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는 잘 안 된다는 얘기의 좋은 점은 뭐냐? 아무튼, 지금 해보려고 지금 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좋은 점이에요. 해보려고 안 하고 않으면 잘 안 된다는 것도 없죠. 지금 뭔가 해보고 있으니까 안 된다. 내가 지금 안 되고 있네. 이거를 알 수가 있다. 그러니 그런 측면에서는 안하는 사람보다는 낫다. 이 말이에요. 그리고 또 우리가 알아도 오랜 습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되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립니다. 우리가 자전거를 탈 때도 “타겠다.” 하고 시작을 했지마는 자전거를 잘 타지는 데까지는 좀 시간이 걸리고, 우리가 운전을 배우고 운전을 할 때도 좀 시간이 걸리는 거요.
그러니까 시간이 좀 걸리는 문제는 조급하면 안 된다. 꾸준히 해보는 게 중요하다. 이거야. 안되면 또 해보고, 안되면 또 해보고, 안되면 또 해보고. 이렇게. 방법을 바로 알았으면 그 방법에 따라 계속하면 돼요. 앞에처럼 방법 자체가 잘못됐을 때는 이것은 방법이 잘 못됐기 때문에 이것은 얼마나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이건 만 번 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방법을 바로 해야 된다. 방법을 바로 했는데도 안 되는 경우는 조급한 마음을 버려야 된다. 될 때까지 하고, 하고, 하고, 또 해야 된다.
그러니까 관점이 잘못 잡힌 것은 관점을 바로 잡아야 됩니다. 관점이 바로 잡혔는데도 안 되는 것은 정진이 필요하다. 이거야. 계속하는 것이 필요하다. 열 번 넘어지면 열 번 일어나서 하고, 백번 넘어지면 백번 일어나서 하고, 천 번 넘어지면 천 번 일어나서 해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한 번 만에, 두 번 만에, 다섯 번 만에 되기를 원하는 것은 그것은 욕심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마지막 말씀에 무슨 얘기가 했습니까? 부지런히 수행정진 하라.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수행정진 하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그렇게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 길을 알았거든 그 길로 똑 가거라.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가고 넘어지면 일어나서 또 가거라. 그런데 길을 잘못 들었을 때는 가는 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상처를 받는다. 이 바깥에서 누가 말하거나 누가 어떻게 하면 그것이 나한테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내가 경계에 끄달리고 있다는 얘기요. 하나는 경계에 끄달리고 있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아상이 강하다는 말이오. ‘내다’ 하는 것이 강하기 때문에 상처를 입는 거요. 내다 할 것이 없는 줄을 알면 상처 입을 게 없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상처를 입는다 하는 이 사실을 가지고 알 수 있는 것은 첫째는 내가 ‘나다’ 하는 것. ‘내다’ 하는 것을 뭔가 내가 움켜쥐고 있는 사람이다. 이것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또한 바깥의 경계에 내가 자꾸 상처를 입게 된다. 거기에 끄달려서 상처를 입게 된다. 이런 성격의 사람은 남이 볼 때는 굉장히 착하고 자기 고집이 없는 사람 같은데. 상처를 입는다는 그 자체가 사실은 에고가 굉장히 강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품을 갖고 있으면 반드시 내 자녀도 대부분 그렇게 닮는다. 그건 사실이에요. 마치 육신이 유전인자가 내려가서 모습이 닮듯이, 이 마음의 업식도 자녀에게 그냥 옮겨집니다. 이것이 좋은 것이라면 옮겨주는 것이 좋지만은 이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면 옮겨주는 것은 잘못된 유산을 주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내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도 바로 이것을 바꿔야 합니다. 고쳐야 합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좋은 신발을 사줄 거냐? 좋은 학교에 보낼 거냐? 유산을 얼마나 돈으로 남겨 줄 거냐? 재물을 줄 거냐 하는 것보다도 이 잘못된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이다. 이렇게 딱 각오가 서야 되요. 그러니까 그 어떤 것보다도 이 문제를 치유하는데 내가 최선을 힘을 기울인다. 이거요. 그런데 이러한 잘못된 유산을 남겨주는 것은 너무나 당연시하고, 모르고 아예. 그리고 쓸데없는 다른 유산. 그것을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주는데 신경을 많이 쓰기 때문에 우리가 각해보살님 법문하면 부모의 공덕이 없다. 이런 얘기를 많이 듣죠.
부모로부터 받은 병이라든지 육신의 병도 그렇고 마음의 병도 그렇고. 어떻게 할 거냐? 첫 번째가 아~ 내가 아상이 참 강하구나. 남이야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내가 상대편의 말 하나하나에 걸리고 거기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내 에고가 나를 고집하는 것이 굉장히 강하다. 이거야. 즉 타인을 다른 것을 이해하는 폭이 굉장히 적다는 거요.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은 그렇게 느낄 수도 있고. 세상은 다양하니까. 이렇게 넓은 이해의 폭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상처를 덜 입죠.
그런데 이해의 폭이 좁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상처를 자꾸 입게 된다. 굳이 또 이것은 둘로 나누면 화나고 짜증나고 미워하고 이런 것들은 주로 이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즉 우리들의 이 표면의식인 6식인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주로 생기는 문제라면, 이렇게 마음의 상처를 잘 입는 사람들은 무의식의 세계로부터 옵니다. 자기의 업식에 대한 에고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즉 사람은 어떤 상황에 부딪힐 때 필링이 서로 달라요. 느낌이 서로 다르다. 이거요.
그런데 그 느낌이 서로 다른 것들을 우리가 함께 받아들여야 되는데 느낌, 자기 느낌을 중심에 놓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그 느낌에 집착하기 때문에 우리가 감정적이 되는 거요. 주로 이렇게 마음에 상처를 많이 입는 사람은 주로 감정적인 사람이오. 이 감정은 이 느낌에 바로 이 마음이 맹목적으로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오는 거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분들은 우리가 앞에 견해가 다른 사람. 화나고 짜증나고 괴로워하고 이런 사람들은 수련을 하더라고 깨달음장이 낫고. 이러한 마음에 작은 일에도 상처를 입고 주로 자기가 좀 감성적이다. 이해는 되는데. 감정을 어떻게 못 한다. 이런 경우는 나눔의 장을 좀 다시 참석해 보는 게 좋다.
왜냐하면, 이것은 알아도 해결이 안 돼요. 몰라서 해결을 못하는 게 아니고, 이해가 돼도 상대편이 그럴 수 있다는 걸 다 이해가 되는데도, 마음이 이 상처를 자꾸 입어. 이 경우는 이 업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래. 그래서 이것은 뭔가를 이해하고 배우고 안다고 해서 해결이 안 됩니다. 그것은 자기의 상처받는 그 마음을 자기가 여실히 봐야 된다. 다시 말하면 이 필링에 깨어 있어야 됩니다. 우리 12 연기로 말하면, 수, 오온에서 말하면 수. 거기에 깨어 있어야 돼. 그것이 반응하는 것을 보고, 다음 행이 거기에 반응하지 않도록, 이 반응에, 이 느낌에 깨어있어서, 그것을 그것으로만 보는 힘이 생기면 이 문제는 치료가 충분히 가능하다. 이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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