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금강경 4번째 강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33페이지 제4 묘행무주분입니다.
妙行無住分 묘행, 미묘한 행이다. 이 말이죠. 무주, 머무름이 없다. 여기서 머무름이 없다는 말은 집착함이 없다. 집착하지 아니한다. 집착하지 아니하는 미묘한 행. 머문바 없는 미묘한 행. 이렇게 제목이 잡혀 있습니다.
復次須菩提 다시 다음에. (다시 부)자죠? 다시 다음에 수보리야.
菩薩於法 보살이 저 법에
應無所住行於布施 마땅히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다시 다음에 수보리야. 보살은 저 법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할 지니.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할 것이니.
所謂不住色布施 不主聲香味觸法布施 보살이 보시를 할 때 어떻게 보시를 해야 되느냐? 법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하라 이런 얘기에요. 법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하라 할 때, 이때 법은 경계를 말합니다. 경계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그 다음에 몸으로 부딪치고, 머리로 알음알이를 하죠. 그런 대상을 여기서는 법이다. 이렇게 일단 썼어요. 모든 경계에 집착함이 없이. 대상에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그리고 저 법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한다 하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한 게 그 다음 문장입니다.
소위, 부주색보시. 색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하며, 색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대상, 모양과 빛깔을 색이라고 한다 그랬죠?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하라. 이 말이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착해서 보시를 하지 마라. 이런 얘기죠?
부주성향미촉법보시 소리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하며, 역시 마찬가지로 향기도 맛도 감촉도 법도 거기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하라. 자~ 저 법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하고 저 법을 다시 뭐로 나눴어요? 6가지로 나눴죠? 색성향미촉법. 그러니까 늘 설명을 할 때는 하나를 먼저 떼서 얘기를 하고 나머지를 같이 붙여서 얘기를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소위 부주색성향미촉법보시 이러면 되겠죠. 그런데 거기서 색을 먼저 떼서 얘기를 하고 다른 거는 같이 했단 말이오.
소위부주색보시 부주성향미촉법보시.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하라.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착하여 보시를 행하지 말지니. 이게 같은 말이에요. 그러니까 집착해서는 보시를 하지 마라하면 보시하지마란 얘기에요? 집착하지 마란 얘기에요. 집착하지 마라. 그러니까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하라.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말 할 수 있겠죠. 그러니까 집착해서 보시를 하지 마라. 이 말은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하라. 이 말이에요.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착해서 보시를 행하지 마라. 또한 귀에 들리는 소리에, 코끝에 스치는 향기에, 혀끝에 스치는 맛에, 손끝에 스치는 감촉에 또 뜻에 스치는 알음알이에 거기에 집착해서 보시를 행하지 마라.
須菩提 수보리야
菩薩應如是布施 보살은 응당이 이와 같이 보시를 하되. 이와 같이 보시를 한다는 게 어떻게 보시를 한다는 거요? 법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한다. 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한다 이 말이오. 이와 같이 보시를 하되.
不住於相 저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느니라. 보살은 보시를 행하되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느니라.
何以故 아이고 어찌한 까닭이냐
若菩薩不住相布施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하게 되면 이 말이죠. 부주상보시니까. 부주상보시.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하면
其福德不可思量 그 지은 공덕이, 복덕이. 불가사량이다. 그 양의 크기를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 즉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 이 말이죠. 만약에 보살이 상에 머문바 없이 보시를 행하면 그 지은 공덕이 한량이 없느니라. 그 지은 공덕이 한량이 없다는 것을 그 밑에다가 예를 들어서 다시 보충설명 하는 거요.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東方虛空可思量不 동쪽에 있는 허공을 헤아릴 수가 있느냐? 없느냐? 끝에 부자가 붙으면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요.
不也世尊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 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可思量不 수보리야 남쪽과 서쪽과 북쪽과 그리고 또 그 사이, 그리고 상하. 위와 아래. 허공을 네가 다 헤아릴 수가 있느냐 없느냐?
不也世尊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須菩提菩薩無住相布施福德亦復如是不可思量 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한 복덕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불가사량. 헤아릴 수가 없느니라. 이랬어요. 그러니까 동쪽 허공을 헤아릴 수가 있느냐? 없습니다. 동쪽 허공만 갖고도 헤아릴 수가 없는데. 하물며 서쪽 남쪽 북쪽. 그리고 그 사유. 사유라는 것은 그 사이사이를 말하죠. 상하. 그러니까 위아래. 그러니까 동서남북 사유 상하. 이건 뭘 말합니까? 십방을 말합니다. 즉 이 온 누리, 온 세상, 이 우주의 온 허공을 네가 다 헤아릴 수 있느냐? 이 말이에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것처럼 보살이 행한 무주상 보시의 공덕도 마치 허공을 헤아릴 수 없는 것처럼 그 공덕이 얼마만한지는 도저히 헤아릴 수가 없다. 이 말은 그 만큼 무주상 보시의 복덕은 한량이 없다. 이런 얘기요.
須菩提菩薩但應如所敎住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무나니라. 여기서 왜 가르치는 바와 같이 머무나니라고 종결이 지어졌느냐? 제일 첫 번째 질문이 이렇게 주어졌어요.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리이까. 이렇게 질문이 주어졌죠? 한가지 주어진 게 아니라 두 가지가 주어졌어요. 쉽게 말하면 어떻게 그 마음을 가지며, 어떻게 그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이 주어졌는데. 부처님은 먼저 다스리는 법을 얘기했죠? 그 마음을 이렇게 다스려야 하느니라 하고 그 다스린 상태를 이제는 어떻게 가져야 한다? 이와 같이 가져야 하느니라.
어떻게 가져야 한다? 지금 설명한 데로 집착함이 없이, 갖가지 행을 행하는. 집착함이 없이 행하라. 그러니까 여기서 행하지 마라는 얘기요? 행하라는 거요? 행하라는 거요. 그런데 어떻게 행하라? 집착함이 없이 행하라. 보시를 하지 마라가 아니라 보시를 하라 하지마라가 아니라, 보시를 행하되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행하라. 그 마음을 어떻게 일상적으로 가져야 하느냐? 이렇게 가져야 한다. 자~ 이렇게 우선 한문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한글로 옮긴 거는 이렇게 옮겨 보니까 한문이 그렇게 특별히 어려운 건 아니죠? 그럼 여기서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행한다.
또,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없이 보시를 행한다. 또는 저 법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 또는 색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 지금 표현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되 있어요. 저 법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는 말이 있고, 색성향미촉법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는 말이 있고. 또 저 상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표현을 가지고 있지만은 다 같은 말이겠죠? 우리가 보통 한마디로 말하면 뭐요? 무주상보시다.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상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 그 말이 곧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 이 말이란 말이오. 이렇게 보시를 행하게 되면 그 공덕이 한량이 없다. 상에 집착해서 행하는 보시를 우리는 유루복이라고 말합니다. 그 복덕은 아무리 많아도 결국은 그것은 언젠가는 사라져버릴 복이다. 그래서 유루. 루라는 것은 샌다. 물이 어디 담아놓으면 새 나가는 것 있죠? 그런데 이 집착하지 아니하고 행하는 그 행을 무위행이라 그래요. 함이 없는 행이라 그러고. 거기에 지어진 복덕을 무루복이라고 말한다. 새지 않는 복이다. 영원한 복이다. 이런 말이 되는데. 여기서는 그 공덕이 한량이 없다.
여기서는 무위니 유위니. 또는 무루니 유루니 이런 말은 쓰고 있지 않습니다마는 우리가 보통 쓸 때, 우리가 어떤 행을 하게 될 때, 유위_함이 있는 행이 있고, 무위_함이 없는 행이 있다 이렇게 말해요. 무위법, 유위법, 또는 무위행 유위행이 있단 말이오. 유위법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집착해서 행하게 되면, 다시 말하면 어떤 상에 집착해서 행위를 하거나, 어떤 대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행하는 것. 그래서 그 행위 뒤에 그 실천 뒤에 뭔가 찌꺼기가 남는 것을 유위의 행이라 이렇게 말해요. 이런 나무판자에다가 또는 이런 마루바닥에다가 쇠에다가 여러분들이 금을 긋게 되면 흔적이 남습니까? 안 남습니까? 남죠. 이것을 유위의 행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허공에다 지팡이를 점을 찍게 되거나 선을 긋게 되면 흔적이 남습니까? 안 남습니까? 아무것도 남지 않아. 이렇게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 것을 무위의 행이라 그래. 이걸 무위법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행했지마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는다. 그러니까 행한 흔적이 남는 것은 인과의 법칙을 따르는 거고, 행한 행적이 남지 않는 것은 여기서는 인과의 법칙마저도 적용되지 않는다. 인과의 사슬마저도 벗어났다 이런 얘기요. 이렇게 유위의 행, 또는 유위법에 의해서 지어진 공덕을 유루복이라고 하고, 유루복은 인연에 의해서 지어졌으면 그 인연을 따라서 다시 멸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 공덕은 언젠가는 사라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돈을 벌게 되면 저축이 되고, 또 그냥 자꾸 써버리게 되면 바닥이 나게 되죠. 빚내서 쓰면 없는 데서 자꾸 쓰는 것 같지만, 그것은 마이너스로 쌓이게 되죠. 나중에 갚을 때는 돈을 벌어도 그걸 갚다 보면 쓸게 없어지는 거요. 이와 같이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이 마이너스 상태로 빚진 것이 결국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거고. 그 다음에 저축이 되 있는 것이 천상으로 가는 길이다. 이것이 육도 윤회의 세계에서 결국은 선행을 하게 되면 선업을 짓게 되고. 이것은 천상으로 나가게 되고. 악행을 하게 되면 악업을 짓게 되고 그것은 지옥으로 나가게 된다.
그러면 지옥으로 간다 해서 영원히 지옥에 있는 게 아니고, 그 갚음을 다 하게 되면 다시 돌아오게 되고. 천상에 간다 해서 영원히 천상에 있는 게 아니라. 그 복을 다 까먹게 되면 도로 내려오게 된다. 이렇게 돌고 돈다. 어느 시점을 딱 잘라 너는 영원히 천상에 가 있고 너는 영원히 지옥에 가 있거라. 이렇게 되지 않는다. 그럼 누가 천상에 보내고 누가 지옥에 보내느냐? 이건 아무것도 보내는 게 없다. 비유를 들어서 물보다 가벼운 기름을 물에다 집어넣으면 물위로 뜨고, 물 보다 무거운 돌멩이를 물에다 집어넣으면 가라앉는 것처럼. 그 지은 업에 의해서 선업은 위로, 악업은 아래로. 이렇게 움직이는 거다. 이것이 유위의 행에 의해서 지어진 유루복이 바로 움직이는 세계다.
그런데 무위의 행이라는 것은 어떤 행은 있었지만은 그 행의 과보가 없다 이 말이야. 그 결과가 없다 이 말이야.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밭에다가 씨를 뿌려서 가꾸었는데, 열심히 행은 했는데. 씨앗 자체를 뿌리지 않았다 이거야. 씨앗을 뿌리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나지를 않는다. 생겨나지를 않으니까 뭐할 것도 없다? 사라질 것도 없다. 무위의 행이라는 것은 바라는 것이 전혀 없다. 바라는 것이 전현 없다. 또는 대상에 집착하지 아니한다. 마음에 아무런 걸림이 없이 행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 결과가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남는 것이 없으면 지어진 복도 하나도 없다고 말 할 수 있겠죠? 안 그러겠어요? 행이 없으니 복도 없다고 말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복이 없는 것이 아니고 금강경 뒤에 갑니다. 역시 지어졌기 때문에 복은 있지만은 보살은 그 복을 탐착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보살은 그 복을 받지 아니한다.
그러니까 그 복은 다 어떻게 되느냐? 중생에게로 회향이 된다. 회향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무루의 복은, 즉 무위의 행은 그 공덕이 한량이 없고. 또 그렇게 해서 지어진 복은 그것은 소멸되지 아니한다.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설명법이 두 가지 인데. 무위의 행에서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으니까 복이 아예 지어 지지를 않는다. 복이 지어지지 않으니까 까먹을 것도 없죠. 이렇게 생각하면 중생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중생은 복을 탐착하잖아. 그죠? 복을 탐착하니까 그건 뭐 좋은 게 아니네요. 나쁜 거네요.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야. 그래서 그 복이 여기서 한량이 없다. 굳이 유루복하고 비교 한다면 이 복은 한량이 없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복이라 할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해야 된다. 왜? 그것이 복이라고 할 것이 있으면 그것은 한계가 있는 복이 된다 이 말이야. 복이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과도 비교 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한량없는 공덕이다.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법회에서 어떤 거사님이 그래요. 불전함에 보시를 하면 복이 옵니까? 이래. 그래서 내가 “그래서?” “아니 복이 온다면 내 꼭 넣죠.” 그래. 또 가만있으니까. “예를 들어서 만원을 넣으면 이만 원이라도 돌아온다면 제가 꼭 넣죠.” 이래. 그래서 내가 “나도 만원 넣어서 일 년 안에 이만 원 돌아오면 재산 팔아서 다 넣겠소.” 왜? 요즘 은행이율이 일 년에 10%도 안 되는데 만원 넣어서 이 만원 돌아오면 100% 아니오. 그죠? 그럼 그 보다 더 확실한 투자가 어디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의 심리가 어떠냐? 그런 100% 정도가 아니라 천% 만%, 억%를 기대할 거요. 그래서 제가 저번에도 말씀 드렸잖아요. 이 불전함에 든 돈이나, 부처님 전에 올린 물건은 가능하면 쓰지 말고 안 먹어야 된다고. 왜? 엄청나게 기대를 하고 갖다놓기 때문에 그 쓴 놈이 물어내야 된단 말이오. 그 먹은 사람이 갚아야 돼. 그래서 옛날부터 시주 돈, 시주 밥이 무섭다. 이런 얘기를 했단 말이오. 그래서 그것을 갚아주지 않으면 결국은 시주한 사람을 실망시키게 되는 거죠. 이렇게 바란다 이거요. 절에 와서 가장 바라는 마음 없이 해라 하지만은 제일 허황된 생각 바라는 마음을 많이 내는 게 절이고, 그 다음에는 또 남편이나 이러고, 제일 적은 게 그래도 자식이에요.
그런데 자식한테도 다 자식을 여러분들이 미워하는 마음이 있다. 자식에 대해서 실망을 한다 하는 것은 자식도 다 뭔가 기대를 하고 있다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다른 건 말 할 것도 없다 이거야. 그래서 우리의 행은 아무리 작은 행도 다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행하는 행이다. 이것을 유위의 행이다 이렇게 말하고. 유위법이다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한다. 어떤 행을 할 때 아무런 바라는 마음이 없다.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섭섭한 마음이 일어 나겠어요? 안 일어나겠어요? 안 일어납니다. 그러니 이 우루벨라 가섭존자가 불을 피워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천상에 나기를 원했죠? 그것이 작은 노력을 하고 무한한 공덕을 바라는 그런 행을 했으니 세상에서는 그것이 엄청난 효과적인 투자다 이 말이오.
평생을 그렇게 했는데 부처님을 만나서 그것이 결국은 윤회의 씨앗을 심는 행인 줄을 알았다. 이 고백 아니오. 나의 이 평생의 그 수행이라는 것이 윤회의 씨앗을 심는 줄을 부처님을 만난 뒤에 그걸 깨달았다 이거야. 이제 나는 그 윤회의 씨앗을 버려버렸다. 이것은 바라는 마음을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 이 바라는 마음에 있다. 얻으려고 하는데 있다. 그것을 놔 버리게 되니까 바로 윤회의 사슬을 벗어 나버리게 된다. 그러니까 얻으려는 게 없으니까 빌 일이 있어요? 없어요? 빌 일이 없죠. 빌 일이 없다는 말은 천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버렸어. 메일 일이 없어.
여러분들이 다 살면서 남의 눈치를 보는 건 뭐요? 거기에 뭔가 상대편으로부터 얻으려고 하는 게 있어요. 하늘의 눈치를 보는 것도 다 얻으려는 게 있다 이 말이오. 그건 꼭 재물만 말하는 게 아니에요? 칭찬을 얻으려 하거나, 비난을 받지 아니하려 하거나. 갖가지 무엇인가를 얻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는 늘 메어 살게 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더 접근해서 설명을 하게 되면요. 자 제가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이 분이 저한테 와서 돈을 좀 꿔주시오 이랬어. 얼마나요? 백만 원만 꿔주시오 이랬어. 그럼 나는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 이거 갚을 수 있을까? 처음엔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물론 거기에는 이자를 많이 준다. 하면 이자에 은행이자 보다 높은데? 이렇게 생각하지만, 다른 한쪽으론 걱정이 되죠. 어떤 걱정이 됩니까? 떼일 걱정이 된단 말이오.
그런데 이자가 획기적으로 높으면 떼일 그 위험부담 보다는 이자에 눈이 멀게 되죠. 그러니까 지불을 하게 되죠. 그런데 이자도 높은데 또 절의 신도고, 또 옛날 학교 동기동창이고, 안 그러면 사촌동생이고. 이렇게 되면 그것 자체가 떼일 확률이 적죠. 길가는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지만은, 어떤 일정한 조건이 있다는 것은 그건 안전하다는 걸 말해요. 그렇게 해서 우리가 돈을 주게 된다. 돈을 주게 될 때는 뭔가 바라는 마음이 누구나 다 있게 되죠. 그런데 내가 바라던 바라지 않던. 일단 돈이 넘어가면 그 다음에 그걸 가지고 어떻게 할 건지는 누구 손에 달렸어요? 그 사람 손에 달렸어. 내가 원한다고 거기에 따라서 그 사람이 행동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바라는 마음을 가졌을 때, 즉, 그것이 돈으로 되돌아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인사로 돌아오든지, 고마움의 표시로 오든지. 어떤 것을 바라게 되죠. 당연히. 그런데 상대가 취하는 행동은 두 가지에요. 하나는 그 고마움의 표시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돈을 돌려주는 거라든지. 어떤 것들이 내 기대에 부응하는 경우가 있고, 그렇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럼 부응하는 경우는 내가 볼 때 “응 됐어.” 이렇게 만족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내 기대에 부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실망을 하게 되죠. “야~ 내 그럴 줄 몰랐는데. 사람이 말이야 사촌지간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동기동창 사이에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또는 “절에 신도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스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 실망을 하게 되고. 실망이 조금 지나면 어때요? 미워하게 되죠. 원망하게 돼. 이게 더 가면 증오하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결혼할 때 다 뭔가 바라는 마음을 갖고 결혼을 하게 되겠죠. 이 남자하고 결혼하면, 생각해 보세요. 돈을 잘 번다든지. 또는 외국을 갈 수 있다든지. 뭐 공부를 할 수 있다든지. 지위가 높아진다든지. 뭐 여러 가지 이런저런 것들이 계산돼서 다 기대가 된다 이거야.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내가 바라는 만큼 안 되죠. 그렇게 될 때는 속았다 싶으단 말이야. 손해난다 싶으면 결혼 괜히 했다 싶고. 손해까지는 안 나도 바라는 만큼 안 되면 실망을 하게 돼. 그것이 점점점점 시간이 흘러가게 되면 원망으로 바뀌게 되죠. 그래서 남자 잘못 만난 거에 대해서 한탄을 하게 되고, 남자에게만 원망이 가느냐? 아니다 이 말이야.
그렇게 결혼을 소개한 사촌언니가 소개했으면 사촌언니를, 부모가 권유를 했으면 부모를, 그래서 내 인생 버렸다고 원망하게 된다. 이 원망이 지나치면 증오하게 되죠. 이런 식으로 이게 바라는 것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렇게 나아가게 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한다는 것은 뭘 말합니까? 인생이 괴롭다는 것을 말해요. 그것이 심해지면 지옥과 다름이 없다. 하루하루 사는 게 지옥이다. 여기서 어떻게 하면 벗어나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여러분들이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하며 어떨까?
바라는 마음 없이 내가 뭘 주거나 어떤 관계를 맺어도 그가 할 수 있는 건 역시 두 가지죠. 나에게 뭔가 그 대가를 돌려주던지 그렇지 않던지. 역시 내가 바라든, 바라지 않든, 상대편은 거기에 관계없이 두 가지 역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런데 내가 바라지를 않았는데 그가 마침 고맙다 하고 돈을 회수를 해 주면 나는 이미 놔 버렸는데 가져오니까 기뻐요? 안 기뻐요? 기쁘죠. 공짜 생긴 거 같단 말이오. 그리고 설령 그가 돌아오지 않아도 나는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섭섭한 마음이 없다. 그러니까 바라는 마음, 기대하는 마음 없이 행했을 때는 뭐가 돌아오지 않습니까? 이 섭섭한 미움, 원망이라는 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게 흔적이 없다는 거요.
그런데 그거는 돌아오지 않지만은 그가 부응을 할 수도 있으니까 부응을 하게 되면 나는 기쁨이 있고, 갖가지 복덕이 생긴다. 그러니까 여기에 흔적이 없다는 말은 흔적이 없다는 말 속에서는 그가 나에게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에게 뭐가 없다? 괴로움이 없고, 원망이 없고, 이런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럼 그가 부응을 하게 되면 어떠냐? 즉 그가 뭔가를 행위를 하게 되면 어떠냐? 여기에는 기쁨이 있다. 그러니까 기쁨이 있되 뭐는 없다? 괴로움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을 때는 어떠냐? 기쁨이 있기는 있지만은 기쁨이 적고, 또 그렇지 않으면 다른 쪽은 어때요? 괴로움이 있다. 괴로움이 잉태하고 괴로움이 커지게 된다.
그러니까 어떤 쪽이 나한테 이익이에요? 바라지 않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다. 내가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친구지간에 원망할 일이 없고, 부모자식간에도 원망할 일이 없고, 부부지간에도 원수 질 일이 없다. 그러니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하라.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그 공덕은 이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 얻은 공덕하고 이 바라는 마음이 없이 행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다 이거야. 그러니까 조금 더 난 게 아니라 그 차이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그리고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내가 그에 매어 있다 이런 얘기요. 그가 하는 행동에 따라서, 내 눈에 보이는데 따라서, 기쁨과 슬픔이 오고 가고. 그가 하는 말 소리 한 마디에 내 애간장이 녹아난다 이거야.
그러니 마치 그것은 내 목에 밧줄을 매서 그에게 주고, 그가 잡아당기는 대로 움직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곳에 기대를 걸고 인생을 살아가죠. 중생은. 즉 바라는 마음을 갖고 인생을 살아간다. 부모에게도 갖가지를 바라고, 남편이나 아내에게도 갖가지를 바라고, 자식에게도 바라고 친구에게도 바라고, 절에 와서도 바라고. 이것은 자기 목에다가 밧줄을 만들어서 제일 굵은 것은 남편한테나 아내한테 주고, 그 다음 굵은 것은 부모한테 주고. 그 다음에 굵은 것은 자식한테 주고, 자질구래 한 것들은 스님한테도 하나 주고, 쫙~ 준다 이 말이오.
그런데 굵은 밧줄을 남편한테 줬는데 남편이 제대로 성취가 안 되면 그 굵은 밧줄을 나중에 절에 가가지고 스님한테 갖다 준다 이거요. 이렇게 하면 그 밧줄을 쥔 사람이 어떻게 잡아당기느냐에 따라서 그는 이리 끌리고 저리 끌리고 이렇게 살아간다 이 말이야. 이것을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셨느냐? 마치 소가 코뚜레에 멍에에 걸려 사람이 잡아당기는 데로 이리 가고 저리 가는 그 고통과 똑같다고 했어. 중생의 이 고통이. 그런 것처럼 여러분들은 거기에 코가 꿰어서 잡아당기는 대로 간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여기까지 오면서도 한 번 생각해 봐요.
아침에 애가 늦게 일어난다. 이걸 갖고 한 바탕 하고. 또 남편이 세수를 하는데 뭐 어쨌다. 물을 많이 썼다든지. 뭐라고 했다. 아침에 나갈 때 사랑해요 소리를 안했다든지. 뭐 갖가지를 갖고 늘 이 마음이 좋았다가 나빴다가 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죠? 윤회가 따로 하는 게 아니라 이게 윤회에요. 육도를 윤회하는 거요. 여러분들은 법문도 마찬가지에요. 딱 와서 법문 듣고, 법문이 제 맘에 들면 기분이 좋고. 지 바라는 데로 안되면, 에이~ 오늘 이럴 줄 알았으면 비도 오는데 오지 말걸. 집에 있었으면 친구 오늘 어디 가자는데 어디 갔었으면 더 좋았을걸. 이렇게 해서 기분이 나쁘고. 갖가지 자기 바라는 거에 따라서 희로애락이 늘 좌우되고 있다. 이게 우리가 경계에 팔려서 산다 이렇게 말해요.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세상에 굴림을 당한다. 내 삶이 이 세상의 영향을 받아서 세상이 시키는 데로 굴러가는 거요. 마치 수레바퀴가 어린아이들이 굴리는 데로 굴러가듯이. 이렇게 굴러간다.
주인이 개를 한 마리 밧줄을 쥐고 같이 산책을 나가면, 개가 주인 앞으로도 갔다가, 주인 뒤로도 갔다가, 주인 옆으로 갔다가. 이렇게 할 때 자기가 생각 할 때는 자기 마음대로 다니는 거 같죠? 그런데 한 바퀴 빙~ 돌고 온 뒤에 보면 누구 따라 갔다 왔다? 주인 따라 갔다 온 거요. 여러분들이 개인 적으로는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고, 자기가 다 살 은거 같지만은 인생을 살아서 결과를 떡 두고 보면. 다 이것은 이 세상에 굴림을 당했어. 태어날 때도 왜 태어 났는지도 모르죠? 예. 엄마아빠 허부적허부적 할 때 그냥 찌꺼기로 생겨났다 이렇게 말하죠. 그래서 태어나서 뭘 먹을 건지, 뭘 입을 건지, 무슨 말 할 건지. 이거 자기가 선택했어요? 그저 세상 따라 습득했어요? 따라 습득했죠.
유치원가고 중학교 가고, 고등하교 가고, 시집가고, 애기 낳고, 이것도 남 따라 남이 할 때 그때 안하면 무슨 큰 손해라도 나는 것처럼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따라가요. 이웃집에 자전거 사면 자전거 있어야 되고, 이웃집 자동차 사면 자동차 있어야 되는 줄 알고, 아파트 평수 늘어나면 그거 안 따라 가면 무슨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이웃집 해외 여행가면 안가면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여름에 다 해수욕가면 안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해수욕장가는 비용은 요즘은 좀 덜하죠 오히려. 한때 한 20년 전이나는, 여름에 안가면 난리 났잖아 그죠?
이런 식으로 굴러가는 거요. 여러분들이 뭘 선택한다 하지만은 그 흐름 속에서 살아가는 거지. 여러분들이 인생을 그것을 거슬러 본적 있어요? 거기에 초연해 본적 있어요? 마치 홍수가 져서 흙탕물에 휩쓸려 갈 때 거기 흘러가는 나무토막하고 무슨 차이가 있느냐? 이렇게 살아가는 게 우리들의 삶이에요.
이것이 저 법에 집착하여 보시를 행하는 것과 같다. 색성향미촉법에 집착하여 인생을 사는 거다. 우리 인생살이가 이래. 이것을 세상에 굴림을 당한다. 세상이 굴리는 데로 따라 굴러간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이것이 다 자기가 똑똑한 척 하고, 이해타산을 따지고, 이렇게 할 때 도리어 이런 결과가 생긴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어떠냐? 그것은 내 목의 걸린 갖가지 밧줄을 다 끊어 버린 것과 같다. 도무지 그가 하는 행동에 의해서 나의 희로애락이 결정되는 게 아니다. 적어도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는다. 내갈 길을 내가 간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인과 종의 차이가 뭐요? 주인은 어떤 결정을 자기가 하고 종에게 뭘 줍니까? 재물도 주고 칭찬도 해주고 뭘 해주죠? 종이라는 건 뭐에요? 주인을 쳐다보고 살죠. 거기서 뭔가를 받아서 기뻐하고, 인사 듣고 기뻐하고, 쓰다듬어 준다고 기뻐한다 이 말이야. 이 종의 특징이 그거에요. 그러니까 오늘 범부 중생은 다 종과 같은 존재다. 누군가가 나를 보고 사랑해 주고, 보살펴 주고, 쓰다듬어 주고, 위로해 줘야 기쁘다 이거야. 그런데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에게 또는 이 세상에 보살펴주고 쓰다듬어주고 의지처가 되 주면 그게 바로 주인이 되는 길이다.
오늘 우리가 자아상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자기를 잊어버리고 누구의 종이 됐다 이거야. 재물의 종이 되든지, 칭찬에 종이 되든지, 권력의 종이 되든지. 명예의 종이 됐다 이거야. 그런데 여러분들이 남을 사랑하고 남에게 베풀고 하는 삶으로의 전환은 바로 여러분들이 주인이 되는 거다. 특히 여자가 더 남자보다 인생이 피곤하고 괴롭고 속박이 많은 것은 인생의 행복을 자기 스스로 얻지 않고, 늘 어려서는 부모 따라, 결혼해서는 남편 따라, 나이 들어서는 자식 따라 자기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거요.
그래서 요즘 여성해방운동 하니, 똑똑한 여자들도 취직하고 뭐하고 뭐하고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 한번 해 보겠다고 하다가 뜻대로 안되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뭐요? 에이고 뭐 시집이나 가 버릴까? 그게 뭐요? 자기 행복을 자기 손으로 개척하는 게 아니고 남자에 빌붙어서 해결을 하려고 한단 말이오. 이렇게 하기 때문에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근본적으로 주인이 되기가 어려운 거요. 그러니까 여성의 해방이라는 것은 그 남자들이 하는 것을 반대하고 따라 하는 그것만 갖고 되는 게 아니라, 바로 남자에 의지하는 마음, 남자로부터 뭔가 바라는 마음, 이게 놓여놔야 됩니다.
아무리 똑똑한 여자도 똑똑한 여자일수록 자기하고 연애를 하거나, 자기 남편이 될 사람은 자기보다 더 똑똑해야 되죠. 그래 안그래요? 그래야 되. 적어도 자기보다 더 똑똑해야. 재산이 많던지, 인물이 잘 생겼던지. 뭐 그런 건 다 없어. 자기가 다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사람이 어때요? 똑똑해야 되. 그래야 거기에 의지할 때가 생기죠. 의지 할 때가 생겨야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단 이거야. 자기보다 갖가지로 못난 남자를 보는 순간에 반했다. 이런 여자들은 없잖아요. 그러니 이 종속성. 이것이 떨어져야 진정한 해방이 있다. 여러분들 살면서 늘 불평이 뭐요? 남자들의 불평은 꼭 아내만 갖고 불평하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여러분들의 주 불평은 3가지죠. 부모의 불평, 남편의 불평, 누구? 자식에 대한 불평. 어릴 때는 부모 불평이 제일 많고, 결혼해서는 남편 불평이 제일 많고, 나이가 이렇게 좀 드시면 자식 불평이 제일 많아요. “요놈의 자식이 내가 얼마나 키운다고 애를 쓰고 했는데, 불효막심한 놈” 이래. 이 남편하고 같이 함 여러분들 살펴봐요. 자식에 대한 불만이 누가 더 많습니까? 아내가 더 많아요. 자식에 대한 실망도 더 크고. 왜? 거기에 그만큼 기대를 했기 때문에 그래. 그러니까 옛날의 3從之道종지도는 바깥에서. 바깥에서 여자는 어려서는 아버지한테 매여있고, 결혼해서는 남편에게 매어 있고, 또 남편이 죽으면 자식한테 매어있어서.
이렇게 매어 있을 때는 이것은 제도적으로 개혁이 가능하죠? 그런 제도를 없애고, 그런 관습을 없애고 해서 지금 다 형식적으로 많이 없어졌다 이 말이오. 그러나 그 매어 살던 습관, 이 기대하는 이 종속성은 아직도 없어진 게 아니란 말이오. 제도가 바뀌어도 머리에 든 이 종속성은 안 없어졌기 때문에 지금도 아직도 괴로움이 많다 이 말이오. 그러니 이 바라는 마음을 버려야 여러분들이 참 해방이 될 수가 있다. 참 해탈이 될 수가 있다. 이 바라는 마음 없이 행하는 것이 뭐냐? 바로 무주상 보시다 이거야.
자 그러니까 우리가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라. 그러니까 구제를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 무거운 짐을 덜어주세요 하지 말고, 어떻게 하라고? 진정한 해탈을 원하면 남의 짐을 덜어주겠다 마음을 내라 이 말이죠? 즉 남의 짐을 덜어주려면 그 사람을 어떻게 해라? 이해하고 그 사람 처지에서 그가 바라는 바를 알아서 그걸 해결해주라 이 말이오. 이렇게 행하게 되면 내 괴로움이 사라지는데. 이렇게 해서 첫째 내 괴로움이 사라지고 그도 좋아지는데. 이 때 상대의 변화를 보고 거기에 내가 어떤 바라는 마음을 내게 되면 어떻게 된다고? 새로운 원망이 또 일어나게 된다.
그러니까 마음을 다스리는 법은 얻겠다는 생각을 뭐로 바꿔라? 주겠다는 것으로, 바라는 것을 버리는 쪽으로, 상대를 위해서 마음을 내라.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는데 그렇게 해서 일체중생이 구제됐다 하더라도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뭐가 생긴다?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즉 상을 짓게 되면 반드시 찌꺼기가 생기게 되요. 그러니까 상을 짓지 마라. 이 말은 찌꺼기를 남기지 마라. 바라는 마음을 내가 중생을 구제했다.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내가 뭘 했다 하면 거기는 반드시 바라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그 바라는 마음은 새로운 괴로움을 뭐하게 된다? 잉태하게 된다.
그러니 다스리는 법은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고 마음을 내고, 그렇게 마음을 내면 괴로움이 없어지는데. 그 괴로움이 없어진 상태를 계속 유지를 하려면 자기 행에 대해서 아무런 과보를 바라지 않아야 그것이 지속이 되지. 바라는 마음이 생기면 즉시 뭐 하게 된다? 도로 괴로움은 또 생기게 된다. 그러니까 이렇게 마음을 다스려라. 그리고 이와 같이 다스린 상태를 이와 같이 유지시켜라. 마음을 이렇게 가져라.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행을 어떻게 행할 거냐? 하는 행을 대표적으로 보시에 대해서만 얘기를 했죠. 보시만 해당 됩니까? 아니에요.
그래서 뒤에 가면 뭐냐? 응무소주이생기심이라 그런단 말이야. 아시겠어요? 마음을 낼 때는 아무런 집착함이 없이 마음을 내라. 보시의 행뿐만 아니라 모든 행에서 마음을 일으킬 때는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마라. 이 말은 마음을 내지 마라는 거요? 마음을 내되 집착함이 없어라는 얘기요? 집착함이 없어라. 보시를 하지마라는 얘기가 아니라, 보시를 하되. 집착함이 없이 하라 이 말이오. 집착함이 없이 보시를 하라.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보시를 하라. 이런 얘기요. 그럼 뭐 공부가 다 됐죠.
그래 반야심경에서 이걸 한 마디로 한마디로 뭐라 그랬어요? 이무소득고.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이 얻을 바 없는 까닭으로 보리살타는 의반야바라밀다.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까닭으로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이러잖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의 장애가 없고. 마음의 장애가 왜 생겨요? 얻으려고 하는 데서 마음의 장애가 생기는 거요. 얻으려고 하는 것은 이미 그물을 쳐 놓은 거와 같기 때문에 거 뭔가 걸리게 되요. 그런데 얻을 바 없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으면 마음에 얻겠다,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천하 경계 아무리 해도 마음의 걸림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뒤집어진 잘못된 생각. 즉 망상에서 깨어나서 원리라는 것은 떠난단 말이죠. 깨어나서 구경열반에 이르게 된다.
자 그러면 실제로 있었던 일을 내가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 해 드릴께요. 그럼 아마 여러분들이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겁니다. 제가 광주사태가 난 뒤에 한국에서 뭘 하기가 좀 어려웠어요. 감시감독이 심해서. 그래서 미국으로 건너갔어요. 미국으로 건너가서 제가 조금 살았는데 그때 한 절에 제가 머무르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절은 벌써 81년도니까 지금부터 한 20년 가까이 됐잖아 그죠? 요즘 절도 많지만 그때는 절이 두 개 밖에 없었어요. 교포사회에. 그런데 이 절에 제일 큰 절인데. 큰 절이라 그래 봐야 미국에 이층양옥 하나 빌려서 리빙룸에다가 법당으로 하고 이렇게 살고 있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 절에서 처음가면 다 절에 무슨 공양주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죠? 스님들이 주지스님하고, 공부하시는 스님들. 미국에 공부한다고 오신 스님들 한 두 세분 있고, 이러고 사는데. 신도들도 그렇게 많지는 않죠 그때는. 그 자연적 저는 주로 설거지나 부엌일 같은 거, 청소하고 이런 일을 주로 했는데. 그 절에 제일 열심힌 신도가 있었어요. 절에. 기도를 열심히 하는 신도가 있었단 말이오.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와서 기도를 하고. 그리고 또 이 분은 오전에 와서는 이 금강경을 칠독을 합니다. 지금 우리 공부하는 금강경 있죠. 이것을 7번을 독송을 해요.
그리고는 점심 먹고는 또 500배 절을 하고. 이렇게 저녁때 되면 집에 가고 이러신 분인데. 한 60세 정도 된 보살님인데. 그러니까 절에서는 금강경보살 또는 절보살 이렇게 불릴 정도로 신심이 굉장히 뛰어나신 분이오. 그런데 부엌에 있으면, 저도 요즘 여러분들 하고 이렇게 제가 부엌에 설거지 당번으로 안 들어가니 여러분들 하고 법상에 앉아 법문 듣는 관계로는 만나지만은 개인적으로 얘기할 시간이 별로 없잖아. 그죠? 그런데 부엌에 들어가서 설거지를 같이 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친해집니까? 안 친해집니까? 친해지죠. 설거지 다 해 놓으면 끝나면 뭐 커피한잔 타서 방에 앉아서 마시고. 이렇게 일을 같이 하면 사람이 동료의식이 생기고 이런 거리감이 없어 진단 말이오. 친해지죠.
그리고 한참 몇 주 지난 뒤에 아주 서로 친해 졌어요. 그래서 방에서 커피를 서로 마시고 있는데. 다른 사람도 마침 없고. 그래서 그 보살님이 커피를 마시면서 아이고 자기 얘기를 좀 해야 되겠다는 거요. 자기는 사실은 지금 막 괴로운 게 많은데 남한테 얘기를 못한다는 거요. 마침 나하고 얘기를 좀 하겠다고.
그래 이 보살님이 살아 온 인생 얘기를 하는데 참 눈물 나는 얘기요. 겉으로 절하고 기도하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아무 괴로움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이 사람의 내면에 그런 큰 아픔을 또 갖고 있는 거요. 이 분은 그 6.25를 전후로 해서 그 전에 결혼을 했데요. 결혼을 했는데. 이 집안도 옛날에 다 어려웠잖아 그죠? 그러나 아마 밥이나 먹고 살아서 큰 고생은 안한 사람이었어요. 그래 결혼을 해서 이 아이 하나, 큰 아이를 낳고 작은 아이는 뱃속에 가지고 있는 상태 하에서 남편이 군대에 징집에 되가 군대에 갔는데 결국은 전사를 해 버렸어.
그러니까 그 부산 피난 시절에 그런 상태로 사니까 사는 게 말이 아니죠. 밥을 굶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렇게 되니까 악착같이 살게 되고. 보따리 장사를 해서 생계를 유지하게 된 거요. 그런데 처녀 때 부모를 따라서 절에를 다녔기 때문에 이렇게 어려울수록 사람은 더 부처님 전에 매달리게 되잖아요. 자기 말마따나 만약에 부처님이 아니계셨다면, 자기가 불교를 안 믿었다면 아마 죽던지 아마 무슨 수가 났을 거라는 거요. 너무 부처님께 매달리면서 기도를 하고 결국 살아났다는 거요.
그런데 그때 자기 소원이 공양주가 그렇게 부러웠다는 거요.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는 것은 이미 자식이 있고 하니까 자신은 가망이 없다 생각했지마는. 자식만 없다면 절에 가서 공양주를 하고 절에서 수행하고 살았으면 좋겠는데. 이 자식까지 있으니까 절에서 받아주는 데가 참 드물죠.
그때만 하더라도 한 사람 일하는 월급은 고사하고 이 밥벌이도 하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죠? 애들 둘이 있으면 받지를 않는단 말이오. 그렇게 해서 이 절에도 못 있고 장사하면서 살았는데. 어쨌든 관세음보살에게 매달려서 고생한 공덕인지 아이들도 잘 자라고, 본인도 장사해서 밥 먹을 정도는 되고. 이렇게 해서 20년 30년 세월이 흘러간 거요. 그런데 큰아들은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 의대를 들어간 거요. 의과대학을 들어갔으니까 잘 됐죠. 둘째도 아들인데 얘도 또 해서 서울대 공대를 들어갔다는 거요. 그러니 둘 다 또 국비장학생으로 해서 미국으로 유학을 왔어요.
그런데 그때는 엣날에는 미국 유학 왔다가 한국으로 잘 돌아와요? 미국에 그냥 살아버려요? 미국에 살아버리는 경우 많죠. 그래서 큰아들은 의사가 돼서 미국에 살고, 작은 아들은 공대 교수가 돼서 역시 미국에 살고 있는 거요. 그러니 고생한 보람이 있죠. 주위에서 다 자식이 다 잘됐으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출세를 한 거고, 소원성취 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부처님께 더 이상 바랄게 없을 만큼, 죽은 남편 때문에 혼자 살은 그런 청상의 서러움은 있지만, 그러나 자식이 뜻대로 됐기 때문에 아무런 더 이상 바랄 게 없는 부처님이 자기 원하는 데로 다 들어줬다고 할 만큼 그런 삶을 살은 거요.
그래 이제 이렇게 성공을 한 뒤에는 이 아이들도 엄마 혼자서 한국에서 그렇게 아직도 장사하고, 나이가 60이 다돼서 아직도 장사하고 사는 게 보기 안 좋고. 그래서 미국으로 오라는 거요. 그래 이 보살은 자기가 늙어서 미국가면 뭐하겠어요? 그러나 자식이 보고 싶으니까 안갈 수가 없어요. 자식들이 안 나올라고 그러니까. 주위에서 다 뭐라 그래요? 아이고 더 이상 장사할거 뭐 있냐? 미국 가서 살아라고.
그래서 그 얼마 안 되는 가게 하고 이런걸 다 정리해서 미국으로 떠난 거요. 이 보살이 미국에 떠날 때는 자기가 혼자돼서 고생이 시작되면서 한 35년 내지 40년간 고생한 그 모든 고생의 결과를 이제는 성공을 했어요? 안했어요? 성공을 했고, 이제는 다시는 이런 고통을 겪을 필요도 없는 완전히 벗어나는 그런 비행기란 말이오. 그 비행기를 탄다는 거는 모든 괴로움은 이걸로 끝이 난 거죠. 안녕히 계십시오 가 됐단 말이오. 이렇게 해서 미국에 떡 도착을 한 거요.
미국에 도착을 하니까 한국에 있을 때보다 집이야 월등하게 좋겠죠. 그래 의사고 하니까 큰 집에다 모셨어요. 이렇게 사는데 자기가 미국에 딱 도착하는 날부터 뭔가 가슴이 답답하더라는 거요. 그래 한참 있다 자기를 둘러보니 자기는 사람이 아니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거요. 말도 한마디 안 통하죠. 길도 모르죠. 다닐 수도 없죠. 그러니까 아들이 이쪽에다 데려다 주면 나무토막처럼, 보릿자루처럼 거기가 있다가, 이쪽으로 데려다 주면 거기 가서 있다가. 그 외에는 할 게 없다는 거요. 요즘만 해도 이 코리아타운이니 이런 게 있어서 할머니들 모이고 이런 게 많이 되죠. 그 때는 아직 그런 게 전현 자리가 안 잡혔을 때란 말이오.
그래 이 20대 초반부터 해서 한 30~40년을 장사를 하고 온 데를 돌아다니며 살은 보살이니까 그렇게 방안에 갇혀있는 거는 죽기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잖아. 그죠? 그런데 사실은 그게 본인이 원했던 거거든요. 늘 돌아다니면서 일할 때 소원이 뭐 있겠어요? 나는 언제 이리 안 돌아다니고 탁~ 방안에 등 붙여서 몇 날 며칠이고 한 번 자볼까? 이런 거였는데, 소원이 들어졌어요? 안 들어졌어요? 들어졌는데 사람은 미칠 지경이 됐단 말이오. 그런데 큰아들은 거기 같이 미국에 있는 한국여자 교포여자하고 결혼을 했고. 작은아들은 미국 여자하고 결혼을 했어요.
그런데 큰아들 집에 우선 있으면서 보면 이 이런 어머니의 답답하고 한스러운 것을 아들이 잘 알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죠. 그러면 퇴근하고 오면 저거끼리 뭐라뭐라고 얘기하고 이러지. 엄마하고 대화시간이 별로 없는 거요. 그런데 엄마는 하루 종일 아무하고도 얘기를 못했으니까 아들만 들어오면 아들 붙들고 무슨 얘기라도 하고 싶어서 하는데 “바쁘다.” “뭐해야 된다.” “다음에 얘기하자.” 자꾸 이렇게 뒤로 밀리는 거요. 그러니까 이 가슴속에 아들에 대한 섭섭함이 생기는 거요. 내가 니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을 하고. 나는 내 생 전체를 받쳐서 너희들을 성공시켰는데. 너는 하루에 조금 시간 내서 엄마하고 얘기하는 거. 그것도 바쁘다고 안 해주느냐 이거야.
이런 데서 또 부모라는 건 이런데 가면 자식한테 빨래도 해주고, 뭐도 해주고, 할 일이 있어야 되잖아 그죠? 그런데 이게 전부 세탁기니 뭐니, 이런 거로 이루어져있으니까 할 일이 하나도 없는 거요. 그러면 손자를 데리고 놀면 되는데 손자도 영어를 쓰니까 할머니하고 말이 안 통하는 거요. 그러니까 말이 안 통하니까 애들이 할머니한테 잘 오려고 하지도 않는 거요. 그리고 가끔은 조그마한 애지만은 할머니 보고 말 할 줄 모른다고 할머니에게 막 욕을 하는 거요. 그런데 이게 참 4살짜리가 어른을 욕해도, 듣는 어른이 4살짜리 한 테도 섭섭하게 느껴져요? 안 느껴져요? 느껴집니다. 그러니 이게 인생이 자꾸 괴로워지는 거요.
그리고 원망심이 자꾸 생기는 거요. 그러니까 이 집에 못 있겠다. 그래서 “야~ 나 작은 아들 집에 보내주고,” 그래 작은 아들 집에 간단 말이오. 그 집에 가서 있어도 그 집엔 아예 더 문제인 거요. 아예 모든 말이 다 영어로만 왔다 갔다 하니까, 이게 나를 욕하는지, 칭찬하는지, 가끔 보면 저거들끼리 뭐라뭐라 히득히득 쳐다보면서 훌랄라 대는 게 나를 욕하는 거 같고 말이야. 이렇게 해서 그 집에 좀 있다가 또 못 견디니까. 또 큰아들 집에 갔다가, 큰 아들 집에 있다가 또 작은 아들 집에 왔다가. 자꾸 불평을 하게 되죠.
그런데 물론 제일 처음에 왔을 때는 구경시켜준다고 어디도 가고 어디도 가고 어디도 가고 이렇게 구경을 많이 시켜줬대요. 그런데 극장에 영화 보러 가자해서 가면 남자여자가 뻘거벗고 하는 이런 영화가 많이 있으니까. “아이고 보기 싫다.” 안가고, “오페라 가자.”해 같이 가 놓으면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고. 그러니까 아들은 엄마를 구경시켜 준다고 하지만은 부모가 생각할 때는 힘드는 거요. 그게 뭐 안 갈란다 안 갈란다 이래가지고 안가니.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되느냐? 엄마는 그런 거 싫어한다. 이래가지고 갈 때는 저거끼리 가고. 아예 엄마는 빼버리는 거요. 뭐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 아니겠어요? 그죠?
그래 이제 가슴에 자식에 대한, 그 자기가 40평생을 오직 자식하나에만 전 생애. 남편도 없는 상태에서 쏟고 살았는데. 그 자식이 결과적으로 이래 밖에 되는 게 아니고. 한국에서는 자기들 다 친구들이 전부 성공했을 거라고, 미국 가서 얼마나 행복하게 살 거냐고 생각 하는데. 자기는 인생은 이렇게 괴로움의 지옥 속에 빠진 거랑 다름이 없단 말이오. 그러니 가슴은 답답하고, 화가 자꾸 올라오고. 그러니까 아들하고 얘기해도 정상적으로 대화가 안 되고 뭔가 짜증석인 얘기가 되고 하니까. 아들들은 뭐라 그러냐? 엄마가 변했다는 거요. 엄마 이젠 밥도 해 주겠다. 주는 밥 먹고 큰 방에 혼자서 딱~ 편안하게 자고, 누가 와서 귀찮게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왜 자꾸 신경질만 느느냐는 거요?
그래서 몇 년 지나서 견디다 견디다 못해서 자기가 생각 할 때는 이렇게 사느니 한국 가서 사는 게 낫겠다. 이렇게 해서 아들한테 나 한국 갈란다. 그러니까 아들은 “어머니 왜 그러시냐고. 그 고생하고 왜 또 그 고생을 또 하느냐고. 한국 가서 뭐 하고 살라 그러느냐?” “야야~ 내 한국가서 뭘 하고 살든지 간에 일단 한국 가서 사는 게 좋겠다.” 그러니까 올 때 집하고 다 팔아, 가게하고 다 팔아 와서. 애들 줘서 그거 가지고 집도 사고 이랬는데. 그러니까 내 가지고 온 돈이나 돌려주고, 그럼 내 가져가서 살겠다. 그런데 미국사정을 잘 모르면 이래 말 할 수 있지만은 미국에는 그렇게 의사라도 몰라도 현금은 그렇게 많은 게 아니죠? 엄마가 가지고 온 그 돈 갖고, 사실은 집도 넓히고 제대로 샀지.
그러니까 이게 돈을 달라니까 돈을 안주는 거요. 그러니까 아들은 어머니가 왜 또 그렇게 이제 편해졌는데 또 가서 고생을 할려고 그러냐? 이러지만은. 엄마가 달라고 해도 안주니까 부모가 생각할 때는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이것들이 돈을 안 돌려 줄려고 그런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더 부화가 터지는 거요. 저거가 번 돈도 아니고 내가 평생 고생해서 보따리 장사해서 번 돈인데. 그래서 나중에는 그럼 집 살 돈은 안 줘도 좋으니까. 전세 값이라도 달라. 방하나 얻어서 살겠다. 그러니까 자식들은 어머니가 왜 이러시냐고? 이래 그것도 안 되는 거요. 그러니 마지막으로 얘기가 어디까지 갔냐? 그럼 나 한국 갈 비행기 표만 두고. 내가 가서 무슨 짓을 하든지 살 테니까. 그럼 자식이 들어 주겠어요? 안 들어 주겠어요? 안 들어주죠.
이래가지고 부모자식간의 사이는 더욱 벌어져서 한 집에 있어도 말도 안하는 정도가 된 거요. 그러니까 부모는 자식만 보면 화가 치솟는 거요. 대화가 아니라 이제는 얼굴만 봐도 꼴이 보기 싫고 열이 솟는단 말이오. 그래 도저히 복장이 터져 살 수가 없는 정도가 됐는데. 이거 뭐 누가 있어야 가서 하소연을 하거나 얘기를 하는데. 아무도 얘기할 사람이 없는 거요. 그래 그 전부터 한국 절이 생긴 줄 알고 절에 나오게 된 거요. 절에 나오게 되니까. 집에서든 절에서든 계속 옛날에 절에 다닐 때, 그 어려울 때 금강경 독송하고 관세음보살 부르면서 절하고 했으니까 이렇게 하는데. 자기가 이렇게 금강경을 독송하고 절을 하는 이유는 하루도 이렇게 안하면 화병이 나서 죽을 거 같다는 거요.
그러니까 절에 와서 딱~ 절을 하고 금강경을 독송하고 이렇게 좀 화를 가라앉혀 집에 가면 그래도 조금 견딜 만 한데. 저녁에 자식 얼굴만 보면 이게 또 터져서 잠이 안온다는 거요. 그러면 아침에 와서 또 하는거요. 그런데 이, 그때 다 교민들 어렵게 살 땐데. 이 집 아들은 그래도 다른 사람은 와서 생선가게하고 채소가게. 그렇지 않으면 가발장사. 뭐 전부 어렵게 어렵게 이렇게 사는데. 이 집에는 그래도 괜찮게 사는 집이니까. 아들이 딱 차로 아침마다 절에 모셔다 드리고. 퇴근 할 때는 모셔가고. 또 할머니한테 용돈도 주고 하니까. 이 보살님은 그래도 절에 보시하는 할머니 중에는 제일 돈이 많은 사람이오. 보시도 잘 할 수도 있고, 절도 많이 하고 아들이 탁 데려다 주고, 모시고 가고 하니까. 전부 주위사람이, 교민 사회에서는 성공한 케이스에 속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정말 보살님은 아들 둘이 잘 뒀다고 효자라고 칭찬도 해쌓고 이런데 거기다 대놓고 우리 아들이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얘기 할 수가 없잖아 그죠? 그러니 가끔 모이면 자기도 아들 자랑 해야 되 안해야 되? 해야죠. 그러니 속이 더 타는 거요. 그러다가 절에 제가 한 몇 주 살면서 이렇게 보니까 얘기를, 자기 하소연을 할만하다 싶어서 나한테 이렇게 자기 하소연을 한 거요. 이런 얘기를 쭉 들으면서, 제가 지나간 얘기를 하니까 그렇지. 들으면서 눈물이 나죠. 자기 살아온 한탄얘기 하고, 그 고생했던 얘기 하면서, 울면서 얘기 하고, 저도 옆에서 같이 울고 했는데.
왜 이런 얘기를 했을까? 요점은 나 한국 갈 때 자기 데려가 달라 이 말이오. 지금 남 보기에 이렇게 좋아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내 꿈은 한국 가는 거다 이 말이오. 나를 어떻게 하든지 한국에만 데려다 주면 내가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는 거요. 자기는 지금 어떻게 비행기표를 끊고 어떻게 한국 가는지 잘 모르니까.
이럴 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한국 데려다 달라는데. 이 처지를 생각하면 한국 데려다 줘야 되겠죠. 이 원하는 게 한국 가는 게 소원이란 말이오. 그런데 한국에 가면 자기 생각에는 이제 까지도 살았는데 뭐 셋방 하나 얻어서 보따리 장사를 해서라도 자기는 살 수가 있다 이거지. 여기 지옥 같은데 사는 것보다는 낫다 이거야. 그런데 이 데려간다고 이게 해결이 되겠느냐?가 문제요. 데려가면 현재 간절히 바라는 건 한국 가는 거니까 한국 데려다 주면 내가 은인 같고 해결이 될 거 같죠. 또 데려와서 만약에 우리 절에다 같이 모시고 살면 할머니로서는 더욱 고맙겠죠. 그러나 그걸로 인생이 끝이 안 납니다. 왜? 자기 아들도 아니고 남으로부터 이렇게 자기가 좋아지고 편안해지면 질수록 가슴 한 쪽 구석에는 자식에 대한 원망이 더더욱 깊어집니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것만 끝나는 게 아니라 또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식이 그립겠어요? 안 그립겠어요? 그립단 말이오. 이게 문제란 말이오. 이게 미웁기만 하면 간단하게 안보면 끝나는데 이게 애증이 붙어 있다 이 말이오. 여러분들도 늘 그렇잖아요. 한 으로 남편 막~ 욕을 해놓고 또 다른 옆에 누가 건드려서 남편 나쁘다 그러면 또 이 세상에 자기 남편 같은 사람 없다 그러고. 자식 나쁘다고 상담하다가 우리애가 착하긴 참 착해요. 또 이런단 말이오. 공부 못한다고 막~ 그래 놓고는 뭐라 그래요? 국민학교 때는 참 잘했다 이러고. 국민학교 우등상 안 받은 사람 누가 있어요. 이 세상에. 이게 애증이 같이 겸해 있단 말이오. 왜냐하면 애가 없으면 증이 없고, 증이 있다는 건 애가 겹쳐있단 말이오. 이게 문제죠. 그냥 미워하면 간단한데.
그래 이거는 지금 일시적으로는 이것이 최대의 소원이지마는 이것은 고를 근원적으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니고 어쩌면 더욱더 고를 인생의 그 괴로움을 더 키워 놓을 수 있는 소지가 있단 말이오. 원하는 건 이거였지마는 그러나 이 분이 이 괴로움에서 벗어날 길이 뭘까? 우리 이걸 생각해야 된단 말이오. 그래서 제가 보살님보고 금강경을 하도 많이 읽으니까 “보살님 금강경 많이 읽죠?” “예.” “보살님. 금강경에 무주상 보시라는 말이 있죠?” “예 있죠.” 이래. “무주상 보시가 뭐요?” 무주상 보시라는 것은 보시를 하고도 안했다. 한걸 잊어버리는 거란 거요. 하고도 했다는 생각이 없는 거. 잊어버리는 거라는 거요.
그래서 내가 보살님이 그렇게 공부를 하니까 지금 절에 이래 다녀도 안 되지. 무주상 보시라는 거는 보시를 하고 보시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다. 이거야. 아무 날 아무 시에 내가 누구한테 보시 했는데 그 날짜와 그 사람을 잊어버리는 게 아니다. 여러분들은 무주상 보시 한다면 이름만 안 쓰고 여기서도. 자기 이름 안 밝히고 낸다고 무주상 보시다 주로 이렇게 많이 이해하죠? 예. 그러니까 자기 이름 밝혀 보시를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는 것보다 이름 안 밝히는 게 복이 더 많다니까. 그래서 이름 안 밝히는 사람이 많아요. 뭐할라고? 한량없는 복을 받으려고. 우리가 무주상 보시라는 것은 대부분 다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단 말이오. 그게 아니에요.
바라는 마음이 없이 행하는 보시요. 그런데 보살의 이 괴로움은 바로 자식을 키우면서 자식에게 바랬기 때문에 지금 이런 미움과 원망이 생기는 거요. 보살이 맨 무주상 보시를 읽으면서도 하루 일곱 번이나 읽으면서도 보살은 무주상 보시를 안했기 때문에 이런 괴로움이 생긴 거다. 내가 뭘 안했느냐는 거요? 당신이 아이 키우면서 바라는 마음으로 키웠다. 난 하나도 안 바랬다는 거요. 정말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고 맹세하지 나는 애 키울 때 하나도 바라는 게 없었다는 거요. 보살이 바라는 게 없었다면 이렇게 미워 할 일도 없다.
보살님이 애기를 키우면서 남편한테 기대도 못하고 모든 정성을 부모도 남편도 다 버리고 그 여자가 세군 데 의지하는데 두 개를 버리고 오직 자식 한군데만 의지를 했으니 그 의지가 얼마나 크겠느냐? 이거요. 그런데 바라는 마음을 갖고 했다는 거는 뭘 말하느냐? 우리가 돈을 벌려고 주식 투자를 했죠? 그런데 주식이 잘못돼서 내려가서 돈을 잃어 버렸다. 그러면 누구를 원망해야 되요? 주식을 원망해야 되? 자기가 잘못했죠. 당신은 주식 사는 거나, 부동산 사는 거나, 은행에 저축하는 것보다는 어디에 투자하는 게 더 장래에 내 인생에 좋다? 자식한테 투자하는 게 더 좋겠다 해서 당신은 자식한테 투자한 거란 말이오.
그런데 주식값이 떨어지듯이, 부동산가격이 하락하듯이 자식이 내 투자한 데로 제대로 안됐으니 그건 당신 책임이다. 당신이 당신 손으로 당신 눈깔을 찔린 거지 누구한테 원망하느냐? 아무한테도 원망할게 없다고. 당신이 자식한테 투자를 했는데 그 투자를 당신이 잘못 파악하고 잘못했다 이거야. 내 자식이니까 투자를 하면 다 요래요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주식 투자한 사람이나, 부동산 투자한 사람 다 마찬가지다. 다 곧 될 거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그게 뜻대로 안된 거와 같은데. 그거 당신 잘못이라는 거요. 이제 이렇게 여기서 길게 얘기 못하니까, 우리가 몇 시간을 얘기했으니까요.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보살님 하는 얘기가 그래.
그래. 그러면 이 괴로움이 내가 바라는 마음 때문에 괴로움이 생겼다 치더라도. 그건 그거고. 그래 자식 놈은 그래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는 거야. 나는 그렇다 치고. 내가 그렇게 정성을 키워서 해 줬던 자식 놈은 부모를 이렇게 해도 되느냐? 이거야. 그건 여러분들 다 그렇죠. 이런 괴로움은 다 여러분들이 기대해서 그렇다 하면 처음엔 인정을 안 하다가. 나중에는 그건 스님 그렇다 치고, 그럼 남편은 저리 술 먹고 늦게 들어오고 저거 내버려 둬도 되느냐 이거야. 이런 얘기 많이 하죠? 똑같아요. 그렇게 설명을 해도 귀에 들어와요? 안 들어와요? 안 들어와.
그런데 이 보살님은 내가 그렇게 좀 심한 말로, 제 발등을 자기가 찧고, 제 눈을 제가 찔렀다 이렇게 얘기 하니까. 마~ 엄청나게 우시는 거요. 그래도 나하고는 얘기할 만 해서 얘기를 꺼냈더니, 위로해주기는커녕, 아~ 자기 눈 자기 찔렀다고 그러니까. 얼마나 서럽겠어요. 젊은 것들은 다 마찬가지죠? 그래 어느 정도 울음이 그친 뒤에 제가 그랬어요. 죽~ 설명을 해 드렸더니, 그래도 뭐, 가슴에 안 다가 오는 거요. 그러자 보살님보고 나무랬어요. 보살님. 그러려면 앞으로 절에 오지 마시오. 그리고 절에 와서 부처님도 부르지 말라고. 금강경을 독송하면서 금강경의 가르침의 반대로 행동을 하시고, 그냥 자식 원망을 하는데, 자식 원망하면서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는 거는 어야란 거요? 관세음보살이 자식 콱 벌주라는 얘기요? 그런 심보로는 부처님을 부르지도 말라고. 절에 와서 자꾸 절만하면 마룻바닥만 닳고 방석만 닳고.
그래 내가 그랬어요. 물어봤어. 보살님. 지나가는 사람 미워합니까? 안합니까? 안 한다는 거요. 지나가는 사람 내가 왜 미워하냐는 거요? 그래요? 그러면 아들은 지나가는 사람보다는 보살님한테 어쨌든 뭐라 그러든 잘해줘요? 덜해줘요? 지나가는 사람보단 잘해주죠? 그런데 내가 왜 미워하느냐고. 지나가는 사람, 길가는 사람 보다는 잘해주지 않냐고. 그런데 길 가는 사람 나한테 아무것도 안 해주는 남은 미워하지 않으면서 왜 내 자식은 그 보다는 잘해주는데 미워하냐 이거요.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거요? 이건 내 자식이잖아. 이거야.
그래서 내가 그러면 앞으로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앞으로 자식보고 이렇게 말하시오. 저 놈의 새끼 남이다. 이렇게 생각하라고. 남이라면 보살 안 미워하니까. 앞으로 관세음 보살님,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부르지 말고. 그냥 밉거든, 저 놈의 새끼 남이다 이리 부르라고. 보살님은 관세음보살님을 부를 자격도 없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다가 저녁에 한 너덧 시간 얘기를 하니까 오후 기도도 못하고 아들이 데리러 와서 갔어.
그런데 이튿날 이 보살이 안 오는 거요. 매일 하루도 안 빠지고 오시는 분이었는데. 그래서 어제 내가 절에 오지 마라 그러고, 관세음보살도 부르지 마라 그래 놓으니까. 이 보살이 내 말 진짜로 알아들었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또 하루가 지나 또 안와. 또 하루가 지나 또 안와. 그래 절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 보살이 왜 안 오지? 매일 오던 분이 이래. 그래도 누구도 그 보살집에 전화해서 왜 안 오느냐는 사람이 없어요. 왜 그럴까?
이 보살이 절에 와서 매일 청소를 했으면 보살 안 왔으면 전화해서 보살님 왜 안 오시냐고 물었을 꺼요. 이 보살이 부엌에 와서 밥을 해도 사람들은 밥할 사람이 안 오니까 전화해서 물었을 꺼요. 그런데 이 보살은 절에 와서 금강경 독송하고 기도만 하니까 자기 혼자 금강경 독송하면 솔직하게 말해 시끄럽잖아 그죠? 아 청소하려는데 청소도 안거돕고, 경만 독송하고, 그러니 이 보살이 훌륭하다, 신심있다, 기도 잘한다. 사람들은 다 이렇게 말하지만은 아무도 이 보살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니까 일주일이 지나고 보살이 안온다고 처음에 얘기하다가도 대화에서 빠져버렸단 말이오.
저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 처음엔 걱정이 되서 야~ 이거 또 혹시 자살해 버리지 않았냐? 절에 오지 마라 그랬으니까. 겁을 냈지만 또 잊어버렸어요. 그래 어느 정도 잊어버린 치고 한달 정도 지난 뒤였어요. 그래 아침에 벨이 울려서 딱 문을 여니까 이 보살이 턱 서 있는 거요. 아니 보살 왠일이오? 내가 이러니까. 그래 얼굴이 환해 져있어. 그래서 제가 아니 보살님, 그 동안에 절에 매일 나오시던 분이 절에도 안 나오시고. 웬일이오? 아이 뭐 부처님이 절에만 있어요? 이래. 그래서 내가 어~ 보살님 도튼 소리 하네. 내가 이랬어. 그랬더니 아이 내가 한 소식 했다는 거요. 그래서 내가 아이 그래요? 들어오세요. 한 소식 한 얘기나 들읍시다. 그러니 들어와서 부처님께 삼배를 딱 하시고 방에 와서 얘기를 하는데.
나하고 얘기한 뒤에 집에 가면서 분해 죽을 뻔 했다는 거요. 괜히 젊은 사람한테 얘기를 꺼내가지고 동정을 받고 위로를 받기는커녕. 지 발등 되 찍었다. 제 손가락 갖고 제 눈 찔렀다. 그 다음에 증권 투자 아저씨 애한테 투자했다가 실패했다. 뭐 부처님 부르지 마라. 그 다음에 저 놈의 새끼 남이라 그래라. 뭐 자기가 생각할 때는 온갖 못 들을 얘기만 들어서 부화가 나서 죽을 뻔 했다는 거요.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절에 오려니까 그런 마음 갖고 오려거든 절에 오지 마라고. 이렇게 해 놓으니까. 이 절에 가서 하루 기도를 하고 와야 그래도 하루를 견디는데. 절에도 못 가고, 또 이런 얘기를 나한테 했으니 소문이 났을 거 아니오.
그러니까 창피해서 절에 얘기가 다 알려졌다 이거야. 창피해서 절에도 못나가겠고. 그렇다고 집에 있으려니까 사람이 터질 거 같고. 이래서 자기 생에 한 일주일 이주일 지나면서 완전히 미칠 지경이 됐다는 거요. 그런데 하도 괴로우니까 하도 괴로우니까 자기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저놈의 새끼 남이다.” “저 놈의 새끼 남이다.” “저 놈의 새끼 남이다.” 이렇게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는 거요. “저 놈의 새끼 남이다.” “저 놈의 새끼 남이다. 남이다. 남이다.” 그러면 조금 가라앉았다는 거요. 이렇게 해서 혼자서 죽지도 못하고 그러고 있는데.
어느 날 하루는 누가 현관문을 탁 열고 들어오는데. 자식이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고 탁 들어오는데 화가 여기서 콱~.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은요. 남편을 미워하거나, 자식을 미워하거나, 누구를 미워하는 사람은요. 그 사람을 탁 보면 눈이 홱 가닥 해져 버립니다. 이게 확 올라오면서 열이 막 올라오죠.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저 놈의 새끼 남이다.” “저 놈의 새끼 남이다.” 이걸 감당을 못하니까. 그래 “저 놈의 새끼 남이다.” 하면서 쳐다보니까 딴 사람이 서 있더라는 거요. 자기 아들이 아니고. 딴 사람이 떡 서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이 가슴속에 그 끓어오르던 그 모든 화가 순식간에 싹 ~ 없어져 버려.
그러니 이 화기가 너무 생기면요. 전부 다 헛거를 보게 되죠. 그래서 자기가 아~ 이 화가 자식 때문에 생긴 게 아니고, 자기 속에서 헛거를 보고도 이제는 열이 오르는 거요. 그래 이게 딱 가라앉고 나니까. 남이다 하는 순간, 정말 남으로 보이는 순간, 화가 탁 가라앉고 자기가 보니까 눈에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지더라는 거요. 정말 남이오. 내 자식이라는 생각이 완전히 없어지고 남이니까.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죠. 남인데 누가 매일 절에 차 태워다 주겠어요? 남인데 누가 밥 주며, 남인데 누가 방주며, 남인데 누가 어머니라고 깍듯이 예우하겠어요.
자기가 만약에 정말 낯 설은 남의 집에 가서 이렇게 몸을 의탁해서 있으면 고맙게 느껴져요? 안 느껴져요? 느껴지죠. 그러니까 그 집에서 밥 해주면 고마우니까.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 봐요. 남의 집에 갔을 때 며칠 있는데 그 집에서 늘 밥을 해주면 설거지는 자기가 맡아 합니까? 안 합니까? 맡아 하죠. 다 다른 사람 나간 뒤에 그 집에 의탁하고 있으면 방 청소 해요? 안 해요? 하죠. 또 저거들끼리 부부끼리 뭔가 속닥속닥 얘기하면 무슨 소리 하나 하고 귀담아 들어요? 얘기를 하면 벌써 저 멀리 가 버려요. 멀리 가버리죠. 그러니 이게 남이다 하는 순간 싹~ 미움은 없어지고, 가슴속에 그저 고마움만 가득 찬 거요.
그 얘기를 들어보니까. 한 소식 하기는 했어. 그래 이후에 이 보살님은 생활이 어떠냐? 절 오면요. 기도하는 시간보다는 설거지하는 시간이 많아요. 왜? 자기가 어릴 때 평생소원이 공양주 하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는 자식 때문에 공양주 못했는데. 자식이 없으니까 공양주 마음껏 할 수 있어요? 없어요? 마음껏 할 수 있으니 절에 오면 공양주를 하는 거요.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 집에 가면 큰아들 집에 있으면 밥 얻어먹고 있으니까. 다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이렇게 하는 거요. 뭐 저거끼리 얘기하면 아예 절로 나가버리는 거요. 안 듣고. 작은아들 집에 가도 마찬가지요. 그러니 나부터도 어떠냐? 보살님이 있으니 편해요. 안 편해요? 편하지. 그러니까 자꾸 보살님. 아이 집에 가면 뭐해? 절에 사세요. 절에 사세요. 나부터도 이래.
큰아들도 어때요? 어머니가 집에 있으면 편해요? 안 편해요? 편하지. 아무런 부담은 없고, 뭘 하나 해도 해 주니까. 작은아들도 어때요? 어머니가 있길 원하는 거요. 서로 그때는 절에 서도 안 왔으면, 작은아들 집에서도 큰아들 집에 갔으면, 큰아들도 작은아들 집에 갔으면. 본인도 싫어 큰아들 집에 조금 있다. 작은아들 집에 조금 있다. 절에 와 조금 있다. 왔다갔다. 본인도 떠돌고, 사람들도 귀찮게 여겼는데. 이 한 생각이 딱 바뀌어 버리니까 본인도 작은아들 집에 있든 큰아들 집에 있든, 절에 있든 어때요? 자유롭고. 다른 사람들도 서로 오라고 난리인 거요.
그러니 이 보살은 일단은 자유로워졌어요? 안 자유로워졌어요? 자유로워졌어요. 이게 바로 무주상 보시의 공덕이다. 이 공덕을 다른 어떤 공덕하고 비교해서 말할 수 있겠어요? 비교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이 보살만 갈 수 있는 길이오? 이 보살님이 한국에 와서 그 아들로부터 도망을 와서 해결하는 길은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는 길이고. 설령 온다고 해도 여기 와서도 괴로움에 벗어날 수가 없죠.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한 생각 바뀌니까. 내 자식이다. 하면 좋은 줄 알았죠. 그런데 내 자식이 아닌 줄 아는 게 해탈의 길이란 말이오. 그러니 바로 그 자리에서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졌잖아. 이 정도 돼서 이 분을 내가 한국에 데려오면 같이 살아도 좋겠어요? 안 좋겠어요? 좋겠지.
그런데 그전에는 데려오면 이런 분은 어떻겠어요. 데려와 줬다고 며칠은 좋아하겠지마는 이후에 같이 살면 또 불평이 많겠어? 안 많겠어? 많겠지. 한방에 열 명이나 어떻게 살으란 말이냐? 이런다든지. 온갖 얘기가 많겠죠. 젊은 사람하고 같이 살면 또 잔소리할까? 안 할까? 잔소리하겠죠. 그럼 젊은 사람들도 노 보살님 때문에 못살겠다고 또 난리겠죠. 그러면 내 보낼 수도 없고, 안 내보낼 수도 없고. 이렇게 세상이 복잡해진다. 이거요. 한 사람 때문에 세상이 복잡해지는 거요. 그런데 이 한 사람이 이렇게 바뀌어 버리면 어떠냐? 모든 게 다 좋아져 버리는 거요.
그러니까 이 보살이 걸어갔던 길은 누구나가 다 걸어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갈 수가 있지. 이게 무슨 지식으로 간 것도 아니고, 참선을 해 간 것도 아니란 말이야. 염불을 해 간 것도 아니고. 그 여기서 부처님의 법이 위대한 거요. 이 보살님의 가슴속에 있던 그 원망과 미움. 소위 쌓인 업을 만약에 비유한다면 태산보다 더 크겠죠. 이걸 하나하나 하나하나 없앤다. 그러면 다생겁래로 없애도 없애기가 어렵겠지.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순간에 없어져 버린단 말이오. 이게.
그러면 저 산을 하나 옮긴 게 기적이에요? 이 보살 속에 있는 이 무거운 업장이 일순간에 없어지는 게 이게 기적이에요? 이게 기적이에요. 부처님 법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늘 부처님 전에 와서 해달라 해달라 하는 건 뭐에요? 아들 버릇 고쳐달라. 며느리 버릇 고쳐달라. 내 신세 한탄하고 이게 일인데. 이렇게 되니까 부처님께 감사하죠. 부처님 법 아니었으면 어때요? 어떻게 내가 이런 자유를 맛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부처님 이름만 들어도 고맙고, 부처님의 형상만 봐도 그림자만 봐도 먼 데서 절을 하는 거요.
법당에 오면 향 꽂고 촛불 켜고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문 열자마자 옆에 서서 절을 하게 된다. 절은 뭐다? 감사하는 마음이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아니었으면 내가 그 지옥 같은 속에서 세세생생이 살았을 텐데. 이렇게 해 죽었으면 원결이 돼서 자식한테 또 따라붙겠죠. 그래서 다 굿을 해야 될 거 아니오. 죽은 조상귀신 붙었다고. 또. 그러니 내가 해탈하고, 자식도 좋아지고, 주위에 있는 사람도 좋아지고. 부처님 찬탄 공경하니 부처님께도 좋은 일이잖아.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안 되면 공연히 부처님만 원망하는 거요. 자기 좋아하는 자식 원망하고, 남편 원망하고, 아이 원망하고, 부모 원망하고, 나아가서는 지 뜻대로 안 된다고 부처님 원망하고. 절에 다녀봐야 소용없다. 경 읽으면 뭐 하노? 참선하면 뭐 하노? 에이 ~ 천하 소용없더라. 이런 소리나 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보고 자식이 보고, 아내가 보고, 남편이 보고, 부모가 보고, 친구들이 보고 어때요? 아이고 저 집은 절에 다녀봐야 뭐 사람이 저렇구나. 이래서 다른 사람 불법에 오는 걸 막고. 그 죄업이 한량없단 말이오.
그러나 한 생각이 바뀌게 되면 어떠냐? 그 공덕이 한량이 없다. 그러니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무서운 과보를 갖고 오느냐? 그걸 놔 버리게 될 때 얼마나 한량없는 공덕이 발생하느냐? 이걸 여러분들이 아셔서, 부처님 법을, 아이고 그거야 성인이 하는 길이지. 그걸 어떻게 우리가 합니까? 이런 소리 이제 하지 마세요. 아시겠어요? 예. 부처님 법은 고통받는 중생인 우리가 하는 거지. 어떤 특별한 사람을 위해서 설해진 게 아니다. 이 말이오. 여러분들이 갖가지 속에서 괴로운 사람이 가는 길이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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