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상시의 난 이후, 어린 황제가 도주하는 등
궁정의 대혼란을 겪은 와중에
동탁은 황제의 신변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무혈입성으로 낙양을 차지하고
동시에 여포를 손에 넣었습니다.
대부분의 조정 내 신하들과 장수들은
대군을 이끌며 낙양에 입성한 동탁을 보고서
어쩔 수 없이 상황을 그저 두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탁은 조정 내 가장 경계하고 있었던 원소를 불러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황제 폐립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고
이에, 원소는 동탁의 야욕에 놀라며
그 자리에서 나와 낙양을 떠나, 기주로 향했는데
이때, 낙양성문에다가
‘언젠가 동탁의 목을 칠 것이라’는 부절을 걸었습니다.
동탁은 원소가 자신에게 따르지 않는 것에 분노하여
지명수배를 내려 원소를 잡아들이려 했지만
원소와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던
오경과 하옹 등이
동탁의 화를 가라앉히는데 나서며
은밀히 원소를 보호하였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원소가 일의 경중을 몰라서
변화를 무서워하여 그저 도망을 친 것에 불과하니
성급하게 지명수배를 내려서
원씨 가문을 따르는 추종 세력이 모이는 것 보다는
원소를 발해 태수로 임명하여, 죄를 사면하는 것이
반란을 잠재울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동탁은 오경과 하옹의 말을 받아들여
원소를 발해 태수로 임명하였는데
원소는 태수직을 받아들이고도
여전히 본래의 직함이었던 사례교위를 자칭했습니다.
이는 사례교위가 수도를 통치하는 장관이며
관리의 감사권도 가지는 관직이었기 때문에
원소는 지금의 동탁 정권이 정당하지 않다고 여겼던 겁니다.
소제가 황제로 등극한 지 4개월이 지난 189년 9월,
동탁은 소제를 폐하고 진류왕인 유협을 옹립하자는 의논을 하기 위해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 모았는데
사실상, 이미 동탁의 뜻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소제를 폐하는 데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동탁의 연설에 좌중이 크게 동요를 하던 중
홀로 반대하는 자는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노식이 종소리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어딜 감히 신하가 황제의 폐위를 논하는 것이냐’며 크게 노했습니다.
노식이 분노하자, 동탁 또한 크게 화를 내며 회의가 끝났고
동탁은 예전부터 자신과 뜻이 맞지 않았던
노식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채옹이 동탁을 극구 말리며
‘노식은 천하의 대유라 많은 이들이 우러러보기 때문에
노식을 죽인다면, 천하가 등을 돌릴 것‘이라 설득했습니다.
동탁과의 마찰을 빚고 난 후, 노식은 화를 피하기 위해
병을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낙양에서 도망쳤으며
동탁이 추격병을 보냈지만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노식을 죽이려고 한 동탁을 말렸던 채옹은
삼국지 시대의 활약은 그리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후대에 서예가로서 칭송받는 업적을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먹을 적게 찍어 붓자국에
흰 잔줄이 생기게 하는 독특한 서체’인
비백서(飛白書)를 발명했는데
이 서법은 그어진 필획이 끊일 듯 이어지는 듯한 가운데
속도감 있는 흰 여백이 남기 때문에 비백이라 불렸고
필획의 속도감과 역동적 힘, 생명력이 특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학문이 매우 깊어서 여러 경전과 고서를 암기했고
달필로도 명성이 높았으며, 음악의 큰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삼국지 시대에는 교현과 노식, 조조와 친분을 쌓았습니다.
채옹이 문장과 학식이 두루두루 뛰어나다 보니
영제 시절, 조정 고관들와 중상시들의 질투로 유배되었는데
동탁이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명성 높은 채옹을 불렀습니다.
하지만, 채옹은 병을 핑계로 취임하지 않으려 했고
이에 동탁이 대노하여, 채옹에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가족을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겁을 먹은 채옹은 마지못해 동탁의 부름에 응했는데
동탁은 매우 기뻐하며, 파격적인 벼슬로 중용시켰고
채옹의 재능과 학문을 중히 여겨 융숭하게 대접했습니다.
원소와 노식이 조정을 떠난 뒤,
동탁은 원소의 숙부 원외를 찾아가
강압적으로 폐립 문제를 건의하였고
이에 원외는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어, 하태후를 협박해 동의를 받아내
‘지금의 황제는 자신의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도
자식의 도리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위, 홍농왕에 봉하고,
유협 진류왕을 황제로 세운다‘는 조서를 발표했습니다.
소제, 홍농왕은 황제가 된 지 4개월 만에 자리에서 내려와
새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신하임을 칭했고
하태후는 기가 막혀 흐느껴 울었으나,
아무도 동탁 앞에서 감히 말을 꺼낼 수 없었습니다.
또한, 하태후는 동태후를 협박하여 죽게 했으니
고부간의 예의를 위배한 것이라는 이유로 영안궁으로 옮긴 후
얼마 뒤 사약을 보내 시해하였습니다.
십상시의 난 때, 하태후의 친오빠였던 하묘는
평소 하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진의 부하 오광과 동탁의 동생 동민에게 죽임을 당했는데
동탁은 하진을 죽인 죄를 물어
하묘의 관을 파내 시체를 절단한 후 길가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하묘와 하태후의 모친인 무양군도 살해하여
궁궐 후원의 탱자나무 사이에 던지며 한때,
권력의 최고봉이었던 하씨 일가를 궁궐에서 지워버렸습니다.
동탁은 스스로 한나라 최고위 대신(大臣)
삼공 중 하나인 군사 담당의 태위로 승진하였고
가후는 동탁의 집권을 도운 공로로 태위연에 임명,
그 후 토로교위까지 승진하였습니다.
삼공 중 하나의 자리를 차지한 동탁은
나머지 두 자리는
사족들 사이에 명망이 높았던 명문 집안의
양표를 사공(司空)으로,
황완을 사도(司徒)로 임명하였으며
이어, 사대부들의 지원을 받기 위해
이전부터 한이 맺혔던 ‘당고의 금’을 재심리하여
진번과 두무 등 당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습니다.
동탁은 기존의 환관들이 차지했던 자리를 몰아내고
대신, 사족의 명사들 중심으로 조정을 운영해 가니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동탁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사공 양표, 사도 황완 이외에도
환관 권력 중심 시절 환관과 대립각을 세웠던 왕윤,
그 외 동탁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들로 주비와 오경이 있었는데
이들은 오랫동안 부패했던 영제 시절의 환관을 척결해야 한다는
공통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동탁 중심의
새로운 질서는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습니다.
소제를 폐하고, 유협이었던 헌제가
새 황제로 등극한지 한 달 뒤
동탁은 신하의 신분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인 상국(相國)이 되었습니다.
상국의 실세는 사실상 황제를 대행하는 자리로
상국이라는 지위는 오늘날로 비교하자면 총리와 비슷한 위치이며
삼국지 시대에서는 촉나라의 제갈량 정도가 있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삼공에서의 태위를 차지했던 동탁은
삼공보다 더 높은 위치인 상국에 올라서면서
태위로는 황완, 사도에는 양표,
사공에는 순욱의 숙부인 순상을 승진시켰습니다.
황제 대행이라는 권력의 정점에 올려서게 된 동탁은
상대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발언을 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쳐내는 등 포악한 성품을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당시, 낙양성 내에는 기존 권력층인
환관들의 일가친척들인 귀척들이
고급 저택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고 있었는데
동탁은 그동안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에게
보상으로 귀척들의 집을 마음대로 약탈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에 수많은 병사들은 귀척들의 집안들뿐만 아니라
근처에 있는 집이라면 가리지 않고 쳐들어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강간하였으며
동탁은 궁궐 내에서 궁녀들을 차지하거나
심지어는 황실의 공주들마저
기분이 내키는 데로 겁탈하고 다녔습니다.
오늘은 삼국지 35번째 시간으로
동탁의 집권 후, 소제의 폐립과 헌제 시대의 시작
그리고 동탁의 폭정까지 정리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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