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비이원시크릿] 풍요를 체험하기 위해 결핍을 겪는가? / 병을 치료하는 인식방법

Buddhastudy 2024. 3. 18. 20:28

 

 

풍요가 결과로 있음을 알기 때문에

지금의 결핍도 감사하고 행복하다고 느끼는데요.

만약 결핍이 계속되고 결핍이 결과라고 한다면

허용이 안 될 것 같습니다.

근데 이건 결국 풍요를 바라고 결핍을 대하는 건 아닌가요?

우린 결국 풍요를 표현하기 위해 결핍을 겪는 건가요?//

여기 이 질문을 하셨는데요.

여러 가지가 짬뽕돼 있는 질문이세요?

 

여러분, 이 질문 중에 만약에

결핍이 계속되고 결핍이 결과라고 한다면 허용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문장을 써놓으셨어요.

 

허용이 안 될 것 같습니다라는 문장이 있지 않습니까?

뭐의 표현이에요?

허용이 안 될 것 같다라고 표현하시는 거?

그 유명한 [저항]이에요.

저항을 표현을 하신 거예요.

 

관념 분석을 들으셨던 분들은

저항이 뭔지에 대해서 뼈저리게 체험하셨을 겁니다.

그렇죠 대단하죠. 저항이.

 

 

--저항의 근본적인 이유

저항이 뭘까요?

왜 저항이 일어날까요?

 

받아들이지 않아서 그런데

뭘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

조금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생각이든, 관념이든 싫어하는 걸 받아들이지 않든 간에

이 자체는 근본적으로 설명하자면

[모든 대상이 드러나 나타나는 데 있어서

가지는 고유한 드라마 자체를 인정하지 못할 때

저항이 일어나요.]

 

모든 대상이 드러나 나타나는 고유한 드라마가 뭡니까?

상대성, 동시성, 전체성이 표현되는 인드라망의 연동이

고유한 드라마예요.

 

그래서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드러난 모든 것]이 뭐다?

[그럴 만해서 나타난 거다]라고 말씀드립니다.

 

 

--부정적인 것 또한 완벽하다

결국에 결핍으로 체험되는 그것에 대해서

그것 자체를

그럴 만해서, 완벽한 존재의 메커니즘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의 완벽한 궁극 실체의 표현이다라는

사실 자체가 인정이 안 되는 거예요.

이때 뭐가 발생하는 겁니까?

저항이 나타나는 겁니다.

 

결핍과 풍요를 따지는 마음이 가지는 건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좋은 것만을 고르고자하는 습성이에요.

 

재밌습니다.

이 좋은 것만을 골라 가지려고 하는 습성이

소원성취를 위한 창조의 영성을 고르는 데도 적용이 돼요.

그래서 뭐 하고 다녀요? 사람들이

나한테 맞는 거 고르려고 다니죠.

누구는 시크릿, 누구는 트랜서핑, 누구는 머리 땋고 있고

또 누구는 호오포노포노하고 있고

누구는 화가 나고, 숨 참고 일기 쓰고

나는 이게 안 맞아, 나는 이게 좋아, 나는 이건 진짜 안 될 것 같아.

나는 이건 힘들 것 같아.

 

전에 영상으로도 만든 적이 있는데 이게 뭐냐 하면

내가 한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사실은 뭐 하냐 하면 허용이라는 것도

[내가 한다]

이 개체 존재로서의 내 입장에서 허용을 한다라고 생각을 하니까

저항이 일어난 겁니다.

 

That I am의 자리,

규정된 자리인 That I am의 자리,

개체 존재의 자리에 딱 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고요한 드라마가 인정되지 않아요.

?

나에게 좋은 것 나쁜 것을 따지는 마음이 작용해서

자연적으로, 자동적으로 뭘 합니까?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내가 볼 때 좋아 보이는 것만을 골라 가지려고 하거든요.

 

심지어는 뭡니까?

허용 작업마저도 I am의 자리에서 해야된다라는 얘기예요.

?

그 자리에서 비로소 고유한 드라마를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기 때문에 그래요.

 

 

--허용에 관한 경전의 가르침들

성경에 이런 구절들이 되게 많이 나옵니다.

허용에 대해서.

누가 네 왼쪽 뺨을 때리면 오른쪽 뺨도 대줘라이 얘기 있죠.

겉옷을 달라 그러면 속옷마저

 

저는 그건 사양하겠어요.

저는 그런 얘기 있고

누가 너한테 5리를 같이 가 달라 그러면 10리를 같이 가 줘라

원수를 사랑하라이런 얘기들이죠.

 

이걸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 사람 관계에서 그렇게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실은 마음속 드라마에 관련한 이야기들이에요, 표현들이에요.

 

상대성을 알고 있는 마음에서는

상대성을 꿰뚫어 보는 그 지혜는

자동적으로 허용의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5리를 같이 가주십시오했는데

기꺼이 10리를 같이 가줄 수 있는 마음 자체가

허용을 뜻하는 거거든요.

 

왼쪽 뺨을 때리는 놈한테 오른쪽 뺨을 대주는 것도

어떤 성인의 마음 자세

이게 뭐냐면 상대성을 꿰뚫고 있는 자비의 마음이거든요.

이게 허용을 뜻합니다.

 

이 허용을 개체 존재의 자리에 딱 붙어서

떡이 된 상태에서는

이 허용을 할 수가 없어요. 사실.

그래서 어디로 갑니까? I am의 자리로 일단 물러나시라는 얘기입니다.

근데 그렇게 하려면 또 뭐가 필요해요?

수행이 필요하죠.

 

어찌 됐든 간에

‘I am의 느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자각하는 일련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뭐예요?

시크릿하고 영성하고 분리되지 않는다라는 얘기에요.

딴 게 아니라.

 

 

--상대성으로 본 결핍의 존재이유

여기에 질문이 나옵니다.

결핍이 계속되고

결핍이 어떤 하나의 결과로서 존재를 딱 하고 있어요.

지금, 이 순간 어떤 하나의 결과로서 나타나 있는 결핍이라는 것은

동시에 또 뭐예요?

동시에 또 다른 결과의 원인이자 과정이에요.

이 하나로서 딱 끝나는 게 아니라.

 

절대 그런 게 아닙니다.

이게 뭡니까?

원인 과정 결과와 원인 과정 결과가

서로가 서로를 투영하면서

관계 맺으면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나타난 결핍이라는 것은

동시에 어떤 가능태를 지니면서 또 나타난다는 얘기예요?

그 상대성으로 있는?

풍요에 대한 모든 가능태를 지니면서 나타나고 있어요.

 

 

--병을 치료하는 인식법

다음 질문 들어볼게요. 좋은 거 나왔네.

병에 걸렸거나 통증이나 아픔이 있을 때

명상이나 다 나았을 때를 생각하면서

낫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효과가 있는 건가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효과가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죠.

우리가 체험하는 모든 순간, 이 매 순간의 현실,

결국엔 뭐냐 하면

실체가 아니에요.

실체가 아니라 인식입니다.

 

인식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감각식]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허상이라고 부르고, 환영이라고 부르고

이렇게 표현을 막 하죠.

 

실체를 갖다가 지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시크릿이 가능해요.

현실 창조가 가능해요.

그 현실을 창조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어떤 하나의 결과를 아는 거예요.

아는 겁니다.

 

 

--현실창조의 비법은 결과를 아는 것이다.

근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하죠.

애석하게도 우리는 뭐를 못합니까?

그냥 아는 거를 못해요.

그냥 아는 걸 못합니다.

그래서 뭘 해요?

아는 게 아니라

앎을 믿으려고 노력하죠.

 

이게 어려운 거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나 익숙하게

우리가 지금 물리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시공간의 흐름 안에서 갇힌 채로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자체가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서

어떠한 시공간의 배열로부터

어떠한 원인 과정 결과에 펼쳐짐으로부터

나타나고 있는지에 대한 앎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뭐 합니까?

책 자체를 어떻게 썼어요?

될 수 있으면 조금 이렇게 이성을 설득할 수 있게

논리적으로 좀 풀어서 쓴 겁니다.

 

이게 중요해요.

뭐냐면은 이성적으로 자기 자신을 납득해 가면서

명상을 통해서, 사유와 명상을 이렇게 상호 보완시켜 가면서

수행을 하시다 보면은

말 그대로 뭐가 생겨요?

앎이 생겨요.

 

이 앎은 뭐냐면은

여기 계신 여성분들, 본인들이 여자라는 것을 아는 당연한 앎하고 똑같아요.

남성분들, 남자라는 것을 아는 당연한 알하고 똑같아요.

 

 

--앎은 증명이 따로 필요없다

무언가 증명을 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증명을 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뭐가 생겨요?

우리 시크릿 할 때

괴리감이 생겨요.

 

괴리감을 딱 불러오면서 이성이 활동을 하게 되죠.

뭐를 들이밀죠?

개연성이 없어라고 말을 하면서.

개연성이 없어 나를 설득해 봐라고

이성이 막 저항을 하는 겁니다.

 

근데 이 앎이라는 거는

말 그대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공기를 자각하진 못하지만

이게 다시 이렇게 또 떠올려 보면

내가 숨 쉬고 있기 때문에 공기가 있다는 사실 자체에

의심을 하지 않죠, 그렇죠?

비슷해요. 비슷한 겁니다.

이게 앎의 힘이에요.

 

통증이나 아픔, 뭐 병에 걸렸거나 명상이나

다 낳았을 때를 생각하면

낫고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효과가 있는 건가요?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심플하게 대답을 해드리지만

저는 더 중요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질병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이게 관념 분석 수업 과정에서도 들어있는 것이고

정말로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요.

이 병이 나의 삶 안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이걸 지금 당장 어떻게 고치고 안 고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 병이 어떤 [관념]을 표현하기 위해 나타나는가?’

이 병의 극복을 통해서 나는 어떤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가?’

 

이것을 고찰해 보시는 게 더 중요해요.

이러한 고찰이 없이 병 낫는 게 목적이라면 뭐 하면 됩니까?

약 먹으면 되고, 뭐 어떻게 하면 되고,

물론 아직 정복하지 못한 그런 병들이 있지만

어찌 됐든 간에.

 

지금 나한테 나타나고 있는 나의 삶의 모든 것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함이며

그것을 인정하고 허용하고 승화시켜서 극복함으로써

어떤 가치와 의미가 나의 삶에서 표현될 수 있는가?

이게 더 중요해요.

 

이것이 해결되지 않은 매듭이에요.

이것이 해결될 때까지 뭡니까?

똑같은 패턴이 계속 반복되게 됩니다.

해결되지 않는 관념이 계속 윤회하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병이 가져오는 어떤 통증이나 고통, 슬픔

이런 것에만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면

는 조금 더 멀리 보세요, 넓게 보세요.

그 이면까지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을 만드세요.

 

 

--쓸모없는 것은 없다

그러면 알게 됩니다.

쓸모없이 잉여로 나타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사실을.

 

그런 분들 많잖아요.

나는 잉여인간

 

그렇지 않다라는 거죠.

잉여인간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는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잉여인간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뭐가 존재할 수 있어요?

다른 정상적인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거든요.

그러면 이건 이미 잉여가 아닌 거예요.

아니 농담이 아니라.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느끼시는 분들 있잖아요.

쓸모가 없지 않죠.

?

지금, 이 순간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통해서

뭐를 표현을 하고 있는 겁니까?

다른 수많은 쓸모 있는 사람들을 표현해 내고 있는 거거든요.

 

그렇다면 그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나 자신이 뭐가 돼요?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게 되는 거예요.

이게 [변형]이에요.

 

이것은 뭡니까?

나의 쓸모없음을 외면하는 게 아니죠.

나의 쓸모없음을 허용을 통해서 바꾸고자 하는 간사한 마음이 아니죠.

말 그대로 [전적인 받아들임]이에요.

전적으로 받아들일 때 뭐를 동시에 받아들이게 됩니까?

상대적인 모습마저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질병, 마찬가지예요.

질병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이 질병이 표현하고자 하는 뜻이 있어요.

 

그것은 나의 우주의 것이기 때문에

나만이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게 고유 우주가 가지는 가치가 되는 것이죠.

이번 질문은 여기까지 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