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말씀은 그런데 불교 어려워요? 쉬워요? 어렵지. 불교가 간단명료합니까? 뭔가 헷갈립니까? 헷갈리지. 불교가 간단합니까? 복잡합니까? 복잡하지.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어렵다. 정반대다. 불교를 알고 싶어서 와보면 어렵고 헷갈리고 복잡해요. 그냥 믿으면 천당 간다. 이러면 간단한데. 쉽고. 분명할 텐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독교가 불교인가 그런 생각 들 거 아니에요. 그런데 여기 오면 뭔가 긴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아닌 거 아닌 것도 아니고,
그런데 첫째 이렇게 헷갈리는 것은 제대로 문자라든지 형식에 너무 집착해서 불법을 제대로 접근하지 못해서 불교를 모르거나, 이래서 생긴 문제도 있지만 주로 우리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어요. 불교는 불교라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달마’라 그래요. 들어봤어요? 달마. 또는 다르마. =법. =진리. 이런 말을 합니다. 이 진리하고 즉 달마하고 문화를 우리가 지금 착각하고 있어요.
진리를 물이라고 하면 그 물을 담은 그릇은 문화에요. 언어 일수 있고, 문자 일수도 있고, 여러 가지 문화에다가 그 다르마를 담아서 우리에게 가져오면 우리는 뭐만 마십니까? 물만 마시죠. 진리만 마시는 거요. 나라마다 다른데 가면 그릇이 바뀔 수가 있어요? 없어요? 있죠. 그러면 뭐, 큰 그릇도 되고, 작은 그릇도 되고, 바가지도 되고, 양푼도 되고, 바뀔 수가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릇을 문화를 부처님의 법이라고 착각하고 있어요. 이게 큰 문제요.
문화라는 것은 가치관, 이런 것들인데, 즉, 가치관이라든지, 언어라든지, 문자라든지, 예식이라든지, 절이라든지, 불상이라든지, 승복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다 문화입니다. 다르마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도 절하고 한국 절하고 모양이 같습니까? 틀립니까? 달라요. 인도 절은 인도 집처럼 생겼고, 한국 절은 한국 집처럼 생겼고. 그럼 절은 뭐가 절이에요? 수행자가 사는 곳을 절이라고 그럽니다. 나무 밑에 앉아 있어도 절이에요? 아니에요? 절이에요. 그러니까 기원 정사할 때 처음에 절이 있었어요? 부처님이 나무 밑에 앉아 있었어요. 나무 밑에 앉아 있었어요. 중림정사는 부처님이 대나무 밑에 앉아있었어요. 수행자가 있는 게 절이에요. 그런데 제가 천막집에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와서 “아이, 스님, 절에 안계시고 여기에 계세요.” 기와집을 절이라고 그 사람은 생각하는 거요. 기와집은 우리 문화에요.
그다음에 불상이 나라마다 같이 생겼어요? 달리 생겼어요? 태극불상 봐요, 머리도 뾰족하고, 손톱도 뾰족하고, 찌르려고.
스님들 복장이 같아요? 달라요? 달라요. 제가 스리랑카에 가면 스님 취급을 못 받습니다. 비구 대열에 나는 안 끼어줘요. 왜? 노란가사를 안 입었기 때문에. 나를 쿵푸 하는 사람으로 알아요.
그러니까 부처님오신날도 다 틀립니다. 부처님 생일날 초파일도. 왜? 다 그 나라마다 옛날에 달력이 틀렸어요. 우리는 우리 음력대로, 인도사람은 인도달력으로. 스리랑카는 스리랑카 달력으로, 태국은 태국달력으로. 그러니 일본은 일본달력으로. 그러니까 부처님 생일날도 다 틀려요.
이게 미국이나 서양에 들어가니까 서양 사람들이 헷갈리겠죠. 아니 부처니오신날이 이게 다 틀리는 거요. 절을 지어 놨는데 절모양이 다 틀려. 불상을 모셔놨는데 불상 모양이 다 틀려. 스님들이 왔는데 옷 모양이 다 틀려. 경전을 가져왔는데 경전 내용이 다 틀려. 그러니까 서양 사람들이 얼마나 헷갈리겠어요. 우리는 그런 거 잘 모르죠. 왜? 우리는 한 종류 안에 딱 들어있으니까 그것만 가지고 보거든요.
그러니까 그 물그릇만 보고 그게 불법인줄 알아도 문제가 없는데, 물이 바가지마다 다 다른 그릇에 담아오니까 바가지만 보고 있던 사람은 여기에 담겨야 불교인데 엉뚱 바가지에 담겨있으니 물 아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요. 이게 지금 헷갈리는 거요.
그러니까 문화는 다 다르니까 우리가 인도에 가면 옷도 갈아입어야 되겠죠. 그 문화를 받아들이려면. 집도 그 모양으로 지어야 되겠죠. 그러니까 많이 배워야 되요? 안 배워야 되요? 새로 배워야 되요. 이런 집, 저런 집, 이런 불상, 저런 불상, 부처님 태어난 날짜도 몇 개 외워야 되고, 그러니 복잡해요? 안 복잡해요? 복잡하고 어렵고,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렇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거요. 문화는 다르다. 다르니까 종류가 많고, 종류가 많으니까 배우려면 힘이 들고 복잡하고 헷갈리고 그래요.
그런데 “아, 이것은 문화다. 문화는 나라마다 다르고, 같은 나라에도 시대마다 다르다.” “아, 이 나라는 이런 문화, 저 나라는 저런 문화, 이 나라는 이런 가치관, 저 나라는 저런 가치관, 이 나라에는 스님들이 이런 복장, 저 나라 스님들은 저런 복장. 이 나라에는 이런 방식의 계,”
우리나라 사람들 다 술 먹죠. 그러니까 스님들 술 먹는 것에 대해서 좀 나쁘게 크게 덜 보는 편이죠. 한잔 정도야 곡차로 마시잖아. 그죠. 그런데 남방불교가면 스님들 술 먹었다하면 그것으로 끝이에요. 술 먹었다하면 바로 5계 안에 들어가니까.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님들이 술 한 잔 먹는 것 하고, 담배 뻐끔뻐끔 피우는 것 하고 어느 게 더 보기 싫어요? 담배 피우는 것 보기 싫죠. 그런데 그 계율 잘 지킨다는 남방불교 버마스님들 보면 밥 먹고 쪼로록, 절 앞 계단에 앉아서 어른 애 할 것 없이 전부 담배를 뻐끔뻐끔. 가서 보면 화~. 그런데 우린 밥 먹고 나면, 어른 애 스님 속인 할 것 없이 앉아서 남자여자 할 것 없이 껌 씹어요? 안 씹어요? 씹죠. 그거하고 똑같은 거요. 그 사람들한테. 아무 문제가 안 되는 거요.
담배는 부처님 당시에 있었어요? 없었어요? 없었어요. 서양 400년 전에 들어온 거란 말이오. 껌 들어왔듯이. 껌 씹는다고 계율 어겼다고 말하는 사람 없잖아요. 그 사람들 담배 피웠다고 아무 문제가 안 돼. 10살짜리 스님부터 60된 노인까지 쪼르륵 같이 앉아서 피우고 있거든요. 그래도 아무 문제의식도 없어요. 이것은 뭐에요? 문화에요. 다르마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다르마는
분명하고 간단하고 쉬워요.
그러나 문화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한문화의 시각에 딱 사로잡히면
다른 것을 이해하기가 굉장히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아, 문화는 서로 다른 거야. 여기는 이렇구나. 저기는 저렇구나.” 하면 배우는 재미가 있을까? 없을까? 있어요, 재미있어.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구분해야 되요. 그런데 우리는 이것이 구분이 안 돼. 오늘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불교라는 것은 불교문화에요.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부처님의 실제의 가르침, 경전에 있는 말씀을 한번 들어볼까요? 얼마나 쉽고 분명하게 가르쳤는지. 어떤 제자가 이렇게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 브라만교에서는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갠지스강에 가서 목욕을 하고 나면, 죽은 시체를 물에 한번 담그고 나면, 모든 업장이 소멸되어 천상에 난다고 하는데, 왜 우리는 이렇게 맨날 수행하라고 그럽니까? 물에 그냥 한번 풍덩 들어갔다 나오죠.”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겠어요. 저 같아도 안 그렇다는 얘기를 하려면 1시간 얘기 했겠죠.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비구여, 그 말이 맞는다면 갠지스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천상에 갈 것이다.” 갠지스강에 가서 목욕한다고 천상으로 갈 것 같으면, 갠지스강에 사는 물고기가 제일 먼저 천상에 갈 것이다. 그러면 그런 질문에 대해서 해답이 풀렸지. 그것이 옳으니 그르니 이런 얘기를 안 하세요.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십니다. 그럼 훤하게 그냥 일체가 온갖 의문들이 어두운 밤에 불 켤 때 훤해서 다 보이듯이 싹없어져요.
자, 여기 있는 경전의 말씀을 또 보겠습니다. 2번부터 보세요.
용모가 뛰어난 가미닌은 이른 아침 부처님을 뵙고 여쭈었다. “부처님, 바라문은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하늘을 섬깁니다. 어떤 중생이 목숨을 마치면 바라문은 마음대로 죽은 이를 천상에 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원컨대 법의 주인이신 부처님께서 중생들이 목숨을 마치거든 천상에 나게 해주십시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가미닌, 내가 너희에게 물을 터이니 아는 대로 대답하여라. 어떤 사람이 게을러서 정진하지 않고 깨달아 산목숨을 죽이며, 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사음을 행하며, 거짓말을 하고, 그릇된 소견을 가지는 등, 온갖 나쁜 업을 지으면서 살았다고 하자. 그가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당신은 게을러 정진하지 않고 알음알이를 행했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천상에 태어나십시오.’ 라고 했다하자. 가미닌이 이렇게 어떤 사람이 축원했다고 해서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게으른 그가, 더구나 나쁜 업을 지은 그가, 축원을 받았다고 해서 천상에 태어날 수 없는 것이다. 비유를 들면 저쪽에 깊은 못이 하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거기에 크고 무거운 돌을 던져 놨다. 마을 사람들의 못가에 모여서 ‘돌아 떠올라라’ 하고 축원을 하였다. 그 크고 무거운 돌이 축원을 했다고 해서 그들의 소원대로 떠오를 수 있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 그가 천상에 태어날 수 없는 것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나쁜 업은 검은 것이어서 그 가풍으로 저절로 밑으로 내려가 반드시 나쁜 곳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법을 향하고 온갖 착한 업을 닦는다고 하자. 그가 목숨을 마칠 때 여러 사람이 모여서 ‘당신은 부지런히 정진해서 묘한 법을 실행하여 온갖 착한 업을 이루어졌습니다. 당신은 그 인연으로 목숨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나쁜 곳에 가서 지옥에 떨어지십시오.’라고 저주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과연 그들의 저주대로 지옥에 떨어지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 그것은 당치도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착한 업은 흰 것이어서 그 가풍으로 저절로 위로 올라가 반드시 좋은 곳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기름병을 깨뜨려 못물 속에 던지면 부서진 병조각은 밑으로 가라앉으면 기름을 물위로 떠오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와 같이 목숨이 다한 육신은 흩어져 까마귀와 새가 쪼아 먹고, 짐승들이 뜯어 먹거나, 혹은 태우거나 묻히어 마침내는 흙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마음의 업식만은 항상 믿음에 쌓이고 정진과 보시와 지혜에 싸여 저절로 위로 올라가 좋은 곳에 나는 것이다.
가미닌이야 산목숨을 죽이지 않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않으며 사음과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사특함 속에서 벗어나는 좋은 길이 있다. 이른바 팔정도가 위로 오르는 길이며 좋은 곳으로 가는 길이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 가미닌과 여러 비구들은 다들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였다.
분명합니까? 안합니까? 질문할 거리도 없죠? 그리고 간단명료하죠. 쉽죠. 이게 부처님 가르침이오. 그런데 여기에 구질구질하게 어떻게 하면 어디까지 가고, 어떻게 하면 어디까지 가고 어떻게 하면 뭘 써 붙이면 어떻게 되고 이런 얘기 부처님이 하신 적이 없어요. 이제까지 교회에 다녔든, 절에 다녔든. 처음 왔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이든, 들으면 누구나 다 끄떡끄떡하게 되죠.
그래서 이러한 가르침을 듣자 자기의 의심이 마치 안개가 걷히듯이, 어두운 밤에 불을 밝혀서 환히 밝아지듯이, 요렇게 분명하게 되니까 부처님께 귀의를 하겠죠. 그래서 다 귀의한 거요. 바라나시 최고의 갑부가, 요즘 같으면 정주영이나 이런 사람이, 아들이 부처님에게 귀의해서 승려가 되었으니까 그것을 뺏으러 찾으러 갔다가 부처님 법문 듣고 그냥 눈이 확 뜨여버렸어요.
그래서 그가 부처님 발에 엎드려서 부처님께 귀의를 했는데 그게 첫 번째 남자신도입니다. 그분이 엎드려서 부처님께 뭐라고 하셨는지 그 앞에 일번 보겠습니다. 여기는 대존이시여라고 번역이라고 되어있는데 원래는 세존이시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위대하시어라 세존이시여, 위대하시어라 세존이시여. 이를테면 넘어진 것을 일으키심과 같이 덮인 것을 나타내지심과 같이, 헤매는 자에게 길을 가르치심과 같이, 또는 어둠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자는 보라. 하고 말씀하심과 같이, 이 같이 세존께서는 온갖 방편을 세우사 법을 설하여 밝히셨나이다. 저는 이제 세존에 대해 귀의하옵니다. 또 그 법과 승가에 대해 귀의하옵니다. 원컨대 오늘날 불로부터 시작하여 목숨을 마칠 때까지 세존께 귀의하옵는 신자로서 저를 받아들여주시옵기 바라나이다.
얼마나 자기 느낀 것을 그대로 직설적으로 표현했습니까? 그러니 수닷타 같은 사람은 돈에 혈안이 되어 평생 돈을 번 장자인데, 그 모든 돈을 다 부처님과 제자들이 수행하고 대중에 포교할 자리를 위해서 싹 다 제공해 버렸어. 목갈리나존자는 인도 제일의 신통력자로 온갖 대중의 지지를 받는 사람인데 부처님이 “야, 신통력 쓰지 마. 대중이 헷갈려.” 이렇게 딱 한마디 하니까, 딱 그만두고, 그 사람 겁을 내어서 가까이 못 오다 그 사람이 개종을 해서 불교 신자가 되었는데, 신통력 때문에 겁을 내어서 못하다가, 신통력을 못하니까 돌로 때려죽여 버렸어.
그럼 죽을 때 쯤 되면 쓰겠어? 안 쓰겠어? 쓰겠지. 딴 때는 참아도. 그런데 돌 맞아 죽고 안 썼어. 사람을 99명이나 때려죽인 살인자 앙굴리말라가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눈을 번쩍 뜨고 중이 되어 버렸어. 그런데 그것을 받아주신 분도 부처님이고, 대중이 다 반대하는데도. 그런데 그 사람이 스님이 된다 해서 사람들이 돌로 쳐서 그 사람 죽여 버립니다. 그 사람 돌 맞고 그냥 죽어버렸어. 자기가 힘으로 하려면 천명도 더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인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거야.
기적이라면 이런 게 기적이에요. 해가 달을 가리는 게 기적이오? 산이 무너지는 게 기적이라고 생각하세요? 물위로 좀 걸으면 기적이에요? 왜 이렇게 사람이 바뀌어버렸을까? 그것은 너무 분명하니 그런 거요. 우리가 조금 분명하지 않으면 어떤 한계상황에 가면 헷갈립니까? 안 헷갈립니까? 헷갈리죠. 부처님 가르침 따라갔다가 병신 되는 거 아니냐? 재산 다 날리는 거 아니냐? 이렇게 헷갈린단 말이오. 그런데 이런 헷갈림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노래를 부르는 거요.
자, 그래서 합장하시고 마치겠습니다.
많은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렇게 분명히 했기 때문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부처님을 찬탄하고 공경합니다.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귀의합니다.
부처님 법 만난 것을 기뻐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옴을 알아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부처님 제자 됨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땅에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는 보살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삼귀의를 했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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