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수행자들의 영원한 화두가 되었던가?
깨닫는다고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늙지 않고 장생불사하는 것도 아닌데
무슨 이유로 그들은 삶을 송두리채 바쳐가며 그것의 성취를 갈망하는가?
깨달아서 얻는 것은 단 하나 실존뿐이다.
참되게 존재하는 이치를 터득한다는 말인데
이것이 그토록 가치가 있는 일일까?
싯다르타는 이점에 대해 자신있게 외쳤다.
실존을 깨닫게 되면 영생과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영원토록 무상의 가치를 누리며 사는 존재!
이만한 비전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싯다르타는 그것을 이루는 법방까지 설하게 되니
그의 가르침은 세상의 주목을 받으며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로 깨닫게 되면 영생과 열반을 얻을 수 있을까?
실존을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영생과 열반으로 직결될까?
이런 의문을 내기 전에, 원인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실존이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만일 그것이 있다면 우리가 속한 3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고차원에 속해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을 일으켜 그것에 접근하고 또한 무슨 수로 그것을 끄집어내 논리적으로 증명할 것인가?
다행히 싯다르타가를 위시해서 이것을 풀었다는 각자들이 간단히 나와 줬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용기를 내어 더욱 분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매진하고 있는 수행이 깨달음을 이루게 해줄 정법으로 확신할 수 있는 수행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안개가 자욱한 바다를 가로지르는 범선은 반드시 나침반이 있어야 한다.
뭔가 방향을 잡을 만한 것이 없으면 목적지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등장한 것이 불법이다.
오늘날 싯다르타는 없지만
그가 남긴 언행이 기록으로 남아 나침반의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렇다면 불법만 있으면 되는가?
이것도 문제가 간단치 않다.
수행자들이 도달하려는 곳은 3차원의 어느 한 지점이 아니다.
현실이 속한 차원을 훌쩍 뛰어넘는 고차원에 있기에 위치가 명료하게 딱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불법은 시종일관 형이상의 언어를 나열하며 고차원을 다루게 된다.
결국 난해할 수밖에 없고
이것을 재차 풀어 형이하의 논리로 설명해줄 안내자가 필요하게 된다.
이 역할을 대대로 한 소식 들었다는 선승들이 맡아 해왔고
그 덕분에 수행자들은 그런대로 좌표를 유지하며 수행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런 일련의 이유로 불법승 삼보라는 말이 성립된다.
깨달음의 기치를 올린 붓다와
그가 남긴 불법 그리고 불법을 해석해 깨달음의 좌표를 안내하는 수행자.
불법승 삼보가 온전히 돌아가면 불교는 탄탄대로 있지만
그렇지 못해 어느 한 곳이 적정 이상으로 훼손되면 위태롭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불교는 어떠한가?
붓다와 불법은 여전할 테니 논외이지만
그것을 해석해 방향을 일러주는 선지식들은 어떠한가?
세간을 얼핏 둘러보면 그런 선지식들이 적잖게 보인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불교 서적들을 보면
견성이나 득도했다는 이력 정도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대중들의 시선을 한껏 받는 소위 스타 승려들은
수행에 대한 뚜렷한 명증이 없어도
암묵적으로 깨달음의 타이틀을 수반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숫제 수행의 문턱을 대폭 낮춰 견성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수의 수행자들이 깨달음을 얻었다면
불법승 삼보엔 조금을 하자도 없을 테고
불교는 나날이 그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사실 돌이켜보면
1920년대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불
교의 독무대가 펼쳐지고 있지 않은가?
불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과학의 발전 할수록 그 토대가 굳건해지는 종교이다.
계속해서 드러나는 과학적 사실들은
불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해주는 양념과도 같기 때문이다.
2016년의 세계적인 SF작가이며 과학자인
아이작 아시모프를 추모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현대 물리학의 석학 수백 명이 모였는데
주제는 과학적 사실로 바라본 우주와 인간이었다.
그런데 토론 끝에 나온 결론이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얘기를 몇 가지만 들어보면 이렇다.
*우주를 깊이 연구하다 보면 에러를 스스로 고치는 코드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원리로 입자와 우주는 작동한다.
우주 전체와 우리 인간은 누군가가 만든 초수퍼 컴퓨터상에 게임 캐릭터의 불과할 가능성이 있다.
-Zohreh Davoudi/ MIT 이론물리학자
*우주는 시뮬레이션이 되고 있는 프로그램에 불과하고
인간은 그 초거대 게임 프로그램의 캐릭터일 뿐이라고 단언한다.
-Max Tegmark/ MIT 천문학
*우리 인간과 우주는 미지의 존재가 돌리고 있는
프로그래밍 시뮬레이션과 홀로그램 속에 가상현실을 가능성이 높다.
-James Gates/ University of Maryland 이론물리학자
세미나에 참석한 한 과학자는
우리 우주가 가상 현실이 아닐 확률을 10억분의 1이라고 주장하는 등
마치 공상과학 영화의 제작 현장 같은 분위기였다.
그들 물리학자들은 자신들 또한 이런 결론을 꺼린다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과학적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우주를 가상으로 놓는 편이 보다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가상공간을 누가 왜 만들어 놓았는지는 영원한 수수께끼라며
인류 지성의 한계를 토로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불교 수행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당연한 사실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불교는 태동부터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토대로 깔았기에
과학자들이 말하는 가상현실의 화두는 전혀 낯설지가 않다.
6세기 초, 인도의 학승인 제바가 지은 백자론에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은 꿈과 같은 가상이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펴고 했다.
꼭 그 책이 아니어도
팔만대장경의 상당부분이 가상현실에 대한 얘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오늘날과 같은 과학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세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처럼 방대한 작업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처럼 과학이 불법을 뒷받침해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런 좋은 시운을 맞아 깨달은 수행자들이 곳곳에서 가르침을 펴고 있다면
불교는 특정 지역을 넘어 인류 보편의 가르침으로 승화될 것이다.
그야말로 불국토 세계의 실현이 시간문제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한가?
좋게 보면 작금의 불교는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고
나쁘게 보면 잿밥 승려들에 의해 크게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환경이 그렇더라도 견성한 승려들이 꾸준히 나와 준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불교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도 둘째도 온전한 수행 문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깨달은 승려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물론 산사 깊숙이 숨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불교의 전반에 걸쳐 깨달음의 나침반이 유명무실하게 된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무엇이 깨달음이며
그것을 위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갈팡질팡이다
다행히 수행이 깊어 어떤 경지를 성취했어도
그것이 깨달음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조차 없다.
그러다 보니 그냥 자기가 믿고 싶은 바대로 해석해서 깨달음을 포장하게 된다.
불법을 들춰 봐도 깨달음에 대한 사전적 정의나 과학적 설명은 없다.
과거 한 소식 들었다는 선승들의 어록에도 마찬가지이다.
냉철하고 논리적이어야 하는 불교가
이상하게도 깨달음의 대목에만 가면
낭만이 넘치는 시인이 된다.
물론 대승불교가 출범하면서 중도의 기치를 올려
나름 깨달음을 구체화하려고 노력한 점은 가상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중도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은 없다.
중도가 빠지면 불교는 그 자리에서 허물어진다.
그만큼 중도는 불교 존립의 근간이며 깨달음의 열쇠이다.
본서에서 붓다의 깨달음과 연관하여
중도를 중점적으로 다루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깨달음엔 타협이 없다.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으로
서로 상대방의 깨달음을 인정하며 대충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깨달음은 불교의 존립 근간이기 때문에
그 무엇보다도 냉철하게 팩트를 따져봐야 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깨달음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정녕 무엇인가?
욕망의 뿌리를 끊어 마음의 고요와 평화를 얻으면 깨달음인가?
나의 모든 것을 소멸하여 무아의 멸진처에 이르면 깨달음인가?
화두를 풀어 지극한 반야를 성취하면 깨달음인가?
생각이 일으키는 자리를 찾아 진아를 자각하면 깨달음인가?
삼라만상을 불이로 보게 됨으로써 절대성을 회복하면 깨달음인가?
그 어떤 경지에도 머무름이 없어 일체 무애한 해탈을 이르면 깨달음인가?
대부분 위에 열거한 것을 깨달음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간혹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기에 깨달았다고 하는 이도 있긴 하지만.
아무튼 싯다르타가 출세한 이후에 나온 모든 깨달음은
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요약하면
평화, 열반, 무아, 진아, 반야, 무주, 적멸, 절대, 해탈 등의 명제들이다.
이것 외에 몇 가지를 더 붙일 수 있지만
아무튼 이런 것들을 이루게 되면 깨달음이라 한다.
그러면 이런 일련의 깨달음에 대한 명제를
싯다르타로부터 전수받은 것이 맞는가?
싯다르타는 첫 번째 스승인 밧가와에게서 고행을 통한 무아를 배웠고
또한 생각을 관찰하는 법을 터득했다.
바로 위빠사나이다.
이 법을 통해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
즉, 진아를 찾았다.
그럼에도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두번째 스승인 알라라 칼라마에게서
불이의 법을 통해 절대로 승화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한동안 절대의 경지에 머물다가 이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길을 나섰다.
싯다르타는 세 번째 스승인 라마프타로부터 자신이 이룬 경지마저 놓음으로써
무소유하고 무소주하고 일체무애한 해탈의 법을 배웠다.
이번에는 자신이 이룬 경지에 만족하는 것 같았던 그는
어느 순간, 이것 역시 깨달음이 아니라며 부정했다,
싯다르타가의 수행 과정을 보면
뭇 수행자들이 오매불망하는 무아, 진아, 절대, 해탈 같은 것들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그리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추구했다.
그런데 오늘날 싯다르타의 제자를 자처하는 수행자들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2차원 평면 세계엔 오로지 평면만이 존재의 모든 것이라고 믿는 생물들이 산다.
다행히 그곳에도 수행자가 있다.
그들 수행자들의 목적은 해탈하여 더 높은 차원,
즉 3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3차원에 대한 이론을 수만 개 만들어 달달 외우면 될까?
아니면 피가 터지고 뼈가 깎여 나가는 수행을 거침없이 해나가면 될까?
그런 수고를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더욱 2차원 평면에 달라붙을 뿐이다.
고차원으로 탈출하려면 무조건 높이를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고개를 바싹 쳐들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고개를 올릴 생각은 않고, 종이에 달 싹 붙어
무아니, 진아니, 절대니, 해탈이니 옹알대고 있으면 어떻겠는가?
높이를 세울 생각은 하지 않고
종이에 늘어 붙어 장좌불와하고 용왕매진하면 어떻겠는가?
지금 수행자들의 모습이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싯다르타는 고개를 쳐드는 법을 가르쳤다.
우리가 속한 3차원의 속박을 끊고
4차원을 건너뛰어 5차원 실존에 이르는 법을 전해 준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태동 순간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는 수행법은
기이하게도 3차원에서 분별의 꿈을 일으켜 그 꿈속에서 붓다가 되는 수행이다.
물론 4차원의 경지에 올라 오도송을 읊는 도인들도 간간히 나와 줬지만
그건 불교에서 지향하는 궁극의 깨달음이 아니다.
불교에는 생각을 관찰하여 분별을 꿈에서 자유로워지는 위빠사나 수행이 있다.
생각과 분리되다 보면 그것이 일어나는 자리에 텅빈 알아차림이 있다.
그것이 참된 자아인 '참나'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생각임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3차원의 생각을 거둬내고 남게 되는 4차원의 생각이다.
그래서 영성이 회복되어 고차원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4차원의 생각이 활동하니
반야가 풍부해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고, 만물이 하나라는 생각이 들고
더 나아가 일체무애의 해탈경이 찾아온다.
이런 높은 자각 현상의 일어나니
깨달음이라고 봄직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싯다르타가 이룬 깨달음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은 관념이 만든 허상일 뿐이다.
다시 말해 3차원 생각이 만든 번뇌 망상을 거둬 낸 자리에
4차원 생각이 만든
진아와 반야와 절대와 해탈의 꿈이 정교하게 그려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그럴싸한지 속지 않고는 배기지 못한다.
싯다르타가 나오기 전에
기라성 같은 영적 스승들이 전부 이런 경지에 올라 깨달음을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더 이상의 경지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4차원 생각이 만든 깨달음의 꿈에 속지 않는 단 한 명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싯다르타이다.
그래서 그는 세 번째 스승인 라마 프타로부터 해탈의 법을 전수 받고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리곤 4차원이 만든 깨달음의 허상을 그대로 관통해
5차원 실존에 이루는 법을 터득했다.
이것을 인류가 태동한 이래 싯다르타가 처음으로 이루었다.
그래서 불교는 한없이 거룩하고 위대한 것이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단숨에 차원의 벽을 뚫고 대각을 이룬 방법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대신 그가 일찍이 실패하여 쓴맛을 봤던 힌두교의 수행법들만 하늘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다.
삼매로 무아를 이루고
위빠사나로 참나를 찾고
참선으로 자성을 회복하고
불이의 반야로 절대에 이르고
무주와 무애로 해탈에 이르는 법들은
모두 세존이 살아 계실 적에도 있던 힌두교의 수행법들이다.
물론 대승불교가 대두하면서
여래선, 염불선, 묵조선, 조사선, 간화선 등으로 수행법이 다양해졌다.
특히 조사선과 간화선은 힌두교에 없던 수행법으로
오늘날 한국 불교의 상징이 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에 공효면에서 여전히 의문이 남아있다.
힌두교의 한계를 무너뜨리며 불교가 출범했다.
그런데 일부 예외는 있지만 불교의 상당 부분이 힌두교의 것들로 채워져 있다.
이런 이유로 불교가 태동한 인도에서는
불교를 힌두교의 한 지파로 보고 있다.
사실 불교 교리의 대간을 이루는 고해론, 인과론, 업장론, 윤회론 같은 것들이
모두 힌두교에서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 아니던가.
물론 불교에서는 전변설, 적취설 육사외도 등을 내세워 힌두교를 비판하지만
그건 광범위한 힌두 사상 일부분일 뿐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힌두교와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중도를 꺼낼 것이다.
중도란 말 그대로
이 쪽 길도 아니고 저쪽 길도 아닌 가운데 길이다.
현의 줄을 너무 팽팽하거나 느슨하게 당기지 않아야 제대로 된 소리가 나는 것처럼
수행 역시 적정한 상태에서 임해야 한다는 얘기이다.
불본행집경에 보면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출가한 사람이 버려야 할 것으로
첫 번째는 세속의 욕망이고
두 번째는 자신을 과도하게 괴롭히는 행위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세속의 즐거움도 문제지만
탈속의 괴로움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이고
여기서 중도론은 더욱 힘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과유불급을 모르는 수행자가 몇이나 될까?
고행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편한 것도 않은 적당한 상태로 수행하라는 것인가?
이런 점을 불제자들이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초기 불교에선 연기를 중도로 보았다.
삼라만상 모든 것들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존재하기에
어떤 독자적인 실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이론이다.
존재론적 본체가 없기에 치우침이 발생하지 않고
이런 무주의 경지가 바로 중도라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설명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이때 연기론은 我를 부정하면서도 연기의 법만은 실유로 받아들였다.
이것이 무아법유이다.
이렇게 되니 법의 걸림이 발생하였다.
법이 유이면 자연히 형이하의 제약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기를 좀 더 세부적이면서 부드럽게 다루기 위해 12연기론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제1원인을 배제한 상태에서 현상계의 변화 원리에 중점을 두다 보니
애초에 본질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12연기론을 보면
삼생의 인연을 연관시키기 위해 불필요한 명제들을 뒤죽박죽 나열함으로써
불법의 질을 적잖게 떨어뜨리고 있다.
이런 상대적 인과론이 중도이고
이런 초보적 심리학이 세존의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세존의 사후 500여 년이 지나면서부터
보다 적극적으로 중도를 연구하는 흐름이 조성됐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정립된 중도의 이론은
대승불교의 기치를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사실 세존의 사후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나온 대승불교는
자칫하다가는 사이비 불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대승불교에는 세존이 없다는 비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지 않은가?
이런 반론을 뒤집은 것이 중도였다.
대승불교는 중도를 다시 끄집어냄으로써
세존의 참된 법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천명했다.
그리고 중도가 유명무실하게 된 소승 불교야말로
세존의 가르침에서 멀어졌다고 비판했다.
이처럼 중도는 불교의 정통성을 저울질할 정도로 절대적 위치에 있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가 사활을 걸고 이룩한 중도는 어떤 것인가?
그들이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이론은 매우 단순했다.
양극단에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양극단 이 상호 융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에 양쪽 어느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음으로써
이쪽과 저쪽이 서로 화합하게 된다는 얘기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쌍차쌍조이다.
모순된 양극단에 머무름이 없으면서
양극단을 한꺼번에 비추고 있는 중도의 경지이다.
쌍차쌍조는 원래 영락본업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천태종의 개조인 지의가 중도의 핵심 이론으로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화엄종의 현수가 이것을 살짝 비틀어 쌍민쌍존이라 했고
천태종에서는 쌍차이변 쌍조이제라 하였다.
이에 한 소식 들었다는 선지식들이 저마다 비슷한 아류를 들고 한마디씩 하게 된다.
말은 조금씩 바뀌지만, 양극단을 버리고 양극단을 융화한다는 기본적 내용은 동일하다.
결국 쌍차쌍조는
교파를 가리지 않고 중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정리하면
세존이 이룬 깨달음은 중도이며
그 중도는 쌍차쌍조가 된다.
그러므로 쌍차쌍조를 터득하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논리이다.
그렇다면 중도= 쌍차쌍조가 맞을까?
이에 대해 어떤 스님은 과학적 사례를 들면서까지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E=mc2’과 에너지 보존 법칙을 들며 쌍차쌍조의 가치를 역설하곤 했다.
그 골자만 간추려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자연계를 구성하는 근본 요소인 질량과 에너지가
서로 다른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에너지가 질량이고 질량이 에너지라는 말이다.
얼음과 물이 다르면서 같은 것처럼
삼라만상 모든 것들은 서로 융화하여 하나로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불생불멸하며 부증불감한다.
게다가 시간과 공간이 같다는 사실도 드러나고 있다./
질량과 에너지가 같다.
에너지는 보존된다.
시공이 물리적으로 연결된다는 과학적 명제는
만물이 단절되지 않고 연속 선상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원리이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연기론의 소재로는 적합하지만
모순된 양극의 비유로 쓰기엔 맞지 않는다.
쌍차쌍조는 대칭으로 이루어진
상대 세계의 근본 패러다임을 허무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칭을 깨서 더 높은 차원으로 도약하려는 것이다.
옛 조사들의 이런 취지를 피상적으로 이해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동문서답이 돼버렸다.
조사들이 언급한 쌍차쌍조는 생과 사, 유와 무, 대와 소, 장과 단 등과 같이
완전히 상반된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이런 양자 모순의 것들은 상대 세계를 떠받드는 대들보이다.
이것들이 무너지면 대칭의 족쇄가 깨지면서 더 높은 차원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그것을 부수려고 작심하고 쌍차쌍조의 카드를 꺼낸 것이다.
양자 모순된 것들 중에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대칭의 수레바퀴는 굴러간다.
하지만 양쪽 모두에 쏠리지 않으면서 양쪽 모두를 끌어안으면
대칭의 수레바퀴는 멈춘다.
생과 사도 멈추고 붓다와 중생도 멈추고 극락과 지옥도 멈춘다.
일체의 분별이 사라지게 되면서 실상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쌍차쌍조이고 여기에는 무소주, 무소유, 일체무애, 해탈, 열반 등의 개념이 녹아 있다.
그래서 쌍차쌍조는 불법을 여타 종교나 철학, 수행들과 구분 짓는 불교만의 상징이다.
그렇다면 쌍차쌍조(雙遮雙照)는 중도를 올바르게 설명하고 있는가?
뒤에 다시 한번 논하겠지만 중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양극에 머무름이 없으면서
양극을 모두 통합하는 개념의 중도는
관념으로 꾸며진 허상일 뿐이다.
5차원 실존을 묘사하기 위해 애쓴 노력은 인정하지만
심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중도를 이해하고 실천해도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앞서 필자가 불교계에 깨달은 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한 이유가
바로 중도의 부재에 있다.
기존에 나온 중도엔 깨달음이 담겨 있지 않다.
진실로 깨달은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같은 물체라도 수평으로 보는 것과 수직으로 보는 건 다르다.
그렇듯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5차원 실존에서 보면 달리 보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러면서 그 모든 것을 융합하고
이렇게 이루어진 경지마저
머무름이 없게 하려는 짓들만 하지 않고
그냥 있으면 오히려 중도에 가까울 것이다.
복잡하고 난해하고 심오할수록
실존의 열쇠에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지구는 둥그니까 길을 잘못 들어도 계속해서 한쪽 방향으로만 가면
제 자리로 온다.
다시 전진할 기회가 생긴다.
하지만 수행은 길을 잘못 들으면
영원히 헤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외도라고 하여 그토록 경계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행자들이 알고 있는 중도로 나아가면 미혹됨만 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세존이 깨달아 부처가 된 이래로
제2, 제3의 부처가 있었던가?
모두 다 부처 아래의 경지, 비유하자면 서열 2나 서열 3이었다.
그런데 불교의 깨달음엔 오로지 오로지 서열 1만 존재한다.
다시 말해 부처가 아니면 그 어떤 경지에 올랐어도 깨달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오늘날의 불교를 보면
깨닫기 전의 과정과 깨달은 후에 과정이 단계별로 상세히 등장한다.
하지만 깨닫기 전은 너무 캄캄해서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고
깨달은 후엔 너무 밝아서 구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세존의 아래를 자처하는 깨달음은 깨달음이 아니게 된다.
이런 잣대에서 보면 세존의 입멸 후 2500여 년 동안 등장한 각자들은 모조리 중생이다.
좋게 말하면 부처 흉내를 제법 낼 줄 아는 중생인 것이다.
물론 깨닫지 못한 수행자들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깨달음의 순서를 매겼다는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계급장을 달려면 왜 출가하여 구도자가 되었는가?
불교는 법 앞에 절대 평등하다.
세존은 진심으로 제자들이 자신과 같아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불교를 거쳐간 수 많은 승려들은 세존을 범접할 수 없는 지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자신이 이룬 깨달음을 세존의 밑에 놓는 겸손함을 보였다.
그런데 깨달음의 세계에서 그와 같은 방편이나 도덕적 치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깨달은 것 같다, 깨달음에 근접했다, 거의 깨달았다, 이 정도면 깨달은 게 아닌가, 깨달았으니 점수만 하면 된다, 깨달음이 맞습니까?’
같은 말들은 어불성설이다.
수행은 자신을 폐쇄하는 인자
즉 취착들로부터 벗어나려는 데 있다.
그런데 세존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넘어 숭배 의식에 물들게 되면
그 자체로 폐쇄의 족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행의 시작부터 커다란 짐을 짊어지고 비틀대는 것이다.
그렇게 깨달음만큼은 그것을 쪼개 등급을 나누거나 미사여구로 장식하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
그렇다면 싯다르타가 깨우친 경지는 어떤 것인가?
이것을 일러 불경에는 무상정등각이라 하는데
거짓됨이 없는 참된 깨달음이라는 얘기이다.
높고 낮은 등급도 없고, 이러쿵저러쿵 긴 설명도 필요 없는
있는 그대로의 깨달음이다.
도대체 그것이 어떤 것이기에
힌두교의 무아, 진아, 절대, 해탈마저 뛰어넘고 있는가?
또한 불법의 정수라는 쌍차쌍조에 중도마저 무색하게 만드는 것인가?
본서는 바로 싯다르타의무상정등각을 밝혀 불교의 위대함을 널리고자 함이다.
또한 출가 수행자들이 얼마나 위대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정진하고 있는지를 각인시키고자 함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출가 수행자들이 더 이상 싯다르타가 했던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단숨에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독자층을 출가 수행자로 한정하는 이유는
금강석과 같은 구도의 발심이 없으면
본서에 대한 이해도 실천도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재가수행자들 중에도 스님들 못지않은 금강발원을 세워 일심로 정진하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은 예외겠지만 대부분은 속가의 구조상 깨달음을 얻기가 지난하다.
세속의 인연을 끊고 오로지 깨달음 하나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출가 수행자들만이 세존의 발자취를 끝까지 따라갈 수 있다.
이제 도래하는 시운을 맞아
싯다르타의 입멸과 함께 사라진 중도의 법방을 다시 들춰내고
무상정등각의 기치를 올바로 세우고자 한다.
수천 년 동안 진리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모조리 부서져 증발할 테니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다.
그렇더라도 인연이 되어 끝까지 읽는다면
분명 수행의 실마리를 잡을 것이다.
모쪼록 본서를 통해 깨달음의 열쇠를 얻어 발원한 바를 이루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 순간에도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왕 매진하고 있는 출가 수행자분들에게
본서를 바친다.
부디 성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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