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법문은 부처님께서 부처님 되신 이야기
이런 내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을 예경할 때 여래10호 삼신불
이렇게 항상 예경을 해요.
그런데 여래 10호는 경전마다 다 나오거든요.
10가지 명호가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여래, 불, 세존, 이 3가지 명호가 아주 중요하게 봉송이 되요.
금강경 구경무아분이라는 경문이 있는데요 거기에
如來者여래자는 卽즉 諸法如義제법여의
제법은 모든 법, 모든 사물, 모든 존재 이게 제법인데
그 제법에는 변하지 않는 뜻이 있다는 거예요.
그걸 여의라고 그래요. 부처님이 깨달은 게 그거거든요.
제법 속에서 변하지 않는 뜻을 깨달았다. 여의를 깨달았다.
같을 여, 뜻 의.
여라는 건 여여하다, 또 진여하다, 참 그대로다. 여여진여.
그런데 제법은 천지만물 우주인간, 전체가 제법인데
거기에는 여의라는 게 있다는 거죠.
여의는 뭐냐? 실상이다. 진실상. 불변이다. 또 상주다.
실상, 불변, 상주. 항상 머문다.
그래서 부처님을 상주불이라고 그럽니다. 항상 머무는 부처님이다.
여래라는 뜻이거든요. 여의.
그래서 우리 인식과 지혜가 있는데, 우리 인식은 형상만 보게 돼요.
하늘도 보고 땅도 보고, 태어나는 것도 보고 죽는 것도 보고
형상이 없으면 인식은 못 봐요.
그런데 지혜는 실상, 진실상, 불변상, 변하지 않는 상, 상주상
그거는 지혜로 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걸 여의라고 그래요.
금강경 위의적정분에서는
如來者여래자는 無所從來무소종래
亦無所去역무소거 故名如來고명여래
여래자는 어디서 오는 게 아니다.
역무소거,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고명여래라, 그렇기 때문에 여래라고 그런다.
이 세상에는 진실상이 있고 불변상이 있고 상주상이 있는데
부처님은 그걸 깨달아서 부처님이 되었다 이거거든요.
깨달았다는 것은
형상만 보는 인식, 생각만으로는 못 보고
그 생각을 일단 중지시킨다.
그래서 생각을 그치면 보여요.
보인다고 그럴 때 상이라 그러거든요. 생각 상, 명상.
그치고 보면 보인다.
그런데 안 그치고 보면 안 보인다.
생각은 멈추고
멈추고 멈추고 보니까
거기서 탁 튀오나온 게 있는데 그걸 지혜라고 그래요.
생각을 멈추고 보면 지혜가 나온다.
이걸 생혜라고 그러거든요. 날생, 지혜 헤, 생혜가 나온다.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의식과 지혜가 있는데, 의식을 멈추고 바라보면
의식을 멈추고 잠들면 또 못 깨달아요.
의식은 멈추되 분명하게 보면. 그걸 관이라고 그러거든요. 볼관. 지관, 정혜
그치고 분명하게 보는 것을 지혜 혜자를 써서 정혜라고 하고요.
그치고 분명하게 보는 거예요. 볼 뿐이에요.
거기다 무슨 생각을 내면 그치는 걸 안하는 게 되어서 못 깨달아요.
딱 그친 상태에서 밝게 탁 보고
밝게 보는 상태에서 다른 생각을 일으키지 아니하면
이걸 불생이해라고 그럽니다. 다를 이, 견해라고 하는, 해석한다는 이해 해자를 써서
다른 해석을 내지 않는다.
그런데 생각으로 살아가는 범부는
다른 생각을 안 낸다는 게 굉장히 힘들어요.
그러니까 이걸 눈으로 탁 볼 때, 그냥 탁 보기만 하고 다른 생각을 안 내면
다른 생각 안 내는 건 그치는 거고
딱 보는 건 그냥 보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냥 다른 생각 안 내고 보는 거를 바를 정, 볼 관, 정관이라고 하거든요.
이 정이라는 뜻은 무작이에요. 섞인 게 없으면 정이에요. 무작.
잡념을 넣지 않으면 정관이 되고요,
정관을 계속하면 정각이 되요. 바르게 깨달아요.
또 바르게 깨달으면 깨달음 부처님은 뭐로 사는가?
정념, 바를 정, 생각 념, 정념으로 살거든요.
그래서 뭘 보든지 깨닫고 나면 물질은 없어지고 마음만 있는 거예요.
이게 어려운 얘기인데, 깨닫기 전에는 물질만 있고 마음이 없어요.
깨닫고 나면 모든 게 마음뿐이에요.
일체가 유심이에요.
일체는 마음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항상 물을 봐도 마음의 상태로 보는 게 그게 정념이고요
죽음을 느낄 때도 마음 상태로 느끼는 그게 정념이고요
삶을 느낄 때도 마음 상태로 느끼는 게 그게 정념이고요.
그래서 부처님은 靜觀(정관)으로 正覺(정각)을 해서 正念(정념)으로 항상 머무셔서
그런 걸 일러서 부처님이 되셨다고 한다. 부처님이 되셨다.
그러면 부처님은 佛(불), 하는 이게 바르게 깨달았다. 이런 뜻도 되고요
또 깨달은 분이다, 인칭도 되고
덕칭도 되거든요. 덕이라는 건 뭘 했다, 이거잖아요.
그래서 불은 깨달았다 할 때는 덕칭이고 깨달은 분이다할 때는 인칭이거든요.
여두 마찬가지에요. 여여하면 그냥 여여인데
그런데 여여를 얻은 분이라고 할 때 여래라 이러는데요,
그 여는 진여인데 진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게 아니다.
뭐 이래서 불에는 늘 삼불이 구족하다.
삼불이 원융하다, 이래요.
부처님에게는 3가지가 항상 구족하고, 원융하다.
그럼 삼불은 뭐냐?
첫째는 부처님에게 화신불이라고 하는데요, 화신불이라는 것은 현신불이라, 몸을 나타낸다 . 몸을 나타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우리가 형상불을 모시는데, 형상불은 부처님께서 몸을 나타내지 않았다면 형상불 만들수가 없어요.
몸을 뭔가 보였기 때문에 몸대로 조성한게 형상불이거든요.
그게 현신이에요.
그리고 사리타불 모시는데, 사리타불은 부처님이 돌아가시지 않으면 사리가 있을 수 없어요.
태어나셨기 때문에 몸의 형상이 있어서, 그 형상대로 불상을 조성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에 돌아가신 몸을 태워서 거기서 사리가 나와서 그 사리로 탑을 모시고
부처님 팔자가 이래요. 팔자가 아주 이상해요. ㅎㅎ
몸은 전부 형상으로 만들어서 예경을 올리고
또 뼈는 전부 사리로 모셔서 예경을 하고.
그런데 뼈도 없고 몸 형상도 없는 거예요. 부처님은, 다 그냥 중생 앞에 제공되어서.
성불하면 좋은 게 뭐 있어요? 좋은 거 하나도 없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는 전부 부처님이 입으로 말한 거거든요. 경전이라는 게.
말씀은 전부 경전이 된 거예요.
말씀은 경이 되고 뼈는 사리가 되고 형상은 불상이 되어서 뭘 하고자 하느냐?
중생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는데요
고통이라는 것은 어디서 오느냐?
형상에 집착하고 마음을 모르는 데서 고통이 와요.
마음을 모른다는 건 뭐냐?
집착하는 대상에만 마음이 쫓아가고 집착하는 자신은 모르는 거예요.
그러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모든 게 마음이라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게 그게 깨달음이거든요.
그러니까 생각은 쫓아만 가요.
그런데 마음이라는 것은 그 마음의 거울에 대상이 그냥 비췄을 뿐이거든요.
그 비춰지는 거울은 어떤 것도 아니면서 어떤 걸 다 비출 수 있는 게 마음이에요.
그걸 깨달은 거예요.
죽음이라는 것도 비출 수 있고요, 그렇지만 죽음은 아니에요.
삶이라는 것도 비추는데 삶은 아니에요.
악한 것도 비추는 데 악한 것도 아니에요.
선한 것도 비추는 데 선한 게 아니에요.
또 마음은 무형무색이라
형상도 없고 빛깔도 없기 때문에 없는 데가 없어요.
또 있는데도 없어요.
무정무상이라, 자취도 없고 형상도 없는데
그거는 오직 지혜로만이 알 수가 있어요.
생각은 형상만 쫓아가니까 형상만 쫓아가는 생각가지고는
형상도 없고 자취도 없는 마음을 알 수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생각을 그치고, 그대로 보면 그게 정관인데
정관을 하면 그 지혜광명이 나와요.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러거든요.
아주 간단한 거예요. 원리가. 아주 간단한 거예요.
그런데 그중에서 일체중생과 똑같이 현신불, 몸을 나타냈다,
사월초팔일에 몸을 나타내서 이월보름날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현신불이라고 그래요.
현신불을 구체적으로 나누면 여덟가지로 나눠서 팔상이라고 그러거든요. 팔상현실이래 얘기를 해요.
그런데 거기서 중요한 거는 태어나고 돌아가시는 거예요. 생멸.
생멸은 현신이거든요.
그래서 태어나신 모습에 의해서 불상이 만들어지고 돌아가신 그 자취로 사리를 남겨서 불교에는 불상과 불탑이 예경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태어나고 돌아가시는 그 속에 복덕이 있어요.
공덕, 복덕. 그걸 보신불이라고 그러거든요.
공덕은 복덕상과 지혜상이 있는데, 복덕은 32상이라고 그래요. 부처님한테.
그게 불상 모신 모습이에요.
불상을 모시는데, 아주 중요한 게 형상이 이렇게 있는데
그 형상 속에 지혜상과 복덕상을 어떻게 드러내느냐가 이게 아주 핵심이거든요.
부처님 얼굴에는 복스러운 것만 있는 게 아니고 지혜가 있단 말이에요.
그 지혜와 복덕을 잘 드러내는 그게 최고의 불상인데요
신라시대에는 그런 불상이 많아요.
참 이상해요. 똑같은 돌로 조성을 했는데, 딱 보면 그냥 보통 얼굴이 아니라 복덕도 충만하고 지혜도 충만한 모습이 느껴져요.
그거는 만드는 시대의 만드는 분들의 정성이 드러나는 거예요,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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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덕이라는 거는 복덕과 지혜가 다 공덕이다.
그래서 그 공덕에 의해서 지혜를 이루고, 또 공덕에 의해서 복덕을 이룰 때
지혜는 지혜광명이 되고, 복덕은 32상이 되었다.
그런데 지혜도 닦아서 이롭고, 복덕도 닦아서 공덕에 의해서 이루었기 때문에
공덕은 닦는 거거든요.
복이라는 것은 물려받을 수 있는데요 공덕은 물려받지 못해요.
태어나자마자 자기가 부자된 건 그건 공덕이 아니라 복덕이거든요.
그런데 자기가 열심히 해서 지혜를 닦고, 지혜는 복덕으로 안 돼요.
지혜는 부모가 물려줄 수가 없어요. 그거는 닦는 거예요.
닦은 보답에 의해서 이루어진 몸이라고 그래서 보신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냥 현신만이 아니고.
보신이 지혜와 복덕을 드러내는 부처님이 보신인데
이걸 만신이라고 그래요.
지혜도 아주 만족하고 복덕도 만족하다.
만신, 가들할 만, 현신 만신.
그런데 그 현신이나 만신이 다 진신, 진여, 실상, 상주,
이 진실을 조금도 떠나지 않는다는 거죠.
그걸 진신이라고 하거든요. 실상.
그래서 부처님에게는 진신여래 만신여래 현신여래,
이게 삼여래, 삼불인데 이게 원융하다는 거예요.
현신에게도 보신과 진신이 있고,
보신에게도 진신과 현신이 있고
또 진신에게 보신 현신이 다 있어서 아주 구족하고 원융하고 원만하다.
이런 분을 부처님이라고 그러고
삼불이 구족하고 삼불이 원융하다 이래서
삼불을 청정법신비로자나불, 법신을 진신이라고 그러거든요. 원만보신비로자나불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 이래서.
석가모니불은 현신이거든요. 사월초파일날 오시고 가시고. 12월 보름날 가시고.
현신 만신 진신이 다 하나로 구족하고 하나로 원융한 것이 부처님의 세계다.
이런 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느냐?
지혜를 이루고 복덕을 이루는 게 부처님 성불인데
복덕은 과거과거에서부터 금강경 정신희유분 제6이 있는데
거기에 말세중생이라고 하더라도 복을 닦는 중생, 계법을 지키는 중생은
과거 1불, 2불, 3 4 5불 세계에서 공덕을 닦는 게 아니라 그냥 무량천만불소에서 공덕을 닦았다.
그래서 이 복덕은 과거 천만불소에서 다 닦은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성도재일날 법회하고 정진하면 이 복덕 이 공덕으로 다 성불해요.
그게 성도불사에요. 안 믿어져요? ㅎㅎ
이건 어디 갈래야 갈데도 없고요, 안할래야 안할 수도 없고.
이렇게 해서 부처님들이 전생서부터 항상 닦아서 시기가 되면 원인이 만족하고 결과가 만족하다.
이게 만신이에요. 인만, 과만.
밥을 먹으면 한숟갈, 두숟갈 먹으면 그건 원인이 만족한 거예요.
배가 그득하면 결과가 만족하거든요. 그걸 만신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처음에 부처님이 깨달을 때, 인연법을 말씀하시는데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긴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사라진다. 이걸 항상 말씀하시는데
이 말은 뭐냐?
법이 없다는 얘기에요.
인연법이라는 건.
인연법은 무법이다, 이거에요.
연법은 무법이다. 아 이거 참...
인연법은 법이 없는 거예요. 무법이에요.
왜 그러냐?
만나면 생기고 안 만나면 안 생기고, 흩어지면 사라지고 만나면 생기고.
이래서 만나서 생기고 흩어지면 사라지는 이 자체는 없어요.
부처님이 이걸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인연을 깨달았다라는 것은
인연은 법인데 법은 없다라는 거에요.
그걸 색즉시공이라고 그래요.
공이라는 게 법은 없다는 소리에요.
색은 없다는 얘기고. 색이 공이라는 얘기는.
박수 치잖아요. 그러면 치라는 소리가 아니고 ㅎㅎ 설명해 드리려고 ㅎㅎ
박수를 치잖아요.
그러면 이 소리가 어디서 나왔냐는 거죠.
이쪽 손바닥에서 왔냐, 저쪽 손바닥에서 왔냐?
허공에서 왔냐? 공기에서 왔냐? 귀에서 왔냐?
아무 데도 온 데가 없어요.
그러면 딱 칠 때는 있다가 금방 또 사라지잖아요. 안치면 사라져요.
하늘도 이거와 똑같고 땅도 이거와 똑같고 사람도 이거와 똑같아서
모든 건 인연으로 생겨서 인연으로 사라진다.
그러니까 생겨도 생긴 법이 없다.
사라져도 사라진 법이 없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법이 없다라는 걸 깨달았어요.
하늘이 없어요.
여러분 하늘 보셨어요?
또 하늘에서 도망간 일 있어요?
하늘은 잡을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고,
이건 뭐라고 생각으로는 정의가 안 되는 게 하늘이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명칭을 붙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동물들, 모기나 개미나 이런 애들보고
“너 하늘 알아?” 그러면 걔네들은 관심이 없죠. 사람만 관심이 있거든요.
사람이 하늘이라고 생각해서 하늘이지
하늘 자체는 잡을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고.
왜냐하면 이게 생각으로 정의가 안 되는 거예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있다 없다는 게 생각인데,
하늘이 있는 거냐?
있다고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형상이 아니기 때문에.
또 하늘이 없는 거야?
없다고 할 수 없어요.
맨날 하늘 속에서 우리가 사니까.
이런 것처럼 안경에 안경이 없다.
안경 이게 뭐냐? 여러 가지 안경 알이나 틀이나 이런 것이 만나서 인연으로 된 것이기 때문에
이거 하나하나 분리 해체하면 안경은 없어요.
이걸 몸이라고 그러는데
여기 뭐 하나하나 이걸 분리 해체하면 몸 없어요.
이게 인연법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이걸 깨달은 거예요. 이걸...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기고
모든 법은 인연으로 사라진다.
모이면 나타나고
흩어지면 사라진다.
아주 간단한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있다고 붙잡을 것도 아니고
없다고 두려워할 것도 아니다.
그래서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이게 인연법에서 나온 거거든요.
오는 거 인연이니까
“어서 오세요”
가면
“안녕히 가세요”
그걸 도인이라고 그래요.
도라는 건 거기서 지혜인데
인연법을 깨달은 지혜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소리거든요.
가지 말라고 애원했지만.. 이런 거는 ㅎㅎ
이건 인연법을 모르고 형상에 집착하는 거거든요.
우리가 맨날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부 인연법을 모르고 형상에 집착하는 그런 하소연과 그러한 고통을 얘기해요.
너무나도 그님을 뭐 어쨌기에 ㅎㅎ 어떻게 한다고 그러고...
전부 이게 형상에 집착하는 괴로움이거든요.
그래서 모든 것은 인연이고.
이게 아주 엄청난 거예요.
말이 그렇지 이걸 깨닫는다는 게 쉬운 게 아니에요, 진짜로.
죽음이라는 형상만 보고 죽음을 무서워하고 삶을 좋아하고 하는 게 우리 인생의 길인데
삶이라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고
죽음이라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니까
인연소치, 인연으로 이루어진 바는
삶의 결과나 죽음의 결과가 똑같다.
이거거든요.
항상 깨달음의 비법을 말할 때
달마대사한테 혜가대사가 찾아가서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십시오.”
이게 천하의 아주 바로 들어가는 깨달음 법문이에요.
그러면 보통 우리 같으면 뭐...
여행을 해보세요. 운동을 해보세요, 좋은 사람을 만나보세요, 일을 해보세요.
이러잖아요.
그거는 그게 언발에 그냥 뜨신물 붓는 거지 확실한 방법은 그때뿐이거든요.
그러면 불안한 마음을 가져와라.
그 불안한 마음.
인간은 불안하거든요. 죽음이 불안하고, 삶이 불안하고, 노인이 불안하고
노인이 다 늙었는데 뭐가 불안하냐?
그건 노인 안되어봐서 하는 소리예요.
노인 되어보라고요, 불안한게 없나.. 참 내..
시정이 그렇게도 없어. 그래...
그런데 이게 전부 다 생각이거든요.
죽음이 와서 불안한 게 아니에요.
죽음을 미리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불안한 마음을 가져와라.
그러니까 찾아보잖아요. 없어요. 불안한 마음이...
그 불안한 마음이 없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없는데 불안이 어디있냐
내가 너를 이미 편안하게 해줬다.
이게 아주 천하의 비법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불안한 마음을 중지시키고, 돌아봐서
불안한 마음이 자취가 없는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게
그게 정관이거든요. 바르게 보는 거...
그러면 불안한 마음이 하나도 없는 깊숙~~~히 들어가면
거기에는 광명밖에 없어요.
그대로 광명인데, 거기에는 하늘도 없으면서 하늘을 비출 수 있고요
땅이 없으면서 땅을 비추고
사람이 없으면서 사람을 비추고.
뭐를 다~~~ 비춰도 그 어느 것도 아니에요.
능일체 비일체
일체를 다 비추는 것이 가능하지만 일체가 아닌 거예요.
이거는 생각해도 알아요.
우리가 이 눈으로 그동안 사람도 보고 물질도 보고 작은 것도 보고 큰 것도 보고 다 봤잖아요.
그런데 눈이 본 게 아니라 눈은 마음이거든요.
보지 못하는 눈은 죽었다고 그래요.
산 눈은 마음인 거거든요.
마음으로 본 거예요. 눈이 아니라...
그러니까 이게 눈이 그냥 이렇게 눈동자를 분리 해체해보면
보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눈동자 하나 빼봐요. 그게 뭘 보나.. 큰일 나요 잘못하면...
그러면 눈으로 하여금 보게하고, 귀로 듣게 하고, 몸으로 느끼게 하고, 발로 움직이게 한 게 마음인데
그 마음은 분~~명히 움직이고 작용을 하는데 이걸 동용이라고 그래요.
움직일 동, 작용할 용, 쓸 용자, 동용.
이 동용을 그냥 쉼 없이 하는데 찾아보면 자취가 없어요. 찾아보면
이걸 청정이라고 그러거든요.
청정은 아~~무 티끌도 거기 안 묻었다는 거예요.
동용은 하는데 자취가 없다.
무적청정이라,
또 부절동용이라, 끊어짐이 없이 부절, 움직여.
그런데 자취 없이 청정해요.
거기에 들어가면 이 죽고 사는 게 전부 자취 없는 마음에 비추어진 그림자에요.
그래서 이걸 일체가 유심이라는 거예요.
이 몸도 내 마음에 비추어진 그림자고요.
그걸 알면 모~~든데서 해탈하고 모든데서 자제해요.
이걸 부처님이라고 그러거든요.
해탈 자제. 무슨 소리인지.. 진짜 어렵긴 어렵다이~~~ ㅎㅎ
어렵긴 어려워. 왜냐하면 이런 소리 잘 안 들어봤거든요.
왜냐하면 생각만 가지고 살아서 이래요.
그래서 인연법을 깨달으면서
법은 없다. 오직 마음뿐이다.
이걸 비유를 한 게 도둑이 뭐 훔치러 어느 집에 들어갔어요.
집에 들어가니까 집에 아무것도 없어. 텅 비었어.
그러니까 훔칠 마음이 싹 달아난 거예요.
그래서 인연법을 딱 알고 보니까 인연법이 없어.
그런데 인연법을 깨달으면요, 어떤 것도 구하려는 마음이 없는 거예요.
왜냐? 그게 다 허망하고 무상해서.
법에 법이 없다.
사람에 사람이 없다.
사람을 구해서 그 사람이 없어요. 사라져요.
물질을 구해도 물질이 없어요. 사라져요.
산을 확보해놔도 산이 없어요. 사라져요.
구름에 매달려 구름이 없어요. 사라져.
그래서 그것에 그것이 없는 걸 아는 게 인연법이거든요.
이걸 어려운 말로는 자성이 없다고 그래요. 자체 성격이 없다고...
미움에 미움이 없는 거예요. 사라져요.
그러니까 이걸 뭐든지 구하는 것은 그것에 그것이 없는 인연법을 모르는 미혹이요, 집착이다. 이렇게 되요.
열심히 구하다가
마지막에 후회의 눈물 흘리고 가는 게 인생이거든요.
인연법 몰라서 그래요.
부처님이 그걸 안 거예요.
“아 이 세상에 구할 게 없구나.”
왜냐하면 인연으로 생겼다 인연으로 사라니까 뭘 구해도 다 사라진다.
그걸 허망하다고 그래요. 불교에서는. 그걸 무상하다고 그래요. 사라지는 걸...
그러니까 그 대상은 다 그렇게 사라지고 지금까지 대상을 구했던 마음만 남는 거라고요.
그래서 도둑이 방에 들어가서 훔칠 물건은 없는데, 훔치러 온 두둑만 지금 있는 거예요.
그걸 마음이라고 그러거든요.
도둑이라는 녀석도 가만보니 그것도 없어.
그다음에 뭐냐?
그냥 광명뿐이야.
그 광명은 형상과 그림자가 있는 광명이 아니라 무적광명이에요.
자취없는 광명이다.
이걸 광명지. 대광명.
또 생각을 딱 돌이켜보니까 역시 생각도 생각이 없더라.
생각에 생각이 없다.
물질에 물질이 없다.
그러면 물질도 없도 생각도 없는 것을 아는 그 마음만 있는 거예요.
그걸 청정심이라고 그러거든요.
그걸 지광명이라고 그러고.
그래서 그 마음은 진신이라, 진여신. 참몸이라.
생겨도 그 마음은 생긴 게 아니고, 사라져도 그 마음은 사라진 게 아니고
그 사라지는 그림자를 느낄 뿐이지, 그건 사라진 게 아니고요.
생기는 그림자를 느낄 뿐이지 그건 생긴 게 아니고.
그래서 이거를 바로 아는 걸 진여삼매라고 그러는데, 진여삼매.
진여는 실상이고, 여여이고 불변이고 상주고, 그게 마음, 본체인데요,
그걸 떡~~ 보면 죽고 살고 ,오고 가는 건 전부 실상마음의 비추어진 그림자에요.
그래서 진여삼매에 들면 공포 불안 전혀 없어요.
내가 죽을 때 어떡하나?
죽어보지도 않고 미리 걱정하는 게 생각이거든요.
어떤 사람은 ‘내가 며느리 잘못 들어와서 집안 망치면 어쩌노’
맨날 이 걱정하는 사람 있어요.
아들은 ‘왜 들어오지도 않았는데 미리 걱정하냐’고.
공부한 사람은 며느리 잘못들어와서 집안 망치면 어쩌나 이런 생각이 들 때
그 생각을 이렇게 돌아보면 싹 사라져요.
그게 잘 안 되면 경을 읽으면 사라지고.
생각이 중지되는 거거든요.
염불, 기도하면 또 딱 사라져요.
방법이 똑같아요.
생각을 중지하고 보는 거랑,
계~~속 관세음보살, 기도하는 거를..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면서 거기에 집중하니까 다른 생각은 중지가 되는 거거든요.
경을 읽어도 마음이 조용하고 깨끗해지는 게
일단 잡념이 중지가 되요.
한 곳에 이렇게..
금강경인데 금강경을 딱 보는 순간에 여기에 집중하고. 이게 보는 거예요.
다른 마음은 중지되니까 그치는 거예요.
그치고 밝게 보면 깨닫는다.
왜 못 깨닫느냐?
안 그치고 안 보는 거예요.
맨날 따라가기만 해요.
따라가면 못 깨닫고
그치고 바로 보면 깨닫는다.
그래서 진여법을 깨달아서 나중에는 진여법을 떠나지를 않고
떠날래야 떠날 수가 없고 허공과 같이
진여법을 보태낼야 보탤 수가 없는 거. 그걸 정념이라고 그래요 정념.
부처님은 바로 봐서 그 자취 없는 마음을 바로 깨달아서
그 자취 없는 마음속에서 머무는 것을 부처님이라고 한다.
이런 거거든요.
그래서 이런 거를 처음 딱 그 생각은 멈추고, 지혜가 나타났을 때, 그걸 처음 시, 깨달을 각, 시각이라고 그래요. 시각.
그런데 처음 깨닫고 보니까 이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하고 영원히 청정하고 변함없이 청정하다. 이걸 본각이라고 그래요.
본래 본자.
그런데 거기서 더 들어가보니까
이거는 처음도 근본도 아니고 그냥 그대로다.
이걸 국영각이라고 그래요. 이걸 삼각이라고 그러거든요.
시각, 본각, 국영가. 기신론에서 이렇게 가르쳐요.
그러면 이걸 비유로 들면 뭐냐?
어떤 사람이 방에서 나가서 돌아다니다가 돌아다니다 돌아다니다 춥고 배고프고 힘들고 그래서 집을 찾아간다고 자기집에 오는 거예요. 물어물어서 와서
본래 자기가 살던 방문을 탁 여니까 자기집 방이 탁 보이는 거예요.
그걸 시각이라고 그래요.
자기 방이었지만 그냥 자기방 잃어버리고 돌아다니가 처음와서 방문 딱 열고 방안 보는 순간, 그건 처음이거든요. 보는 사람 입장에서.
지금까지 그걸 생각으로만 살았지, 지혜의 눈은 한번도 못 떠봤다.
처음 봤어요. 시각이에요. 들어와서 들어왔더니
본래 내가 사놨던 거 내가 사용하던 그대로 자기 거란 말이에요. 그걸 본각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거기서 자유로워지니까
처음에 방문열고 봤을 때나.. 그냥 아무것도 아니고 본래의 그대로
나의 방이고, 나의 물건이더라 이걸 구경각이라고 그러거든요. 구경각.
그리되면 어찌되냐.
그 청정심, 대지혜, 그거 뿐이다, 이거죠.
그러면 이렇게 이런 물건을 볼 때, 요거 의식으로 보면 이게 물건인데
이 물건은 없고, 이 물건을 바라보는 자기 마음뿐인 거에요.
그런데 범부는 여기 물건인 줄만 알지 바라보는 자기 마음이라는 건 꿈에도 모르는 거예요.
요걸 미혹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런데 어떤 물건을 보더라도 보는 마음이 없이 물건은 존재할 수 없어요.
그런데 이걸 전혀 모르는 거예요.
누구를 좋아하더라도
그 좋아하는 마음 없이 좋아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어요.
아.. 이거 참...
말을 하면서 좀 염치가 없네요.
말을 하면서도 염치가 없어.
지금 우리 입장이 전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이거 안경인데, 안경이 있잖아요.
이걸 바라보는 마음없이 이게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이걸 딱 보는 순간에 이것만 알지
보는 마음은 까맣게 모르는 거죠.
두려워하기 전에 두려운 마음을 그치고 봐라.
그러면 두려운 건 없다.
미워하기 전에 미운 마음을 그치고 그대로 봐라.
그러면 미움은 사라지고 보는 마음뿐이다.
짜증이 날 때, 짜증나는 마음을 그치고 그대로 봐라.
그러면 짜증은 사라지고 보는 마음 뿐이다.
이거는 전부 내 생각이 만들어내는 행위에요.
그래서 생각이라는 것은 그림자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아서
생각이 일어난다고 거기 쫓아가서
“아, 그렇지. 옛날에 우리 엄마가 나한테 잘못했지. 맞어.”
그런 거 막 쫓아가고 그러면 아무... 고통만 있지 아무런 이익이 없어요.
그런 생각이 일어나도 쫓아가지 말고 내버려 두세요.
그냥 딱 보기만 하는 거예요.
그게 수행이에요.
그냥 볼뿐이에요.
보면 생각은 구름처럼 맑아지고, 지혜는 태양처럼 솟아난다.
생각을 그치고 바로보면 지혜광명이 솟아난다.
그걸 정각이라고 한다. 이거죠.
정각을 얻으면 그다음부터는 정각뿐이다.
그래서 뭘 보더라도
보는 것은 그림자이고
보는 마음뿐이다.
뭐든지 뭘 보더라도 그게 내 마음광명인 거예요.
내 마음광명에 비추어진 그림자
내 마음 물에 비추어진 그림자.
이렇게 참가를 했으면, 이게 엄청나게 중요한 거예요.
근래에 나도 못했어요.
성불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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