 왜 어떤 사람은 갈애를 일으키고 어떤 사람은 혐오를 일으킬까? 똑같은 사람을 보고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여기 강아지를 두고 너무너무 귀여워하는 사람도 있고, 가까이 못 오게 털 빠진다고 싫다는 사람도 있단 말이오. 그럼 두 사람이 뭐가 다를까? /식/ 업식이 다른 거요. 그러니까 이미 형성되어 있는 내면의 업식이 다르다. 그 업식이 여기 작용을 하는 거요. 요것을 정리하면 뭐다?
가장 출발은 업식입니다.
요게 종자에요.
/식/으로 반연해서 뭐가 있고?
/명색/이 있고, /6입/이 있고, /촉/이 있고,
그래서 뭐가 일어난다? /수/가 일어나는 거요.
요것은 현재 갈애가 일어나는 원인들입니다.
그냥 “내가 하고 싶다.” “야, 갖고 싶다.” 이렇게 말하지만,
요것은 이런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는 거다. 이 말이오.
그러면 이 업식이라고 하는 게 출발점이에요. 사실은 모든 것에 뿌리는 뭐다? 이 업식이에요. 업식이 종자요. 씨앗이다. 이
업식이 씨앗이라 하면
명색-6입-촉까지는
땅하고, 바람하고, 햇볕하고, 거름하고, 수분하고 뭐, 이런 거요.
이렇게 해서 싹이 딱 트는데,
그 싹이 뭐요? 수에요. 싹이 싹~ 튼다. 이 말이오.
씨앗으로부터 싹이 터. 업식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명색-육입-촉이 일어나지 않으면, 즉 두 개의 부싯돌이 부딪치지 않으면 불이 반짝 하는 게 일어날까? 안 일어날까? 안 일어나요. 또 명색-육입-촉이 있다하더라도 식이 없다면 이 수가 일어날까? 안 일어날까? 안 일어나요. 그래서 이 근본으로 올라가면 식이에요. 그런데 이 식은 나한테 본래로부터 있었습니까? 그 전에 어떤 것으로 형성되어진 겁니까? 형성되어진 겁니다.
나한테 담배피우는 습관이 있다 이 말이오. 업식이 있단 말이오. 그게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 거요. 그러면 이것은 나한테 본래부터 있었나? 아니오. 형성되어진 거요. 그 과거에 뭐로 형성되어졌냐? 바로 행위에 의해서, 맹목적 행위에 의해서 형성된 거요. 그러면 그러한 행위는 왜 있게 됐냐? 갈애가 있었다. 갈애는 왜 있게 되었냐? 그전에 식이 있었다. 식은 왜 있게 되었냐?
이렇게 자꾸 반복해서 올라가면 맨 출발점, 담배를 첫 번째 피울 때는 습관에 의해서 피웠어요? 자기가 선택했어요? 자기 선택했어요. 이 습관에 의해서 마음일 일어난 게 아니죠. 담배 피우고 싶은 습관에 의해서 담배를 처음부터 피운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것은 식으로서 출발한 게 아니에요. 그러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첫 번째 마음을 불러일으킬 때, 이 사람은 담배 피우는 게 좋아보였어요? 안 보였어요? 좋아 보였어요.
우리의 모든 행위는 사실은 자신의 어떤 업식으로부터 일어난 욕구에 따라서 행위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추적하고 추적하고 추적해서 돌아가 보면, 맨 첫 번째 시작할 때는 어떤 습관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이 말이오. 맨 첫 번째는 아무런 습관이 없었는데 이게 시작이 되었어. 그러니까 시작할 때는 아무 근거가 없었다. 이 말이오.
씨앗이 있어서 싹이 텄는데, 어쨌든 이것을 올라가고 올라가 보면 첫 번째는 씨앗이 없는데서 시작이 되었어요. 그 시작이 뭐냐? 바로 /무지/다. 잘못 알았다. 그래서 이 과거의 수도 없이 되풀이 된 모든 것들을 통털어서 딱 줄여 놓은 게, 그것이 100번이든, 천 번이든, 만 번이든, 억 번이든, 조 번이든 관계없이 되풀이 된 것을 딱 줄여 내놓은 게 뭐다? 무명-행이에요.
첫 번째 /무명/으로부터 시작이 된 거요. 그래서 /행/이 있고, 또 그 결과가 있고 원인이 있고 해서 해서 딱 결과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 찰나 현재 이후에 뭐가? 종자, 씨앗으로 출발하는 것을 뭐라고 한다? /식/이다. 이렇게 불러. 그러니까
‘식’부터 ‘유’(식-명색-6입-촉-수-애-취-유)까지는
현재를 말합니다.
현재를 말하니까 세세하게 이것은 분석을 해 놓은 거요.
그러니까 이런 것에
과거에 되풀이 되었던 것을 하나로 정리해 놓은 게 뭐다?
무명-행이고.
미래에 되풀이 되는 것을
생-노사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현재를 분석한 8연기와,
과거와 미래까지 합해서 12연기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이런 업식은 지금부터 시작이 된 게 아니고, 과거에 결과물이죠. 이 결과물로부터 ‘수’가 일어나는 것도 내가 의도적으로 일으켜서 일어나요? 자동으로 일어나요? 자동으로 일어나니까 ‘수’까지는 다 과거에 결과입니다. 과거가 원인이 되어서 현재에 일어나는 결과에요. 그런데 이것은 내 책임이 아니에요. 내가 책임질 수가 없어. 나도 모르게 일어나버리는 거요.
그 다음에 ‘애’부터, 내가 하고 싶다고 해버리는 애-취-유는 현재 내가 원인을 만듭니다. 그래서 다음, 미래의 그 과보가 나타는 것을 뭐라고 한다? 생-노사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의 원인이,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고, 그래서 과거와 현재가 원인 결과로 이렇게 만나 있죠. 또 현재와 미래도 어떻게? 원인과 결과로 만나 있죠. 현재 안에도 두 개가 겹쳐 있습니다. 뭐로? 원인과 결과로. 식-명색-6입-촉-수는 원인에 속하고, 그 ‘수’의 결과로 뭐가 일어난다? ‘애’가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애-취-유는 원인과 결과에요. 그러니까 식-명색-6입-촉-수는 과거 원인의 결과인 동시에 현재 뭐가 되고? 원인이 되고 있고, 그 다음에 애-취-유는 현재의 원인에 현재의 결과물이죠. 동시에 그것은 미래 뭐를 짓고 있다? 원인을 만들고 있죠. 그러니까 결과물인 동시에 뭐다? 원인이오. 이게 다 결
과물인 동시에 원인이오.
과가 곧 뭐가 된다? 인이 되는 거요.
이렇게 과거와 현재가
현재와 미래가
현재와 현재 사이에
원인과 결과가, 원인과 결과가 이렇게 겹쳐있어요.
그러니까 결과가 곧 원인이 되어 다음 결과를 만들고,
그것이 다시 원인이 되어서 또 이렇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빠져 나가기가 어려워.
어제 담배 피웠던 습관이
오늘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담배를 피우고,
그것이 결과물로
내일 또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그래서 또 피우고.
그것이 어제 오늘 내일만이 아니고,
조금 전에 피운 것과
지금 피운 것과
다음에 피운 것이 연결이 되어 있는 거요.
그것이 지난해와 올해와 내년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이것을 확대하면 전생과 현생과 내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수행차원에서는 찰라 이전이 뭐고? 전생이고, 찰나 이후가 뭐다? 내생이오. 즉 요것의 한 과거의 원인으로 현재의 결과가, 현재의 원인으로 미래의 과보로. 이렇게 찰나찰나찰나 연결이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다음 단계에 뭘 관찰하느냐? 요거보다 조금 더 앞서서 ‘수’를 관찰해야 됩니다. ‘수’는 부싯돌에 불붙이는 것처럼 반짝반짝 일어났다 사라지는 거요. 그러니까 ‘수’를 관찰해야 되요. ‘수’를 관찰해 보면 ‘수’는 거의 다 여러분이 못 알아차립니다. 불이 붙어야 불인 줄 알지, 반짝할 때는 구분을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대해서, 몸과 마음에 일어나는 감각과 필링에 아주 깨어있어야 돼. 찰나찰나에 깨어있으면 알아차려져요. 그러니까 쾌라고 하는 반응이 호의적 반응이 싹~ 기분 좋음이 싹~ 일어나면 ‘하고 싶다’라는 게 금방 맹목적 충동으로 해서 탁~ 옮겨 붙을 때, 그때 옮겨 붙지 않도록 해야 돼. 이게 갈애로 안가도록 해야 된다. 혐오로 안가도록 해야 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수’를 알아차려야 되요. 느낌을 알아차려야 돼. 그래서 몸에 대한 감각을 관찰하고 마음의 느낌을 관찰하는 거요.
그런데 그게 잘 안 잡히니까 그전에 뭘 관찰한다? 호흡을 관찰하는 거요. 미세한 호흡을 관찰해서 아주 집중력을 높여서 관찰하게 되면 그것을 나중에 코언저리에 있는 감각을 관찰하고, 그 감각을 몸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감각을 관찰해서 그 다음에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느낌을 관찰하고.
이렇게 딱~ 감각이 관찰되면, 알아차리면, 감각을 관찰할 때 느낌을 관찰할 때 알아차림이 있으면 그것이 옮겨 붙지 못합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금방 탁~ 옮겨 붙는데, 알아차림이 있으면 반짝하고 사라집니다. 그러면 사라지면 영원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연달아서 또 반짝하고 도 부싯돌을 친단 말이오. 그러면 그때도 알아차림이 있어야 이게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한번 알아차린다고 되는 게 아니라, 어떻게?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돼. 그것을 뭐라고 한다?
순간순간 찰나찰나
알아차림이, 깨어있음이 이루어져야 되는 거요.
알아차리는 것이 지속되는 게 아니에요.
찰나찰나 알아차려야 돼.
‘수’는 찰나찰나 일어나기 때문에.
그럼 알아차리면 어떻게 된다고?
사라지는 거요.
그래서 여기서부터 소위 관법, 비파사나, 관법이 행해진다. 앞에 것은 뭐라고? 계율이고, 이것은 뭐다? 관법이고. 이게 선정을 닦는 법입니다.
선정 닦는다 해서
가만 앉아 있는다는 뜻이 아니에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 된다.
그러니까 알아차림이 지속이 되려면
집중이 되어 있어야 되요.
그 알아차림이 뭐요?
정념이에요.
바르게 알아차림이 있어야 돼.
그런데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그러니까 쾌, 불쾌 마음이 금방 들뜨거든요. 들뜨면 어디로 가버린다? 갈애로 가버려요. 그래서 마음의 평정, 정정, 마음의 평정이 유지되고 그 다음에 알아차림이 아주 예리해야 된다. 놓치게 되면 어떻게 한다? 다시하고, 놓치게 되면 다시하고, 놓치게 되면 다시하고. 그러니까 계속 되어야 된다. 놓쳤다 하더라도 다시 계속 되어야 된다. 그게 뭐요? ‘정정진’ 그래서
정념, 정정, 정정진
이 3개를 합해서 뭐라고 한다?
선정을 닦는다. 정에 든다.
정에 드는 게 멍청하게 앉아있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또렷한 깨어있음이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고요함 가운데 뚜렷함이 있어야 되요.
이것을 선에서는 소소영영 해야 된다.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으면 안 된다. 이 말이오. 깨어있다고 해서 마음이 들떠서 깨어있어도 안 된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 또렷함이 있어야 된다. 그런데 고요하면 졸립니다. 그래서 자꾸 깜빡깜빡 조는 게 있다. 놓침이 있다. 그래서 놓치면 다시 해야 된다. 이렇게 선정을 닦습니다.
이렇게 ‘수’를 또렷이 알아차리면
‘애’로 옮겨가지가 않으니까
계율은 지킬 것도 없어지는 거요.
그러니까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억지로 악다물고 참는 것은 계율은 지킨다고 할 수 있지만
수를 알아차리는 게 아니에요.
피우고 싶은 담배연기나
마음에서 그것에 반응이 일어날 때
딱 알라차려 버리는 거요.
그러면 사라졌다 또 일어나고 일어나고 계속 일어나도
계속 알아차림 있으면
이 ‘수’라는 것은 영원합니까?
일정하게 일어나다 사라집니까?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피우고 싶더라도
여러분이 피워도 그 욕구가 사라지지만,
안 피워도 일정한 시간이 사라지면 요구가 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맹목적으로 끌려 갈 게 아니고,
뚜렷한 알아차림이 있어야 돼.
“이런 마음이 일어나구나.” 하고 알아차려야지,
이를 악다물고 “안 피워야지. 안 피워야지” 하는 것은
옮겨 붙었다는 거요.
옮겨 붙었으니 이것은 불을 끄는 수준이오.
그러니까 알아차림 있어야 돼. “안 피워야지” 하는 것은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요? 긴장되어 있어요? 긴장되어 있거나 흥분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냥 고요한 상태에서 뚜렷하게 알아차려야 돼. 그 업식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그냥 알아차려야 된다. 그러면 이 무의식이 업식이 아래 있는 무의식이 계속 반응을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딱 앉아 있으면 첫째 몸이 반응하죠. 다리가 아프다. 죽겠다. 그래도 고통을 그냥 고통으로 참는 게 아니고, 알아차려야 돼. 그냥 온 몸으로 느껴야 돼. 그다음에 그게 지나가면 졸림이 오죠. 거기서 며칠 헤매다가, 몸에 고통도 졸음도 사라지면 그 다음에 망상이 치성을 합니다. 이게 생시인지 꿈이지 구분이 안 되는 혼미상태에 빠집니다. 무의식이 올라오니까. 꿈과 같은 꿈의 상태에 빠지죠. 앉아서 완전히 혼미한 상태에 빠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잤느냐? 잔거하고는 틀립니다. 자면서 꿈꾼 거 하고는 달라요.
거기에 망상에 빠지면 안 된다는 얘기에요. 망상은 끝없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내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빠지지 말고 흘러 보내야 됩니다. 또렷이 깨어 있어야 된다. 이렇게 자꾸 정진을 해 나가면 자꾸 무의식의 세계에 쌓였던 찌꺼기들이 흘러나가고, 흘러 나가는데 거기에 빠지면 안 된다. 그러면 세력이 나중에 조금조금 약해지고, 더 아래에서, 더 아래에서, 자꾸 올라오게 되죠.
이러면 뭘 알 수 있느냐? 반응이 있어야 “아, 나한테 이런 업식이 있었구나. 이런 피의식이 있었구나. 나한테 이런 게 있었구나.” 이런 것을 알죠. 즉 싹이 터야 이게 무슨 종자인 줄 알죠. 그런데 그 많은 싹들을 보면 “아, 우리 밭에는 무슨 씨가 바닥에 많이 뿌려져 있구나.” 이것을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래서 자기 업식을 보게 됩니다.
업식 자체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이 반응을 해서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그 판 자체를 내가 알 수 있게 된다.
이래야 뭐다?
내가 나를 안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면 뭐요? “니 꼬라지 니 알라.”
이런 것처럼 자기 업식을 안다는 거요.
자기의 업식을 알게 된다.
그러면 꼭 반응을 안 해봐도 벌써
“내가 어떻게 업식이 형성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이런데 반응하면 마음이 어떻게 일어날 거다.” 라는 것을
이미 다 아는 거요.
일어나 봐야 알고
일어났는데도 모르고
거기에 빠져 있는 사람이 대부분인데
일어나기 전에 이미 아는 거요.
남이 나를 몰라도 나는 나를 아는 거요.
그런데 보통 사람은 이게 싹이 터서 잡초가 밭에 무성해서 지나가는 사람이 다 “아이고, 문제다. 문제다.”해도 본인만 몰라.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자기를 모르고, 남이 나를 알지 않습니까? 그죠. 이것은 최하수요. 남이 나를 아는 것 보다 내가 내 자신을 더 먼저 알아야 됩니다. 더 자세히 알아야 됩니다. 남이 나를 칭찬해줘도 내 업식이 그렇지 않다는 거. 내가 이미 딱 알고 있어. 그래야 칭찬에 흔들리지 않게 된다.
자, 이 과정이 뭐라고? 선정을 닦는다. 이래요. 그러니까 계율만 지킨다고 되는 거 아니에요. 계율을 지키는 것은 중요한 수행 가운데 하나이지만 선정을 닦아야 된다. 그러면 이렇게 선정을 닦는 것만으로 되느냐? 즉, 이렇게 해서 업식이 소멸되었다. 담배 피우는 습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하더라도 이 사람은 또 언젠가 담배를 피울 가능성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왜? 이 사람은 처음에도 업식이 없을 때도 피웠어요? 안 피웠어요? 피웠죠. 그러기 때문에 무지, 무지 자체가 근본적으로 없어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증득해야 된다. 이게 뭐요?
계정혜 삼학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남방불교, 근본불교, 소승불교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이 12연기에 따라서 계정혜 삼학을 닦습니다. 물론 대승수행법은 조금 다릅니다. 그러니까 이거 자체는 아주 좋은 가르침이에요. 그런데 여기 뭐가 문제냐?
무명이라는 것이 있어서
‘무명을 없앤다.’ 라고 한다면
이것은 근본 교설에 어긋난다는 거요.
만약 꿈속에서 내가 강도를 만났어. 그래서 도망을 갔다. 그러다 내가 깨었어. 깨어서 보니까 강도로부터 내가 두려움에서 벗어났죠. 그러면 내가 그 고통에서 벗어났는데, 강도가 있어서 벗어난 거요? 사실은 강도가 본래부터 없었던 거요? 본래부터 없었던 거요. 그러나 한 생각, 즉, 꿈속에서 생겨난 거요.
그러니까 이 /무명/이라는 것이 있어서 무명을 없앤다고 한다면 이것은 마치 꿈속에서 강도를 잡겠다는 거와 같은 거요. 그러니까 강도는 본래부터 없었어. 깨고 보니 강도는 없었다 이 말이오. 깨고 보니 공중에서는. 깨어보니 무명이라 할 실체가 본래 없다. 그러니까 무명이 없으니 무명을 없앤다 랄 것도 없다. 그게 뭐요? /무무명 역/ 역 또한 이 말이오. /무무명진/ 무명진, 무명을 없앤다. 무명을 다 한다랄 것도 없다. 이게 대승적 관점이오. /내지/ 싹~ 생략하고. /무노사/ 노사가 노사라 할 실체가 없으니까 노사가 다한다, 노사로부터 벗어난다할 것도 없다. 그게 뭐요? 무노사 /역무노사진/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럼 여기서 우리가 소승교설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하나 필요하고, 그러나 제가 설명 드린 대로 이렇게 교설을 올바르게 이해한 게 아니고, 지식으로는 이해했지만, 실제로는 이 무명이 본래로부터 있어서 무명을 없앤다. 이렇게 이해했기 때문에 이것은 잘못된 이해다. 이것은 아직도 꿈속의 소식이다. 눈뜬 소식이 아니다. 강도를 내가 없앴다. 나는 강도로부터 벗어났다라고 얘기하면 그 사람 아직 꿈속의 소식이다. 눈뜬 사람은 그런 소리 안한다.
그래서 공중에서는, 공의 세계에서 볼 때는 이런 얘기는 아직 꿈속의 얘기다. 그러니까 이 잘못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이것을 비판한 거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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