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 전통에는 3가지가 있어요.
문증, 이 글을 통해서 정득해 들어가는 방법이 있어요.
이것이 중국의 근본 화엄입니다.
의상스님이 공부했던 그 지엄선사가 있는데, 지엄, 또 중국의 법장, 또 청량,
이런 분들이 대표적인데
이런 분들은 엄청난 화엄저술을 남겨서
저술이 그냥 학문을 하기 위해서 한 게 아니라
그 화엄삼매, 그 지혜의 세계를 증득하는 방법, 그게 저술이죠.
그래서 이것은 문증이에요.
글을 통해서 증득해 들어가는 거.
증득이라는 건 체험한다 이 말이오.
무한한 허공과 무한한 천지가 내 지혜의 그림자다. 이거예요.
허공과 대지가 자체가 없어요. 자성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있어도 있는 자성이 없고, 없어도 없는 자성이 없고
(자성_모든 존재가 지니고 있는 변하지 않는 존재성을 이른다)
그래서 자성이 없다는 말은 이런 거예요.
그것에 그것이 없다.
요거 잘 들어놓으면 중요해요.
그것에 그것이 없다.
그러니까 물에 물이 없는 거예요.
물을 가만히 조사해보면 물이라는 자체가 없어요.
그런데 그냥 물이에요.
그릇에 그릇이 없어요.
나무에 나무가 없고
사람에 사람이 없고,
죽음에 죽음이 없는 거예요.
이게 화엄삼매인 거죠.
죽음이 있는 것처럼 미혹하니까 ‘나 죽네, 살려주세요’ 이런 거예요.
지혜로 깊이 들어가면, 죽음에 죽음이 없는 걸 딱 보면 자제하는 거죠.
그래서 세간만 알고 법계를 모른다.
법계라는 것은 그 지혜의 실체, 진여, 법성, 이런 거예요.
세간이라는 건 언제 생겼고, 누가 만들었고, 용도는 뭐고, 이게 세간이거든요.
이 몸이라는 것은 세간인데
이걸 자세히 보면 법계에요.
몸에 몸이 없는 거예요.
요거 하나 몰라서 고생하는 거예요.
사랑에 사랑이 없고,
사랑보다 더 좋은 게 오랑이라면 오랑에 오랑이 없는 거죠.
오랑이라는 말 들어보셨어요? ㅎㅎ
사랑보다 더 낮은 건 삼랑인데, 삼랑에 삼랑이 없는 거예요. ㅎㅎ
말로는 사랑 때문에 못 살겠네 해도, 자세히 들어가면 사랑에 사랑이 없어요.
뭐가 사랑이냐? 실체가 없는 건데, 그런다고.
뭐가 죽음이냐?
죽음에 죽음이 없고, 태어남에 태어남이 없고
이게 자성이 없다는 말이에요.
그래서 뭐든지 법계실상으로 들어가면 그게 무상법이에요.
형상없는 법이다. 이런 말이죠.
(무상_일체의 사물은 실체가 없어 공하며, 따라서 분별되는 모습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저술을 통해서 화엄을 하면
그런 저술을 통해서 이런 실상에 들어가는데 그게 문증화엄입니다.
문으로 증득할 증, 들어갈 입, 증입이라고 그러거든요.
증득해 들어가는 거예요. 문증입.
문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건.
또 중국에 법장이나 청량 말고, 통연장자라는 분이 있어요.
그분이 화엄경 신론 40권을 지었는데. 그분은 다른 저술 같은 거 전혀 중요시 안 해요.
딱 그걸 믿는 마음, 믿을 신, 신을 중요시해요.
신으로 증입을 해요. 화엄세계에.
신이 뭐냐?
우리 중생이 바로 진여이고, 중생이 바로 지혜이고, 중생이 바로 법계다.
그 중생은 뭐냐? 무명이다. 어리석은 거.
그 어리석은 그 자체가 법계이고, 그게 지혜이고, 그게 자성이지 그거 떠나서 없다
바로 이런 신심을 통해서 그 화엄법계에 들어가요.
그걸 신으로 증입한다고 그러죠. 증입.
우리나라 의상스님 같은 경우에는 행으로 증입 해요. 실행을 통해서. 실행.
의상스님의 제자 중요한 분이 지통법사라고 있는데. 지통. 지혜 지, 통할 통.
(지통_7세에 출가하여 영취산의 낭지법사에게 나가 제자가 되었다가 다시 의상의 문하에 들어갔다. 원효가 반고사에 있을 때, 찾아가서 가르침을 받고 <초장관문>과 <안신사심론>을 지었다고 한다.)
그 지통이라는 분이 태백산 토굴에 가서 화엄삼매를 닦는데
화엄경에 보면 부처님의 몸이 시방에 두루하고, 지혜가 온 삼세에 깊이 들어가고
이런 걸 듣고 그냥 말면 못 들어가거든요.
부처님의 이 지혜의 몸이 허공신도 되고, 중생계도 되고 다 되면 어째서 그런가?
깊이 들어가면 화엄삼매거든요.
이 화엄삼매를 깊이 깊이 닦는데, 한번은 지통스님 앞에 멧돼지가 지나갔어요.
멧돼지가 지나는 걸 딱 보는 순간에 깨달음이 왔는데요, 뭔 깨달음이냐?
저 멧돼지가 전생의 나의 몸이고, 또 당신 토굴에는 목조상이 있었어요.
나무로 불상을 조성해서 모셨는데,
저 나무불상 조각은 내생의 나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요게 구세십세호상즉이라는 게 바로 그거에요.
호상즉,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서로 함께 딱 연결되는 거죠.
삼세인과로 보면
멧돼지는 나의 전생이고, 나의 사람 몸은 나의 금생이고, 뒤에 모신 불상은 나의 후생이고, 요게 삼생인과에요.
(삼세인과_과거의 인에 의하여 현재의 과를 받고, 현재의 인에 의해서 미래의 과를 받는 것을 이른다)
그런데 화엄은 원만인과이기 때문에 같이 통하는 거예요.
내가 바로 전생의 맷돼지이고, 내가 바로 내생의 불상이다.
이게 같이 돌아가는 거지, 같이.
그것을 딱 깨닫고 의상 스님한테 갔어요. 그리고 얘기를 했어요.
의상스님이 이 사람은 화엄세계에 들어가는 그릇을 이루었다. 화엄법계에 들어가는 그릇이 만들어졌다 이래서
의상스님이 지은 법성해인도, 그걸 딱 주고 인가를 하고
그래서 십대 제자에 아주 으뜸가는 제자가 되었거든요.
(해인도_ 의상대사가 당나라 유학시절 화엄사상을 요약한 210자, 7언 30구의 게송을 만자로 발전시킨 도안에 써 넣은 것)
신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행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전부 다 필요한 거죠.
모든 사람을 위해서는 화엄의 기록이 굉장히 필요한 거죠.
문으로 들어가는 거죠.
그리고 믿음이 있어야 해요.
그리고 믿음 위에는 바로 행동으로 들어가야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 의상스님 계통의 법문을 보면 그런 거예요.
정각이 뭐냐?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밑에서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러잖아요.
그러면 정각이 뭐냐 그러면
이 의상스님 화엄학에서는 절대 어려운 말을 하지 않아요.
내 몸이 바로 정각이다. 이렇게 가르쳐요. 내 몸.
너의 몸이 바로 정각이다, 이렇게 가르쳐요.
법성이 어떻고 이런 게 아니에요. 바로 행으로 바로 그냥..
그 실행을 통해서 바로 화엄세계에 들어가도록 가르치는 거예요.
그러면 “생사가 뭐냐” 그러면
“네 몸이 바로 생사다.”
이 몸이 생사인 거예요.
“열반이 뭐냐” 그러면
“네 몸이 바로 열반이다” 이렇게 가르쳐요.
아, 이거 참..
이 몸이 정각이요, 이 몸이 열반이요, 이 몸이 생사다 이 말이오.
그럼 그 말을 듣고 바로 들어가는 거예요.
이게 신라화엄입니다.
많은 저술한다고 한평생 보내는 게 아니고요.
믿을 신 자 하나 가지고 그렇게 매달리는 게 아니고
바로, 눈앞에서, 멧돼지 지나가는 거 보고
멧돼지가 바로 전생의 나이고, 금생의 멧돼지가 금생의 나이고, 또 멧돼지가 내생의 불상이고,
삼세가 일념이고, 일찰나다 이거지.
삼세가 더 벌어지면 구세가 되는 거고,
구세에 항상 한 생각이 있으니까 그게 십세가 되어서
구세십세가 전부 하나의 지혜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래로 고손하고 위로 고조가 다른 게 아니듯이
시방과 가는 티끌이 다른 게 아니듯이
이게 화엄인 거거든요.
이런 세계에 머무는 것을 부처님의 머무는데 머문다 이래요.
이런 것은 보통 사람이 잘 말할 수가 없다.
이래서 얘기를 쭉 해나가는데요.
여기 보면 일체 부처님들이 법을 설하는데,
법을 설하는 데는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중생은 그러면 어디에 빠져 있느냐?
번뇌에 빠져 있거든요.
번뇌는 뭐냐?
자기가 바로 정각이고, 자기가 열반이고
그런데 그걸 모르고, 요 죽고 사는데 빠져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항상 좋은 것을 구하다가 죽는 그게 번뇌거든요.
실체를 모르고 구하기만 한다. 그게 번뇌죠.
그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설법한 것이 부처님의 설법이니까
부처님께서도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법을 설해주십시오.
어떤 법을 설하느냐?
일체 모든 부처님이 다 그렇게 한 것처럼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이런 법을 낱낱이 설해주십시오.
이렇게 요청을 해요.
그런 요청을 다 보고 부처님이 신통을 일으키는데
거기에 신통을 일으키고 나니까
전 시방세계에서 보살이 몰려들어요.
그런데 그 보살 중에는 문수보살이 으뜸이에요.
문수보살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설법하는 것이 여래명호품이고
여래명호품의 설주는 문수보살이에요.
그러면 이게 뭔소리냐?
화엄경은 부처님은 그 근본이고, 그 부처님을 대신해서 보살이 법을 설해요.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서.
그래서 설주가 문수거든요.
그러면 뭔 법을 설하는가? 몇 구절만 새겨볼게요.
이거 법문하려면 천지로 많은데,
안 세기고 내려가기도 그렇고, 세기려니 제대로 되지도 않고.. 허..
불자야 여래가 어차사천하 중에서
혹은 일체의성이라고 하며 혹은 원만월이라 하며
혹은 사자후라 하며 혹은 석가모니라 하며
혹은 제칠선이라 하며 혹은 비로자나라 하며
혹은 구담씨라 하며 혹은 대사문이라 하며
혹은 최승이라 하며 혹은 도사라하나니라
이와 같은 등 그 수가 십천이니
모든 중생으로 하여 금각각 알고 보게 하나니라.
나무아미타불~
여래는 지혜가 원만하니까 신통이 원만하고
또 여러 가지 원력이 원만해서
중생에게 한량없는 몸을 자재롭게 나타나는데
자재가 화엄삼매에요.
자재를 화엄삼매라 그러고 나타내는 시현을 해인삼매라 하거든요.
나타내는 모습이 무궁무진하니까 그 모습 하나하나에 따라서 명칭이 한량없어요.
그래서 일체 세 간 명칭이 다 여래 명칭이 되는 거예요.
이게 화엄경 여래에요.
그래서 이 여래명호품은 부처님의 신업,
몸의 세계를 나타내는 거거든요.
부처님의 몸이 아주 여러 가지로 다양해요.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기도 하고,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여자도 되고 남자도 되고
몸이 다양하니까 명칭이 다양하다.
이게 여래명호입니다.
그래서 여래의 신업이 불가사의하다, 이거구요.
사성제는 구업이 불가사의한 거예요.
사성제는 설법인데, 설법이 세계세계에 따라서 한없이 다양하게 펼쳐지거든요.
사바세계의 고승제를 어느 세계에서는 뭐라고 하고, 어느 세계는 뭐라고 한다.
또 그다음 세계에서는 뭐라고 하고.
그러면 일체 세상의 언어가 다 여래의 언어다.
이것이 사성제입니다.
그래서 사성제는 여래의 구업을 말로써 설법하는 내용을 말하는 것이고
여래명호품은 여래의 신업을 말한다. 이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왜 이렇게 보이고 말을 하느냐?
중생이 법계를 모르고, 형상에 매여서 그렇거든요.
법계를 모르고 형상에 매인다.
그래서 고가 나오는 거예요.
우리 모든 고통은 형상에서부터 와요.
보이는 데서. 들리는 데서.
보이고 들리는 게 보이는 데 보이는 것이 없다. 이걸 알면 무상법을 통달한 건데
보이는 데 보이는 것이 없다.
들리는 데 들리는 것이 없다.
이걸 모르고, 보이는 형상, 들리는 소리에 매여서
더 좋은 소리 들으려고, 한마디 칭찬해 주면 더 들으려고 정말이냐고 또 물어요.
아주 미치겠어요.
예쁘다 그러면 그 말 한마디로 만족해야 하는데 또 듣고 싶어서
‘정말 예뻐요?’
짜증 나지, 그러면.
그게 중생이에요.
끊임없이 더 구한단 말이에요. 끊임없이.
형상에 미해서 괴로움을 받거든요.
그래서 뭔 고통이 나오느냐 하면 형상에 형상에 쫓아가니까
있는 걸 몰라요. 자기에게 있는 걸 몰라.
나에게 몸도 있고, 머리도 있고, 뭐도 있고 많이 있는데
있는 걸 모르는 거예요.
있는 걸 모르는 걸 노이로제라고 그럽니다.
나한테 있는 걸 찾아보면 굉장히 많은데, 그 있는 걸 하나도 몰라요.
이 노이로제라는 게 있는 거 모르는 거예요.
그다음에 없는 것만, 없는 것만 구해요.
그걸 스트레스라고 그래요.
스트레스는 없는 거 구하는 게 스트레스에요.
어떤 분이 나이가 80인데, 지금도 떨린데, 밖에 대중 앞에 나가서 얘기하려면.
왜 떨리나?
지금도 구하는 게 많은 거예요. 더 예뻐 보이고 싶어서.
그 나이에 예뻐서 뭐 하려는지, 기가 막혀..
60대는 60대 대로 떨렸고, 70대는 70대 대로 떨렸고 80이 되도 떨린데요.
지금까지 사랑받고 인정받았던 건 전혀 몰라요.
그게 노이로제거든.
계속 더 받으려는 그게 스트레스에요.
구하지 아니하면 스트레스가 없어요.
나에게 있는 거, 그냥 만족하게 느끼면 노이로제 없어요.
이게 미혹한 거거든요.
전부 보면 있는 거 모르고, 없는 것만 구하는 거.
이게 노이로제 스트레스인데
그게 말하자면 화병이고, 그게 가슴앓이요.
옛날에 우리 할머니도 보면
그냥 할아버지한테 못 받은 것만 생각하더라고.
그런데 아니, 아들 낳고, 손자 낳고 한 거 보면 받는 게 있기 때문에 낳았지.
어떻게 하나도 받은 거 없이 아들을 낳았겠냐고. ㅎㅎ
그런, 참 기가 막혀요.
내가 아는데 왜 할머니는 모르냐 이 말이오. 내가 아는데.
우리 아버지 낳은 거 보면, 할아버지한테 받은 게 있으니까 낳았지.
그런데 그 받은 건 몰라요.
그리고 없는 거 더 받으려고만 생각해요. 자꾸 더 받으려고.
더 받으려는 이게 스트레스에요.
그럼 얼마를 더 받아야 멈추냐?
멈추지 않아요.
항상 없는 것만 구하니까.
그 중생의 병은 어떤 약을 써도 못 고쳐요.
있는 거 모르는 노이로제병
없는 것만 구하는 스트레스병은
어떤 약을 써도 못 고쳐요.
그럼 어떻게 구하냐?
“나에게 없는 게 뭔가?”
이걸 돌아보는 데서 이 병이 고쳐져요.
나에게 과연 뭐가 없나?
없는 거 구하지 말고, 나에게 뭐가 없는지를 먼저 보면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나중에 보면.
나에게 부족한 것이 뭐가 있나?
이거부터 보면 돼요.
나에게 과연 구할 것이 있는가?
없어요. 보면.
그래서 항상 선지식의 법문이 뭘 구하라고 한 게 아니라
너에게 없는 게 뭐냐? 이걸 물었어요.
나에게 뭐가 없는데?
다 있고
내가 뭘 안 받았는데?
다 받았어요.
그런데 받은 거 모르고 없는 것만 구하는 거예요.
아, 이걸 오늘 깨달으면 아주 편안하게 오늘 저녁부터 잘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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