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역사, 세계사

[세계사, 4대 문명] 잔인했던 아시리아 제국 10분 완벽정리

Buddhastudy 2023. 7. 13. 19:54

 

 

 

세계 최초로 철제 무기를 이용했던 히타이트 왕국은

기원전 1170년대 후반 바다 민족에게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기원전 9세기경까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등의 왕국들이 난립하는 시대가 됩니다.

 

세계 4대 문명이라 불리는 고대 문명 중에서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전쟁과 교류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는데

이집트 왕국과 히타이트 왕국이 싸우는 동안

아시리아에서는 힘을 길러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죠.

 

새롭게 힘을 강성하게 키우며

기존의 강대국들을 위협하던 아시리아는

티그리스강 상류에 있는 작은 도시 국가, 아수르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아수르라는 이름은 이 도시의 수호신인

태양신 아수르에서 비롯되었죠.

 

아수르 시는 동서 문명의 교차점에 있었기 때문에

상업의 중심지로서 부를 쌓게 되었고

이는 아시리아가 강국이 되는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시리아는 원래는 아주 오랜 옛날

기원전 25세기에 성립된 아카드인의 왕국들 중 하나였는데요.

투디야 같은 초기의 아시리아 왕들은

부족 수준의 소국이었다가

아카드 제국의 사르곤 1에게 복속되어

아카드 제국의 속국이 되기도 했습니다.

아카드 제국에 대해서는 채널 내 재생목록 10분 세계사 메소포타미아 역사에서 참고하세요.

 

이번 영상에서 다루는 아시리아는

좀 더 명확하게 표현하자면

신아시리아 제국으로서

서로 기원이 다른 여러 민족들과 부족들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로

기원전 934년부터 기원전 609년까지 존재했습니다.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아시리아인은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부터 이어져 온 최후의 메소포타미아계 민족으로 불리는데

페르시아에게 복속당한 이후로는

독립된 국가는 이룬 적은 없으나

민족 공동체로서 정체성은 유지해 오고 있죠.

 

이들은 이라크 북부, 시리아, 이란 북서부 등에 분포하고 있으며

전 세계 통틀어 약 400만 명의 아시리아인들이 있습니다.

 

고대 아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이 한창 세력 다툼을 하던 시기 때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와 동맹을 맺으면서 경쟁을 하는 등

다른 국가들과는 큰 차이가 없었는데요.

그러다 청동기시대 말기의 갑작스로운 바다 민족의 침범으로 인해

히타이트가 거의 궤멸되고

이집트도 위협을 받을 때

아시리아도 위축된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보내는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메소포타미아의 다른 나라들은 거의 초토화가 되었고

멀리 떨어진 강대국 이집트마저 재건하는데 힘겨워하고 있었죠.

 

이에 반해, 아시리아는 상업의 중심지인 아수르에서 재력을 모으고

이는 군대의 강성으로 이어져 전차를 혁신하고

최초의 기병을 체계적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아시리아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통상로를 지키기 위해

강력한 군사력을 추구하였는데요.

멸망했던 히타이트로부터 철 무기 제조법을 알아내어

아시리아의 전군을 철기 부대로 구성하게 됩니다.

 

여기서 좀 더 나아가

히타이트의 전차에서는 3명이 탔는데 반해

아시리아의 전차에는 방패잡이가 두 명으로 4인승 전차였죠.

 

또한, 이들은 세상에 알려진 가장 오래된 공성 병기를 이용하였으며

이는 적이 지키고자 하는 성벽을 부수는데 힘을 발휘하여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하는 신기술이기도 했습니다.

 

바다 민족으로 인해 침체되었던 아시리아의 회복은

기원전 900년 전후로

아슈르 단 2아다드 니라리 2

주변 민족들을 진압하며 시작되는데요.

 

이후 아시리아의 이리라 불리는 정복왕 아슈르나시르팔 2

군사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며

동쪽과 북쪽으로 시리아와 페니키아 등을 정복하게 됩니다.

 

 

 

아시리아 민족은 우월의식이 지나치게 강한 성질을 갖고 있어

정복지에 대한 정책이 상당히 잔혹한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로 인해 구약성경에도 이들에 대해

공포와 증오가 나타난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특히 아슈르나시르팔 2

정복지에 대한 지배의 법칙을 공포정치로 두며

반항하는 자들을 잔혹하게 죽이며 본보기를 보였죠.

살갗을 벗겨 성벽에 걸어두는 건 기본이며

여자와 아이들도 화형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지배한 민족들에 대해서는 잔혹함을 보인

아슈르나시르팔 2였지만

그는 자국민인 아시리아인들을 위해

선진 지역과의 교역과 문화교류를 이행하여

광대한 건축물들을 올리는 등

국가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곤 했었죠.

 

기원전 859년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사망한 후

다음 왕들은 영토 분쟁에서

땅의 일부분을 잃는 등 침체기를 보내게 됩니다.

 

아시리아의 영향력이 줄어들 무렵

기원전 744년에 티글라트 필레세르 3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며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요

아시리아 제국의 완성자라 불리는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는

서쪽으로는 다마스쿠스, 페니키아와 유대인

동쪽으로는 아제르바이잔 지방의 메디아 등을 장악

남쪽으로는 바빌로니아 왕을 겸하면서

오리엔트 최대 강국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하지만, ‘티글라트 필레세르 3도 평안한 정치와는 거리가 멀어

계속해서 정복전쟁을 하게 되는데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정복했던 지배지의 주민들을 강제 징용하여 군대를 만들었죠.

 

티글라트 필레세르 3시대 때는 공포정치도 극에 달했는데요

저항한 지역의 주민들은 무작위로 처형하여 해골탑을 쌓고

저항을 하던 지역의 항복을 받게 되어도

그곳의 지배자였던 귀족들은

코에 구멍을 뚫어, 줄에 엮어서 끌고가 처형을 했습니다.

 

반항하는 도시의 귀족과 지배자들을 처형하고

남은 주민들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단결심이나 애국심이 생겨나지 않도록

강제 이주 정책을 시행했는데요.

이주할 땅에 도착하기 전에

더위나 추위 그리고 굶주림에 죽어가는 사람들도 다수 발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걷는데 속도가 느린 아이들은

바위에 머리를 처박아 죽여버리기도 했죠.

 

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 다음 왕인 샬마네세르 5세는

4~5년 정도의 짧은 재위 기간을 가졌는데

샬마네세르 5세가 죽을 타이밍에 왕위를 빼앗아 즉위한 왕은 사르곤 2였습니다.

아시리아에서는 정복전쟁을 통해 바깥으로 혼돈의 연속이었지만

국내에서도 심심찮게 쿠테다를 일으키고는 했었죠.

 

기원전 722년에 재위한 사르곤 2세는

국가통치는 선왕의 정책을 계승하였고

군사적으로는 3년간 사마리아를 공격해 함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뒤

백성을 아시리아로 이주시켰으며

아르메니아를 약탈 및 키프로스로부터 충성의 맹세를 받았죠.

 

사르곤 2세가 재위하기 직전에 바빌로니아는

아시리아 왕이 바빌로니아 왕을 겸했습니다.

이 당시 야킨족 출신의 메로다크 발라단

칼데아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죠.

그는 아시리아에서 사르곤 2가 즉위하는 혼란한 틈을 타 바빌론을 차지하여

스스로 바빌로니아의 왕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바빌로니아는 원래 메로다크 발라단의 선조인

에리바 마르두크의 지배를 받았던 터라

그는 사르곤 2가 즉위할 무렵부터 약 10년간

바빌로니아의 왕으로서 국가를 통치하는데 주민들의 저항은 없었죠.

 

하지만, 사르곤 2세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된만큼

무력적으로 강한 면모를 보였으며

결국 메로다크 발라단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어

바빌로니아 왕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메로다크 발라단은 전쟁에서 패하여 도망갔으며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사르곤 2세를 받아들이게 되죠.

이후 사르곤 2세는 다른 곳으로 영토를 확장하다 전사하게 됩니다.

 

 

 

아시리아의 왕위는 아들 센나케리브가 계승하게 되는데

사르곤 2세에게 패배했던 메로다크 발라단은

여전히 아시리아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그는 유다 왕국의 헤제키아에게

아시리아에 대한 불만을 선동하기 위한 밀사를 보내곤 했죠.

 

사르곤 2세가 죽은 2년뒤, 메로다크 발라단은

다시 바빌로니아의 왕 자리를 차지했지만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아시리아의 왕 센나케리브에게 패배하며

도주를 하다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센나케리브는 즉위 4년 만에 주변 도시들을 점령하며 영토를 확장하였고

이집트의 원군을 격파하기도 했는데요.

그는 수도를 지금의 이라크 모술지방인 니네베로 정하고

4km에 달하는 성벽을 쌓아 신전을 재건하며 번영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왕 자리에 민감한 자식들의 왕위 다툼에서

황태자를 장자에게 물려주지 않아

큰아들에게 살해당하게 되죠.

 

형들을 제치고 황태자가 된 에사르하돈

아버지에게 지목받은 정통 왕위계승자였지만

이를 시기한 형들로 인해 결국 아버지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에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모아

수도 니네베로 진격하였고

에시르하돈은 니시비스에서 형들의 대군을 격파하죠.

 

기원전 680. 왕위에 오른 에사르하돈은

아버지가 철저하게 파괴한 바빌론을 다시 부흥시키는데 열중합니다.

그리고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두크의 신전을 재건하며 민심을 안정시켰죠.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했다고 생각한 에사르하돈은

이제 다음 목표를 아프리카에 있는 이집트로 정하게 됩니다.

아시리아 제국이 그간 저질러놓은 피지배민들에 대한 착취는

다른 민족들의 증오가 굉장해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는데

에사르히돈은 우선 민심을 잡으며

북방의 스키타이 인이나 킴메리 인과는

정략결혼을 하며 우호 관계를 맺었죠.

 

이 무렵, 이집트에는 제25왕조로 에티오파이아 인들이 세운 왕조였습니다.

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죽은 이후,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며 왕조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죠.

 

이해를 돕기 위해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클레오파트라와 관련있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300년 뒤에 시작된 제32왕조입니다.

 

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은 지중해 무역으로 황금의 제국을 만들고 있었는데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이집트의 왕 타하르카를 물리치고

이집트를 아시리아에 무릎꿇게 하고 싶은 욕심을 부렸죠.

 

이로 인해, 서아시아의 왕이 처음으로 하이집트의 사막을 건너

이집트의 수도 멤피스를 공격하게 됩니다.

 

아시리아 군대는 지배한 종족들의 노동력을 동원해

멤피스 앞 지하터널을 뚫었고

그와 동시에 성벽을 부수는 공성 병기로 멤피스의 성벽을 두들겼는데요

또한 다른 성벽에는 사다리 부대를 올려

끝도 없이 성벽 위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결국, 이집트의 왕 타하르카는 멤피스를 버리고

남쪽에 있는 테베로 도주를 하게 되죠.

 

아시리아 제국은 그간 메포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 전쟁으로 이집트까지 점령하게 되면서

대제국을 형성하게 됩니다.

 

 

 

오늘은 고대 사회에서 정복한 주민들에게 가장 잔인했다고 알려진

아시리아 제국에 대한 정리를 해보았는데요.

 

아시리아는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좀 더 본격적으로 두각을 드러낸 것은

철기 무기를 도입함으로써

신아시리아 제국에서부터 존재감을 나타냈습니다.

 

기원전 900년경. '아시리아의 이리'라 불렸던 아슈르나시르팔 2세부터

티글라트 필레세르 3, 사르곤 2세에 이르기까지

공포정치로 많은 국가들의 증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죠.

 

하지만, 이들의 군사력은 워낙에 막강하여

아프리카의 강대국인 이집트를 점령하기까지에 이릅니다.

결국, 아시리아의 에사르하돈은

이집트의 타하르카 왕을 테베로 도주시키는데 성공하는데요.

 

이후의 아시리아 제국의 흐름은

다음 세계사 영상에서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끝까지 시청해주셔셔 감사드리구요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