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 이렇게 해서 잘 안된단 말이오. 딱 경계에 부닥치면 도로아미타불이 되요. 그래서 우리 인생이 이렇게 고해다. 갖가지 괴로움으로 늘 이렇게 사이에 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하고 알아차리는 게 진리요. 이것만 벌써 알면 반은 해결 한 거요. 그런데 보통 이것을 잘 몰라요. 그런데 이 괴로움이 어떤 극치에 도달하면 “아, 괴로움이구나.”하는 것을 압니다. 즉 병고를 암 걸렸다고 선고를 받든지, 교통사고 나서 죽을병을 당하든지, 재물이 부도가 나서 완전히 거지가 되어버리든지.
그러면 “아, 재물이라는 게 이것이 내 것이 될 수가 없는 거구나.” “재물에 의지했던 내 인생이 어리석구나.” “육신에 의지했던 내 인생이 어리석구나.” 이런 어떤 고가 극치에 다다르면 “이게 고구나.”하는 것을 자각하기 때문에 그런 특별한 상황에 다다랐을 때 사람은 변하죠. 사람 변하면 뭐라고 그래요? 깍쟁이 같은 게 좀 자비스러우면 뭐라고 그럽니까? “저게 죽을 때가 되었나.”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苦고인 줄 알아차리면 벗어날 길이 있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큰 세상에서 말하면 가장 큰 불행에 다다랐다하지만, 그것을 본인이 깨우친 사람은 바로 해탈의 길을 가버려요. 부처님은 어릴 때 중병 들었을 때의 자기 심정, 자기가 늙었을 때의 자기 심정, 자기가 죽을 때의 자기 심정을 젊은 날에 그것을 그냥 자기 것으로 받아들여 버렸으니까 이 세상에 갖가지 그런 것들이 의미 없다는 것을 다 깨쳐버린 거요.
그런데 우리는 그 상황에 다다라도 겨우 눈 뜨고, 병이 났거나, 병날 때 제가 병문안 가보면 “스님, 어리석었습니다. 병만 나으면 제가 문경에 가서 공부하겠습니다.”이러죠. 그런데 병 나으면 그런 생각이 계속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들어. 부도난 뒤에 어떤 사람은 “그럴 줄 알았으면 스님한테 보시를 팍 해버릴 걸.” 그러니까 재산이 없어져야 재산이 소용없는 줄 알고, 건강이 나빠져야 건강의 소중함을 아는 거요.
그래서 이 인생의 전환기, 인생의 전환기가 되니까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뭡니까? 남이 볼 때는 불행한 것 같지만, 아직도 어리석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는 불행한 것 같지만, 그 사람에게는 큰 행복이오. 그래서 남편이 술을 먹거나 어떤 일로 도저히 살 수 없는 경계에 이르러서 이 결혼이 고구나. 이래서 버리고 절에 들어와서 공부를 하다가 탁, 이치를 깨달았어. “이거 내가 모르고 살다가 죽었으면 내 인생이 뭐가 될고.”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내가 어째서 이런 복을 얻게 되었을까? 누구 덕택이에요? 남편 덕택이오.
남편이 그때 그렇게 안했으면 집을 버리고 이 공부를 할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그 자리에 탁 엎드려 남편보고 “아이고, 당신이 보살입니다. 당신이 보살입니다.” 이렇게 되는 거요. 거짓말 하는 게 아니라 정말이다. “아, 당신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이 깨달음의 길에 들 수 있었습니까?” 남편은 똑같은 남편이오? 똑같은 남편 아닙니까? 똑같은 남편이죠. 자기 생각이 바뀌어버리면 바로 원수 같은 사람이 불보살인 줄 알아버리는 거요.
그게
원수도 자기 속에 있고,
불보살도 자기 속에 있는 거요.
만약에 남편에게 있다면
어떻게 그 원수 같은 남편이 그냥 그대로 불보살이 되겠어요.
그 남편은 원수도 아니고 불보살도 아닌데,
내가 원수 같은 마음을 내니 원수가 되니,
내가 불보살 같은 마음을 내니 불보살이 되는 거요.
깨닫는다는 것은 불보살의 마음을 내는 거거든.
자,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불행히 닥치지 않기 위해서 지금 기도하죠? “남편 다 내말 잘 듣게 해주세요. 애들 내말 잘 들어서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 재물은 많이 모이게 하주세요. 하는 장사마다 다 잘되게 해주세요. 병고 없이 해주세요.”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 이것은 뭔가 얻겠다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만, 목표가 그런 식으로 해서 행복해 지는 게 아니고, 뭔가 깨달아야 행복해진다. 이런 사람은 이런 기도 안 합니다.
이런 갖가지 재앙이 확 밀어닥치면 뭐할 기회가 많다? 깨달을 기회가 많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비가 오면 방안에서 나가기 싫은 사람은 “아이고, 비가 왜올까?” 이러지만, 농사짓는 사람은 비가 와야 좋은 거요. 비가 와야 우장 삿갓입고 나가서 천수탑에 물대서 모두 심고 이런 일이 있는 것처럼,
이런 갖가지 소위 세상에서 말한 그런 불행이라는 것,
그런 장애라는 것인 즉, 마장이라는 것이 다 뭐의 계기가 된다?
깨달음의 계기가 되고,
인연법을 알면 다 지어서 받는 거니까,
이왕지 받을 바에야 빨리빨리 받아서 해치우는 게 좋다.
빚이 없는 줄 알았을 때 빚이 있다면 조금 덜 먹고 해서 빨리빨리 갚아버리자. 이자 늘기 전에. 이런 생각을 딱 하니까, 마장이 장애가 불보살의 은혜임을 알아버리는 거요. 그럼 이 세상에 겁날 일이 있겠어요? 없겠어요?
마장이 불보살의 은혜인 줄 알아버린 사람은
세상에 아무 두려움 없어져버려.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별 상관이 없어요.
마장이 높으면 높을수록
크면 클수록 뭐가 높아져간다?
깨달음의 높이와 깨달음의 깊이가 커져가는 거요.
원력이 커져간다.
그러니 일단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일은 “아, 인생은 괴로움이다.” 이것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 들여야 한다하면 좀 강요 같죠. 강요가 아니고 찬찬히 살펴보고 “아, 인생을 살아가면서 괴로움이 늘 떠나지 않구나.”
인생이 괴로움이다. 고해다.
이렇게 아는 게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첫 번째 진리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우리는 “왜 사람이 괴로울까?”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죠. 이게 괴로움인 줄 모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이게 괴로움이다 알면 “그럼 왜 괴로울까?” 이거요.
이런 괴로움이 왜 생겼을까?
이런 괴로움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런 괴로움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런 생각을 하고, 그런 말을 하고,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올 수 밖에 없는데도,
나는 그런 게 올 거라고는 전혀 몰랐던 거요.
즉,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도 나는 몰랐다 이거요. 내가 스스로 자처해 놨는데도 “내가 왜 이런 것을 청했어?” 이렇게 된단 말이오. 쥐가 쥐약을 먹을 때는 바로 쥐약을 먹는 것 보면 옆에서 구경하는 사람은 저거 죽을 거라는 거 알아요? 몰라요? 알지. 저거 먹으면 배 아프다가 목마르다가 뒹굴다가 죽는다 하는 거 다 알죠. 그런데 누가 몰라요. 쥐만 몰라.
여기 있는 청년들이 둘이 와서 “스님, 우리 둘이 결혼하겠습니다.” “너 뭣 때문에 결혼하려고 그러니? 여자가 왜 좋아?” “이래 좋습니다.” “너는?” “남자가 이래 좋습니다.” 딱 보면 “아, 이거 쥐약 먹었구나.” 뭣 때문에 좋으냐? 하는 그 좋아진 특징이 뭔지를 탁 보면 벌써 이것은 삶이 어떻게 되겠다. 1년을 못가겠다. 억지로 살면 하나가 죽겠다. 이렇게 나오는 거요.
쉽게 말하면 ‘남자가 단명할 인연이 있다.’ 그러면 그런 남자는 그것을 극복을 하려면 어떤 여자하고 결혼을 해야 되느냐가 있단 말이오. 그런데 여자를 딱 보면 ‘혼자 살 팔자가 있다.’ 그런데 딱 둘이서 눈이 맞습니다. 절대 다른 사람하고는 눈이 안 맞아. 둘을 떼어놓으면 딴 데가서 그런 사람을 찾아요. 그러니까 지남철에 못이 붙죠? 나무가 붙습니까? 안 붙습니까? 안 붙어. 못이 딱 달라붙는단 말이오.
그런데 그때 말리면 어때요? “스님은 혼자 사니까 우리 결혼하는 것 갖고 질투한다. 스님은 결혼 안하는 주의다. 혼자 살려면 자기나 혼자 살지 왜 남까지 못살게 하냐?” 이 심성 쓰는 것을 보면 이게 남하고 살 수가 없는 심성이 있어요. 여러분 다. 그러니까 살면서 갈등이 생기는 것은 그렇게 둘이 살면 안 되는 서로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그럼 바꾸면 되지 않겠냐. 자기한테 맞는 사람.” 아니에요.
늘 쥐약을 먹게 되요. 선을 30명을 딱 보고 30명 중에 제일 좋은 사람을 골라놓고 살아보면, 30명 중에 제일 안 맞는 사람이 딱 찍혀 있어요. “스님은 안보고 어떻게 합니까?”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 고르는 방향에 이미 딱 그렇게 맞게 되어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별거 아닌 거 갖고 여러분들, “아, 스님 그것을 어떻게 알아요?” 이래.
어떤 거사님이 저하고 얘기를 하는데 한 시간 동안에 담배를 빡빡 5대나 피워. 그럼 제가 “거사님 어제 담배 한 갑 피웠죠.” 이러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지. 그럼 여러분들이 “스님, 그것을 안보고 어떻게 합니까?” “거사님은 내일 또 담배 한 갑 피울 거야.” 이러면 맞아요? 틀려요? 맞지. 내일 일을 어떻게 압니까? 아, 그것은 다 알 수 있어요? 없어요? 다 알 수 있어. 그것보다 더 쉬워.
높은데서 바가지에 물을 부으면 저 아래 있는 사람 아직 물이 안 왔죠. 그런데 “야, 조금 있으면 물내려간다.” 이러면 밑에 있는 사람은 “정신 나갔나? 물이 어디서 온다고 그런 소리 하니?” 이러지만, 조금 있으면 갑니까? 안 갑니까? 가지. 그것은 원리란 말이오. 그것은 아무것도 이상한 게 아니오. 그런데 쥐가 쥐약을 먹을 때 말리면 큰일 나. 놔둬야지. 말리는 방법이 뭐요? “아이고, 기도 좀 더 하슈” 이러죠. 그냥.
자, 그러니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치, 이것을 보통 인연법이라고 그러죠.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들어보셨죠? 사물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그 원인과 조건이 만나서 그런 결과가 나오는,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동글동글한 거 그걸 심었는데 “거기 무슨 잎이 달렸다고? 이것은 콩이고 이것은 팥이고 당신이 어떻게 압니까?” 하는데 농부는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알 수 있어.
보리수나 콩씨나 똑같거든요. 두 개의 모양과 크기도. 그런데 요것은 심으면 요만큼 자라고 잎은 요렇게 생기고, 열매는 요만큼 열리고 1년 만에 죽어. 요것은 심으면 500년씩 자라고 크기는 이만해져. 이러면 아니 그것을 보고 어떻게 압니까? 그 안에 뭐가 쓰여져 있는데, 보기에 똑같은데. 그래도 알죠. 그런데 씨앗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그것 참 신기하죠. “야, 저것을 어떻게 알까?” 하지만, 그것은 그 안에 유전 인자가 있어 그렇게 되도록 다 그 안에 설계도가 다 나와 있단 말이오. 그게 왜 이상합니까? 아는 게 너무 당연하지. 모르는 게 당연한 게 아니라니까. 아는 게 당연한 거지. 왜 모르노? 우리가. 훤한 그 이치를 왜 모르느냐? 제정신이 아니오.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이것을 점잖은 용어로 표현한 게 뭐요? 전도몽상.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전도라는 것은 거꾸로 되었다 이 말이죠. 몽상은 꿈꾼다 이 말이오. 그게 ‘미쳐서 제정신 아닌 상태다.’ 이 말이오. 왜 그러냐? 왜 미치고 제정신이 아니냐?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어떤 물건을 훔치거나 어떤 일을 저질렀을 때, “당신 왜 그랬냐?” 이러면, “욕심에 눈이 어두워.” 그런 말 들어보셨어요?
순간적인 어떤 물질이나 이런 데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눈에 뵈는 게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욕심에 꽉 차면, 눈이 어두워져버려요. 즉, 안 보인다. 눈이 갑자기 시력이 떨어졌겠어요? 아니죠. 그러니까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고 “나는 판검사와 결혼할 거야.” 그렇게 사람에 욕심을 내면, 어느 날 고등학교밖에 안 나온 사기꾼이 양복 탁 입고 “나 사법연수생이다” 이러면 몸도 주고 돈도 빌려주고 이런 일이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생기죠. 그런데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 안 보이는 거요.
그런데 지나놓고 나중에 보면 그 사람 한 말이나 행동을 보면, 얼토당토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없어요? 알 수 있어. 그런데 순간적으로 눈이 어두워지면 안 보이는 거요. 이게 미친 상태란 말이오. 욕심에 눈이 어두워.
두 번째 또 어떨 때 눈이 어둡다고 그래요?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게 없더라.” 이러죠. 그런 말 써요? 안 써요? 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로 소중한 게 목숨이거든요. 강도가 와서 죽이겠다 그러면, 다 가져가라 그러죠. 그 아까운 재물 다 가져가라 그래요. 살려만 달라 그래.
이렇게 소중한 목숨을 두 부부가 서로 싸울 때, 남편이 화가 대게 나면 아내를 “죽여 버리겠다.” 이렇게 말을 해요. “이게 그냥” 이렇게 하면서 죽여 버린다고 그러죠.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목숨을 또 어떻게 합니까? “그래, 한번 죽여 봐.” 이렇게 나와요. “찌른다.”이러면 “찔러” 이런단 말이오. 이것은 바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에요. 제정신이면 “찌른다” 소리도 하기 어렵지만, “찔러” 소리는 더더욱 못한단 말이오. 그런데 이때는 뭐에 눈이 어두워버렸다? 화에. 화가 나서 헷가닥 해버린 거요. “설마 찌를까?” 이래서 그냥 큰소리치는 게 아니오. 정말 그때는 “죽어도 좋다.”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오. 순간적으로.
이것을 탐진 이라고 그래. 욕심에 눈이 어두운 것을 뭐라고? /탐/ 화가 나서 눈이 어두운 것을 /진/ 어리석어서 눈이 어두운 것을 /치/ 탐진치에 중독이 되어서, 그냥 마음이 헷가닥 해버린 거요. 그래서 이 3가지를 뭐라고 그럽니까?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이다. 이래서 /삼독심/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아이고, 밥 먹고 싶다.” 이런 것 갖고 탐심이라고 말 안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 먹고 싶은 생각에 빠져서 안보여 버리는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증상은 시장에 오늘 5천원어치만 물건 사러 나갔다가 물건을 보는데 눈이 팔려서 그냥 카드를 긁거나 남의 돈까지 빌려서라도 물건을 산 경우가 있고, 집에 와서 괜히 샀다는 경우가 있죠. 이런 게 다 욕심에 팔리는 거요.
이런 것을 심리분석하면 어릴 때 욕구불만이 있었거나, 가지고 싶었던 것을 못 가졌거나 , 이렇게 분석하면 밑바닥에 거기에 뭔가 중독이 된, 그런 게 도사리고 있어요. 우연히 나타는 것 같지만 안 그렇습니다. 이것이 꼭 쉽게 얘기하면 물질로 얘기하면 마약에 중독된 것 하고 같아요. 즉, 아편에 중독이 들죠. 그러면 옆에 사람이 보면 저거 아편피우고 중독이 들면 건강 해친다는 것 압니까? 모릅니까? 알죠. 저렇게 되면 앞으로 재산 탕진할 거라는 거 알죠. 가정파탄 일어날 거 알죠. 그런데 본인은 거기에 중독이 딱 되면 거기에 꽉 사로잡혀버리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는 것을 잘 못 알아채요. 또 건강이 나빠지는 것 알아도 멈추지를 못해.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논밭전지를 다 팔죠.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마누라까지 팝니까? 안팝니까? 팔아. 자식까지도 팔아버려. 이게 중독된 현상에서 나타나는 거란 말이오. 중독이 되면 몰라요.
그런 것처럼 우리는 바로 탐진치 삼독에 중독이 되어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욕심 안내고 어떻게 살아? 화 안내고 어떻게” 이렇게 말하잖아요. 왜 그럴까? 거기 중독이 되었으니까. 담배에 중독이 된 사람은 “담배 안 피우고 무슨 재미로 사노?” 이렇게 말한단 말이오. 그런데 또 “그게 쉽게 끊기나?” 이러잖아요.
그러나 담배 안 피우는 사람 입장에서 볼 때는 담배 그거 피워봐야 백해무익이잖아. 그죠? 또 끊기가 쉽겠어요? 어렵겠어요? 그 사람은 어렵다 하지만 쉽죠. 뭐하면 됩니까? 안 피우면 되지. 어떻게 안 피우나? 어떻게 안 피우기는? 그냥 안 피우지. 그거 뭐 방법이 있어요? 그냥 안 피우면 되지.
그런데 중독이 되면 그게 안 돼요. 중독이 되면 방법론을 찾습니다. 자꾸. 여러분들 수행에도 자꾸 방법론을 찾거든요. 집착을 놔라. 집착이 괴로움의 근원인 줄 알면 그냥 집착을 놓으면 되는데, “어떻게 놓습니까? 놓기는 놔야 되는데 안 놔지는데요.” 이 말은 이미 중독이 되어있는 거요.
중독이 되면
끊임없이 방법론을 찾는 거요.
자, 그러면 그럼 사람이 왜 이렇게 삼독에 물드느냐? 왜 멀쩡한 사람이 담배를, 원래 태어날 때 담배 피웠습니까? 안 피웠습니까? 안 피웠는데 담배를 피우죠. 멀쩡한 사람이 아편을 피워서 거기 중독이 들면 중독이 든 사람은 거기서 반복이 된다는 이해가 되는데, 왜 처음에 피우느냐? 이거야. /왜 사람이 탐진치 삼독에 물들게 되느냐?/ 물어봐야 될 거 아니오. 그죠?
우선 화내는 것부터 얘기를 하면요, 화가 왜 나느냐? 이런 거 하고 관계가 있어요. 여러분들은 생각이 늘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일어나죠. 이런 저런 생각이 일어나죠. 갖가지 생각이 일어나고, 그 생각이 이런 판단 저런 판단, 이런 분별 저런 분별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늘 자기 생각이 옳은 것 같죠. “아니 사람 생각 틀릴 수는 있죠 뭐.” 이렇게 말은 하지만, 아니에요. 내 생각이 틀리면 안 되죠. 틀린 생각을 뭣 때문에 해요? 늘 옳은 생각만 해야지. 내 생각이 옳다. 이거요. 내 생각이 옳다. 내 의견이 옳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어떤 얘기를 할 때 딱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안 들어요? 들죠. 그것은 당신 생각이 뭐했다? 틀렸다 이거요. 이것을 뭐라고 그러냐? /아집/이라고 그래요. 아집. 뭐라고요? 아집이라고 그래. ‘내 생각이 옳다’ 하는 이 심리 현상, ‘내 생각이 옳다/ 하는 이 심리현상을 아집이다. 이렇게 말해요.
두 번째 남이 내 옷을 입거나 뭘 만지거나 하면 뭐라고 그럽니까? “아니, 이게 누군 건데 함부로 손을 대.” 이러죠. 누구 거라는 거요? 내거다. 이거야. 내거. 그러니까 이런 얘기 있지 않습니까? 홍수가 나서 논밭이 다 떠내려갔단 말이오. 그러니까 온 동네 사람이 나와서 울고불고 야단이오. 그런데 거지 아들은 천막에서 나와서 물 구경을 하다 보니 다 우는데 자기만 울 일이 없단 말이오. 그래서 아버지한테 “아버지 아버지.” “왜” “우리는 울 일이 없네요.” “임마, 그거 다 너희 애비 덕택인 줄 알아라.”
내 것이다 이거요. 내거다. 여러분들이 살면서 뭐든지 내것다. 네 거다. 그러니까 똑같은 집에 불이 났는데도 내거다 하는 생각에 잡혀 있는 사람은 울고불고 불속에 뛰어들고 난리인데 다른 사람들은 구경하죠. “저기 붙었다.” 이러면서 다 싱글벙글 하고 구경한단 말이오. 똑같은 집인데. 집에 불이 났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오. 내 것이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생기는 거요.
그래서 영화를 볼 때도 아내 있는 남편이나 남편 있는 아내가 딴 여자나 딴 남자하고 놀아도 재미있잖아요. 연속극에서는. 남의 것 구경할 때는. 그런데 자기 부인이나 자기 남편은 누구하고 만나 식사만 해도 눈이 뒤집어 지는 거요. 내거다. 이거야. 내거다.
세 번째 더 좁히면 ‘나다.’ 이거야. ‘나다.’ 여러분들 입만 뻥긋하면 내가 누군데. 이게. 이러잖아. 내가. 내가 누군데. 나다하는. 내 것이다 이것을 한문으로 뭐라고 그럴까요? /아소/ 이래요. 뭐라고요? 아소. 또는 /아소유/ 이렇게 말해요. 나다. 이것을 아라고 그래. /아/ 그래서 우리들의 근본 무지는 탐진치 삼독이 일어나는 그 이전에 근본 무지는 어디 있느냐? 아와 아소와 아집에 있는 거요. 이 아와 아소와 아집을 다 통털어서 한마디로 뭐라고 한다? 我아, 이렇게 말해요. 아. 나다. 나다 하는 것이 내 거다. 내가 옳다. 이런 거요.
여기로부터 시작해서 내거다 하니까 당연히 어때요? 내거는 어떻게 해야 된다? 많이 가져야 되겠죠. 내 의견은 어때요? 옳으니까 관철이 되어야 되겠죠. 그런데 내 것을 많이 가지려는 게 재벌로 가는 길이고, 내 의견이 관철되는 게 독재로 가는 길이란 말이오. 그러겠죠. 여러분들이 다 재벌 되고 싶고, 부자 되고 싶고, 다 임금 되고 싶잖아. 두 개 다 합하면 더 좋죠. 그게 왕이잖아. 왕. 이렇게 나아가는 거란 말이오. 그러면 근원적으로 아다. 또는 아소, 아소유, 또는 아집. 그러니까 아와 아소 또는 아소유에요. 아집. 이
我아라고 하는 그것이 보니까
괴로움의 근본이오.
그러니까 ‘나다’ 하는 것에 사로잡힘.
사로잡힘을 집착이라고 그래요.
‘나다’ 하는 거에 사로잡히거나
또는 ‘내거다’ 하는 것에 사로잡히거나,
내가 옳다하는 데 사로잡히면
바로 탐진치 삼독이 일어나는 거요.
탐진치 삼독에 물들면 중독이 되는 거요.
이 중독이 된 상태를 업장이라고 그래요.
뭐라고요? 업장. 그러니까 업장은 업력을 불러일으켜. 스스로 힘을 일으켜서 업력을 불러 일으켜. 담배에 중독이 되면 그놈이 담배를 피우고 싶은 마음을 끌어 잡아 당겨. 거기 끌려가 또 피워. 그래서 또 재산을 또 쌓아. 업장을 또 만들어. 그래서 그의 과보로 괴로워하는 거요. 이렇게 굴러간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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