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원적인 질문이 나왔어요.
소망에 대한 심상화를
순수의식의 평정제복 상태에서라고 말씀하셨는데, 책에서.
어떻게 그러한 의식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이렇게 질문하셨거든요.
쉽게 말씀드리면 가능합니다.
가능한데 의식에 대해서 구분하는 게 조금 필요해요.
이 세상이 표현되는 모습에 대해서 한번 살펴볼게요, 간략하게.
처음에 일원성의 상태라고 칠게요.
일원성의 상태가 있습니다.
이 일원성의 표면이 슬쩍 움직임을 시작해요.
슬쩍 움직임을 시작합니다.
일원이라는 상태에 대해서 쉽게 이해하시려면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여기다 점을 찍어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점이 있어요. 없어요.
‘있다 없다’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이유는 뭐냐 하면
있다라고 말을 하려고 하든, 없다라고 말을 하려고 하든
이 점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인식이 되어 있어야 되거든요.
그래야지 ‘있다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죠.
이게 일원성인 상태예요.
일원성인 상태에요.
이 점은 어찌 됐든 간에 있습니다.
왜냐면은 이원성이 움직였다는 사실은
일원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이것의 근원이 되는.
이것을 떼야만 이제 이 점이 보이죠?
이것을 떼기 전까지, 움직임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점이 드러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거죠.
일원성의 상태에서 슬쩍 어떤 하나의 움직임이 시작됐다 라고 칠게요.
이때 이 지점이 존재의 핵점이 되는 거예요.
존재의 핵점이 되는데
여기에서 나타난 의식의 상태가 Am의 상태예요.
의식의 상태가 Am의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 Am은 순수한 있음에 가까워요.
그런데 순수한 있음인데
이 순수한 있음에 대해서 잘 받아들이셔야 됩니다.
없음에 가까운 있음이에요.
이유는 뭘까요?
주어가 없어서 그래요.
그래서 뭐가 생겨납니까?
‘I am’라는 허수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또 뭐가 생겨납니까?
‘I am’, 이 지점을 순수존재의식이라고 불러볼게요.
‘Am’, 이 지점을 순수의식이라고 불러볼게요.
의식 자체는 이렇게 사실은 구분을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
그냥 이 순수의식 하나만 있는데
이것들이 그냥 드러나는 세상에서
작용하는 기능적인 그런 부분들 있죠?
이런 부분들을 굳이 분류를 해보자면
이렇게 표를 만들어서 한번 사용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 ‘That I am’이 해당하는 부분이 뭐가 되겠어요?
삼라만상이 되는 겁니다.
이 ‘I am’의 부분이 있죠.
‘I am’ 부분이 자아의식이에요.
불교에서 이야기했던 7식이 되는 겁니다.
말라식이라고 부를 수 있죠.
이 순수의식의 영역에 해당하는 이 부분이
불교 유식학에서 이야기하는 8식의 영역에 해당이 되는 건데
물론 이러한 구분 자체가 정확하게 딱, 딱 상응되는 건 아니에요.
서로가 서로를 포함을 하고 있으면서도
특징들이 또 전부 다 있습니다.
심리학이니 뭐 그런 것하고도 전부 다 마찬가지예요.
이것은 이것에 완벽하게 대응되고 막 그런 건 아니에요.
이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이제 한번 살펴보는 거예요.
--의식의 분화 ‘내가 있음’
Am의식에서 I am으로 분할하면서
‘내가 있음’이라는 상태가 됩니다.
‘내가 있음’이라는 상태가 되는데
이 ‘I am’에 ‘내가 있음’이라는 상태
이게 마하라지가
명상법을 물어보는 사람한테
‘내가 있음에 머무르시오’라고 말을 해줘서 좀 유명해졌는데
이게 영어로 갖다가 이렇게 다 옮겨놓고
이걸 한국말로 해석을 하니까 뭐가 된 거예요?
‘내가 있다’ 이런 식으로 번역이 된 것일 뿐이지
사실 이것은 뭐냐면은 (내가 있음을 안다) ‘앎’에 가까워요.
I am, 순수존재의식이라는 거는 앎에 가깝습니다.
순수한 앎인 거예요.
그런데 뭡니까?
이 앎이 앎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드러내서 활동을 하려면 뭐가 필요해요?
여기 앞에 아이가 붙었죠?
나라는 허수가 붙었죠?
이거 뭐예요? 이게 뭐라고 말씀드렸죠?
이것도 대상이라고 말씀드렸죠.
사실 이 Am 의식 자체도 대상이에요.
누구의 대상이에요?
여기서 볼 때는 대상이에요.
어찌 됐든 이건 아주 깊은 수준의 수행이 필요한 부분이니까
‘내가 있음’이라는 이것을 갖다가 문자 그대로
‘내가 있다’ 이렇게 주어 동사 이런 식으로 파악을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있음’이라는 표현한 이게
이 순수존재의식이라는 게
‘지금 이 순간을 알고 있는 앎의 느낌’에 가깝습니다.
지금 이 순간을 아는 앎의 느낌에 가까워요.
그래서 그 앎이라는 것
앎이라는 것 자체만 따로 떼어놓고 딱 보면
예를 들어서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어떤 앎을 상정을 한다면은 뭡니까?
그 앎이 자기 자신을 몰라요.
왜?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래요.
모르는 상태가 돼요.
그래서 이 앎의 뿌리는, 있음의 상태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앎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없음’이라고 표현해요.
‘있음’이면서 그전에 ‘없음’이었고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앎’이면서 그전에 ‘모름’인 거예요.
물론 이렇게 Am의 상태로 드러난 의식마저도
일원성의 차원에서 볼 때는 뭡니까?
역시 동일한 대상입니다.
이게 순수의식이고, 바탕의식이고, 우주의식이고, 합일의식이고, 신의식이고
막 이야기를 합니다.
그 상태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뭐냐면은
이 모든 것을 아는 앎의 그 느낌 자체를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머무르다 보면
이 앎의 속성이라는 게 알려지게 돼요.
이 앎의 속성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직접 체험을 해보시고
이 앎의 느낌 자체가 자각하게 됩니다.
자각이 된 상태에서 뭘 하라는 얘기예요?
상상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인식하라는 겁니다.
상상이라는 방식을 동원을 해서 인식하시는 거예요.
그게 심상화예요.
인식하시는 거예요.
--눈앞의 심상이 ‘나’다
그렇게 되면 뭐가 되냐면요
I am That I am이라는 도식이 만들어지면서
지금 눈 앞에 나타난, 상상의 형태로 나타나 있는 그것 있죠?
그거 자체가 ‘내’가 되어버린 거예요.
I am That I am이 되는 거예요.
이 앎이 자기 자신을 알아보기 위한
거울과 같은 대상으로서 무엇을 사용하는 거예요?
심상을 사용한 거예요.
어찌 됐든 간에 이 앎의 느낌을 자각한 다음에
여기에 머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게 순수존재의식 자리에서의 심상화를 하는 데 있어서 키 포인트가 되는 거예요.
순수존재의식의 상태라는 것을
어떤 아무런 평정도 없고
이렇게 막 하는 그런 상태로 대상화해 버리는 순간
어떻게 돼버려요?
순수존재의식이라는 어떤 하나의 상태
이게 실체화가 되면서 그게 대상이 돼버리죠.
대상이 돼버리는 순간 뭐가 또 생겨요?
그것을 아는 앎이 또 생겨버리죠.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어요?
?이라는 거는
‘I’라는 허수를 가지느냐 안 가지느냐 뭐 이거 따지기 이전에
그 어떤 상태가 되든지 간에
심지어는 앎이 앎 자신을 스스로를 알아보는 상태가 되든지 간에
대상을 통해서 그것을
존재하는 대상을 통해서 알아보는 앎에 가까운 거예요.
이 앎이 순수존재의식인 겁니다.
그렇지 않고 ‘순수존재의식이란 이러이러한 상태다’라고
상을 딱 만들어버리는 순간 뭐예요?
그 상은 뭡니까?
순수존재의식에 의해서 알려지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아시겠죠?
그래서 순수존재의식의 상태라는 것
평정지복의 상태라는 것을 실체화했기 때문에
이 상태에서 ‘소망에 대한 심상화를 어떻게 해야 되는 겁니까?’라는
질문이 나오는 겁니다.
이해가 되세요? 좀 어렵죠?
딴 게 아닙니다.
앎의 느낌 자체를 찾아서
계속 머무르는 수행을 하시는, 주시자 수행이에요.
그러면서 여러 가지 개개인에 따라 다르지만
여러 가지 영적 체험들을 할 겁니다.
그 체험들을 거쳐가고
이제는 이 앎 자체가 각성돼서
항상 함께하고 있는
스스로가 알려지는 그런 상태가 돼요.
이 상태에서는 뭐냐 하면
인식되는 모든 대상들이
나 자신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제가 방금 나라고 할 때
여러분들 흠칫하면서 여기로 오지 않았나요?
느낌이?
이 몸으로 오지 않았나요?
나 자신의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딱 할 때.
여러분들 스스로 한번 대 뇌어보세요.
‘나 자신의 그림자’ 했을 때
흠칫하면서 여기로 오죠.
나라는 느낌이
이렇게 한번 체크를 해보시는 거예요.
이 부분에 대해서 설명을 하자면, 제대로 설명을 하자면
깊은 명상수행이 필요하긴 해요.
그래서 책에다가 쓸 때도 상당히 애를 먹었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써야 되나?
다른 게 아닙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자체를
전체적으로 알고 있는 앎 자체를
끊임없이 느껴보세요.
누누이 말씀드리자면
이 앎마저도 사실은 뭡니까?
대상이라는 얘기입니다.
일반성인 차원에서 볼 때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왜?
드러나 알려지고 있잖아요.
뭐가?
앎이.
앎을 통해서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식되는 모든 대상은
결국 진정한 나라고 볼 수 있는
일원성의 궁극 실제의 상태에 의해서 인식되고 있는 대상이에요.
그런데 일원성의 상태, 궁극 실제의 상태라는 것은
인식의 대상이 아닙니다.
대상 바라보듯이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모든 거는
사실 앎이 아니에요.
앎의 그림자예요.
진짜 앎은 뭡니까?
그래서 얘를 ‘유일한 주시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결국.
이 부분은 뭐라고 말씀드리기가 애매한 게 뭐냐면은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이러한 영적 상태를 체험해 보셔야 돼요.
이러한 의식의 상태를 한번 체험해 보셔야지
제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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