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오전 시간에서 지금까지 굉장히 오랜 시간입니다.
일념이 무량겁이라.
일념은 일찰나거든요. 일찰나 이외에 무량겁이 없어요.
(일념무량겁: 단 한 번 망상을 일으켜도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걸쳐서 그 응보를 받는 일)
그러니까 당연히 안녕하십니까?
물어야지. ㅎㅎ
오전에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시니, 정각,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니
부처님 소개부터 하거든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신 내용을 10구로 설명을 하는데 10구절로, 제일 앞에.
하나하나 설명이 있거든요.
그러면 어땠냐?
이행이 영절했다_ 이행, 생사와 생사 없는 세계, 그 2가지가 없어요.
생사와 열반을 이행이라고 그래요.
이 부처님의 정각 안에는 생사, 생사 없는 세계, 없는 거예요.
이행이 영절하시고,
달무상법 하시고
형상없는 법, 형상은 세간법인데, 형상 없는 법, 세간법이 세간법이 아닌 법을
달_ 통달하셨다. 아셨다.
그러면 무상법은 다른 말로 하면 진여법, 진여_적멸법, 이걸 무상법이라고 그러는데,
(진여_ 중생심의 근원이 되는 참되고 한결같은 마음
적멸_ 일체의 상이 적멸한 법 또는 그런 경지)
생사 없는 세계를 아셨다.
이런 거죠.
그럼 부처님은 뭘 부처님이라고 그러는가?
금강경 현장법사 번역본이 있는데요, 현장법사 번역본에는
/부처님은 진실 진여 증어라/ 이랬는데, 더할 증, 말씀 어.
(아이가 법문 좀 잘하라고 지금. 법문이 왜 이렇게 시원찮냐고 뭐라고 그러는 거예요.)
부처님은 진실진여에 대한 존칭이다. 정어라는 말은 존칭인데,
진여 존칭을 부처님이라고 그래요, 진여 그 자체를 말하는 거죠.
생사 없는 세계, 적멸존칭.
또 /부처님은 진여법성증어라/
법성에 대한 존칭, 법과 법성이 있는데
법은 세간법이고, 법성이 무상법이란 말이에요. 형상 없는 법.
그 형상 없는 법성을 존칭으로 호칭할 때 부처님이라 이래요.
형상 없는 그 생사 없는 법은
오는 게 아니고 가는 게 아니고, 온다든지 간다든지 하면 여래를 잘 모르는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런 세계에 도달하셔서 무상법을 통달하셨다. 이러고요.
/주어불주라./ 부처님의 머무는데 머물렀다.
생사 없는 법을 깨달으신 분들이 머무는 세계가 있어요.
그게 불주입니다.
그래서 불주에 머물렀다.
중생은 중생에 머무는 세계가 있거든요.
그럼 중생은 어디에 머무는가?
형상에 미혹해서 형상이 무상인 줄 모르는 거예요.
이게 미혹이에요.
형상이 무상인 줄 모른다.
그래서 그 형상을 구하는 것이 중생이 머무는 거죠.
중생은 구하는데 머물러요.
사람을 구하든, 건강을 구하든, 재물을 구하든, 명예를 구하든,
이건 다 형상인데 그거 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인간은 구하다 죽어요. 구하다 죽어.
기러기는 날다 죽고, 날다가 날다가 죽어요.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구하다 구하다 죽어요.
그게 중생이 머무는 곳이에요.
그런데 어떤 것을 구해도 남는 게 하나도 없어요.
요즘도 맨날 듣는 얘기가
‘건강하십니까’ ‘하나도 안 늙었네요’ ‘그전하고 똑같아요’
이런 말 많이 해요.
나도 그런 말을 해요. 또 다른 사람한테 그 말을 들어요.
그런데 내가 하는 말도 말짱 거짓말이고 ㅎㅎ
다른 사람이 하는 말도 말짱 거짓말이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거든요.
그래서 이 몸이라는 것은 마지막에는 털끝 하나도 안 남고 다 없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건 이 몸을 위해서 살고 있어요, 지금.
마지막에는 털끝 하나도 안 남는게 몸인데, 그 몸을 위해서 살고 있어요.
그게 우리가 머무는 중생살이 거든요. 기가 막혀요.
다른 거 모든 게 똑같아요. 몸이 그럴진데, 다른 사람도 그렇고
사람을 위해서 산다.
권력은 어디서 나오느냐? 사람한테서 나오거든요.
사람을 모으지 못하면 권력은 없어요.
재물도 그렇죠. 재물도 나중에는 먼지 하나도 안 남고 다 없어질 게 재물이고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군지를 깨닫는 거.
그게 제일 소중하고 그게 제일 급하고,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인데,
이 없어질 몸을 위해서 살고, 없어질 사람 위해서 살고, 없어질 재물을 위해서 살다가 그냥 마는 거예요.
죽을 때, 구하기는 구했는데 남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다음 세상에 또 구해요.
그다음 세상에 또 구해요.
이게 생사윤회인 거예요.
금생에 또 구하고, 내생에 또 구하고, 그런 거죠.
구하는데 머무르는게 우리 인간이고 중생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부처님에 머무는데 머문다.
그럼 부처님은 깨닫는데 머문다 이러죠.
그래서 그게 불의 세계인데, 화엄경에서는 불을 어떻게 보느냐?
삼불, 십신, 십불 이렇게 보거든요.
삼불원융이라,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 이러는데
법신불은 지혜 그 자성이에요. 지혜자성, 그걸 법신불이라고 그래요.
지혜 그 자성은 범부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고 여래도 아니고 불도 아니고 일체를 초월해서 일체에 자제해서
모든 것이 아니면서 모든 것이 다 통하는
그게 청정법신이거든요.
법신 그 자리는 완전히 성인이냐? 성인도 아니고, 범부냐? 범부도 아니고
그냥 청정 그 자체에요.
그래서 그거를 일물이 장령이라,
한 물건이 길이 길이 신령스러울 뿐이에요.
그냥 신령스러운 자체이지, 그 다른 범성이나 생불이 아닌 거죠. 중생과 부처가 아닌 거.
그것이 청정법신이고,
원만보신은 그 청정법신에서 사람이면 사람으로 이렇게 공덕을 지으면
그 사람으로서 지은 공덕의 보답이 있는데, 그게 지혜에요. 자기 지혜,
그게 원만보신이에요. 그게 보답에 의해서 얻어진 몸이죠.
그럼 거기에는 무한한 변화를 해요. 변화신이죠.
사람에게 똑같은 게 있어요.
우리 지혜 자체가 있는데 그게 법신이죠.
그럼 우리가 이 몸을 받고 전생에도 몸을 받아서 부단히 경험을 하고 닦음이 있는데,
그 경험과 닦은 만큼 자기가 스스로 얻어서 이룩한 지혜가 있어요.
그걸 보답으로 얻어진 몸이라고 그래서 보신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그 보신은 변화를 해요.
무한히 변화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참 보신이 변화를 하면 그게 화신이 되거든요.
이 화신으로서 무단히 변화를 하니까 믿으면 안 돼요.
(화신불_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변화하여 나타나는 부처)
내 지혜는 저분이 얼마 안 있으면 돌아간신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문병을 가서는 절대로 안 돌아가신다 이래요.
오래오래 사셔서 통도사도 가고 뭐 어디도 가고 전부다 하셔야죠, 이래요.
심지어는 아들도 그러고요, 아들 말도 들으면 안 돼요.
심지어는 부인도 그래요.
남편이 내일모래 죽을 거 뻔히 알면서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오래 사신다고, 거짓말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왜 거짓말 하느냐고 말도 못하고 나도 따라서 거짓말 하고 나왔거던. ㅎㅎ
그게 변화신입니다. 변화신.
그런데 이걸 부처님으로 보면
변화신은 석가모니불이고, 원만보신은 노사나불이고, 청정법신은 비로자나불인데,
이 삼불이 원융한 거예요. 원융해.
하나가 있으면 다른 둘이 따라와요.
삼불원융이 부처님 세계죠.
변화신 속에는 원만신이 있고, 청정신이 있는 거예요.
우리 지금 말하고 하는 이거 변화신이거든요.
이 안에 지혜가 있어요. 그 밑에 자성이 있어요.
자성신, 지혜신, 변화신. 이렇게 항상 같이 다녀요.
부처님 세계, 삼신을 넓히면 십신이 되는데요,
이런 얘기는 들어도 잘 기억도 안 되고 그러니까 어렵다고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어렵다라고 느끼는 게 중요한 법문이에요.
그럼 십신은
국토신, 중생신, 업보신, 성문신, 연각신, 보살신, 여래신, 지신, 법신, 허공신
이게 십신이에요.
여래의 지혜에는 허공이 그대로 여래의 지혜에서 나타난 그림자예요.
국토도 여래지혜에서 나타난 그림자이고, 중생도 여래 지혜에서 나타난 그림자이고.
이게 십신무애거든요.
그래서 이거 저.. 불공 올릴 때, 예참에
중생국토업보신, 성문연각보살신, 여래지신여법신, 허공신, 이렇게 외우면서 맞이 올리는 거예요.
그게 십신무애입니다.
허공신, 중생신, 국토신, 업보신, 그게 다 여래의 지혜에서 나타난 몸이죠.
그리고 또 십불세계가 있어요.
(십불_보살의 수행이 완성된 부처의 경계를 가리키는 것)
십불이 보현이라, 법성게에 보면 십불 보현 대인경 그래요.
(십불보현대인경_화엄경의 보현행원품 보현보살 십대 실천 원력은
큰 사람의 마음 경지로 삼라만상을 부처로 보고 실천함으로)
대인경, 큰 사람의 경계, 경계는 세계죠.
십불 보현, 십불이 보현이에요.
십불은 항상 널리널리 어딘 대상이거든요. 어진 존재에요. 그래서 보현이라고 그래요.
십불은 하는 일이 보현인데, 보현이 화엄이에요.
많은 공덕으로 장엄을 해서 일체 덕용을 성취하는 게 보현이고 화엄이거든요.
그래서 십불은 보현인 거에요.
이게 부처님이 머무는데에요.
십불은 성정각불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정각을 이루는 부처님, 법계불, 삼매불, 수락불,
수락이라는 게 중상이 즐거워하는 것을 항상 따라서 나타난다, 뭐 이런 게 십불이거든요.
십불세계에는 우리나라 불교가 화엄불교이기 때문에
맞이 올릴 때, 부처님께 공양올릴 때, 화엄의식으로 하는게 화엄대예참이라고 그래요. 대예참.
대예참 첫머리에 어떤 송이 나오느냐 하면
초명안첩기황주라는 말이 있어요.
초명_ 벌레 초, 벌래 명, 벌레 중에 제일 작은 벌레를 초명이라 그래요.
안첩_ 눈 안, 눈썹 첩, 제일 작은 벌레에 눈썹도 겉눈썹이 아니고 속눈썹
그 속눈썹 첩자가 있어요. 속눈썹.
초명이라는 건, 전설상의 벌레라고도 해석을 해요.
눈으로 본적은 없고 전설상의 벌레, 그렇게 작은 벌레의 속눈썹에
기황주라, 임금 황, 고을 주
이 세상에서 제일 큰 나라를 황주라고 그래요. 황주를 세운다. 초명안첨기황주.
옥황제후차제투
아주 훌륭한 여러 왕들이 제후는 여러나라의 왕을 제후라고 그러거든요.
여러나라의 왕들이 차례차례로 와서 복종을 해요. 이걸 차제투,
이게 화엄이에요.
천자임헌론토광
그 세운 나라의 천자가 궁중에 떡 임해서 국토가 한없이 넓은 토광이라,
국토의 광대함을 논하는 거예요.
태허유시일부구
거기에 비하면 그 넓고 넓은 태허공이 하나의 조그마한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게송으로 불공을 올리는 그게 한국불교 화엄신앙입니다.
그냥 하는 거예요. 그냥. 외우는 거예요.
그런데 왜 그렇게 편안하게 외우냐?
잘 모르니까 편안하게 외우는 거예요.
만약 그걸 전부 알았다면 야단 날거예요. 어째 이런 일이 있냐고...
그런데 그게 지혜에는 십신이 무애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럼 무애이기 때문에 미진이 시방이요, 시방이 미진이요.
또 일념이 원겁이요, 원겁이 일념이라.
일념이라는 건 일찰나인데, 찰나 념, 생각 념.
일차가 원겁, 한없이 먼 무량겁이다.
이게 전부 지혜에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래서 이거를 화엄학에서는 총상이라고 그래요. 총상(모든 것에 두루 통하는 성질)
지혜 총상에 나타난 일념이고
총상일진이요, 총상시방이요.
총상일념이요, 총상원겁이라.
그 해인삼매, 총상에서 나타난 시방이고, 미진이고, 일념이고, 원겁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게 화엄학이에요.
그전에 경봉노스님은 법문할 때 맨날 그날 쓰셨는데
법사가 청중을 쫙 보면, 그 많은 대중이 한 눈에 다 들어온다 이거예요.
한눈에 다 들어온다 이거예요.
그러면 이 많은 대중이 한 눈에 들어오는데
여기 보이는 사람이 내 마음에 있느냐? 저기 보이는 사람이 내 마음에 있느냐?
모두가 한 마음에 다 있거든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다 총상속에 다 들어오는 거죠.
한 마음 전체 속에.
그리고 청중도 법단을 향해서 보면
뒤에서부터 모든 게 다 한눈에 다 들어가요.
그러면 요쪽에 보이는 것이 나냐? 저쪽에 보이는 것이 나냐?
그게 아니오.
전체가 한마음에 다 들어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 속에 전부가 다 있는 거죠.
그게 일미진중이 함시방이에요.
한 미진 속에 시방을 다 포함한다.
그런데 이런 거를 신라시대 의상스님은 재미있는 비유로 말씀을 하셨는데
어떤 사람이 꿈에 10대를 꿈을 꿔요.
10대가 뭐냐? 나로부터 상5대가 있고, 나로부터 하5대가 있거든요.
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 이게 상 5대 아니오?
나, 아들, 손자, 증손자, 고손자. 이게 후5대 아니오.
나를 중심으로 해서 위로 5대, 고조까지. 아래로 5대 고손까지.
이 사람들이 한꺼번에 다 있는 거예요. 한꺼번에.
그러면 꿈에 이렇게 볼 때, 낱낱이 보면 저 아래로 고손하고 위로 고조하고 전혀 틀리잖아요.
또 나하고 아들하고 틀리고, 나하고 아버지하고 틀리고. 할아버지 증조부하고 다 틀리고.
그런데 이분이 딱 하나 같은 게 있어요.
그 아래로 5대, 위로 5대, 대수는 조손이 다 틀리는데.
할아버지 손자가 다 틀리는데 하나 딱 같은 게 있거든요. 그게 뭐냐? 뭘까요?
고조든 고손이든 누구든, 다 자기 꿈에서 나타났다 이거예요.
고조도 자기 꿈에 나타난 거고, 고손도 자기 꿈에 나타난 거고, 증조도 그렇고 증손도 그렇고 자기도 그렇고
전부 하나의 꿈에 위로는 고조까지 아래로는 고손까지 다 나타난 거예요.
꿈인 것만은 똑같아요.
낱낱이 다 틀리죠.
그런데 전부 하나의 꿈에서 나온 것만은 똑같아요.
고조도 하나의 꿈에서 나왔고,
고조라고 그래서 그 꿈이 더 많은 것도 아니고요.
고손이라고 그래서 꿈이 적은 것도 아니고
하나의 꿈에서 십대가 다 나타난 거예요.
이거 뭔 말 하려고 이렇게 하나.
이런 것을 화엄이라고 그래요.
하나의 꿈에서 다 나타난 거지. 꿈 떠나서 고조가 없다 이거죠.
그러면 이 세상 무량겁이든, 일찰나든, 하나의 지혜에서 다 나타난 것에요.
그래서 여래십신이에요. 그게 지혜신이고요, 그게 보리신이고, 자성신이고 그런 거예요.
시방허공도 지혜에서 나타났고 일미진도 지혜에서 나타났으니까
미진지혜나 허공지혜가 조금도 다른 게 아니고 전부 총상지혜 하나뿐인 거예요.
이런 철학이나 이런 가르침은 또 이런 인생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스님법문 > 종범스님_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범스님] 57. 죽음에 죽음이 없고 태어남에 태어남이 없다 #깨달음의길 (0) | 2021.12.06 |
---|---|
[종범스님] 56. 생사 없는 세계 #깨달음의길 (0) | 2021.11.30 |
[종범스님] 55. 시간은 지혜 바다에 비친 그림자다 #깨달음의길 (0) | 2021.11.23 |
[종범스님] 54. '화엄경'이 무슨 경인가? #깨달음의길 (0) | 2021.11.22 |
[종범스님] 53. '화엄'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깨달음의길 (0) | 2021.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