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그런데,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데,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정말 내 생각이 옳은가? 이 근본, 이 괴로움의 근원을 추구해서 근본으로 돌아온 게 아, 아소, 아집이란 말이오. 이게 밑바닥에 딱~ 깔려있단 말이오. 이게 우리가 말하는 다른 말로하면 저 아뢰야식이란 말이오. 저 밑에 우리들의 의식을 일으키는 모든 것들의 밑바닥에 이게 딱 달려있단 말이오. 이것으로 누구를 삼는다? 나로 삼는 거요.
그런데 하나씩 살펴보자. 정신을 차려가면서 살펴봅시다. /과연 내 생각이 옳은가?/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은 누구나 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죠. 여러분들 생각 안하고 싶다고 안 일어납니까? 아니죠. 생각은 일어나죠. 느낌도 일어납니까? 안 일어납니까? 일어나죠. 그런데, 사람마다 같아요? 달라요? 사람마다 같아요? 달라요? 다르죠. 이 다르다는 말 속에는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있다. 이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무의식중에 같아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해요. 우리는 부부니까 생각이 같아야 한다. 견해가 같아야 한다. 이래요. “남일 때는 다를 수도 있지.”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데, 가까이 있으면 있을수록 “너하고 나하고는 같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이 들어요. 같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 그런데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갈등이 생기겠어요? 안 생기겠어요? 생기죠. 같을 수 없는 것을 같아야 한다고 잘못생각을 했다. 이 말이오. 이게 착각이오.
다른 것을 같다고 거꾸로 생각을 해버리니까 같아야 되는데, 안 같아진다. 본인이 이렇게 생각하는 거요. 그럼 사람의 생각은 왜 다릅니까? 살아온 환경이 다르니까 다르죠. 다른 거요. 이 방안에 있는 사람이 다 여기 있는 법륜스님이 어떤 사람이냐? 해서 관찰해서 평가를 내리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 달라. 왜 그러냐? 각자의 업식이 다르기 때문에 그런 거요. 각자의 안경빛깔이 다르기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다 달리 보이는 거요.
조금씩 조금씩 다르다는 것은 이 중에 누구하고는 조금 더 비슷하고, 어떤 것은 주황하고 노랑하고 비슷한 면이 있죠. 그러나 푸른 색깔하고 파란 색깔은 좀 비슷한 면이 있잖아. 그죠? 그러나 붉고 푸른 것은 전혀 다르죠. 그러니까 영 다른 사람도 있고, 비슷하거나 같은 사람이 있고 이런 차이가 있지 다 달라.
자, /내거다./ 여러분들 태양은 누구 거요? 내거요? 아니죠. 그 다음에 공기는 누구 거요? 내겁니까? 내거요? 아니에요? 그럼 물은 누구 거요? 빗물은? 내거요? 땅은 누구 거요? 내 거요? 그런데
내거 아닌 것들이 모여서 나무가 되고 풀이 되고,
내거 아닌 것들이 모여서 나무와 풀이 되었으니 내거요? 아니오? 아니겠지.
내거 아닌 풀들을 먹고 자라는 것들이니까 내거요? 아니오? 내거 아니겠지.
사실은 내거 같지만 엄밀히 분석을 해보면 지금 제가 이렇게 얘기하는 게 귀에 안 들어올 거요. 내거라고 하는 것은 그냥 착각이에요.
여러분들 보고 이 볼펜 누구 거요? 스님 거요. 이러잖아. 그럼 지금 사무실에서 가지고 내려왔어요. 그럼 누구 거요? 그럼 사무실 건 가 봐요. 사무실에 가서 이거 어디서 생겼어요? 이러니까 어제 신문 기자가 쓰고 놔놓고 갔데요. 그럼 이거 누구 거요? 신문 기자 꺼요? 신문 기자는 이거 어디서 났어? 하니까 취재 갔다 쓰다 그냥 가져왔데요. 이렇게 추적을 해 가봐요. 내 것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태양은 내거 아니니까 누가 햇빛을 쬐도 시비 안하죠? “넌 나쁜 놈이니까 태양빛 쬐지 마. 넌 나쁜 놈이니까 숨 쉬지 마.” ‘숨 쉬지 마.’ 이런 것은 있습니다. 사형을 시키는 것은 “너 나쁜 놈이니까 숨 쉬지 마.” 이런 거거든요. “너 나쁜 놈이니까 먹지 마.” 이렇게 잘 안합니다.
필요한 사람이 쓰는 거요.
필요에 의해서 쓰이는 거란 말이오.
세상 만물은.
그런데 자 자기 거라고 착각하죠.
자기 거라면 왜 죽을 때 못 가져가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과거전생에 처음 발심을 해서 보살의 길로 들 때 첫 번째 사건이 뭔지 아세요? 위로 조상의 7대가 돈을 모으고 모아서 엄청나게 모아서 자기 아버지 대에 최고 부자가 되었어요. 그런데 그 아버지가 갑자기 죽어버렸어요. 그리고 그 재산이 다 자기한테로 넘어 왔어요.
그때 이 청년이 생각하기를 “왜 아버지가 이 중에 이렇게 7대를 모은 것 중에 동전 한 닢도 못 가져갈까? 이것은 내게 될 수가 없는 거구나. 그럼 왜 내거 아닌 것에 이렇게 집착해서 허송세월을 보내야 하나.” 그래서 왕에게 말하고 가난한 사람에게 다 나누어줘 버리고 ‘참으로 나라는 게 뭘까?’ 이래서 숲속에 가서 공부한 게 그게 선해 동자가 그때 시대가 연등부처님이 계신 시대인데, 아직 부처님 만나기 전인데 첫 발심한 계기가 그래요.
/나다./ 이러죠. “네가 누구냐?” “법륜입니다.” “법륜이? 법륜이가 너냐? 네 이름이냐?” “내 이름이요.” “그럼 넌 누구니?” “몸뚱입니다.” “누구 몸뚱이?” “내 몸뚱이요.” “내 몸뚱이 할 때 내가 누구냐?” 이렇게 자꾸 ‘내가 누구냐? 내가 누구냐?’ 그 ‘나’라는 게 뭐냐? 이거야. 이렇게 들어가 보면 이제까지 ‘나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렇다면 정말 ‘나’라는 게 뭐냐? 이거야. 나, 나 하는 게. 이렇게 우리가 그 근원을 정신 차리고 살펴봐야 됩니다.
우리 선사들의 얘기에 이런 게 있죠. 스승을 찾아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수만리 길을 스승을 찾아왔어요. 해탈의 길을, 법의 진리를 물으려고. 그렇게 스승이 계시는 절에 당도를 해서 그 방문 앞에 서서 얼마나 감개가 무량하겠습니까? 그래서 밖에서 “스승님” 했어. “스승님” 하면서 문을 척 열고 들어갔는데 스승님이 벽력같은 소리로 물었어. “어떤 물건이 여기 왔는고.” 이랬어. “어떤 물건이 이렇게 왔는고?” 오기는 왔어요? 안 왔어요? 오기는 왔죠. 오기는 분명히 왔어. 산 넘고 물 건너 왔는데, 어떤 물건이 왔는고? 하는데 대답할 말을 잊어버렸어.
“법륜이가 왔습니다.” “이름이 왔어?” “몸뚱이가 왔습니다.” “시신을 매고 왔어?” “생각이 왔습니다.” “귀신이 왔어?” 할 말을 딱 잊어버린 거요. 이제까지 배운 어떤 지식도 어때요? 아무 쓸모가 없어. 그냥 콱 막혀서 깜깜절벽이 되어버렸어. 일체의 사량 분별로서는 뭐라고 할 수가 없어져버렸어. 이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뭐요? “네가 누구냐?” 이 말이죠. “너라는 게 뭐냐?” 이게 뭐요? “시삼마. 이것이 무엇인가? What is this? Who are you?” 콱 막혀버렸어.
그러다가 7년이 지난 뒤에, 그래도 경전은 ‘잠시’ 그래요. 잠시 후에 그가 돌아왔어. 7년이 지난 뒤에 왔어. “스승님” “왜?” “한 물건이라 해도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났어.
자, 부처님이 계시는 데, 인천사람 3명하고, 수원사람 2명하고, 춘천사람 1명, 6명이 부처님 계신데 와서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문 밖에 부처님과 신도들이 대화하는 것을 문 밖에서 들어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물어요.
“부처님, 저는 저희 집에서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동으로 가거라.”
또 옆에 있던 한 사람이
“부처님, 저는 저희 집에서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문밖에 있던 내가 머리를 굴려서 “저거 물을 게 뭐 있어? 동으로 가면 되지.”이러는데 부처님이 “너는 북으로 가거라.” 이러는 거요. 부처님이 헷갈리게 말하고 있어. 질문이 똑같아서 “저는 저희 집에서 서울을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똑같이 물었는데 한번은 “동으로 가거라.” 한번은 “북으로 가라.” 이런 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통밥을 굴려봤어. “동, 북, 이번엔 서겠구나.”
그런데 그 다음 사람이
“부처님, 저는 저희 집에서 어디로 가면 서울 갑니까?” “그거 물을 필요 뭐 있어. 난 답 알아. 뭔데? 서.” 그런데 부처님이 “동으로 가거라.” 이런단 말이오. 헷갈리죠. 계속 동동동이든지, 동북서든지 이래야 되는데, 동북 또 동이란 말이오.
그래서 또 한 사람이
“부처님 저는 서울로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그러니까 “동북동 동일까? 북일까? 헷갈린단 말이오. 그래서 동 아니면 북인데, 에이, 북일 거야.” 이렇게 탁 잡았는데, 부처님께서는 “너는 서쪽으로 가거라.” 이러는 거요. 헷갈리죠.
그래 또 다음 사람이
“부처님, 저는 어디로 가면 서울로 가면 되겠습니까?”하니까, 이제 다 나왔죠. “아, 이번엔 남이겠다.” 이렇게 딱 찍었는데, 부처님께서 역시 또 “너는 동으로 가거라.” 이러는 거예요. 또 안 맞았어. 그래서 가만 보니까 동쪽으로 지금 몇 사람이 나왔어요. 3사람 나왔죠. 빈자리가 남쪽만 비었어.
또 “부처님 저는 어디로 갑니까?” 야, 인마, 너는 물으나 마나 남이야. 이러니까 부처님이 “북으로 가거라.”
첫째 복잡해요? 안 복잡해요? 복잡하지. 확실해요? 애매모호해요? 애매모호하지. 쉬워요? 어려워요. 어렵지. 그러니까 불교는 “아이고, 복잡하고, 어렵고, 헷갈리고” 이렇다 이거요. 그런데 정말 그럴까?
첫 번째 물은 사람은 인천 사람이었어요. 동, 맞죠.
두 번째는 수원사람이 물었어. 북 맞죠.
세 번째 사람은 인천 사람이 물었어. 동이오.
네 번째 사람은 춘천 사람이 물었어. 서죠.
다섯 번째 사람은 또 인천 사람이 물었어. 동이죠.
여섯 번째 사람은 수원사람이 물었어. 북이오.
이게 맞는 거요? 계속 동이라고 말해야 맞는 거요? 이래야 맞지. 그래요? 안 그래요? 그래. 이래야 맞는 거요. 이게 뭐가 어려워요? 여러분들도 이 사람이 어디 사는 줄 알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어요? 없어요? 있죠.
여기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되요. 서울이 어딘지를 알고, 이 사람이 어디 사는 줄을 알면 만 명이 물어도 대답해 줄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 만 명이 다 같을 수도 있고 다 다를 수도 있어요. 정해져 있어요? 안정해져 있어요? 안정해져 있어.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정해져 있지 않다. 이것을 금강경에서 뭐라고 그래요? 무유정법이라고 그래. 다르마는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자님께서 뭐라고 그랬어요? 도는 도라 하면 이미 도가 아니다. 이러잖아요.
그럼 무유정법, 정해져 있지 않다. 법이라는 것은 정해져있지 않다 하니까, ‘정해져 있지 않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정해져 있지 않다. “아. 없다는 뜻이네요.” 서울 가는 길이 없습니까? 있습니까? 있죠. 없다는 뜻이 아니오. 그것을 ‘없다’ 이렇게 해석한 게 한쪽으로 치우친 잘못된 망념이오. 그러면 서울 가는 길은 동북서 남북, 막 부르니까 “아,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 말은 아무렇게 가면 된다. 아무 방향이나 가면 된다. 이 말이구나.” 아무 방향이나 가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지. 이 말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가면 된다. 또는 없다. 이런 식으로 멋대로 생각을 하니까 불법이 어렵고 까다로운 거요.
서울 가는 길은 정해져있지가 않다.
그러나 자신의 위치만 정해지면
저절로 서울 가는 방향은 정해집니까? 안정해집니까? 정해지죠.
그러니까 무유정법으로 인해서 갖가지 방편이 나오는 거요.
8만4천 가지 방편이 나온다.
그러면 부처님의 말씀은 방편이죠.
부처님은 저희 집에서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 동으로 가거라. 저는요? 너는 북으로 가거라. 저는요? 너는 동으로 가거라. 저는요? 너는 서로 가거라. 저는요? 넌 또 동으로 가거라. 저는요? 북으로 가거라.
억 만 명이 와서 물어도 힘들어요? 안 힘들어요? 하나도 힘 안 들어. 그냥 술술술술 나와. 거울에 물건이 오면 비치듯이. 이게 방편이오. 그래서 방편이 자유자재하다.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법문 하는데 힘이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들어. 그냥 가만히 앉아 거울에 물건 비치듯이 그냥 나와.
중생의 근기 따라 나오는 거요. 근기 따라 이러니까, 인천 사람이 근기가 여기 높아요? 춘천사람이 높아요? 수원사람이 높아요? 그런데 중생의 분별심은 이 근기에다 또 높고 낮음을 붙여요. “아이고 그 사람은 근기가 높아서, 나는 근기가 낮아서.” 또 이런 말을 해요. 근기에는 높고 낮다는 말이 없어. 근기는 다만 뭐하다? 다를 뿐이오. 근기는 다르지, 높고 낮음이 없어요.
그러면 8만 대장경을 분석하니까 동쪽으로 가라는 게 3경이 나오고, 북쪽으로는 2경이 나오고 북쪽으로 가라는 게 1경이 나와. 그러니까 다수로 따져서 동쪽이 진리다. 이게 테라밧다가 주장하는 거요.
아니다 동쪽으로 가라는 것 3번 나오니 이것은 쉬운 일이고, 이것은 유치원생 얘기고, 북쪽으로 가라는 것은 2번 나오니 이것은 중학교 과정이고, 서쪽으로 가라는 것은 딱 한번밖에 안 나오니 이건 대학원 과정이다. 화엄경, 이게 최고다. 아니야. 법화경 이게 최고다.
그런데 누가 와서 물으면 만약에 의정부 사람이 지금 나한테 와서 물었어. “서울 가려면 어디로 갑니까?”하니까 “아마도 동쪽일걸, 경전에 보면 동쪽이 많던데.” “아니야. 진짜 서울 빨리 가는 길을 서쪽이야.” 이러면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안 맞아. 경전에 없더라도 너는 어느 쪽이다? 남쪽이다. 이 남쪽인 줄 알아야 이게 불법을 제대로 아는 거란 말이오. 이게 선이오.
그러면 남쪽으로 가는 것만 능사요? 아니겠지. 여긴 또 어떻게 주장 하냐? 본래 정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표시가 없는 게 진짜라는 거요. 그러니까 남쪽이 진짜라는 거요. 이래서 또 종파를 만들어. 제 말 이해가 되세요?
그러니까 길에는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다. 쉽고 어렵고는 그가 받아들이기 따라 다른 거요. 높고 낮음도 없어. 불법이 어떻게 높고 낮음이 있어? 부처님 법이 어떤 게 높은지 어떤 게 낮은지 안다는 것은 자기가 부처님 보다 높다는 얘기 아니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생각을 버리고 부처님 법을 받아들여야 깨달을 수가 있는데, 자기 생각을 가지고 부처님 교리를 해석해서 이것은 높고 이것은 낮고, 이것은 초등학교 과정이고 이것은 대학교 과정이고, 이것은 뭐요? 망상이오. 망상. 여러분들은 그 망상의 종파주의에 빠져있으니까 불법을 통달하기가 어렵지 않겠느냐?
그러니 어느 한 경전을 읽어도 “이 사람이 어떤 처지에서 어떤 마음에서 어떤 입장에서 질문을 했는데,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아, 이게 무슨 의미일까?’” 이렇게 두세 케이스만 경전을 읽으면 “아, 이런 말씀이구나.” 이게 탁 통한단 말이오. 그러면 나머지 케이스는 딱 적용해보면 다 맞아. 그래야 다르마를 체득하는 거란 말이오.
이거 동이 몇 가지고, 서가 몇 가지고, 북이 몇 가지고, 남은 없다. 이렇게 해서 박사학위 논문은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현실에 있는 사람이 와서 질문했을 때, 자기 인생에 대해서는 한마디 대답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린 지금 박사학위 논문 따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니란 말이오.
자, 그러면 오늘 공부한 것을 한번 살펴보면, 이것을 교리적으로 정리한 게 뭐냐? 근본가르침은 무아, 무소유, 무아집.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그러면 우리들의 고뇌의 뿌리가 아, 아소, 아집에 있는데, 이 그것이 본래 아라고 할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 이것을 소승불교에서, 즉 원시불교에서는 /무아/다. 이렇게 말하고, 대승불교에서는 뭐라고 말해요? 공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것의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길은 정해져있습니까? 안 정해져있습니까? 안 정해져있죠. 그러나 형편에서 보면 아주 간단하게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쪽도 저쪽도 집착하지 말고 놓아버려라. 이거야. 탁 놔버리면 바로 갑니다. 이것이 /중도/다. 이거야. 그 중도에 8가지 길이 있다 해서 /8정도/라 하는 거요. 그것을 금강경에서는 뭐라고 한다? /무유정법/이다. 또 대승에서는 이 길도 다른 말로 /공/이다. 공은 없다는 말이 아니란 말이죠. 공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말도 아니에요.
이것이 괴로움이다 라고 깨닫는 것을 뭐라고 그래요? 고의 성제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집의 성제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텅 비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게 멸의 성스러운 진리이며
거기에 이르는 이것이 거기에 이르는 길이다. 이게 도의 성제다.
그래서 현실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서 원인이 나오고,
궁극적인 도달할 목적지가 나오고,
그 다음에 구체적인 실천으로서
우리가 가야할 길이 나오는 것을
4가지 성스러운 진리다 해서 뭐라고 한다?
/사성제/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사성제라는 교리를 외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 삶에서
아, 이게 고구나.
이거의 원인은 이거였구나.
더 살펴보니 텅 비었구나.
아, 그러면 이렇게 집착 없이 나아가면
그 텅 빈 자리를 체득을 하겠구나.
이렇게 해서 바로 “이게 괴로움이구나.”하면 이렇게 나아가야 되겠구나하고 길이 바로 열려버리는 거요. 그렇게 나아가는 단계에 있어서의 조금 분석적으로 단계가 하나하나 가다가, 척 고다하면 바로 도에 턱 가버려서, 멸해져가는 단계로 가면 그게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렇게 말하죠. 그렇게 올라가는 거요.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거요. 어려울 게 하나도 없어.
오늘 아침에 파먹고 왔는데, 파먹고 왔다고 안 될까? 오늘 양파 먹고 왔어. 이게 이해가 안 될까? 오늘 아침에 소고기국 끓여 먹고 왔어. 이게 이해가 안 돼요? 오늘 아침에 죽 먹고 왔으면 이해가 될 텐데. 그런 거 아니오. 지금 우리가 집중해야 할 초점을 탁 잡아서 공부를 해야 된다.
자, 그러면 마지막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막 괴로워서 찾아온 사람에게 부처님이 뭐라고 턱 말씀하시니까, “괴로워요.” 하는데, 그냥 얼굴이 환하게 밝아져버린단 말이오. 순식간에. 저처럼 이렇게 2시간씩 얘기 안하고, 이것은 다 남이 깨달은 찌꺼기를 가지고 지금 이렇게 설명을 하려니까 길지, 당사가 탁 물으면 바로 얘기를 해야 된단 말이오. 한번 볼까요? 남의 얘기를 들으면 자기한테 도움이 되죠.
부처님께서는 사밧트의 동쪽에 머무르셨다. 어느 날 아침 비사카 부인이 찾아왔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옷은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부처님께서 그녀에게 물으셨다.
“비사카여, 그대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오?
그대의 옷과 머리카락은 웬일로 그렇게 젖어 있소.”
비사카 부인이 흐느끼듯 말했다.
“존엄하신 분이시여 저의 어린 손자 놈이 방금 죽었습니다.
당신을 만나려고 왔습니다만 너무 슬픈 나머지 모자나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해야 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렸습니다.”
“그대의 손자는 몇 살이오, 비사카?”
“그 아이는 겨우 3살밖에 안됩니다.”
“그 아이는 어쩌다 죽었오?”
“그는 장티푸스로 죽었습니다.”
“안 됐구려. 시바카.
그런데 그대는 자식과 손자들이 얼마나 되오.”
“제 자식은 모두 16이 있습니다. 그중 9은 결혼을 했죠. 손자 녀석들은 8명이 되는데 이제는 7명이 남았답니다.”
“비사카여, 그렇다면 그대는 여러 명의 손자를 가진 사람이 아니겠소.”
“예. 그렇습니다. 자손은 많을수록 좋지요. 사밧티에 사는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아이들을 많이 갖는 것을 행복으로 여긴답니다.”
“비사카여, 그대가 보기에 사밧티에서 매일 몇 사람이나 죽을 것 같소?”
“대략 아홉 명이나 열 명쯤 되겠지요. 하지만 최소한 한 명은 늘 죽겠지요
사밧티에서 사람이 죽지 않는 날은 없지요.”
“비사카여, 그대의 아이들이 사밧티에 살고 있는 사람들 수만큼 많다면
당신의 머리카락과 옷은 오늘처럼 날이면 날마다 젖어 있겠군요.”
그 말을 들은 비사카는 갑자기 얼굴이 밝아지며 부처님께 두 손을 합장하고 말하였다.
“이제 알았습니다. 저는 사실 사밧티의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되는 아이들을 원치 않습니다. 집착이 많을수록 고통은 많아지지요. 당신께서 자주 그 점을 일깨워 주셨는데도 저는 늘 잊어버리곤 한답니다.”
알아 들었어요? 못 알아들었어요? 쉽게 얘기하면 “내 사랑하는 손자가 죽어서 슬프다.” 그러니까 “그러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소? 적을수록 좋소?” “많을수록 좋죠.” 백 명이 좋아? 서울 시민만큼 좋아. 서울 시민만큼 내 사랑하는 손자 같은 사람이 있으면 내가 얼마나 행복하겠어요? “아, 그래요.” “서울 시내 하루에 몇 명 죽소?” “100명이오.” “최소한 한명은 죽겠죠.” “그러면 당신은 맨날 울겠구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설명을 해야 된다면 바가지 지금 거꾸로 들고 있다. 지금.
그러니까 자긴 내부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가 이런 문답 속에서 확 뒤집어져버리는 거요. 그러니 얼굴이 금방 밝아지는 거요. “당신 누구요?” 하는데, “이 새끼. 내가 누구긴 누구야?” 이런 생각할 때는 얼굴이 굳어지고 인상이 쓰여지지만, 탁 자기 생각이 돌아가 버리면 얼굴이 그냥 훤해지고 달덩이처럼 훤해지고 주름살이 탁 펴져버린다니까.
자, 두 번째 한번 봅시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쉬라바스티 성에서 걸식을 하고 계셨다. 그때에 니이다이가 인분이 가득 든 똥통을 메고 밭으로 가고 있었다. 니이다이는 부처님을 뵙고 싶었으나, 초라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자신으로 인해서 혹시나 부처님께 폐가 될까 하여 길모통이에 숨어서 부처님이 지나가시기를 기다라고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니이다이의 그 착한 마음을 아시고, 니이다이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셨다. 부처님께서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오시는 부처님을 본 니이다이는 당황하여 멀리 도망가려다가 너무 급히 서두르는 바람에 그만 똥통이 벽에 부딪쳐 깨지고 말았다. 더러운 똥이 사방으로 튀어서 자신이 오물을 뒤집어 쓴 것은 물론이고 부처님의 옷까지 더럽히고 말았다.
니이다이는 자신에게 오물이 묻는 것은 게이치 않고 부처님께 폐가 되는 것이 두려워 어쩔 줄을 모르고 똥이 쏟아지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면서 사죄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자비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손을 내미셨다.
"니이다이여, 내손을 잡고 일어나거라."
니이다이는 너무도 놀라서, 손을 뒤로하며 황망히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부처님은 손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면서 말씀하셨다.
"니이다이여, 이리 오너라. 나와 함께 강물로 가서 씻자."
"저같이 천한 자가 어찌 감히 부처님과 함께 가옵니까. 더구나 저는 지금 온몸에 오물이..."
"염려 말거라. 니이다이여, 나의 이 법은 청정한 물과 같으니 일체를 받아들여 더러움으로부터 정화하여 해탈케 하나니, 빈부귀천이 나의 법 안에서는 모두 하나가 되느니라."
여긴 조금 내용이 짧게 되었는데요, 똥꾼 니이다이라는 말은 천민이라는 뜻입니다. 똥통은 비유고 이 사람이 천민이란 말이오. 그럼 천민은 당시에 브라만이나 카스트리아계급이 지나갈 때 그 그림자만 밟아도 칼로 목을 켜버려도 그만이오. 왜 불가촉천민이냐? 그 사람의 몸에 내 손이 닿으면 나는 내 몸이 더러워져서 아무리 수행을 해도 천상에 못가. 즉, 부정 타는 존재다 이 말이오. 천민은. 그러니까 그는 부처님이 가까이 되면 돼요? 안 돼요? 안 돼. 그러니까 피했단 말이오. 나를 보면 재수 없어지니까.
그런데 부처님이 부딪혔단 말이오. 거기다가 오물까지 뒤집어썼단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이 니이다이를 이끌고 냇가에 가서 씻으라고 그랬어. 똥은 냄새 나지만 씻으면 깨끗해집니까? 안해집니까? 깨끗해지죠.
똥은 본래 똥이 없어요. 씻으면 깨끗해져.
본래 없던 몸인데 똥이 묻어서 냄새가 나지만 씻으면 깨끗해지는 것처럼,
니이다이여, 너도 그와 같다. 이 말이오.
너도 그와 같다는 게 뭐요? 천민이라는 게 없어. 그런데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는 천민이다. 천민이다 해서 똥물이 튀었단 말이오. 옷을 빠니 그 냄새가 사라지듯이 이 한 생각 바꾸게 되면 없어져버려요. 그래서 뒤에 이런 말이 붙은 거요.
/내 법 안에는 아무런 귀천이 없다./
그러니까 그 천하 부정한 것이, ‘부정탄다’고 하는 그 소위 사람들이 다 금기로 여기는 그것도 다 우리들의 한 생각에 딸린 거요. 이게 인도 당시에 사회에서 받아들이기기 쉬운 일이겠어요? 그런데 부처님은 그것을 어렵게 “야야, 계급이라는 게 없다.” 이렇게 말한 게 아니라 옷을 딱 버리기 위해서 빨게해서 그것을 보여주면서 얘기를 하니까 금방 알아들은 거요. 이 무식쟁이가.
이게 바로 제법이 공하다. 이거야. 더럽니, 깨끗하니 하지만 그것이 공하다. 공한 줄을 알아버리면 모든 번뇌가 사라져버린다.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죽림정사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 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부처님께서는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 시켜 그를 불러 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여, 그대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네, 그랬습니다.
그대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드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드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투명한 소리가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대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말아라.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 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이 되었다.
소오나는 아라한이 되어 마음으로 해탈한 기쁨을 지니고 부처님을 찾아가 뵈었다.
부처님, 저는 부처님의 법 안에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모든 번뇌를 다하고 할 일을 이미 마쳤으며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습니다.
또 바른 지혜로써 욕심을 떠난 해탈,
성냄을 떠난 해탈, 멀리 벗어난 해탈,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取취로부터의 해탈, 늘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 등
여섯 가지 해탈을 얻었습니다.
부처님 만약 조그마한 신심으로 욕심을 떠나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욕심을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소한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써 자기는 성냄에서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성냄을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기심으로부터 멀리 벗어나려고 닦아 익힌 것으로써 멀리 벗어난 해탈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멀리 벗어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가리켜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取취로 부터의 해탈,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이라고 합니다.
소오나 존자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기뻐하셨고 수행자들도 한결같이 환희에 젖었다. 소오나가 그곳을 떠나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잘 해탈한 사람은 마땅히 그와 같이 말해야한다.
소오나는 지혜로써 말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추켜세우지도 않고 남을 낮추지도 않고
그 이치를 바로 말하였다."
우리가 정진을 욕심으로 하게 되면 바로 조급해지고, 게으름으로 하게 되면 게을러져서 정진이 안 된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하라는 말은 조급하게 하라는 말이 아니다. 늘 자기를 잊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 깨어있는데 늘 집중해야지, 욕심으로 하면 조급해지게 된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을 깨우치셨습니다. 쉬워요? 어려워요? 쉽죠. 굳이 경전을 갖고 여기서 뭐라고 설명 할 필요도 없을 만큼 쉽다. 그러기 때문에 대중들은 늘 부처님을 존경하고 따랐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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