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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범스님 법문 - 참된 나를 만나는 것의 의미

Buddhastudy 2020. 11. 16. 20:19

 

 

 

오늘 법문은 나와 나의 만남

신령한 광명

나나, 나나는 나라는 소리에요.

 

이 나와 나라는 것은 평소에 잠든 나가 있고 꿈꾼 나가 있어요.

잠든 나, 꿈꾼 나.

그걸 한자로 기록하면 꿈꾼 나를 꾼 몽, 나 아, 몽아라고 하고요.

잠든 나를 수면이라고 하는 잠잘 수, 나 아, 수아라고 하는데요

 

이 꿈꾼 나로 있을 때는 잠든 나를 몰라요.

내가 어디서 잠이 들었는지, 어디서 지금 잠을 자고 있는지 모르고

그 꿈의 세계만 압니다.

 

그럼 언제 잠든 나를 아는가?

꿈에서 깬 순간에, 꿈 깨면 그 잠든 나를 알아요.

그런데 꿈 안에서는 그 잠나를 모르거든요.

 

꿈을 우리가 다 꾸는데

꿈 한창 꿀 때, 내가 어디서 잠들었는지, 어떤 잠자리에서 내가 잠자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이게 꿈나와 잠나입니다.

 

그런데 꿈나는 꿈에서 깨는 순간에 없어져 버려요.

오직 남는 건 잠나 뿐이죠.

 

꿈을 깨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냐?

그다음부터는 생각하는 나가 있어요.

의식의 나.

 

순전히 꿈에서 깬 데서부터는 생각을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생겼다 사라지고 생겼다 사라지고...

항상 보이고 만나는 대상에 따라서

생각은 사라져요.

 

대상이 생기면 생각이 생기고

대상이 사라지면 생각이 사라지거든요.

 

그래서 그거를 의식아 이래요. 의식.

생각이라는 건 의식이거든요.

 

이 의식은 어디에 머무냐?

순전히 보이고 들리고 접촉되는 그 대상에 머물러요

이걸 한마디로 경계 경, 경이라고 하거든요. .

 

이 경계가 없는 의식은 없어요.

그래서 뭘 생각한다 하면 내 몸도 보여지는 대상이고 느껴지는 대상인데요

몸을 생각하든지, 사람을 생각하든지, 어떤 물질을 생각하든지

~~부 대상입니다.

 

저 사람 뭘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그거 궁금할 거 하나도 없어요.

몸 생각 아니면 사람 생각 아니면 물질 생각이에요. 뻔해요.

그거 관심을 가질 거 하나도 없어요.

자기 몸 걱정하든지 사람 걱정하든지 물질 걱정하든지

물질 아니면 사람이고 사람 아니면 물질이고. 그것뿐이에요.

이게 생각이 머무는 영역이에요.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 생각은 오래 가는 게 아니고, 계속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허상하고 무상해요.

생각이 일어나도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생각이 사라져도 사라지는 것이 아닌 어떤 광명성, 역동성이 있는데,

역동, 힘차게 움직인단 말이에요.

그걸 지혜라고 그럽니다. 지혜아, 의식아.

 

그런데 우리는 그 경계를 쫓아다니는 의식에 머물기 때문에

그 지혜를 놓치고 있어요.

꿈나가 잠나를 모르듯이 의식에 내가 지혜의 나를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범부라 그러고 미혹이라 그러거든요.

그래서 이걸 줄여서 말하면 지혜 지, 나 아, 지아.

의식의 나를 줄여서 말하면 식아. 의식

 

우리는 식아로 살고 있어요.

지아를 모르는 거예요.

 

이것이 마치 꿈꿀 때는 몽아는 잠든 나, 수아를 모르는 거와 같다.

그래서 우리는 꿈꿀 때는 몽아가 있고, 또 잠들 때는 수아가 있는데

꿈도 잠도 다 벗어나서는 식아가 있다.

 

그런데 평생 식아로 사는 거예요.

그 식이 어디서 나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전혀 몰라요.

그래서 미혹이라고 그래요.

 

이런 지혜의 나와 의식의 나를 모두 깨달아서

이걸 모두 다 자제하고 성취하는 분을 불교에서 삼세제불이라고 얘기해요.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이다.

역대조사라 이렇게도 얘기를 해요.

역대 대를 이어서 계속 나타나는 조사, 할아버지 조, 스승 사. 아주 근본 스승이다. 이 말이죠.

삼세제불 역대조사.

 

또 미진수 선지식이라고 그러는데요

미진수라는 건 숫자 중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가는 티끌과 같은 숫자라고 그래서 미진수라고 그래요.

 

이건 뭐, 삼세제불 역대조사와 미진수 선지식들이

가는 티끌과 같이 많은 선지식들이 뭘 깨달았느냐?

생각의 나에서 지혜의 나를 깨달았다는 거죠.

식아에서 지아를 깨달았다.

 

그래서 이 깨달은 분들이 이름이 있든 없든 이거는 빙산의 일각보다도 더 숫자가 얼마 안 되는 거고

그냥 아무 이름도 없이 홀로 깨닫고 홀로 머물다가 홀로 가시는 분들이 그렇게 많으세요.

달마조사니 어떤 조사니 하는 것은 그거는 크게 대를 쭉~~ 이어 가는 그런 거고

예를 들면 어떤 집안에 종가, 종손으로 이어지는 숫자는 몇 사람 안 되잖아요.

그 선조에서부터 후손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도 없다 이 말이죠.

 

똑같은 거예요. 삼세제불 역대조사, 미진수 선지식,

이런 분들이 다 지혜의 나를 깨달으신 분들이죠.

 

그런데 이 지혜의 나, 그걸 깨닫고 보면

꿈꾼 나도 지혜의 나를 떠나서 있는 게 아니고요

잠든 나도 지혜의 나를 떠나서 있는 게 아니고요

생각의 나도 지혜의 나를 떠나서 있는 게 아닌데

다만 그 생각하는 순간에는 지혜의 나를 모른다는 것에요.

 

잠들었을 때는 지혜의 나를 모른다는 것이고요

꿈꿨을 때는 지혜의 나를 모른다는 거예요.

그런데 알든 모르든 지혜의 나는 없는 데가 없다는 거지.

 

나니, 뭐니를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이라고 그러거든요.

마음이라는 이걸 전체를 포함해서 마음이라고 그래요.

꿈꾼 것도 마음이고, 잠든 것도 마음이고, 꿈 깬 것도 마음이고, 생각도 마음이고, 지혜도 마음이고.

그래서 이걸 산란심이니 청정심이니 지혜심이니 분별심이니

이렇게 마음에다가 뭘 많이 붙여서 그렇지

마음 아닌 게 하나도 없는 거죠.

 

그래서 이걸 깨우치는 방법으로 얘기하는 것이

일반 범부들이 살아가는 마음을 범부심이라고 그러거든요.

사람에게 상대를 해서 범부들이 살아가는 범부 마음을 범부심이라고 그런다.

보살이 깨달아가는 마음이 있어요. 그걸 보살심이라고 그래요.

부처님이 깨달아서 중생을 교화하는 마음이 있는데요, 그걸 제불심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불심.

 

사람에 따라서 어떤 마음에 머무느냐.

거기에 따라서 불심이다, 보살심이다, 범부심이다 있는데

이게 전부가 그 지혜의 한마음이 그렇게 나타나는 거지, 지혜의 마음이 다른 게 아니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거든요.

 

그럼 범부심은 어떤 거냐?

범부심이라고 하는 것은요, 한마디로 말해서 분별심인데, 분별, 분별이라는 건 뭘 말하냐

하면

경계를 바라보고 경계를 선택하는 거예요.

촉경, 취사, 어려운 말이에요.

취는 취하고 사는 버리고. 경계에 접촉해서, 접촉할 촉, 경계 경.

이게 분별인데요, 이게 범부심이에요.

 

촉경 경계에 딱 눈으로 보는 게 안촉이고, 귀로 듣는 게 이촉이고, 부딪힌단 말이죠.

그럼 거기서 좋다 나쁘다 판단이 딱 나오는 거고

좋은 거는 취하고 나쁜 거는 버리고.

 

이래서 범부의 마음은 분별심인데, 이 분별은 촉경 취사하는 마음이에요.

경계에 접촉해서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에요.

 

여기서 못 벗어나요.

이것 때문에 울고 웃고 하는데 경계에 울고 경계에 웃는 거예요.

경계를 떠난 범부심은 없습니다.

 

분류별로 젊었을 때는 사랑에 대한 속박이 엄청나게 심해요, 사랑에 대한 속박이.

사랑으로 얽히는 문제가 의외로 굉장히 많아요. 보통 많은 게 아니에요.

그다음에 좀 성장을 하고 중년이 되면 재물에 얽혀요. 재물에 엄청나게 얽혀요.

 

그래서 사랑과 재물, 이거에서 못 벗어나는 게 인생이에요.

이것 때문에 항상 또 갈등을 해요.

젊은 애들은 자유로운 사랑을 하려고 하는데, 요새는 젊다는 게 10대부터 갈등이 시작되죠.

10대는 자유로운 사랑을 원하거든요.

그런데 부모들은 그 사랑을 위험하다고 보고, 뭐니 뭐니 해도 재물이 최고다.

그래서 재물에 유익한 선택을 해야지, 사랑에 잘못하면 안 된다.

이래서 사랑과 재물의 갈등이에요.

 

옛날에 미국영화는 많던데, 인도 영화가 별로 없어서 인도 영화가 한번 들어왔길래 일부러 가서 봤거든요.

그런데 그 제목이 신비롭다는 신, 코끼리 상, 신상인데 그게 70년대 말인가 80년대 초인가 일부러 가서 봤어요. 제가. 신상이라는 영화를.

 

그런데 거기서 나오는 영화 대사가 딸이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는 사랑을 너무 모른다.” 이러더라고요.

아버지는 딸보고

너는 가난을 너무 모른다.”

 

부모들은 가난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살아요. 가난 공포.

이거 엄청난 공포거든요.

그런데 젊은 애들은 사랑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부모가 막으니까 갈등이 생기는 것에요.

지금도 그 대사가 잊혀지지 않아요.

아이는 사랑을 얘기하고 부모는 재물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요즘에 보면요, 직업도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업무에 너무 과로해서 목숨을 잃는 게 종종 있어요.

업무에 매여요.

며칠 전 인터넷 신문에 봤는데

40대 초, 아기엄마 판사라고 하더라고요.

육아에 시달리고, 업무가 너무 많고, 며칠 밤을 꼬박 새우니까 과로로 목숨을 잃었데요.

화장실에 쓰러져서 과로사한 거예요.

 

업무가 과중해서 업무로 목숨 잃는 경우가 많아요.

업무에 매이고.

이런 게 범부의 삶이에요.

 

할 일없는 것도 고통이지만, 너무 일이 많아서 고통인 그거는 잘 모르거든요.

일 많은 거 진짜 괴로운 거예요.

그런데 그게 뭐냐 그러면 다 경계에 매이는 거예요.

보이는 것에 매이고 들리는 것에 매이고 접촉되는 것에 매여서

거기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그게 범부심이에요.

 

그럼 보살심은 뭐냐?

보살심은 이게 뭐지?

경계라는 것은 쫓아가도 쫓아가도 취해도 취해도 허망하다는 걸 느끼게 돼요.

쫓아가도 쫓아가도 이거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허망함만 있을 뿐이다.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다(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이게 보살이 느낀 거거든요.

모든 존재하는 경계형상은 다 허망하다.

 

그러면 허망한 것을 절실하게 보면 그 참나를 본다는 거예요.

거기서 참나를 여래로 표현한 거예요.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모든 형상이 다 상이 아니다. 허망하다는 거죠.

 

진실함이 없다 이거지.

상이 아님을 보면 바로 여래를 본다. 그 여래는 바로 참나, 지혜. 이런 거다.

이게 보살이에요.

 

범부는 경계를 쫓아가는데

보살은 경계를 허상한 줄을 알고

참나를 향해서 찾아 들어가는 게 보살이에요.

 

그래서 그 보살의 마음을 볼 관, 조견이라고 비칠 조, 관조심이라고 그래요. 관조.

보는 거예요.

 

보는 게 뭐냐? 라고 하면 그냥 딱 볼 뿐이에요.

그걸 요요명이라고 그러는데, 수료한다고 하는 요. 아주 간단하게 쓰는 수료, 완료 종료한다는. 그게 밝을 료도 되거든요.

밝고 밝게 본다. 밝을 명 위에 써서 명료요, 밝게 보고 밝게 보고 밝게 본다.

그냥 볼 뿐이에요.

볼 뿐이지 취사를 안 해요. 그냥 보기만 하지 판단을 안 해요.

 

저건 산이다. 저건 사람이다. 저건 돌이다, 이렇게 판단을 안하고 또 쫓아가서 취하고 또 가까이 온 거 버리고. 멀리 있는 건 쫓아가서 취하고 가까이 있는 건 떼어내고

범부가 하는 짓은 이건데 보살은 그걸 안해요.

이걸 관조라고 그래요.

보고 본다. 볼 관, 비췰 조. 그냥 딱 봐서 비춘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안 일으키는 거예요.

좋다, 나쁘다, 뭐 이것이다, 저것이다, 죽는다, 산다.

이런 거를 막작념이라고, 금강경에 보면 막작시념 이런 말이 있거든요.

이런 생각을 하지 마라. 막작념, 지을 작, 생각 념.

생각을 일으키는 것에요. 생각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생각 만들어내는 걸 하지 마라.

이게 명료요, 막작념, 그냥 볼 뿐이지 생각을 자꾸 만들어내지를 않아요.

그래서 생각을 만들어내지 않는 것을 그칠지, 지라고 그러고,

보는 걸 볼 관, 관이라고 그래서 지관이라고 그러는데

 

보살의 경지에 올라가면요, 보는 게 중심이에요.

관지에요. 관지.

딱 보기부터 해요. 딱 보고 다른 망상은 만들어내지 않아요. 안 일으켜요.

 

이게 명상이라는 말이 있는데, 똑같은 얘기에요. 지관이나 명상이나.

생각을 그친다는 거죠. 뭘 만들어내지 않는다고.

그래서 그칠 지를 쓰는 거예요.

 

그다음에 그대로 환하게 보는 거예요.

분별을 하지 않고 본다.

취사를 하지 않고 본다 이거예요.

그리되면 그 참마음하고 가까워져요. 그걸 상응이라고 그러는데 서로 상, 응할 응.

 

지혜하고 상응하게 돼요. 생각이.

아주 간단한 거예요.

 

그래서 마음으로 마음보는 거

어려운 게 절대로 아니에요. ㅎㅎ

 

그러면 왜 못하냐?

생각에서 못 나와서 그래요.

이게 어려운 게 아니라 생각에서 나오질 못해서 그렇지

 

보살처럼 딱 보고

다른 생각 안 일으키면

바로 보이는 거예요. 바로 보인단 말이죠.

 

명상이라는 것도 우리가 발견한 거예요. 옛날 유학자들이 발견한 거예요.

차라리 생각을 가지고 보는 것보다 눈 감고 보는 게 더 진실하게 보는 것 같다.

여기서 착상을 해서 명, 눈감을 명입니다. 눈목 변에 어두울 명.

눈이 어두워지면 어떻게 된 거예요? 눈 감은 거 아니에요?

보되 눈 감고 본다. 눈감을 명, 생각 상. 그게 명상이에요.

 

지금까지 밖으로만 밖으로만 쫓아갔던 그 생각을 감아버려.

그리고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걸 본단 말이에요.

그래서 생각을 막고 지혜로 돌아간다. 이게 명상이거든요.

이게 익숙해지면 보는 게 언제나 보는 거예요. 보는 거는 명료요

 

그다음에 생각을 일으키지 않아요. 이게 막작념이에요.

그래서 관이 먼저이고 그다음에 지다.

 

그러면 더 오래 되면 그냥 밝은 것뿐이에요.

다른 생각은 없는 거예요.

 

내가 통도사에서 경 배울 때, 경봉 큰스님이 범문하러 법상에 올라가시면요

다른 사람은 죽비치고 입정한다고 딱 어깨 세우고 눈딱 찡그리고 감고 그냥 인상쓰고 앉았는데

경봉 큰 스님은 이런 거 보고, 종이 보고, 뭐 보고, 죽비를 쳐도 딱 눈감고 어깨 세우지를 않아요.

그냥 봐.

 

저 양반 이상하다. 왜 안보고 저렇게 보지?

그래서 나도 또 이상해서 문제가 많았어요. 이상해서.

다른 사람 다 죽비치고 눈감고 입장하는데, 저 경봉 큰 스님이 어떻게 하고 있나.

그거를 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양반은 입정을 하든 안 하든 항상 하던 일 하지, 죽비 쳤다고 딱 눈감고 그냥 어깨 세우지 않고, 죽비 안 쳤다고 딴 거 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요즘도 법회할 때 입정하는 거 보면, 입정하기 전에 안내방송을 하거든요.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잡념을 조용히 가라앉히시고~~~

깊은 선정에 들겠습니다~~~

~~ ~~ ~~~”

 

그렇게 시작하잖아요.

그리고 끝날 때는

다시 망상산란심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 말은 안하고 그냥 죽비치더라고. ㅎㅎ

 

그걸 보면요, 지금까지 일어났던 온갖 잡념을 가라앉힌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온갖 잡념을 안 일으켰으면 가라앉힐 일도 없는 거예요.

그렇잖아요.

 

보살은 항상 관조, 항상 막작념. 늘 밝고 밝게 보지, 또 늘 잡념을 안 일으키지

어느 때는 잡념에서 살다가 한순간만이라도 죽비치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생각에서 돌아와서 지혜와 하나가 되면 그 지혜는 그런 생사가 없는 거예요.

꿈에서 본 것은 꿈꿀 때만 있지 꿈 깰 때는 없잖아요.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오온이 다 불생불멸임을 비추어 보시고, 도일체고액하시니라.

일체고액에서 다 건너셨느니라, 건넜다는 건 뭐에요? 다 벗어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모든 것은 경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이

경계는 내 생각에서 일어난 거다. 이게 불교에요.

 

심생법생이라.

생각이 일어났기 때문에 경계가 일어난 거다.

 

 

그다음에 제불심을 얘기하는데 제불심은 평상심이라고 그래요.

諸佛心제불심을 도라고 그러는데,

도라는 거는 지혜의 마음을 한마디로 도라고 하거든요.

도심이라고도 해요. 도심.

중생심하고 다르다 이 말이죠.

 

그런데 도가 뭐냐? 평상심이다, 이렇게 가르쳐요.

평상, 평등이라는 평, 항상 한다고 하는 항상 상, 평상심이라.

이 평상이라는 말은 다른 건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그것 뿐인 거예요.

 

평등, 평등해요. 그거하고 다른 게 없어요. 차별이 없어요.

죽는 거와 사는 거, 오는 거 가는 거, 있는 거 없는 거, 다 평등해요.

 

그리고 항상해요. 과거가 다르고 현재가 다르고 미래가 다른 게 아니라 과거현재미래가 항상해요.

그걸 평상심이라고 그런데요.

 

이 평상심을 평등원광. 평등해.

왜 범부가 괴로우냐 그러면 서로 달라서 괴로워요.

달라. 센사람 하고 약한 사람하고 다르고, 잘난 사람하고 못난 사람하고 다르고

전부 다르게 보는 거예요. 아주 미치는 거예요. 달라서.

 

어떤 엄마는 아들만 좋아하는데 딸이 볼 때 괴로운 거예요.

저렇게 아들만 좋아할 바에야 나 같은 딸을 왜 낳았지?”

말해봐야 안 통해요. 엄마가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할 거예요? 엄마를 뜯어고칠 수는 없잖아요.

 

또 어떤 사람은 반대가 있어요.

어머니가 자기 아들을 낳고 이혼을 했는데, 아버지가 새엄마를 들여서 새엄마 사이에서 딸을 낳았는데, 그 새엄마가 오로지 자기가 낳은 딸만 좋아하고 자긴 그냥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어떻게 하면 저 아이가 받는 사랑만큼 나도 받을 수 있을까?

세상에 최대의 경쟁을 자기 배다른 동생으로 봤다는 거예요.

이런 거 아주 괴로운 거거든요.

아버지한테는 말할 수도 없더래. 아버지가 또 괴로울까 봐. 생각이 깊은 아이죠.

뭐 그런 것도 있고

 

이게 다르다는 거예요.

경계를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경계는.

 

그런데 참마음은 그런 게 아니에요. 평등하다.

왜 평등하냐?

바다와 같고 허공과 같다.

 

바다 그 넓고 넓고.. 아무리 뭐.. 넓고 넓어도 다 물이거든요.

바다가 그렇게 넓지만 어디 어느 곳에 있는 바다든지 전부 물이에요.

그러니까 평등하죠.

 

허공과 같다.

허공이 끝이 없지만, 두 허공이 없거든요.

 

그래서 나는 죽어도 내 몸이 차지했던 허공은 죽지 않는다.

이것만 알아도 죽음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어요.

 

내가 죽어도 내가 숨쉬던 이 허공, 공간

내 몸 이 전부가 허공덩어리에요, 알고보면.

내가 차지했던 허공은 안 죽어요.

아 이거 참...

 

그러니까 산다 죽는다 하는 거는 오직 생각의 결과에요.

존재의 진실이 아니라 생각의 결과다.

 

그래서 생각이 맑아지면 생각이 평등해지면

나와 허공이 평등하고 나와 바다가 평등하고...

 

다른 건 없는데 이 생각이 그렇게 경계에 매이니까

평등이라는 건 없는 거죠.

분별, 차별뿐이죠.

 

그런데 제불이 깨달은 마음이 평상심이에요.

죽는 거와 사는 게 평등하고, 있고 없는 게 평등하고, 너와 내가 평등하고, 동쪽과 서쪽이 평등하고 다 평등해.

또 항상해요.

이걸 평등과 항상을 합치면 평상이거든요.

 

이걸 확실히 깨닫는 거를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평상심이거든요.

 

상주진심이다. (항상 머무는 참된 마음) 평상심이라는 것은.

평등원광인데, 평등하고 둥글 원, 빛 광, 둥글고 밝은 건데

절에 가면 원광이라는말 많이 쓰거든요. 둥글 원, 빛 광, 원광.

또 평등이라는 말도 쓰고

그게 참마음을 말하는 거예요. 평등원광이라는 게.

 

그런데 그거는 상주, 항상 머무르는 참 마음이다.

그래서 상주진심. 평등원광 상주진심.

이런 거를 깨닫는 게 그게 부처님의 깨달음인데요

 

삼세제불이나 역대조사나 미진수 선지식들이

다 이 평등원광 상주진심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가 현재 느끼는 이 삶과 죽음과 고통과 즐거움이라는 것은

잠든 나에서 꿈꾼 나가 생겼을 때, 그 꿈에서 느끼는 거와 같다.

이걸 확실히 안 거예요. 확실히.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그러나 알고 보면 괴로워하고 뭐 슬퍼하고 뭐하는 건 다 이게 꿈인 거에요.

꿈꾸는 순간에는 괴로움이 없지 않거든요. 심각해요. 그때도.

그런데 꿈은 꿈이에요. 깨고 나면 다 꿈인 거에요.

 

그래서 인생이 아주 절실한데, 참마음으로 돌아가면 다 꿈인 거에요.

그거를 모르는 거죠.

그거를 몰라요.

 

그래서 재물에만, 재물에만 매일 때, 그 재물을 위해서 동분서주하고 애쓰는 건 심각합니다.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과로사 직전까지 거의 가요. 조금만 더했으면 과로사로 죽었을 텐데.

다행히 안 죽은 거죠.

 

그런데 거기서 또 굉장한 허무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요.

재물은 넉넉하게 가진 사람을 부자라고 그러는데, 요즘에 부자를 구분하는 방법이

10억 부자, 100억 부자, 1000억 부자. 조 부자.

조 이상 넘어가야 부자라고,

그 부자들도 차이가 많거든요.

 

빈곤층에서 보면 10억만 해도 부자에게요.

그런데 아주 부자 중에 높은 등급의 부자에서 볼 때 10억 부자는 좀 별로 주목이 안 되거든요.

이게 전부 경계인 거예요.

 

그런데 10억 부자도 어디가 명함 내밀기가 어려워요. 부자한테 가서는.

보통 사람한테 가서야 뭐.. 괜찮겠지만.

100억 정도가 되어야 부자로서 인정하는 그런 부자다.

100억 가지고도 안 돼요. 1000.

그런데 아주 높은 부자는 1000억 가지고 높은 부자라고 할 수 없거든요. 엄청나니까.

 

그런데 그게 이 몸이 죽을 때는 아무 필요 없다는 거예요.

이게 생각이에요.

조 부자든지, 1000억 부자인든지, 100억 부자인든지

이 몸이 딱 숨을 거둘 때는 그게 아무 소용이 없어요. 헛되게 매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걸 이루고 지키는 때는 얼마나 절실한지 몰라요.

이게 마음이라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이게 평등원광, 상주진심.

이게 부처님이 깨달은 건데, 여기에도 어떤 게 있냐하면

중생을 상대해서 중생을 교화하는 그런 면이 강해요, 부처님 마음도.

 

그런데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면 향상심이라고 그러는데, 향할 향, 높을 상, 향상, 아주 높은 마음이다.

이거는 제불심도 아니고, 보살심도 아니고, 범부심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 향상심이다 이거죠.

 

그런데 여기서 부처님으로 활동하면 부처님 마음이 되고

보살로 활동하면 보살마음이 되고

중생으로 활동하면 중생심이 되는 것이지

원래 향상심은 그냥 마음일 뿐이에요. 그냥 마음이다. 그걸 향심이라고 그래요.

 

향상심이라는 거는 제불보다 더 높고, 보살보다 더 높고, 범부보다 더 높아서

어디에도 해당이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걸 말할 때 원성원만이다. 이 향상심은.

둥글 원. 이룰 성. 그냥 원만이 허공과 같이 이루어진 거예요.

허공이 끝이 없잖아요.

원만, 어디든지 꽉 차 있는 거예요. 원성, 원만.

 

그래서 무거무래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다.

이걸 향상심이라고 그래요. 그게 우리 자신이에요.

그게 참나이고 그게 지혜의 나인 거예요.

 

원성원만이라, 원만이 이루어지고 원만이 가득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무거무래라, 어디 간다든지 온다든지

이 몸이 사라진다고 가는 게 아닌데 가는 거로 보거든요.

이 몸이 태어난다고 오는 게 아닌데 오는 거로 보고

이 몸이 죽을 때가 마지막이 아닌데 마지막이다 이래요.

그거 생각이에요.

 

이 몸이 죽어도 허공은 죽지 않거든요. 그런데 뭐가 마지막이에요?

이 몸이 나도 처음이 아닌데 뭐 첫 아이 갓난아이, 갓이라는 게 처음이다 이 말이잖아요.

사람의 경험에서 하는 말이죠.

 

그래서 무거무래. 이게 본래 난데,

이거는 신광불매로 신비로운 광명이 어둡지 않아서 불매하다.

 

만고희유라,

희유라는 아주 아름다운 걸 아름다울 휘, 아름다울 유, 서경에 있는 말일 거예요.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이 만고라. 이거는 세월을 뛰어넘은 세월을 만고라고 그러거든요, 만고강산이라고.

만고의 아름다움, 그걸 만고의 희유라고 그러는데.

 

신광불매, 그 신비로운 광명이 어둡지 않아서 만고의 아름다움이다.

그게 우리 지혜의 나인 거에요. 그게 참나인 거예요.

 

그래서 나와 나의 만남, 신령한 광명, 그렇게 오늘 제목을 딱 들고 나와서

1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쭉 했네요.

그런데 평소에는 와서 웃기도 많이 하고 했는데

오늘 이야기는 어떻게.. 잠잠하고 참...

 

잠잠한 게 좀 지나치면 따분하거든요.

생각의 길이 막히면 그래요.

생각이 길이 막히면 잠잠하고 따분한데, 그 생각에 홀딱 반하는 얘기를 하면

, 그냥 뭐.. 재미가 있거든.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이 생각에 빠져 살아서 참나의 이야기를 하면 이게 영 이해하기가 그렇게 쉽게 안 되는데

이걸 찿아야 돼요.

 

그 찾는 방법은 뭐냐?

똑같아요.

 

이것이 무엇인고? 이게 화두로 하는 방법인데

그게 보는 것이 먼저예요.

이것이 무엇인고? 이게 보는 게 먼저거든요.

 

그다음에 망상을 일으키지 마라. 그다음에 그치는 거예요.

똑같은 거예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볼 때에

이 보는 게 먼저거든요.

그다음에 일체고액에서 건넜나니라.

고는 생각인데, 생각에서 다 벗어났다.

막작념이란 말이죠.

생각을 만들어내지 않는.

똑같아요.

 

그리고 중생이 워낙 생각이 많으니까 멈춰라, 이렇게 할 때는

초보자에게 강조하는 말이 멈추는 걸 먼저 시켜요.

송아지가 막 달아나면 붙들어 매야 하거든요.

 

그러면 어느 정도 길들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나

그 일하는 밭이랑을 쳐다보고 가는 거예요.

그런데 딴 데로 가지를 않아요.

좋은 소는. 갈 곳만 간단 말이죠.

 

우리 마음 공부도 처음에는 그쳐야 하는데

나중에 항상 보고,

그다음에 생각이 일어날 때는 생각을 안 일으킨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하신다.

그렇게 되면 보살이거든요.

 

그래서 점점 깊어지면 생각은 없고 지혜만 충만해서 깨달음으로 가는데

그때는 그냥 항상 밝고 항상 자유로울 뿐이에요.

근심걱정은 없는 거예요.

근심걱정은 오직 우리 생각에서 나오는 거다.

그게 가르침이거든요.

 

생각이 깨끗해지면 근심·걱정은 없고

밝고 자유로움만 있다.

 

그래서 이걸 불가사의 해탈경계, 이렇게 얘기를 해요.

불가사의 해탈경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