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스님께서는 아주 소탈하신 분이에요. 삶이 굉장히 뭐라고 그럴까, 심플했어요. 그냥 등허리에 댄 바랑 하나, 입은 옷, 아주 간단했어요. 식사를 많이 차려놓고 먹는 법도 없고, 혼자 계실 때 남이 시중 들으라는 것도 없고, 상 차려다 주면 안 먹는 것도 아니고 차려다 주면 먹지마는 혼자서 거의 해 드시고, 반찬도 그냥 한두 개 놔 놓고 드시고. 굉장히 소탈했다. 내 나이가 스님보다 37살이나 36살이나 적은데도 현재 나도 그분처럼 그렇게 살기가 어려워요. 내가 앞으로 늙으면 더 할 거 아니오. 그죠? 더 소탈해지겠어? 더 군더더기가 붙겠어? 인간은? 늙으면 더 군더더기가 붙습니다. 내가 특별히 각오하지 않는 이상.
왜? 제가 아무리 현재 바르게 살고 해도 살다 보면 명예가 붙고, 권위가 붙고, 이러면 옆에서 시중들고, 뭐 들고, 뭐 들고, 하다 보면 인간은 습에 젖는단 말이오. 안개에 옷이 젖듯이. 그런데 현재에 그냥 바로 비교해도 우리보다 훨씬 더 소탈하고 훨씬 더 검소하고. 지금 제가 서암 스님보다 한 열 배는 더 소탈해도 그 나이가 되면 때가 묻을 텐데. 그렇게 비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 나이에도 아직 흉내를 내기 어려울 만큼, 그렇게 아주 검소하고 소탈하시고. 그것이 그분의 제가 볼 때 큰 장점이고. 허례허식. 허례허식이 거의 없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종교를 하다 보면 저도 허례허식이 있거든요. 스님으로서 뭐도 지어야 되고, 뭐도 해야 되고. 내가 이론적으로 옳지 않다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면 적당하게 어울려 산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런 게 없으셨어요. 그게 아주 원칙대로 딱~ 살으신 분이고 일반스님들 평가는 좀 까다롭다. 노인이. 이렇게 평가를 받는다고 볼 수가 있죠. 그러니까 우리가 살다 보면 절에서는 아~ 오도송, 깨쳤다 하는 노래가 하나 있어야 되고, 열반할 때 열반송도 하나 있어야 되고 그렇잖아요. 그죠? 그런 걸 딱~ 없애 버리잖아요. 사리를 뭐 뒤진다. 그것도 하지 마라.
그게 어떻게 보면 굉장히 쉬운 말 같지만 쉬운 말이 아니에요. 제가 살아보면 그런 어떤 형식을 이렇게 탁 버리는 게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에요. 이런 집단에서 이렇게 살면. 저 같은 경우는 집단 밖에 좀 나와 가지고 자유롭게 있으니까 비교적 형식에 좀 덜 집착하는 편이지만은 그래도 나도 그런 이 문화의 형식에 늘 눈치 보고 사는데. 그렇게 말하기가 쉽지 않아요. 그다음에 세 번째, 굉장히 그분이야 말로 원칙주의자세요. 그러니까 우리가 종단사태가 났을 때, 84년도 얘기에요. 그분이 갖고 있는 최고의 오명이라고 사회에서 말하지마는 제가 볼 때는 그분이 갖는 최대의 명예로움이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서의원 총무원장이 이선을 하고 삼선을 법을 고쳐 했지 않습니까? 그럴 때 다 대중이 일어나 반대를 했단 말이오. 그런데 서암 스님께서 그 사람들을 쫓아내는 거. 승려 대회를 해서 쫓아내는 거에 대해 반대했단 말이오. 요현 스님을 내보내는 걸 반대하는 게 아니고, 다중이 모여서 데모를 해서 쫓아내는 걸 반대한 거요. 이거 내가 몇 번 확인했어요. 왜 반대하느냐? 잘했든 못했든 이 사람이 뭐다?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을 두 번을 했다. 8년을 했다. 이거야.
그런데 그 사람을 다중이 모여서 개 패듯이 쫓아 내버리면 그러면 그 사람을 8년간 총무원장을 한 속에 살은 대한불교 조계종은 뭐가 되느냐는 거요. 그리고 해외에서 다 이 사람이 한국불교를 대표해서 모든 관계를 다 맺어 놨는데. 그 사람을 몽둥이 두드려 맞고 쫓겨나가 뿟다. 그럴 때 이게 불교의 위상이 뭐가 되느냐는 거요. 첫째는. 불교의 이해관계를 생각해도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 사람이 사표를 내고 나가도록 해야 불교의 위상이 산다. 개인이 불쌍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거요. 그리고 두 번째 종교가 사람이 이렇게 확 모여서 단식을 하든지 데모를 하든지 비록 총 들고 몽둥이 들고 안 해도 그게 폭력이라는 거요. 어쨌든 사람이 많이 모여 힘으로 밀어붙여 자기 마음에 없는 행동을 하도록 할 때 그게 폭력이라는 거요. 불교는 그런 방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거요. 다중의 힘을 모아서 총 들고 칼 들고 한 것만 폭력이 아니고, 다중이 힘을 모아 가지고 힘에 의해서 밀어붙일 때 그것은 세속적이라는 거죠.
그런데 처음에 저도 그때 그 말씀을 내가 받아들이기가 좀 어려웠어요. 왜 내가 어려웠을까? 나도 그런 방식으로 해왔는데, 그건 마치 나를 부정하는 거 같단 말이에요. 그 말씀은. 그러니까 내가 받아들이기가 좀, 그래도 부당한 걸 어떻게 합니까? 칼 들고 몽둥이 들고 때려 없애는 건 안 되지마는 그래도 우리가 단식을 모여서 하든지 해가지고 비폭력으로만 하면 되지 않느냐? 그런데 그 비폭력에 대한 개념이 그때 제가 얘기했던 거와 스님이 얘기했던 거와 차이가 났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몽둥이든 것만 폭력이 아니라 다중의 힘에 의해서 힘으로 밀어붙인 건 다 뭐야 된다? 폭력이라는 거요. 힘으로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는 거요. 이 종교는. 그런데 그때 지금부터 10년 전인데, 10년 전만 하더라도 큰스님 말씀이니까 ‘예’하고 내가 참여는 안 했지. 속으로는 ‘아~ 스님이 저러면 안 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왜? 저러면 분명히 젊은 사람을 설득할 길도 없고. 그거는 결국, 권력을 힘을 옹호하는 결과밖에 안 된다. 결과적으로. 그런데 10년이 지나서 제가 지금 돌아보면 지금은 스님의 말이 내가 아직도 그걸 100% 실천을 못하더라도 스님의 말이 이제는 이해가 돼요. 그 의미가.
이게 내가 이제야 이해되는데, 이게 우리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세월이 좀 더 지나야 될 거요. 그래서 지금 명예 회복 같은 거 안 하는 거요. 지금 얘기해봐야 받아들여지기가 어려운 거요. 논쟁이 될 뿐이라는 거요. 그런데 그러고 종정을 사표 내라 할 때 사표를 안 낸 이유가 있어요. 스님 말씀대로. 스님이 종정에 연연해서 안내겠어요? 종정이라는 건 부처님을 대신하는 자리라는 거요. 부처님이 안 계시는 상태에서 부처님을 대신해서 있는데. 밑에 사람이 신도가 힘으로 부처님을 몰아냈다 할 때, 이거는 세속 정치는 되고 세속적이라는 거요.
이럴 때는 이미 조계종, 부처님의 정맥은 없어져 버렸다는 거요. 불조사의 맥은 끊어진 거와 같다는 거요. 더 이상 불교는 아니라는 거요. 이름이 불교인 군중의 무리지. 이것은 법이 심지가 살아있는 건 아니라는 거요. 내가 개인의 종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요. 이거는. 그런데 소위 말해서 사미는 엄격하게 말하면 승려가 아닙니다. 그건 예비승려지. 그러니까 사미 사미니를 동원해서 몇 백 명을 동원해서 종정을 밀어내 버렸어. 불신임을 해 버렸어.
그러니까 종정이 세속적인 권력으로 보는 거죠. 그러니까 이거는 불교입장에서 볼 때는 종정은 불신임을 한다든지, 나가라든지, 이런 게 아니라는 거요. 합의를 해서 나가고 들어오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이걸 낸다는 것은 힘에 밀려서 내는 게 된다는 말이오. 그럴 때 이거는 더 이상 불교가 아니다. 그래서 안 냈는데 본인이 낼 때는 불교의 맥이 끊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어떻게 했다? 종단 밖으로 나간다. 이런 표현을 쓴 거요.
그게 뭐 내 맘대로 안 되니까, 내가 조계종에서 탈종하겠다. 이런 뜻이 아니오. 내가 그 직책에 맞는 직분을 뭘 했다? 그것의 정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거요. 내가. 어떤 이유에든 내가 그 직책에 있을 때 그거를 지켜내야 되는데. 내가 어쨌든 상황이 그걸 지켜내지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기가 그거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된다는 거요. 그래서 자기가 지위를 내놓는 게 아니라, 종단 밖으로 나가겠다 하고, 그 10년간의 어려움을 겪은 그런 측면이오.
이것은 우리가 이해되고 받아들여지기에는 아직은 어려워요. 저도 상황, 현실의 상황에 집착하다 보니까, 그분의 선택에 대해서 제가 처음에는 이해가 잘 안 됐어요. 이해가 안 됐다기 보다는 선뜻 동의가 안 된 거요. 그러나 한 번 더 말씀하신 걸 듣고 제가 동의를 했죠. 그렇기 때문에 흔쾌히 그분의 뜻대로 하고, 그분이 밖에 나와서 10년간 그런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승적문제가 내가 제기됐는데. 거기다 승적문제를 고민한다는 건 말이 돼요? 안돼요? 있는 사람도 나와 있는 상태에 없는 놈이 기어들어가겠다고.
그래서 스님을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는 그 스님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죠. 내가 그때 현실이었다면 그렇게 선택 안 했을 수도 있지마는, 그러나 그분의 선택은 지금 돌아와 보면 지극히 불교적 원칙에 입각해있었다. 이것이 정치적인 사건이라면 그렇게 선택하면 안 될 수도 있죠. 그러나 이것은 종교집단이라는 거요. 그런데 오늘날 종교집단이 종교집단만이 갖는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몇 명이 있느냐는 거요. 그래서 스님께서 밖에 계실 때 봉암사 수좌들이 가서 스님께 봉암사로 들어오라고 그랬어요. 사정했어. 오시라고.
그랬을 때 스님께서 뭐라고 그랬어요? 나 안 간다. 이렇게 했으면 또 모시러 갔을 텐데. 두 번 다시 모시러 못 오도록 하셨어요. 뭐라고 하셨겠어요? “네 이놈들. 내가 가겠다 해도 너희가 반대해야 될 텐데. 너희가 어떻게 나를 오라 그러느냐”는 거요. 왜? 정치인이 맨날 은퇴를 했다. 또 정치하고, 은퇴했다가 또 정치하고. 연예인도 그렇고. 그런데 그러면 한나라의 종정을 한 사람까지도 나간다 했다가 또 눈치 봐서 또 들어온다. 그럼 종정이란 장점이 뭐 있냐는 거요. 천하가 다 그래도 종교인은 어때요? 자기 말에 대한 책임을 져야 되지 않겠느냐? 는 거요. 그것도 보통 종교인도 아니고 종정까지 지냈으면.
그럼 내가 나간다 했으면 내가 들어오겠다. 그래도 너희가 그렇게 하면 ‘스님, 불교계의 창피입니다.’ 이렇게 말려야 될 텐데, 너희가 들어오라! 그러면 나보고 말을 번복 하란 얘기냐? 그럼 너희가 뭣 때문에 머리 깎고 중 돼서 사느냐? 그러니까 스님의 좌담에 능한데. 그것이 어쨌든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아무도 없어진 거요. 그거를 번복시킬, 그 스님의 말을 번복시킬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거요. 그러니까 그냥 설득하러 왔다가 설득당해서 고개 숙이고 갔단 말이오.
그러니까 모시고 못 와서 못 온 게 아니고, 스님의 그 논리를 명분 적으로 누구도 그거를 뛰어넘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거요. 그러니까 그때 봉암사 간 거는 잘못된 거 아니냐? 그렇지가 않죠. 봉암사 간 거는 스님의 자기 의지에 간 거는 아니죠. 스님이 병이 들어가지고, 몸져누워있는 상태에 스님의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그거는 대중이 예우로 모셔가 버렸으니까. 그것은 스님의 뜻을 번복한 거는 아니라는 거요. 그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수행자로, 한 사람의 어떤 수도자로는 자기를 완벽하게 하고 살아가시지 않았냐?
자기에게는 어쨌든 완벽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스님의 자기 논리에 자기가 어긋나지는 않았어. 나는 내 논리에 내가 어긋난 행동을 할 때가 있는데, 스님은 자기의 원칙에 자기를 온전하게 맞춰서 사셨어요. 그래서 제자들이 와가지고 시봉하겠다고 이렇게 하면 바랑을 들고 밖에 던져버렸어요. “야, 이놈아. 니 남 종 되려고 중됐나? 부처 되려고 중됐지.” 이런 식으로 물론 시봉하는 게 싫다는 게 아니라, 수행자가 중이 될 때는 자기가 주인이 돼야 된다. 이게 정에 끄달려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공부를 해라. 우리 부처님 말씀대로 말하면 바로 자기 정진하는 것이 부처님의 법을 가장 잘 개선하는 사람이다. 이런 뜻이 되겠지.
'법륜스님 > 즉문즉설(2013)' 카테고리의 다른 글
[즉문즉설] 제400회 이라크전에 대해 (1) (0) | 2013.05.09 |
---|---|
[즉문즉설] 제399회 마음의 상처 (0) | 2013.05.09 |
[즉문즉설] 제397회 내 마음이 발견되어 집니다 (0) | 2013.05.08 |
[즉문즉설] 제396회 불법의 대의 (0) | 2013.05.07 |
[즉문즉설] 제395회 기도가 잘 안됩니다 (0) | 2013.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