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오계 지켜야 되나요? 말아야 되나요? 우리가 계를 지킬 때보면, 또 계를 받을 때보면 지키겠느냐? 말겠느냐? 그렇게 묻지 않습니까? 그럴 때 우리 뭐라고 대답하죠? “예. 지키겠습니다.” 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다보면 오계라고 하는 부분은 5가지의 계를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살-도-음-망-주. 그래서 살생을 하지마라. 도둑질을 하지마라. 음행을 하지마라. 망어를 하지마라. 또한 술을 먹지마라. 이렇게 5가지를 이행하기로 하는데, 그 5가지를 지키겠다고 우리가 보살계를 받죠.
그런데 그 보살계를 받을 때는 반드시 다짐을 합니다.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키겠다. 라고 하는 마음으로써 계를 받지만, 막상 생활을 하다보면 그게 되요? 안 돼요? 사사건건 모든 게 다 걸리는 거 같아요. 첫째 살생을 하지마라. 그런데도 산목숨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나요? 없나요? 없어요. 우리가 모든 부분의 삶을 영위하려고 하다보면 산목숨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다라고 하는 부분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오계를 지키는 부분에 있어서 오계라고 하는 부분은 반드시 지키려고 노력을 하되, 그 노력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반드시 그 명분이 있어야 되는 거다.
예를 들어서 살생 하지마라. 그랬는데, 농사를 짓는 분들이 농작물에 벌레가 끼었어요. 잡아야 되요? 말아야 되요? 잡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부분은 살생입니까? 아닙니까? 살생이 아니에요. 살생이라고 하는 부분은 필요 없이, 나의 이익을 위해서, 나의 어떤 부분의 욕심을 위해서 상대를 해하거나 죽이는 부분이 살생인 것이지, 농사를 짓는 사람이 벌레를 잡는 건 당연한 부분일 수 있듯이. 그래서 初發心自警文초발심자경문에 보면 그런 내용이 나와요. 지범계차하라. 계를 받을 때는 일단 받아서 지니고, 또한 때로는 범하고, 때로는 열고, 때로는 닫아라. 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보면 농사를 짓는 사람이 곤충을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이치니까 그런 부분을 갖고 살생이라고 말할 이유는 없겠죠. 그다음에 오늘날 우리가 보면 거짓말 하지마라. 그랬는데 거짓말을 때로 할 때가 있어요? 없어요?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에게 이익이 되는 부분이라면 거짓말해야 되요? 안해야 되요? 해야 되죠. 그런데 거짓말을 해서 상대방에게 손해가 끼쳐지는 행위라면 해야 되요? 말아야 되요? 그게 바로 계를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불교라고 하는 이 종교는 융통성이 있어야 되요. 융통성이라고 하는 부분을 발휘하려면 뭐가 필요하죠?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식의 종교가 아닌 지혜의 종교, 우린 끝임 없이 도를 이루는데 있어서, 부처님 가르침대로 사는데 있어서 그 가르침의 목적은 성불에 있다. 그 성불을 하는 데 있어서 이것이 상대방에게 이익이 될 건지 아닌지, 또한 내 개인에게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또 어떤 술수를 피우거나 하는 거 자체는 거짓말이 될 수 있겠으나, 상대방의 목숨을 살려주기 위해서 하는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의 해석을 잘못 해석을 하다보면, 모든 부분을 다 용서하고 싶은 거예요. 자기가 잘못하는 모든 부분을 다 합리화시키기를 목적으로 해서 움직이거나 하는 것은 참된 계율이 아닌 거죠.
그래서 계라고 하는 부분은 그야말로 계율정신이라는 자세는 만인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행위,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때로는 열기도 하고, 때로는 맞기도 하고. 그래서 예를 들어서 이웃집에 어떤 사람이 술 먹고 아내를 때리려고 막 쫓아가고 있어요. 아내가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술 먹은 남편이 이웃집 누구에게 “우리 마누라 봤소?” 라고 물었어요. 그가 도망간 데를 가르쳐 둬요? 거꾸로 가르쳐줘야 되요? 그런 거짓말은 얼마든지 해야죠. 그런데 부처님 믿는다고 잘못해석해가지고 도망간 사람을 “이쪽으로 갔어요.” 라고 가르쳐주면 그것이 오히려 계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계를 파하는 게 되죠.
오늘날 흔히 보면 살생을 하지마라.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살생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살생의 반대가 뭐죠? 방생입니다. 방생. 우리가 살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방생을 하는 불자가 되라. 그래서 방생이라고 하는 게 어떤 게 방생이에요? 죽어가는 목숨을 살려주는 게 방생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느 사냥꾼이 사슴을 쫓아가요. 사슴을 쫓아갈 때, 사냥꾼이 물었어요. 사슴이 어디로 간 거 봤냐? 그럼 어떻게 가르쳐줘야 되요? 반대로 가르쳐 줘야 되요. 그게 방생이에요. 또 방생이라고 하는 부분이 이런 부분이에요.
우리가 오늘날 흔히 보면 방생을 잘못해석해가지고 특별한 시간을 내서, 특별히 차를 타고, 어딘가 먼 곳에 가가지고, 잡아놓은 물고기 사가지고, 그래서 풀어주면 방생이라고 그러면 돼? 안 돼? 안 되죠. 방생이라고 하는 부분은 뭐가 방생이냐 하면, 오뉴월 뙤약볕에 정말 올챙이가 웅덩이에서 말라죽어가고 있어요. 그걸 쳐보고 있는 순간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면 그건 방생이 아니겠지만, 그걸 쳐다보는 순간에 “아~ 이거 좀 살려줘야 되겠다.” 그래서 우리가 어렸을 때, 검정고무신 신고 다녔잖아요. 검정고무신에다가 올챙이 담아가지고 넓은 물에 놔주면 그게 방생입니다.
여러분 많이 해보셨죠? 그 공덕이 여러분들이 행복한 거예요. 공덕이 멀리 있는 게 아니야. 아주 평상시에 그냥 불쌍한 마음, 측은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를 어떻게 도울까? 그래서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부분의 방향으로 갔을 때, 그건 진정한 방생이다. 그 살생을 두려워할 게 아니고, 우리는 어떻게 살면 되요? 적극적인 방생을 하려고 노력해라. 그래서 방생 중에 가장 큰 방생은 누구냐? 따라하세요. 인간 방생. 인간 방생을 해야 되요.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면 부부가 부부싸움을 하면 말을 해요? 안 해요. 말 안하죠. 왜 말을 안 해요? 답답해 죽으라고.
그러니까 그 부분은 내가 말을 안 하고 답답해 죽으라고 이야기하는 거든 어쨌든 간접 살인이 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항상 되도록이면 상대방 입장에서 “아, 내가 말을 안 하면 네가 얼마나 답답하겠냐?” 말해야 되요? 안해야 되요? 그렇게 소통하는 불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계라고 하는 부분은 많은 부분의 이익을 주기 위해서 희생하는 걸 일컬어서 계율이라고 그 계율이라는 자체는 무조건 지키는 것이 아닌, 때로는 열고, 때로는 닫고, 때로는 막고, 때로는 차단하는 부분이 바로 계율이라고 하는 부분이라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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