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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영화 [국제시장] 2부 _ 아빠의 청춘

Buddhastudy 2018. 10. 5. 21:10


국제시장:

일제 강점기 시절에 도떼기시작으로 시작되어

6.25 전쟁 중 부산으로 피난민들이

삶의 터전을 잡고 재기의 발판을 이룬 곳이다.

 

19536.25전쟁이 끝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정말 폐허였습니다.

, 그렇게 50년대를 맞이했는데요, 먹을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게 됩니다.

 

이것을 원조경제라고 부르는데요, 밀가루, 설탕, 면이랄지 재봉틀에 실에 고무, 타이어까지 모든 생필품을 우리는 원조 받는, 그래서 근근이 살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미국의 원조는 50년대 후반에 끊기게 되구요.

 

, 60년대를 맞은 우리나라는 뭔가 스스로 경제를 발전시켜야 될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 정부는 생각했어요. 값싼 노동력이 많으니까 뭔가를 만들어서 수출을 하면 되겠다.

수출 주도형 산업을 꿈꿨다는 얘기죠.

 

그런데 종자돈이 있어야 수출을 할 것 아닙니까. 미국의 원조도 끝났구요.

그때 우리나라에게 기회가 주어졌으니, 그것이 첫 번째 파독, 간호사 광부였습니다.

 

파독이라는 것은 독일에 파견을 한다는 얘긴데요, 그때 독일의 경우 간호사하고 광부가 3D업종 이었습니다. Dirty(더러운), Dangerous(위험한), Difficult(어려운) 그런 직종이었는데요,

일단 광부 같은 경우는 폐병도 걸리고 열악하고 위험하지 않습니까? 많이 꺼렸다구요.

 

간호사 같은 경우는 복지정책이 막 화대되었던 시절이라 병원에 환자들이 차고 넘쳤거든요.

공급이 굉장히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근데 우리나라는 외화는 필요한데 실업률은 높고 아!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보내면 되겠구나라고 생각이 든 것이죠.

당시 광부를 모집하는데 말입니다. 500명 모집하는데 무려 46,000명이 모이게 됩니다. 경쟁률 1:92.

 

거기서 뽑힌 사람들이 독일로 보내졌는데 모두 8,000명 정도가 되구요, 간호사 같은 경우도 엄격한 심사와 교육을 거쳐서 11,057명이 독일에 파견되게 됩니다. 8000km 떨어진 머나먼 이국땅으로 우리 젊은이들은 그렇게 떠났습니다.

 

, 그런데 꿈을 안고 간 그들에게 놓여진 현실은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광부들은 1000m 이상의 갱도로 내려가는 데요,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공기가 좋지 않았어요.

 

그 상황에서 그 뜨거운, 그 뜨거운 공기를 마시면서 50kg이 넘는 쇳덩이를 이고, 거기서 탄을 캐야했던 것 아닙니까? 너무나 위험한 현장 상황에 무려 27명이나 되신 분이 사고로 목숨을 잃으셨구요, 또 우울증에 걸리십니다. 그래서 4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간호사는 어떻습니까? 말이 뭐,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 그런 거 아니에요.

매일 닦는 것이 시체요, 매일 받는 것이 그들의 똥, 오줌 등의 수발을 들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리게 되죠. 스스로 목숨을 끊게도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어렵게 번 돈을요, 자신들 먹는 데, 입는 데에 쓰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허리띠를 졸라 매구요, 고국으로 돈을 송금해 보냈습니다.

당시 그들이 우리나라에 송금한 돈이 1년에 1,200달러 정도 됐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연 70달러 였으니까요, 그때 우리나라를 살린 건 바로 그들의 눈물 젖은 외화가 아닌가라고 생각이 되구요. 그들이 바로 라인강의 기적을 만들었고, ‘한강의 기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 이 종자돈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는 앞으로 앞으로 산업화를 향해 전진했고, 드디어 1970년대에는 북한보다 우리가 더 잘사는, 국민소득이 앞서는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1980년대가 됐습니다. 어느 정도 배는 부른데요, 등은 따신데요,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습니다. 그게 뭐죠? 바로 북에 두고 온, 그리고 남쪽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어디 있는지 모르는 헤어진 가족, 산산이 흩어진 가족, 이산가족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시작은 의외로 사소한 데서 비롯됩니다. 6.25전쟁 33주년을 맞이해서요, KBS남쪽에 있는 이산가족만이라도 만나자라는 기획 프로그램을 만들어요. 그래서 630일 방송을 하게 되는데요, 방식은 이렇습니다.

 

먼저 신청한 분들이 자신의 이름과 그리고 어렸을 때 기억나는 어떤 가족끼리 헤어진 지역이랄지 특징들을 이렇게 푯말로 들고 나와요. 서울의 방송국에서 지방에 있는 방송국으로 TV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그 푯말을 보고 각 지방 방송국에서 그것을 보고 이산가족들이 오면 서로 전화나 화상으로 연결하는 방식이었는데요,

 

정말 대한민국이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울었습니다. 그래서 방송을 끝내야 되는데 담당 프로듀서가 끝내지를 못해요.

저거 어떻게 멈추냐?” 그래서 새벽까지 연장을 해서 방송을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71KBS는 난리가 났습니다. 서로 내 가족을 찾아달라고 전화가 왔는데, 완전 방송국 전화는 불통이었구요, 전화가 되지 않자 전국에 있는 이산가족들이 KBS 본사로 본관으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KBS는 장장 138일 동안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이 진행되고 약 10,080여 가족이 상봉을 하게 됩니다.

 

전 세계도 주목을 하게 됩니다. 모든 언론이 앞 다투어서 여기의 한반도의 감동과 아픔을 보도했구요, 대한민국이 울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북한도 울었을 겁니다. 온 세계가 함께 울었습니다. 이것은 당하지 않고서는, 겪어보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고 아픔이었습니다.

 

그것이 촉매제가 되어서 2년 뒤에는 남한에 있는 가족과 북한에 있는 가족이 최초로 만나는 남북고향방문단 만남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 이렇게 가족을 다시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1990년대를 맞이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우리는 1990년대 다시 또 위기를 겪게 됩니다. IMF 외환위기!

 

우리 민족은 항상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똘똘 뭉치는 긍지가 있는 민족입니다.

금 모으기 운동! 어떤 분은 금니를 뽑아가지고 온 분도 있어요.

이 나라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 내가 금을 모으기 위해서 이를 뽑았다는 거죠.

 

그렇게 우리는 하나가 됐고, 2001년에 3년 조기 상황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2년에는 월드컵에서 4강에 진출하는 기적을 낳게 되죠.

그 힘으로, 그 에너지로 오늘날까지 왔습니다.

 

영화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기 참 다행이라꼬...”

 

우리가 보통 어른들을 만날 때 이렇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데요, 그냥 아무생각 없이 몸짓으로만 우리가 머리 숙인 건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그분들은요, 우리에게 존경받고 감사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분들입니다.

 

이제는 작고 볼품없이 굽어진 우리 아버지의 어깨이지만은,

그 어깨가 오늘날 대한미국을 만들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