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1970년 초가을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 운동장에는 ‘검은 표범’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에우제비우.
전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
(1942~2014)
당시에는 유세비오로 불리었던 그는
자신이 속해 있던 포르투갈의 명문 벤피카와 함께 와서 대포알 슛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축구를 선보였지요.
과연 그는 별명대로 ‘검은 표범’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우리 국가대표팀과의 두 차례 친선 경기를 에우제비우는 정말 열심히 눈부시게 뛰었습니다.
특히 더구나 비까지 내리던 경기 첫날의 그의 첫 득점은 아마도
우리나라 축구사에도 기록될 만한 것이었을 겁니다.
경기 시작 1분여 만에 하프라인 바로 너머에서 프리킥을 얻은 에우제비우는 40m 가까운 골문까지 그야말로 대포알 같은 슛을 날려서 성공시켰지요.
예상도 못 했고, 보고 나서도 믿기지 않는 골에 관중들은 물론 텔레비전 중계를 지켜보던 시청자들도 경악했습니다.
그때까지 어찌 보면 우물 안 개구리였던 한국 축구와 관중들은 이 한 방의 슛으로 개안 즉, 축구에 대한 눈을 떴다고나 할까요.
한 팀의 친선 방문이, 그리고 그 팀을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의 한 방의 골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에우제비우는 여지없이 보여주고 돌아갔습니다.
그날부터 동네 아이들은 볼을 차며 모두가 중거리 슛을 끝없이 연습했음은 물론입니다.
아마도 그 이후에 10년이나 혹은 20년 후쯤 나온 우리의 축구 영웅들 중에는 바로 그날 에우제비우가 보여줬던 그 슛 하나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선수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인상적인 골이 터진 후 49년 만에 공교롭게도 같은 나라 출신의 축구선수가 자신을 보기 위해 며칠 밤을 설레며 기다렸던 한국의 관중들을 만났습니다.
그 중에는 병상에 있다 온 어린이도 있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는 뛰지 않았고
그 많은 관중들과 함께 경기를 ‘구경’하고 갔습니다.
뛰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고,
축구선수 하나에 의해서 무시당했다는 말도 별로 입에 올리고 싶지는 않고.
다만,
경기 내내 자신을 보러 온 그 수많은 관중들, 그중에서도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도 사람이니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잠시 그러니까 45분 동안 몸은 편했을지 모르나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마음은 불편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그도 그저 공 잘 차는 축구선수일 뿐
축구 영웅은 아니라는 것.
49년 전 그의 선배인 축구 영웅 에우제비우가 보여준 40m 대포알 슛의 추억이 어느 날 갑자기 축구하기가 싫었던 후배에 의해서 가려지지는 않기를 바라는...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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