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의 앵커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한바탕의 전투가 끝나면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해서 임금에게 올렸습니다.
“이순신의 장계는 그 첫머리부터가 문신들의 장계와는 판이하다”
-김훈 ‘내 마음의 이순신 1’ <연필로 쓰기> 中
작가 김훈에 따르면 이순신의 장계는 첫머리부터가 다른 문신들의 장계와 판이하게 달랐다고 하는군요.
(장계- 신하가 왕에게 보고하거나 청하는 문서)
즉, 고사나 고전을 인용하면서 임금을 칭송하는 상투적인 도입부를 쓰는 대신에 그는 다만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삼가 무찌르고 붙잡은 일을 보고합니다”
-김훈 ‘내 마음의 이순신 1’ <연필로 쓰기> 中
이렇게 시작된 그의 장계는…
“맞붙어 싸울 때 관노비 기이, 난성, 토병 박고산, 격군 박궁산…들은 전사하였습니다.”
-김훈 ‘내 마음의 이순신 1’ <연필로 쓰기> 中
그는 이렇게 전투에서 몸이 상한 관노비, 사노비, 어부, 격군, 토병들의 이름과 작은 전공까지 세세하게 적어서 임금에게 보냈습니다.
“이들의 처자식들에게는 구제를 위한 특전을 베풀어주소서”
-김훈 ‘내 마음의 이순신 1’ <연필로 쓰기> 中
간결하고 건조한 자신의 일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요.
“흐리다. 새벽에 최천보가 세상을 떴다.” (1594년 4월 5일)
“맑다. 탐색선이 들어왔다.” (1595년 2월 18일)
“맑다.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 (1597년 9월 2일)
-이순신 <난중일기>
아마도 그 까닭은…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달아난 조정에서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들이라는 유려한 미사여구나, 공허한 충성의 언어가 아니라…
다치고 부서져도 지키고자 하는 백성의 마음이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물론 지키고자 했던 백성의 그 마음은 실패로 마무리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강제병합 이전에 진행된 국채보상운동이 그러하였고,
1920년대 조선물산장려운동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국채보상운동- 국민이 주도하여 국가가 일본에 진 빚을 갚고자 한 모금 운동)
(조선물산장려운동-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맞서 전개한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쓰자”
비록 의병처럼 총칼을 들지는 못하였지만 마음이나마 의병이 되고자 했던 이들의 움직임은 일제의 분열 공작과 탄압으로 결국 무산되고 맙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일어나 지키고자 했던 그 마음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우리는 결국 나라를 되찾은 것일 겁니다.
아마 오늘의 시민들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들은 이순신의 장계 속에 등장한 그 사람들처럼 이름을 남기진 못할 것이나, 스스로 움직이고 있으니…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자극적인 고함, 혹은 유려한 미사여구,
또는 애국을 앞세운 말들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쪽이 아닐까…
그에 비하면 평범하디 평범했을 노비의 이름을 앞세운 이순신의 마음이란…
“맞붙어 싸울 때 관노비 기이, 난성, 토병 박고산, 격군 박궁산…들은 전사하였습니다.…”
-김훈 ‘내 마음의 이순신 1’ <연필로 쓰기> 中
오늘의 앵커브리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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