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늘 법문은 무상계와 자성계,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계라고 하면 가야할 길인데, 안가면 어떻게 되느냐? 많은 고통을 당합니다. 그것을 계라고 그럽니다. 가고 안 가는 것은 자유인데, 가면 큰 이익이 있고, 안가면 엄청난 괴로움이 따릅니다. 그게 계입니다. 그런데 계에는 온갖 계목을 설해서 이것은 하고 이것은 하지마라. 이렇게 목차를 정해서 계목으로 말씀하신 계가 있습니다.
보통 계살림이라고 그래서, 계단을 설치하고, 법회를 열어서 그렇게 법식을 갖추어서 말씀하는 계가 계목을 자세히 설명하는 그런 계입니다. 그런데 이 무상계라고 하는 것은 무상한 것 그 자체를 믿고, 무상한 그 자체를 잘 살펴서 그것을 실천해 옮기는 그것이 무상계입니다. 그래서 무상계를 설하는 데는 없습니다. 다만 돌아가셨을 때 시다림법문으로, 제사를 지낼 때 천도법문으로 하는 것이 무상계입니다.
그런데 그 무상계라고 하는 돌아가신 분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살아있는 분들이 전부 다 믿어야 할 내용이고, 따라야 할 내용입니다. 무상인데, 무상을 잘 살피고, 무상을 잘 알고, 무상을 잘 따르면 거기서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상을 살피지 않고, 믿지 않고, 무상을 잘 경계하지 아니하면 거기서 온갖 고통이 따르거든요. 그럼 무상계라고 뭐냐? 무상한데, 우리가 무상이라는 말 많이 쓰거든요. 뭐가 무상하냐?
인생이 무상한 거죠. 쉽게 말하면. 인생이 무상한 거예요. 인생무상이에요. 그런데 인생무상을 알고 사는 사람하고 모르고 사는 사람하고 전혀 다릅니다. 그러면 인생이 어떻게 무상한가? 불교에서 인생을 설명할 때 2가지로 설명하고 5가지로 설명하고 8가지로 설명합니다. 2가지로 설명하면 2가지가 모인 것인 인생이다. 그러면 그게 이온이 되는데요, 모일 온. 2가지가 모였다. 그러면 5가지가 모이면 오온이고, 8가지가 모이면 뭐겠습니까? 8온이죠.
전부 이게 모여서 된 것이 인생이에요. 그러면 뭐가 모였느냐? 둘로 보면 명색입니다. 명이라는 것은 정신인데, 수상행식이라고 그럽니다. 수는 느낌이고, 상은 인지 아는 거고, 행은 행동이고, 식은 의식이에요. 이게 정신입니다. 색이라고 하는 것은 지수화풍 우리 몸입니다. 그래서 이게 2가지가 모였죠? 명색,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이 정신과 지수화풍이라고 하는 육체, 물질이 모여서 이게 사람이 된 겁니다.
그런데 요것을 5가지로도 봐요. 명을 넷으로 보는 거죠. 이름 명. 이게 왜 이름명이냐? 수상행식은 안보이니까 이름만 짓는다 그래서 명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말할 때 명색이, 그게 불교 사람이. 이런 소리입니다. 명색이 사람이라는 얘기입니다. 명색이 뭐로써, 이러거든요. 명색이 큰아들로서, 이런 말 쓴단 말이에요. 큰아들이라는 사람이 이 뜻입니다. 그게.
그러면 명을 하나로 보면 그냥 명인데, 이름명, 하나인데, 요것을 나눠보면 넷입니다. 수상행식, 넷 아닙니까? 그다음에 몸을 하나로 보는 거예요. 색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5이거든요. 이렇게 넷, 다섯이 모여서 이게 된 거죠. 모여서. 안모이면 안 되는 거예요. 모이면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색도 수상행식처럼 넷으로 되어있습니다. 지수화풍 넷 아닙니까?
그러니까 명도 넷이고 색도 넷이에요. 그러니까 전체로 보면 8개가 모이면 사람이 됩니다. 요게 팔온이죠. 그래서 자세히 말하면 팔온이고, 중간색을 하나로 생략하면 오온이고, 색도 하나로 보고 명도 하나로 보면 그냥 명색이 되는 거예요. 명색. 자, 그러면 우리 몸에서 지수화풍을 뺀다고 하자. 안되거든요. 우리 몸이라는 것은 합상입니다. 합상. 합한 상. 집한 된 모양. 이 집합되어서 몸이 이루었습니다. 이것을 합상이라고 그럽니다. 서로 상. 합한 모양이다.
그러면 지수화풍만 갖추면 몸이 되느냐? 아니죠. 정신이라는 게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이 정신이 또 같이 만나야 되요. 그러면 수상행식이라고 하는 것은 뭔 역할을 하느냐하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인식하고, 이런 일을 합니다. 이게.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이런 일을 하거든요. 이것을 인연 연, 연상이라고 그럽니다. 연상.
여기도 가서 인연을 맺고 저기도 가서 인연을 맺고. 밥을 보면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그것은 수인데, 느낌인데, 먹어요. 이 연상 이게 엄청나게 인연 연, 서로 상. 합상만 가지면 그건 사람이 아니오. 그건 시신이란 말이오. 합상만 가지고는 연상이 있어야 되요. 아무리 어두운 데라도 밥을 먹을 때 정확하게 밥이 입으로 들어갑니다. 이게. 정확하게 들어가요. 조금도 길을 헤매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슨 옛날 것도 생각하고, 지금 것도 생각하고, 뭣도 생각하고, 이게 전부다 반연을 맺는 현상이에요. 연상이라고 그래요. 이것을 정신이라고 그럽니다. 정신. 오늘날 현대과학에서 뇌기능을 이야기할 때 바로 이겁니다. 뇌기능, 뇌라고 하는 것은 수상행식의 연상을 말하는 거죠. 그럼 이 연상이 어디서 나오느냐? 뇌세포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지수화풍에서 나오는 거예요. 요기까지 만을 현대과학에서 뇌과학이니 무슨 과학이니 말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이게 전부 무상하고 허망한 그거 연구하는 거예요. 부처님이 깨달은 게 그게 아닙니다. 전부 이 무상세계를 연구하는 거예요. 그건 뇌 작용이 뇌세포에서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수상행식하고 지수화풍이 만나야 사람이 되는 거지, 뇌세포 없는 뇌 작용이 없듯이, 지수화풍이 없는 수상행식이 없습니다. 이게 오온으로 말하든, 팔온으로 말하든, 이온으로 말하든, 내용은 전부가 수상행식하고 지수화풍이에요.
그러면 8아닙니까? 분명히. 그러면 지수화풍을 하나로 줄이면 색으로 표현해 버리니까 오온이 되어버려요. 그렇죠. 다 하나씩 줄이면 명색이 되는 거죠. 명색이. 이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게 무상하기 그지없다. 아주. 왜 무상하냐? 왜 무상하냐? 이게 그냥 목숨이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없어질지 모른다. 이 말이오. 대표적인 것 설명하는 방식이 유교경에서 “이 생명이 얼마나 오래 간다고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하루저녁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했는데, 부처님이 “다 아니다.” “뭐냐?” “생명이 호흡지간에 있다.”
숨 내쉬고 못들이 쉬면 죽고, 그렇죠? 들이쉬고 못 내쉬면 죽는다. 이렇게 무상하고 허망한 거예요. 오온이라고 하는, 팔온이라고 하는 이 신체라는 게. 이 신체가 또 내 맘대로 되는 게 절대로 아닙니다. 본래 내 맘대로 된 게 아니구요. 그래서 무슨 사고가 어떻게 날지. 비행기타고 못 내리면 죽는 거고, 기차타고 못 내리면 죽는 거고, 물에 들어갔다 못 나오면 죽어요. 그래서 해수욕하는 사람이 들어갔다가 나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회사에다 보험회사 보험들어 놓은 거 그거 소용없어요. 아무 소용없어요. 그거하고는. 물에 들어갔다 못나오면 죽고, 차타고 못 내리면 죽고, 숨 들이쉬고 못 내쉬면 죽고, 이게 무상이에요.
그래서 이런 무상한 것을 철저히 알면, 이 무상에게 근본적인 반성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게. 그러면 우리가 현대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이 무상도 느끼지 못하고, 철저히 여기다가 포장을 해요. “건강하십시오. 운동하십시오.” 무엇이 어쩌구. 사람 만날 때마다 거짓말로 거기다가 붙여서 “건강해 보이네요. 좋아 보이네요.”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공포심이, 마음 깊숙이 있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그러니까 그놈이 못나오도록. 자꾸 이것을 덮어 싸는 겁니다. 그러니까 항상 건강해 보인다고. 그렇게 거짓말을 자꾸 해야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그런 거짓말을 안 하고 “작년보다 많이 늙었네요.” 이런다든지. “얼굴빛이 안 좋아요.” 이런다든지. “돌아가실 날이 가까워 오는 것 같습니다.” 이런다든지. 이게 바른 말이에요. 이게. 그러데 바른말을 하면 난리가 나고, 철저히 거짓말을 하면 인기가 좋아요. 이게 중생세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영원하도록 꿈을 꾼다든지, 오래 살려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이게 무상계를 철저히 안 지키는 거거든요. 이건 지수화풍과 수상행식이 모여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풀잎의 이슬과 똑같은 거다. 무상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그렇게 지진 한번 일어나서 그 많은 사람이 일시에 죽겠는가? 허공이 무너지는 것은 못 봤거든요. 그런데 인간의 몸은 금방 무너져요.
그런데 이것을 모르고 뭔 일을 하는가? 우리가 살아갈 때. 이 몸으로 위해서 재물, 권력, 명예, 사랑, 이것만을 구하려고 그냥 목숨을 겁니다. 재물, 권력, 명예, 애정이라는 것은 몸 하나 뚝 떨어지면 아무짝애도 쓸모없는 거예요. 이 몸이 있는 동안까지만 필요한 겁니다. 그게. 그런데 이 몸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것을 위해서 평생을 산다는 게 이게 무상계를 모르고 사는 거다. 이거에요. 이게 아주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자나 깨나 노력하는 것이 뭡니까? 돈 벌기 위해서, 권력을 갖기 위해서, 이름을 얻기 위해서, 좋은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애쓰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목숨이 뚝 떨어졌다. 평생 구한 게 뭐에요? 아무짝애도 소용이 없거든요. 이 목숨이 붙어있을 때 그게 다 필요한 거라고요. 그런데 이 목숨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것만 평생 구하다가 죽으면, 죽는 순간에 무엇이 오는가? 통곡이 옵니다. 통곡. “내가 오래 살면서 온갖 것을 이루고자 했는데, 내가 구하던 것은 손에 잡히지도 않았는데 목숨부터 떨어진다.” 이러니 그 통곡이야말로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생은 통곡이라고 그럽니다. 옛날 할머니 할아버지도 통곡하고 돌아가시고, 지금 사람도 통곡하고 세상 떠나고 있고, 앞으로 미래에 수많은 사람이 전부 마지막에는 통곡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게 중생이 가는 길입니다. 그게 왜 그러냐? 무상계를 못 받아서 그래요. 무상계. “아, 이 인생이라는 것은 8가지가 모여서 된 것이고, 두 가지가 합해서 된 거고, 이 다섯 가지가 합해서 된 것이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그러면 이런 무상과 통곡으로부터 면할 수 있는 게 뭐냐? 이게 도를 찾는 길입니다. 이게 해탈법을 찾는 거예요. 무상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이지, 다른데서 해탈하는 것이 아닙니다. 해탈은 벗어난다는 말인데, 무엇에서 벗어나는가? 무상으로부터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무상이 아니면 벗어날 게 있나요? 그래서 무상법으로부터 해탈하는 것이 그게 해탈법입니다. 해탈법이 그게 자성이죠.
그래서 이 자성을 믿고, 그 해탈법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 그게 또 자성계입니다. 자성계. 그러면 이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묘체담연 무처소하니
산하대지가 현진관
자성이 참나고, 자성이 해탈이고, 자성이 고인데, 스스로의 본성,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합상이고 연상이다. 지수화풍이 합해진 것이고, 수상행식이 이것저것 색성향미촉법 육진을 반연하는 내용이다. 그래서 합상 연상을 떠나서는 몸은 없습니다. 생각하는 것 보면 과거 것 생각하고 미래 것 생각하고 보는 대로 생각하고 듣는 대로 생각하고. 이게 연상입니다. 이게 내 마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하나의 연상일 뿐이에요. 대상이 사라지면 그것도 사라지는 거예요. 연기법이에요
저 사람 보는 것, 오는 거 보다가 그것도 없어지면 보는 마음 사라져요. 바람소리 듣다가 바람소리 사라지면 듣는 마음 사라져요. 또 딴 거 보고, 또 딴 거 보고, 끊임없이 반연하는 그 생각이 그게 연상입니다. 지수화풍 이거하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그 생각하고 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게. 그 속에 들어가서 나타나는 게 그게 자기 자성입니다. 그것을 묘체라고 그럽니다. 묘체는 담담하고 적적해서 당연하다. 이 무명무상이에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요. 이름이 없다라는 것은 묘체에는 개념이 없어요. 개념. 무슨 학술과 논리, 이론을 붙이는 건 개념인데, 이건 전부 연상입니다. 생각으로 만들어내는 생각작용이에요. 말하자면 뇌 작용이에요. 본래 진실 법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무명이라고 진실법에는. 이름이 없다. 이름은 개념이거든요. 무상이라 형상이 없다.
그런데 중생의 생각은 전부 이 개념과 형상에서 찾습니다. 찾아도 소용없어요. 찾다가 죽는다고 그래요. 찾으면 못 찾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억만년을 찾아보라고 되는가?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찾는 마음이 팍삭 녹아져야 되요.
찾는 마음이 녹아져야 되지, 찾아서는 못 찾는다.
이게 부처님이 깨달은 법입니다. 이게.
찾는 마음이 녹아지면
그게 자성이에요.
찾는 마음은 구름광 같은 것이고,
자성은 허공과 같은 건데,
구름으로 허공을 억만년 찾아봐도 허공이 안 나옵니다.
구름이 사라지면 그대로 허공입니다.
구름 사라지는 곳이 허공이지, 구름이 따로 어디 가서 허공을 찾는 게 아니다. 요것이 아주 똑같아요. 생각하는 이 생각이 그게 연상인데, 반연하는 내용인데, 이 반연하는 내용이 사라지면 그게 심공이에요. 마음이 공한 거예요.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색즉시색 공즉시색, 이러거든요. 색이 공했다는 얘긴데요. 고 밑에 수상행식 역부여시, 이게 간단하게 설명해서 넘어가는 거예요.
그러면 수즉시공 공즉지수, 상즉시공 공즉시상, 행즉시공 공즉시행, 식즉시공 공즉시식, 이 수상행식이라는 이게 뭐냐? 저 아지랑이 와 같아서 실체가 없는 거예요. 이 몸이라는 것이 이게 전부 모셔서 된 것이기 때문에 실체가 없고, 이게 무아에요. 이게 무아적멸이거든요. 그런데 이 수상행식이 무아적멸을 모르고 끊임없이 색성향미촉법 육진을 쫓아다녀요. 그래서 본래 윤회가 없는 곳에 한없이 윤회를 하고 있어요. 그게 중생입니다.
그런데 수상행식이 녹아진 그 자리에는 이름이 없어요. 개념이 없어. 그래서 개념 때려 붙이는 것은 전부 망상이에요. 옳다는 생각도 망상이고, 그르다는 생각도 망상이고. 있다는 생각, 없다는 생각, 생각이라고 일으키면 전부 망상이에요. 무명이라는 거예요. 무명. 무명인데 거기다가 이름을 붙이는 거예요. 무상인데 거기다 형상을 붙이는 거예요. 무명무상 절일체에요.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어서 일체가 끊어졌는데, 거기다가 자꾸 생각을 붙여서 찾다가 죽고, 찾다가 죽고. 그냥 죽어요. 그것을 고해라 그러고, 그것을 윤회라 그럽니다.
그래서 생각 하나가 녹아지면 일을 마치는데, 이놈의 생각을 하나 들켜 쥐고 이 생각, 저 생각, 밥 생각, 국 생각, 온갖 생각 다 해요. 그걸 번뇌라고 그러거든요. 번뇌. 그런데 그 본래 자성은 묘체담연 무처소하니, 그 오묘한 자성묘체는 담담하고 적적해서 처소가 없어요. 그럼 본래 우리 자성이 내 몸에 있느냐? 허공에 있느냐? 발에 있느냐? 얼굴에 있느냐? 없어요. 그럼 없느냐? 없지도 않아요.
있다라고 한다든지 없다라고 하면 처소가 있는 거예요. 이건 처소가 없어요. 그래서 자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명무상이기 때문에 몸에서 찾아봐도 없고, 허공에서 찾아봐도 없고, 물질에서 찾아봐도 없는데, 또 역시 무명무상이기 때문에 몸에도 있고 허공에도 있고 물질에도 있다. 그래서 항상 없는 데가 없는데 찾아보면 없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한생각도 미혹한 마음, 모르는 마음이 안 일어나면 그게 해탈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확실히 보지 못하면 무슨 소리를 들어도 또 의심이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또 찾다 죽고, 의심이 생기니까 두려움이 생겨요. 또 공포심에서 헤매고, 이 모양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무상을 철저히 믿고, 자성을 철저히 믿고, 인과법을 딱 지키고 도를 구하는 것. 그게 깨닫는 길입니다. 무상을 믿지 않고 그런 자성, 해탈을 안 믿으면 영원히 생각에서 생각으로 헤매는 윤회고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묘체담연 무처소하니, 그 자성묘체가 담담해서 처소가 없다. 처소가 없으니까 이 몸을 아무리 아무리 갈라서 뇌세포를 아무리 아무리 쪼개서 정신의 실체를 찾아봐도 헛수고에요. 소용없어요. 그래가지고는 억만년을 찾아도 안 돼요. 뇌 과학가지고 대단히 도통할 거 같죠? 천만의 말씀이에요. 그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마치 꽃송이를 후벼 파서 봄을 찾는 거 하고 똑같아요. 꽃송이 후벼 파보죠? 봄이 있는가? 부처님이 그렇게 어리석은 분이 아니에요.
봄을 척 알면, 그 봄은 꽃에도 있고, 허공에도 있고, 없는 데가 없어요. 그런데 봄을 가서 찾으려고 보면 허공에도 봄이 없고, 꽃잎에도 봄이 없습니다. 그게 도입니다. 그게. 도는 뭐에요? 해탈이요. 해탈은 뭐요? 지혜요. 지혜는 뭐요? 광명이다. 그래서 산하대지가 현진광이라. 산하와 대지가 참 광명을 항상 비추고 있다. 그거 무상계 법문에 나온 법문이에요. 이거 안 믿으면 하나도 소용이 없는데, 이 말 한마디만 가지고도 해탈해요. 묘체담연 무처소하니
우리 본래 내 몸, 어머니 아버지가 주기 전 내 몸, 묘체.
이게 담담하고 적적해서 처소가 없으니, 그렇다고 없느냐? 산하대지가 현진광이라. 산하와 대지가 항상 참광명을 환희 비추고 있다. 이게 법문 아닙니까? 이게. 이거보다 더 훌륭한 법문이 어디 있느냐? 이 말이죠. 그게 자성입니다. 자성. 그러니까 자성계를 하나 턱, 믿으면 자성으로 돌아가는 거 밖에 더 중요한 일이 없다 이거죠. 왜 그러냐? 다른 건 무상하니까. 재물 권력이 안 좋다나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좋기는 좋은데, 문제는 끝이 있다는 거예요. 재물도 다 떨어질 때가 있고, 권력도 다 떨어질 때가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다 없어지고 나면 천만년을 그것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러니까 결국 무상에서 무상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래서 무상계를 받아야 된다. 이거죠. 그리고 또 하나는 보통 중생들은 가난한 건 고통으로 알아도 부자는 고통으로 모르는데, 실제 겪어보면 부자에게도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되려고만 노력을 하면 결국 가난한 고통에서 부자고통으로 옮겨가는 것뿐이에요. 이런 꼬라지를 하고 산단 말이에요. 이게 뭐하는 짓이오? 이게. 배고픈 고통이나, 재산 지키는 고통이나, 고통은 마찬가지인데, 이 고통 버리고 저 고통 얻으려고 그 애를 쓴단 말이야. 이게 뭐하는 짓이냐? 이 말이에요. 이게. 그래도 뭐 똑똑하다고, 그래도 영리하다고, 이 도를 모르면 천하에 이렇게 어리석은 게 없거든요.
도 하나 모르는 게 그렇게 어리석은 거예요. 혼자 있어도 괴롭지만, 둘이 있어도 괴롭거든. 그러면 하나두고 사람 만나려고 목을 매는데, 결국 혼자 있는 고통에서 둘이 있는 고통으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그것도 죽기 싫어하고 살기 좋아하는데, 사는 고통도 있지 죽는 고통만 있나? 그러면 오래 살려고만 운동하고 보약 먹고 어디 여행 다니고 하면, 결국은 죽는 고통을 자꾸 뒤로 무르고, 사는 고통 연장하려고 애를 쓰는 건데, 이따위 짓을 하면서 영리하다고 그래요?
그러니 그런 것에서 다 벗어나는 게 해탈법이요. 자성 해탈법으로 돌아갔을 때, 그게 참으로 즐거움을 얻는 길이지, 가난한 고통 버리고 부자고통 취하고, 그거죠. 혼자 있는 고통 버리고 둘이 있는 고통 취하고. 이 짓을 해서 무슨 마음 편하게 누울 수나 있는가 이 말이죠. 그래서 천하에 어리석은 게 도를 구하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다. 그거에요.
그래서 이것을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던 법문이 하나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이루 말 할 수 없이 많이 들었어요. 중국에 당나라 때, 태전선사라고 계셨다고 그래요. 클 태, 전도되었다고 하는 전. 엎어질 전. 태전선사. 그분에 축령봉이라고 하는 높은 산에서 10년 동안 도를 닦았는데, 그 도에 대한 이름이 많이 알려져서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이 태전선사의 도력을 한번 시험해보려고 작정을 했다. 이렇게 내려옵니다.
그러니 요것은 도에 대한 이야기만 전하는 게 목적이지, 그게 진짜 그랬나? 역사책 뒤져보고 이것은 어리석은 거거든요. 거기에 전하는 핵심이 있어요. 그래서 어떻게 시험을 했느냐? 의례것 도인들은 남자고, 남자를 시험하는 게 끝까지 남녀관계니까 홍련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여성을 기생인데, 젊은 여성을 보냈다. 옛날에 젊다고 그러면 20세 전입니다. 이팔청춘이라고 그래요. 8이 둘이면 16이거든요. 16, 17 요때.
홍련이라고 하는 기생을 떡~ 보내서, 백일동안 기한을 주고, “100동안 그 태전선사를 계를 파하라. 그러면 엄청난 상을 줄 것이고, 만약 그것을 파하지 못하고 오면 너는 죽는다.” 이렇게 죽기 아니면 살기죠. 그래서 이 홍련이라고 하는 젊은 여성이 태전선사한테 가서, 참 100일 동안을 온갖 기술을 다 부렸는데, 안되었거든요. 그러니 100일만 에 울었어요. 왜 우느냐? 나는 돌아가면 죽습니다. 왜 죽느냐? 얘기를 쭉 했단 말이에요. 그래? 그럼 치마를 벌려라 해서 치마폭에 써준 게송이 있다고 그래요.
十年不下祝靈峰 십년불하축령봉
觀色觀空卽色空 관색관공즉색공
如何曹溪一適水 여하조계일적수
背墮紅蓮一葉中 배타홍련일엽중
십년불하축령봉에서 내려가지 않고 도를 닦았다. 이 말이죠. 도를 닦은 경지가 어떻더냐? 관색관공즉색공이라. 관색은 볼관. 빛색. 색을 보는 관공, 그 마음까지 턱 비워졌다. 관색관이 공해져 버렸다. 그러니 색이 공한 것을 먼저 깨닫는데, 마음이 공한 것을 못 깨달아서 그 마음 하나를 붙들고 이 마음도 일으키고 저 마음도 일으키고, 이제 여기서 다 수도자가 나가 떨어져요.
자기 마음에 속는 거예요. 심문공을 몰랐어. 그것을 내각이라고 그럽니다. 밖으로는 깨달았는데, 안으로는 못 깨달았다. 내각만 못했어. 외각만 했어. 지금 도 닦는 사람들이 특히 일반재가자들, 일반 속인들, 도 닦는다는데 전부 여기에 다 걸려버렸어요. 자기 마음 하나 딱 붙들고 있어 내각을 못했다. 관색관이 공해져야 되는데, 그래서 이 처사견성이라는 게 위험하기 짝이 없어요. 이게 요새 아주 문제거든?
스님들은 옛날서부터 내려오는 전통이 있는데, 거사들은 한번 올라왔다가도 딱 끊어졌다가 나오고 이러는데, 이게 여기서 관, 색이 공한 것은 아는데, 색을 보는 그 마음이 공한 것은 몰라서 아, 이놈 하나 붙잡고, 이게 별별 재주를 다 부린다. 그것 때문에 지옥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색즉시공만 있는 게 아니라, 수상행식도 똑같다 이 말이오. 그거 알아야 되요.
관색관이 공해버렸다. 관재, 색을 보는 관까지 턱 공해버리니, 즉생공이요, 모든 색이나 모든 마음이나 다 공했다. 이 말이오. 색만 공한 게 아니에요. 마음까지 공했어요. 공이란 뭐냐? 불생불멸이에요. 형상만 불생불멸이 아니라 생각도 불생불멸이요. 아 그러니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릴게 있나요? 홍련이라고 하는 기생을 내치지도 않고, 끌어당기지도 않고, 불치불사라. 이게 자성이에요.
버리는 마음도 그게 이미 속인된 거예요. 그게 마음으로 벌써 색이라고 보는 마음을 일으켰으니까 불생불멸에서 벗어나 버린 거 아니오? 취하는 마음은 말할 것도 없이 속인이고, 버리지도 않고 취하지도 않는 게 그게 자성이란 말이에요. 불취불사. 관색관이 공하니까 이제 즉색공이고 공즉색이고 그렇단 말이오. 그러니까 취사심이 다 끊어져버렸어요.
그러니 옆에서 잠을 잔들 무슨 상관이 있으며 옷을 벗은들 무슨 상관이 있는가? 태전선사가 한 일이라고는 경계한 일도 없고 친한 일도 없고,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요. 이것을 무위도인이라고 그래요. 함이 없는 도인이다. 중생은 해서 탈나는 거예요. 안 해서 탈나는 게 아니라 해서 탈이 나는 거예요. 이게 속박이에요.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고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여하조계일적수를, 조계라고 하는 것은 불불이 전하는 법인데, 일적 한 방울의 물이라는 것은 비유요. 그 부처님의 조그마한 법인들 어찌 홍련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에게 떨어뜨릴 수가 있겠는가? 벌써 보냈죠. 그래서 태전선사는 아주 유명하게 그렇게 자성계를 지킨 모델로 전해지고,
고려시대에 진각 혜심선사라고 보조스님 제자인데, 그분이 선문염송, 30권을 지었는데, 선문염송 제일 마지막 최고 마지막에 파자소암 이라고 화두가 있어요. 어느 노파가 토굴을 하나 지어놓고, 공부하는 어떤 수자스님을 20년 동안을 뒷바라지를 해줬어요. 그리고 어린 여자아이를 시켜서 늘 가서 공양을 올려드리고, 수발을 들어드렸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여자아이가 한 20세 가까이 되었는지, 시험을 하게 한 거예요.
“네가 오늘은 와서 그 스님 무릎에 안기고 얼굴을 맞대고 목을 끌어안고 물어라.” “이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맞대고 있는 요 때에 요 감정이 어떻습니까?” 하고 물어라. 이거에요. 이게 밥값이 있는 거예요. 공짜가 없어요. 20년 동안 밥 먹었으면 밥값을 해야 되거든? 이걸 타산반전이라고 그래요. 반전을 타산한다. 타산이라고 있죠. 계산하는 게 타산입니다. 반전은 뭐에요? 밥 돈. 밥밭이라는 얘기에요. 밥밭, 돈전. 어머니가 시키니까 그대로 했단 말이죠.
앉아서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탁 맞대고 “요럴 때 어떻습니까?” 기분을 물었단 말이오. 뭐라고 했을 거 같습니까? 이거 깨달으면 도통한 거예요. 그냥 나오는 말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 스님 하는 말씀이 고목의한암 삼동무난기. 고목의_마른나무가 한암_찬 바위를 의지했으니, 의한암, 삼동_차디찬 겨울 날씨처럼 따뜻한 기운은 하나도 없다. 삼동처럼 무난기라. 더운 기운을 하나도 없다.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 어머니한테 가서 말을 했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노파가 뭐라고 그러냐하면 “내가 20년 동안 속인에게 공양을 올렸구나.” 그러고 초당 토굴을 불을 쏵 태워버렸어요. 이게 초당노파가 암자를 불태운 화두다. 자, 그러면 이 토굴 스님이 뭘 잘못했는가? 잘못이 뭐냐? 그 처녀를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따뜻한 기운이 전혀 없다고 했는데 그게 뭐가 잘못인가? 그래요.
그럼 만약에 더운 기운이 펄펄 났으면 어찌되었겠나? 그러면 속인이 아니겠냐? 이 말이오.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이 부분이 이 계목의 계는 철저히 지킨 거예요. 여자를 가까이 하지마라. 뭘 하지 마라. 이게 계목계인데, 이 계목에 대한 계목은 이거보다도 청정하게 지킬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자성계를 못 지켜서 속인 되고 암자 불 질러 버린 거예요. 자성계.
벌써 고목이 마른 나무가 차가운 바위를 의지했다. 이게 벌써 한 생각이 일어난 거예요. 벌써 밀어내는 마음이 일어났다 이 말이오. 도라는 것은 이런 겁니다. 밀어내는 마음이 일어났다 이거에요. 태전선사가 뭘 했느냐? 태전선사가 백일동안 같이 한방에서 살았는데, 아무 일 없는데, 이건 뭐 잠깐 무릎에 앉았는데 덜커덕 걸린 거예요. 이게 자성이라는 거예요.
끌어안아도 속인이고
밀어내도 속인이고.
뭔 소리를 해도
거기서 한 생각이 일어나면
다 속인 되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자성입니다.
이게 개념이 없는 건데, 도라는 것은. 개념을 일으킨다 이 말이에요. 좋다. 나쁘다. 해탈이다. 속박이다. 여자다. 남자다. 다 속인 되는 겁니다. 이게. 다 속인 되는 거죠. 그래서 대표적인 그 도와 분별이 어떻게 되는고? 이거에요. 그래서 육조단경에도 심지무비가 자성계라. 마음 땅, 마음 땅이 그른 것이 없는 게 그게 자성계다.
그른 것이 없다라는 게 뭐요? 그게 마음으로 부터 반연심을 가지고 이리저리 이리저리 자꾸 찾아 다니고 구하고, 취하고 버리고, 이게 그른 거죠. '신거신래 본삼매라. 몸이 가고 몸이 오는 게 본래 삼매다. 본삼매가 있어요. 본삼매. 그런데 우리는 공연히 분별심을 가지고 자꾸 생각을 일으키니까, 그것을 다시 돌아가려고 닦는 게 그게 닦는 삼매입니다. 다 닦으면 본래 삼매로 돌아가는 거예요. 본래 삼매로 돌아가는 거다 이 말이지. 그게 자성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본 모습은 어떤 거냐?
요 몸에만 국한 되어있는 게 아니라,
처소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데가 없는 게 그게 우리 본 모습니다.
없는 데가 없는 게.
그런 건데 우리는 그 본래의 자기를 잃어버리고,
몸만을 자기로 알고,
생각하고 쫓아다니는 그 생각만을
자기마음으로 알아서
전도몽상이 떡~ 잡혀서,
자기를 찾지 못하고 늘 헤매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되는가?
몸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
그 자성이 청정하다는 것을 믿고,
이 무상을 믿고, 청정을 믿고,
그냥 닦아나가는 게
그게 불자의 삶입니다.
무상을 믿지 못하고,
자성을 믿지 못하면,
있는 고통에서 없는 고통 받고,
없는 고통에서 있는 고통 받고,
이 고통에서 저 고통으로 가고,
저 고통에서 이 고통으로 가고
헤맬 뿐이에요.
능엄경이라고 있는데요, 능엄경에 뭔 말이 있느냐?
문복예근제
진소각원정
우리는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고, 반연심 밖에는없어요. 중생의 마음이 반연심이에요. 고향심이라는 것은 털끝만큼도 없어요. 고향마음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전부 반연심만 가지고 왔다 갔다 한다. 그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이 마음을 돌이키는 거예요. 이게 문복이에요. 문복. 들을 문. 회복할 복. 문복. 그래서 마음을 가린 그 본래의 뿌리가 있는데 이것을 턱~ 제거해버리면 이 소리에요. 반연심을 턱~ 제거해 버리면,
멋진 말씀이 있는데, 진소각원정하리라. 육진 티끌은 다 녹아져버려요. 녹일 소, 티끌은 다 녹아져버리고, 깨달을 각, 깨달을 각자는 지혜인데, 그 지혜가 둥글고 깨끗하리라. 둥글 원, 깨끗할 정. 이게 완전히 부처님 아주 골수법문입니다. 진소각원장이라. 허공이나 티끌이나 뭐나 다 녹아져요. 왜 녹아지냐? 전부 마음이에요. 깨닫고 보면 우리 몸도 자기 지혜요, 물질도 자기 지혜요, 하늘도 자기 지혜요, 삼라만상 우주만물이 전부 자기 마음입니다.
그런데 요 몸만을 자기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요 번뇌심만을 자기 마음으로 생각하니까, 전부 자기가 아닌 거예요. 그러니 문복예근제하면, 견문각지의 생각하는 마음을 턱~ 돌이켜서 그 지혜를 가린 그 번뇌의 뿌리가 싹~ 제거가 되면, 마음밖에 있는 그 여러 가지 물질현상, 이런 것은 다 녹아지고, 지혜마음 하나만 끝없이 청정하리라. 각원정이라. 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게. 그러니 이것을 못 깨달은 사람은 물질로 보는데, 깨달은 사람은 마음이에요. 이게 진소각원정이에요.
그래서 원각경에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 본다. 오불견공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것을 몰라서 사불견이있는데,
魚不見水어불견수하고 물고기는 못보고, 물고리라는 놈이 물속에 사는데 물을 몰라요. 자기 집으로 알아. 그 희한하죠.
人不見風인불견통하고 사람은 바람을 못보고, 사람이 바람 속에 사는데 바람을 못 봐요.
迷不見性미불견성하고, 미한 사람은 본성을 못 보고,
悟不見空오불견공이라.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 본다. 이게 사불견이거든요. 원각경 대소처에 나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왜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 보느냐? 이래요. 이상하다고. 이게 화두입니다. 여기에 의심이 철저히 녹아져야 각원정이 되는 거예요. 진소가 안 되어서 그래요. 진소. 밖으로 추구하는 육진경계가 녹아지지 않았기 때문에 자꾸 이것을 허공으로만 보는 거예요. 그것을 자기 마음으로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깨닫는 순간에 허공은 없어지고, 자기 본각만 둥글게 끝없이 청정한 거예요. 요게 각원정이에요.
그런데 깨닫기 전에는 전부가 마음 밖에 있는 상으로만 본단 말이죠. 요게 미한 거예요. 이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불견공이라.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 본다. 그럼 허공이 어디로 갔기에 못 보느냐? 깨치고 나면 물질이고 허공이고 없어요. 전부 하나의 본각, 본래 자기 지혜가 둥글고 청정할 뿐이다. 이거거든. 그게 자성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리를 들어보니 알 수가 있어요. 왜 모르느냐? 하도 오랫동안 미해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거예요.
전생에서 부터 도를 조금이라도 닦았으면 여기서 털커덕 깨치는 거예요. 못 깨달을 수가 있나요? 진소각원정이라는 말을 듣고 어떻게 못 깨달을 수가 있는가? 그리고 본성이라는 말을 자꾸 쓰는데, 본성이 뭐냐? 어떤 분한테 가서 자성이니 본성이니 그러는데, 어떻게 해야 자성이니 본성이니를 볼 수가 있습니까? 물으니까, 세상 싱겁죠.
몇 줄기의 푸른 물은 바위 앞으로 지나가고, 한조각의 흰 구름은 저 강위에서 떠온다.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 그러니 이게 본성이에요. 본성이 뭐냐? 몇 줄기의 맑은 물은 바위 앞으로 술술 지나가고, 한조각의 흰 구름은 강위에서 둥둥 떠온다. 그게 자성에 대한 법문이에요. 법문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런 자성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만 지옥고도 면할 뿐 아니라 생사고도 멸할 수가 있어요.
복만 지으면 지옥고는 면합니다. 삼악도 고통. 그런데 생사고는 못 면해요. 그래서 이런 자성에 대한 도를 닦아야만 생사고까지 멸할 수가 있습니다. 생사고. 그게 부처님 법이에요. 그래서 두 가지를 믿어야 되는데, 인과법과 해탈법. 해탈법이 그게 자성법이에요. 인과법을 믿고, 자꾸 복을 닦아야 삼악도에 안 떨어지거든요. 또 해탈법을 믿고, 자꾸 지혜를 닦아야 생사고를 멸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인과법을 잘 믿고 살아가는 게 그게 무상계를 지키는 것이고, 해탈법을 믿고 자꾸 닦는 게 그게 자성계를 지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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