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소에서는 여래신은 십신인데 삼신으로 거둘 수 있다.
그래서 삼신 십신이 원융무애하다.
그렇게 설명을 하고
삼신출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법신은 어떻게 출현하냐?
법신은 제법이 여여한 게 법신인데
이 모든 제법 속에 여여 실상법이 있어요.
얼음 속에 물이 있듯이
법신은 여여상현(법신은 여여히 항상 나타나는 것)
여여히 항상 나타나는 거예요.
법신출현은 제법 속에서 여여히 항상 출현한다.
그것이 법신출현이고,
그다음에 보신이 있는데 이 보신 출현은 어떻게 되냐?
여실도로서 여실한 도를 말미암아서 성취정각을 하면 그것이 보신 출현이다.
이 보신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 보신이다.
그 깨달음은 금강도를 닦았다, 이거지.
번뇌망상을 다 비추어서 녹이고 금강도에 올라가면 정각을 이루는데
그 정각은 금강도 보답으로 이루어진 몸이다 해서 보신이라 그래요.
정각을 이룬 건 보신인데
그 보신출현은 성취정각을 해서 출현한다.
그러면 여래의 본성공덕이 정각을 이루는 순간에 일시동현하나니
일시에, 한꺼번에 쏵 나타나요.
그걸 대웅이라고 그래요.
크게 웅장하다.
본성공덕이 정각을 이루는 순간에 일시에 그냥 한꺼번에 나타나니까 그 웅장함이 있다,
그걸 대광이라고 그래요.
그게 보신이에요.
청정법신은 일체제법의 여여법신이기 때문에
제법 속에서 항상 출현하는 거예요,
풀 끝에도 출현하고, 바람 속에도 출현하고.
그런데 이 보신은 깨달았을 때, 본성공덕이 일시에 나타난다.
그래서 대광명, 대웅, 대력, 그것을 신력이라고 한다 이거죠.
그다음에 화신은 그런 보신이 대기대용으로 응기대용으로
중생의 근기에 응하는 큰 공덕작용으로 출현하는 게 화신이에요.
보신을 이루어서 대지혜를 이루었으면 응기대용이 나타나요.
중생에 응하는 큰 작용이 나타난다. 이게 화신이에요.
이렇게 출현하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건 아무리 해봤댔자 3권 다 못해요.
본문 얘기는 이 정도 하고, 이제는 언제까지 법상에 올라올지도 몰라요.
왜그러냐하면 다리 아프면 여기 못 올라요.
기억력 떨어지면 법문 못 해요.
법문 못 하는 이유가 다리 아파서 못하고, 기억력 떨어져서 못하는 거예요.
기억력이 조금 있을 때, 그동안 경험했던 걸 자꾸 얘기를 해놔야
혹시 참고가 되지 않을까 이래서
화엄경 경보는 이야기 조금 하고 넘어갈게요.
화엄경을 공부를 해야 하는데,
화엄경 공부를 하려면 옛날에는 전부 이런 소초를 가지고 공부를 했거든요.
60년대 강원에서는 다 이런 책을 가지고 공부를 했어요.
그런데 70년대 이후에는 한글대장경이 나타났어요.
요즘에는 첫 번째는 한글대장경을 보고, 두 번째는 이렇게 인쇄된 화엄경을 보고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런 소초를 보고
이런식으로 공부를 할 수밖에 없구요.
그런데 경에는 경문이 있고, 경의, 경지가 있어요. 뜻 지, 대지.
경문은 80권 문인데, 이 경문만 해석하는 것을 문해간경이라고 그래요, 문을 해석한다고.
이게 쉬운게 아니에요.
예를 하나 든다면, 여래 심력을 이야기를 하는데, 십지품에서
처비처지라고 하는 게 있는데요, 전부 해석이 달라요.
옳은 거 그른거.
그런데 이것을 어떤게 옳은 거냐?
경문에 있는 거로 아는 게 옳은 거예요, 사전에 있는 거 설명하는 게 아니라
경문에 의해서 경문을 이해하는 게 가장 옳은 거예요.
십주품 계송에 보면
삼세인과명위처 (처를 아는 지혜는 삼세인과를 아는 지혜이다.)
처를 아는 지혜는 삼세인과를 아는 지혜에요.
이게 옳은 거예요.
아등자성위비처 (비처를 아는 지헤는 자성을 아는 지혜이다)
또 비처를 아는 지혜는 아등자성, 우리들 자성을 아는 지혜는 비처지다.
요렇게 경문에 의해서 경문을 이해하는 것이 문해간경의 옳은 태도입니다.
괜히 말만 듣고 이해하면 안 돼요.
그다음에 의해간경이 있는데, 의해간경은 이 경의 뜻을 어떻게 해석을 할 거냐, 이건데요.
이게 전부 다 다르거든요.
예를 들면 우리나라 의상스님은
화엄경 경문은 전혀 해석을 안하셨어요. 경문 자체는.
그러면 어떻게 했냐?
화엄경하고 심지경론을 종합적으로 모아서 일승법계도합시일인을 만듦
일승법계도 합시 시를 합한 일인 한 도장
그런데 그 내용이 뭐냐하면 원교종요라 그랬어요.
일승법계도 합시일인 원교종요.
종이라는 것은 뿌리와 같다는 거고, 요라는 건 줄기와 같다는 거거든요.
이게 의상스님의 의해의 방법이에요.
다른 건 전혀 경문 자체를 해석하지 않아요.
중국의 철량 법사는
대방광불화엄경 일곱 글자를 한자한자에 열 가지 뜻을 담아 총 70가지 의미로 설명
고려시대의 고려말 순지스님이 계셨는데, 그 분은
대방광은 법(비로자나)
불은 사람인데 문수보살이다.
화엄은 보현보살이다 이렇게 설명을 한 거예요.
그리고 조선시대의 화엄사기를 보면
대방광은 체용이다, 체와 용이다, 대는 체이고 방광은 용이다, 이 말이죠.
불화엄은 인과다, 불은 과이고 화엄은 인이다.
이렇게 설명하는 게 의해간경이에요.
그다음에 경지는 뭐냐?
그러면 화엄경을 가르치는 게 이런 거 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에요.
경이라고 하는 것은 등불이다.
그럼 등불은 등인이 있어요. 등불을 드는 사람이 있어요, 등인이.
들려면 등체가 있잖아요, 등의 몸체.
등체에서는 등광이 비출 거 아니에요.
그런데 등만 들고 다니라고 하는 게 아니고, 뭔가 중요한 걸 보려고 등불을 들거든요.
이걸 등조라고 그래요. 등이 비추는 거.
등조가 뭐하는 거냐?
어둠 속에 잇는 보물을 보는 거예요.
등불을 통해서 보물을 보는 건
경전 속에 들어있는 경지를 깨닫는 거예요, 경지.
이게 경보는 자세입니다.
이 경만 보다 끝내라고 절대로 아니에요.
그러면 경지를 보려면 어떻게 하냐?
범행품이라고 있는데, 그 범행품에 보면, 여러 가지 관법을 이야기해요, 처음부터.
관행이 상응하면 관법이 깊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지일체법 즉심자성(일체법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일체법이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관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성취혜신 불유타오 (혜신을 성취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말미암아 깨닫는 것이 아니다)
혜신을 성취하는 거, 이거 깨달음이거든요.
불유타오_ 유타 다른 사람을 말미암아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관을 통해서 다 되는 거예요.
전부 관하라는 얘기요.
그다음 야마궁중게찬품에 보면
약능견불신 청정여법성 (만약 불신이 청정하기가 법성과 같음을 보면)
만약에 불신이 청정하기가 법성과 같음을 보면, 법성을 보면
법성을 보면 불신을 봐요.
그러면 어떻게 되냐?
차인어불법 일절무의혹 (이 사람은 불법에 의혹이 없다)
관해서 관행공부를 해서 마음에 번뇌망상이 쏵 밝아지기 전에는
의혹이 안 떨어져요.
이게 경지를 깨닫는 방법이에요.
관행이 없으면 의심은 안 떨어진다.
이게 견불간경이에요.
-경전을 보는 방법
문해간경, 의해간경, 견불간경, 불견_ 부처 불, 이 견불은 간행으로 된다 이거죠.
역시 야마궁중게찬품에 있는데
약견일체법 본성여열반 (일체법의 본성이 대열반과 똑같다)
일체법의 본성이 대열반하고 똑같다
이 컵은 형상인데, 법성이 대열반이에요. 본성이.
여기에 매이지 않고, 여기에서 대 열반을 보면, 이 말이에요.
만상에서 여여를 본다. 여여가 만상을 떠나지 않고 있거든요.
물이 얼음을 떠나지 않고 있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시즉견여래 구경무소주(법성에서 대열반을 보면 여래가 구경에 머무는 데가 없다)
이건 바로 법성에서 대열반을 보면 여래가 구경에 머무는 데가 없어요.
무소주를 본다.
그게 깨달음이에요.
화엄경은 간행만 하는 것도 아니고
경문도 이해하고, 뜻도 이해하고
마지막으로 보년 견불을 해야 한다.
제일 마지막 부분에 그런 말이 있어요.
야마궁중게찬품,
견문공양제여래 소득공덕불가량
(부처님을 형상불이라도 보고 명호라도 듣고, 공양을 올리면
그 얻는 공덕이 한량없다.)
이게 염불문인데, 염불에는 제일 처음시작하는게
공양할 공, 부처님 불 공불부터 시작해요.
예경하는 예불이에요. 항상 생각하는 염불이에요.
그다음에 이런 행이 자꾸 깊어지면 염불에서 더 들어가면 견불을 해요. 부처를 봐요.
초지보살되면 견불하는 거예요.
견불되면 그다음에는 머물 주, 부처 불 주불을 해요. 불에 머무는 거예요.
그다음에는 그냥 현불 방광이에요.
마지막에 현불인데, 현불은 방광이에요.
이게 길이 다 이렇게 정해져 있는 거지.
간경을 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간경을 잘해서
우리가 공부를 해야 하거든요.
마지막 게송한번만 창법으로 한번 읽어보고 내려갈게요.
읽는데, 소리 없이 읽은 걸 묵독이라고 그래요.
그다음에 이렇게 생각하고 읽는 거를 그냥 보고 읽는 거를 독송이라고, 독송.
그다음에 축원하는 식으로 읽은걸 염독이라고 그러는데
마음으론 생각하고 아주 길게 읽는 것을 창독이라 그러는데
창독은요, 한 구절을 한 10분 씩하면 온몸이 다 경전을 받아들여요.
견문공양제여래 (부처님을 형상불이라도 보고 명호라도 듣고 공양을 올리면)
소득공덕불가량 (얻는 공덕이 한량없다)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어유위중종불진 (함이 있는 가운데서 다하지 않아)
요멸번뇌리중고 (모든 번뇌 멸하고 괴로움을 여의리라)로다
나무아미타불~
이게 창독인데요
그냥 바쁠 것 없이 길~~~게, 깊게
온 몸으로 다 받아들여요.
그리되면 경전을 펼치는 순간에 거기서 부처님을 뵙게 됩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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