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부처의 세계는 뭐냐?
도량이라고 하면 부처님이 항상 계신다라고 해서 도량이라고 그러거든요.
통도사다 그러면, 통도사 전체가 도량 아닙니까?
그럼 통도사에 어떤 부처님이 계시는가?
중생들이 잘 못 느끼니까
집을 지어놓고, 그 집이 불전이라고 그래서 부처님이 계시는 전각이다, 이 말이죠.
전각, 불전이라고 그러거든요. 부처님의 전각이다.
그래서 그 전각을 지어놓고 이름을 붙이잖아요. 극락전,
아미타불이 계시는 곳이다, 이거에요. 극락전
뒤에 가면 대광명전, 비로자나불이에요.
대광명, 대광은 적광이라.
이 대라는 건요, 고요한 대이기 때문에 양변이 없어요. 양변.
이쪽 저쪽 끝이 없어요. 가도 가도 끝이 없어요.
또 시종이 없어요. 언제 대가 시작되었는지, 언제 대가 끝나는지
그래서 그걸 대라고 그럽니다.
시작을 헤아릴 수 없고, 종말을 헤아릴 수가 없다.
또 양변이 없다. 저쪽끝과 이쪽끝이 양변인데 이것을 헤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게 시작과 끝을 생각하면서 사는게 우리 인간이고
이쪽과 저쪽을 생각하면서 사는게 이게 인간인데
이거는 완전히 의식놀음이에요.
생각 속에만 있는 거고, 부처님의 정각 속에는 없어요.
그래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에서 정각으로 들어가는 거거든요.
삶과 죽음이 전부 생각이에요. 삶과 죽음이.
좋다 나쁜게 전부 생각이고요.
그러면 그 생각이 정각하고 동떨어졌느냐? 동떨어지지는 않았어요.
않았는데, 자기 방에서 나그네 꿈을 꾸는 것처럼
꿈꾸는 거와 같은 게 생각인 거죠.
자기 집에 가만히 누웠는데, 꿈을 꿨어요.
그러면 나그네가 돼요. 자기 집인 줄 모르고, 그게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머니 나 죽겠다고 살려달라 그러고, 밉다고 그러고, 좋다고 그러고
그거 다 좋은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게 죽겠다, 좋다, 밉다 하는 그게 생각에서 나온 거예요.
생각이 바뀌면 죽겠다고 안하고요,
생각이 바뀌면 밉다고 안하고,
생각이 바뀌면 좋다고 안 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그 생각 보고 따라갔다간 큰코다치는 수가 있어요.
오늘 생각하고 내일 생각하고 틀릴 수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간판을 전부 걸어서 대광명전이다, 대웅전이다, 금강계단이다, 대방광이다.
이 대방광이 대방광불이거든요, 적멸보궁이다.
이런 게 전부가 일각적조, 한 깨달음의 고요한 비침에서 나타나는 일이에요. 일각적조.
그러면 그 일각적조가 어디 있느냐?
도량으로 장엄을 해 놓은 거고, 전부가 우리 몸, 우리 생각에서 벗어난 게 아니에요.
화엄경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이 생각, 우리 이 몸을 가지고
대광명의 세계를 바로 알고, 대웅의 세계를 바로 알고, 금강계단의 세계를 바로 아는 것
극락의 세계를 바로 아는 것, 해탈의 세계를 바로 아는 것,
이것이 화엄입니다. 화엄.
그래서 오늘 이걸 다 설명할 수는 없을 거 같아서
게송을 하나 지어왔어요.
게송을 하나 하고, 얘기 조금 하고 마치려고 으흠... ㅎㅎ
그전에는 게송을 더러 잘 읊었는데 요새는 힘이 빠져서 잘 안 돼요. ㅎㅎ
배가 땅기고 이래서 ㅎㅎ 잘 안 돼요. ㅎㅎ
...
안이비설 명색신이니
대방광불 화엄전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원교보물을 선수지하면
십보를 보현이니 항출현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오랜만에 해 봤네요, 오랜만에 해봤어. ㅎㅎ
안이비설명색신이 우리 몸을 가지고 있는데요, 눈귀코혀
명은 수상행식 생각이거든요.
색은 사지육신 이걸 색이라고 그러고
그래서 우리 몸, 이 전체가 명색신이
대방광불 화엄전이다,
대방광불이 있는데 대방광불이 어떤 부처인고 하니
화엄경에 십불세계가 있고요, 대방광부처의 몸이 십신이 있어요.
보통 대승불교에서는 삼신을 말하는데, 화엄경에서는 십신을 말해요.
그러면 화엄경 십신은 어떤 몸인가?
중생신, 중생신이 대방광불의 몸이에요.
대방광불의 몸은 온 일체중생의 몸, 그게 부처님 몸이에요. 하아 이거 참...
내 몸이 그대로가 부처님 몸이에요. 중생신.
국토신, 온 국토의 몸이 그게 대방광불의 몸이에요.
그래서 화엄경의 부처는 대방광불이다. 그럼 대방광불이 어떤가?
중생신, 국토신, 그다음에 업보신, 선업 지어서 선보 받고, 악업 지어서 악보 받는 업보신
성문신, 계속 출가해서 도 닦는 성문신
연각신, 인연법을 보고 깨닫는 연각신,
보살신, 성문연각 보살신이죠.
여래신, 부처님 몸.
지혜신, 지신.
아주 근본 법인 부처님 몸은 법신
허공신.
이게 부처님의 십신인데 이게 대방광불이에요. 대방광불.
이런 몸이 전부가 부처님 몸이다.
그런데 우리 몸에 이게 다 있는 거예요.
대방광불화엄전이다. 우리 몸이 화엄전이에요.
여기에 온갖 것이 다 있어요.
대웅신도 있고, 약사신도 있고, 극락신도 있고, 적멸신도 있고, 금강신도 있고, 화엄전이에요, 그대로 안이비신설명색신이.
그럼 이걸 어떻게 해야 하냐?
화엄경 80권이 원교인데, 이 원교라는 것은
일구가 무진장설법이 다 있고, 무진장설법이 일구에 다 있고, 이게 원교에요.
일미진에 한 티끌에 시방세계가 다 있고, 시방세계가 한 티끌에 있고.
이걸 원융이라고 그러거든. 원용.
그 원융의 가르침을 펴는 것이 원교입니다.
그러니까 오전에 보고 안녕하세요 그러면
그 오전 오후, 이 사이에 무량억겁이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 왜 오전에 봤는데 절하나? 그러는데
그건 생각이에요. 그건 정각이 아니고 생각이다.
정각으로 볼 때는 일찰나가 무량겁인 거예요.
생각으로 볼 때는 일찰나는 일찰나이고 오랜 시간은 오랜 시간이고
이렇게 양변과 시종을 가르는 것은 생각이고요
양변과 시종이 없이 찰나가 영겁이고 영겁이 찰나인 것은 정각이에요
화엄경은 그걸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가르침을 펴기 때문에 원교보문이라 그런다.
원교, 원만한 가르침, 보배로운 문장이다.
이걸 선수지하면, 잘 받아서 간직하면, 착할 선, 수지독송이라고 하는 받을 수, 간직할지.
그럼 어떻게 하는게 선수지하는 건가?
경에는요, 경을 보고 마음을 보고, 관문관심,
첫째 딱 펴면 글자를 봐요, 이게 관문이에요, 볼 관, 글 문, 글자가 보일 거 아니에요.
거기서 끝나면 선수지가 안 돼요.
그다음에 마음을 보는 거예요. 관심, 그게 선수지에요.
이 경을 통해서 마음을 본다 이거죠.
아, 이거 뭔 얘기인지.. 또 참.. ㅎㅎ
경으로 시작해서 마음을 본다 이거예요. 경으로 시작해서.
예를 들면 경봉 큰스님께서 화엄경을 보시다가
종일수타보 자무반전분, 종일토록 다른 사람의 보물을 세는 것이 나한테 반푼어치 값도 안 나간다.
여기서 탁해서 발심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셨다, 이거에요.
이런 게 선수지에요.
글을 외우는데 멈추지 않고 마음을 꿰뚫어 본다 이거죠. 이거거든요.
그러면 왜 그러냐?
우리 몸, 이게 전부가 대방광불화엄전이기 때문에
여기 마음을 챙기면 일미진중이 함시방이고, 일찰나가 무량억겁이고
바로 경을 펴는 동시에 마음을 봐서 바로 성불할 수 있는 거거든요.
선수지 하면 십불보현이 항출현이라,
화엄경에 십불세계가 있어요.
이세간품에 가면 정각불도 있고, 원불도 있고, 업보불도 있고, 주지불도 있고 아, 이름 많네,
열반불, 법계불, 온 법계가 부처님이 그게 대방광불이거든요.
마음불, 심불, 삼매불, 본성불, 수락불, 중생 그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서 나타나는 게 수락불이에요
십불세계가 대방광불인데요,
그 십불세계가 하는 일이 보현공덕행이에요.
그 십불보현이 항상 출현한다. 그 말을 떡~ 하고
전부 다 할 수는 없으니까 게송을 하나 지어서 한번 하고
웬만한 얘기는 다 줄이고 와야 하겠다 그랬는데, 진짜 생각대로 됐어요.
시간은 다 갔는데 별로 말은 못하고.. 됐거든요.
그러니까 화엄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바로 말했다는 거예요.
시작부터가 정각으로부터 시작되요. 바로 말했다는 거고
화엄경은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다 있다. 하나 속에.
그래서 그 깨달음의 세계를 의상스님은 법성이라고 했거든요. 법성. 법의 본성,
그 법성이라고 하는 이 물건은 원융해요.
원융이라고 하는 것은 둘이 없는 거예요. 무이상이라.
그러면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중도이고, 거기에 도달하는 것을 실제라고 그래요.
궁좌실제중도상, 실제중도상이 법성원융에 도달하는 거예요.
그러면 억만 번을 꿈도 꾸고, 태어나기도 하고, 죽기도 했는데,
그 법성원융무이상 자리에서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은 거예요.
구례부동,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한 걸 아는 것이 부처다, 구례부동명위불이라.
그래서 법성게를 보면 화엄의 이치를 설명한 건데
첫 번째 게송이 법성원융무이상이고, 마지막이 궁좌실제중도상 구례부동명위불,
딱 끝나거든요.
이걸 도표로 보면 불 자하고 법 자하고 맞물려 있어요. 복판에. 딱 들어있어요.
그래서 화엄경이 어렵다고 그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쉽게 만들어놨어요.
약찬게를 쪽 외우면 화엄경의 구성체계가 고대로 드러나고
법성게를 쪽 외우면 화엄경의 내용이 고대로 드러나요.
그건 참고로 법문을 듣고,
실제로는 약찬게 외우고, 법성게 외우면
법성게에서는 화엄의 이치가 눈앞에 무슨 유리알처럼 다 보이고
법성게 외우면 화엄의 체계가 고대로 다 보인다,
이게 옛날 선지식들이 가르쳐준 화엄체계 거든요. 이것이.
그렇게 되어서 이걸 자꾸 수지독송하면
글 읽는 게 아니에요. 절대로 글을 읽는 게 아니에요.
관경은 관심이다, 경을 보는 것은 마음을 보는 것이다.
마음을 보면 어떻게 되냐?
법성원융무이상이 그대로 다 나타나는 거죠.
구례부동명위불이 그대로 나타나고, 구세십세가 호상즉이라.
이게 말이 아니고 그대로 마음이기 때문에 눈에 보일 때가 와요.
그래서 인생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일미진중이 함시방이라, 한 미진 속에 시방이 다 있다.
무량원겁이 즉일념이라, 한 일찰나에 무량원겁이 다 있다.
이걸 깨달을 때 인생문제가 다 해결이 돼요.
그러니까 오늘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닦는 일이다, 마음 공부
이게 아주 심각한 거예요.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을 닦는 일이다.
그래서 무엇을 가지고도 어디에 가도 늘, 자력행복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자력행복,
자기 힘으로 행복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해요.
그런데 자력행복을 못 얻으니까
뭘 잘 보여서 행복하려고 그러고
많이 가져서 행복하려고 그러고
누구 이겨서 행복하려고 그러고
힘만 들지, 만날 나의 행복은 산 너머의 뜬구름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몸이 대방광불이 늘 화엄행을 닦는 궁전이다, 이렇게 딱 보고
내가 내 마음을 잘 닦아서 이 생노병사가 다 공함을 믿고
그 죽음을 무서워할 게 아니라
“죽음을 무서워하는 내 마음이 뭔가?”
죽음이란 없는 건데 내가 생각으로 무서워하는 거거든요.
생각으로 무서워하는데 그 생각을 돌아봐 버리면 끝나요.
그래서 옛날 큰 스님들이 살려달라고 소리치면요, 2가지 가르침을 딱 준 거예요.
하나는 반야심경 읽어라.
하나는 화두 들어라, 이거예요.
그전에 경봉큰스님은 어떤 젊은 스님이 큰절에서 죽겠다고 스님 살려주세요 하니까
“야야, 화두 들어라” 이러시더라고.
나 그때 얼마나 스님이 아주 원망스러웠는지 모르겠어.
사람이 큰 스님이 인정머리가 있어야지
죽겠다고 살려달라는데 화두 들으라니 그게 말이 되냐고.
그래서 그때 아주 충격을 받았어요.
도인이 왜 이렇게 인정머리가 없냐고.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보니까, 그렇게 해야만 되는 거예요.
살려달라고 하는 이 마음이 뭔가.
돌아봐 버리면, 없는 거예요, 그게.
내 생각으로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을 만들어내는 생각을 돌아보면
색즉시공이라, 끝나는 거예요.
그게 반야바라밀행이거든요.
마음을 자꾸 닦는데, 그 보현행이 있다 이 말이에요, 방편.
여러 가지 이런, 남 좋은 일 하는 게 아니라 내 마음 닦는 일이다.
그래서 반야는 부처님을 출생시키고
또 보현은 부처님을 양육을 시켜요. 키워내요.
그러는 것이 다 지혜와 공덕으로 나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거거든요.
똑바로 말해보면
지금요, 대한민국이 가난해서 행복하지 않은 건 절대로 아니에요.
마음이 빈곤해서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원인을 알았으면 마음을 풍요롭게 만드는 노력을 해야지
점점 더 많이 갖고, 더 많이 하려고 하는 것은
자발적 행복능력이 없는 거예요.
숨을 쉬더라도 자발호흡이 있어야 하거든요.
자발호흡이 없으면 인공호흡기로 아주 불안해요.
자발행복을 가지려면 스스로 원을 세워서
스스로 공덕으로 마음을 닦는 일을 해야 하는 거예요.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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