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1

[지혜별숲]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허용할 뿐이다. [낭독16회/배경음有]

Buddhastudy 2022. 8. 31. 19:00

 

 

 

아니타 무르자니의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 함께 하겠습니다.

 

지은이 아니타 무르자니는

싱가포르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살았던 인도인 여성인데요.

20024, 임파선암이 발견된 뒤 4년 동안 투병 생활을 했으나

20062, 악성세포들로 인해 몸의 기능이 멈추었다고 합니다.

 

이때 임사체험 상태로 들어갔다고 하는데요.

30시간 동안의 임사체험을 통해

삶과 존재 그리고 우주에 대한 근본 관점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해요.

 

이 경험 후 아니타의 몸은 씻은 듯이 나았고

임사체험의 경이로움과

그것을 통해 깨닫게 된 통찰을 이 책에 담았다고 합니다.

책 내용 중 일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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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동시성과 끌어당김의 법칙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끌어당기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노력 없이도 제때 나타난다는 생각은 꽤 매력적이다.

 

하지만 나는 끌어당긴다는 표현보다는

허용한다는 표현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우주와 하나이고

우리의 목적은 우리의 장엄한 자아가 되는 것이며

외부 세계는 우리 안에 있는 것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내 삶의 큰 위기도

내가 바깥에만 눈길을 두고

남과 나를 비교하며

그에 따른 경쟁심에 시달렸을 때 찾아왔다.

 

나는 이 세상이

모두가 누릴 만큼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그런 생각은 내 안에 욕심과 경쟁심을 낳았다.

 

사람들의 독특함과 차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다른 이들을 설득해서

내가 하는 대로 믿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했다.

 

이 모든 감정은

우주가 부족하며 제한된 곳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실제로 우주는 무한한데 말이다.

 

우주는

우리가 커지는 만큼 커지고

넓어지는 만큼 넓어질 수 있다.

 

우주가 확장되고 허용하는 정도는

우리가 얼마나 원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그것은 먼저

우리 안에서 이루어져 밖으로 표현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내 무한한 자아의 바깥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나는 내 자신을 진행 중인 완전성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은

정적인 것이 아니라 동적인 것이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장면들이 계속해서 돌아가는 만화경처럼

완전성의 작업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내게 있어 이는

여정 안에서, 그리고 일견 실수로 보이는 것 안에서

아름다움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실수는 또 다른 이해의 차원으로 나를 데려가기 때문이다.

 

내 목표는

자신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을 만큼

스스로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는 것

그리고 그 상태에서 결과는 신경 쓰지 않는 것이다.

 

나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된 것도 없다는 걸 알아차리기 시작했을 때

외부 세계 또한 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을 나는 보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최선의 것들을 끌어당기고 있었지만

그것은 내가 우주를 위해 최선의 일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바깥으로 나가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은

나로서는 따르기 어렵다.

그것은 뭔가 잘못되었고 바뀔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으로

처음 문제를 일으킨 것과 똑같은

판단의 에너지를 더욱더 키울 뿐이다.

 

그러기보다는 어떤 것이든

믿음이나 생각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때

나는 우주 에너지가 나를 통해 흘러갈 수 있도록

나 자신이 더욱 넓어지고

마치 투명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이런 허용의 상태에 있을 때

훨씬 더 긍정적인 우연의 일치들이

내 삶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결과를 끌어당기며

비슷한 것들을 불러들인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에게 친절하면 할수록

외부의 일들도

그런 내 태도를 반영해 내게 친절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스스로를 가혹하게 대하거나 판단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마찬가지로 그에 상응하는 상황들이 펼쳐질 것이다.

 

우주는 언제나

내 생각이 맞다며 내 편에 서준다.

내가 나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말이다!

 

과거에 나는

내가 뭔가를 해야 하고

손에 넣어야 하고

이루어야 한다고 느끼면서

그것을 추구하곤했다.

 

하지만 뭔가를 추구하는 행동 그 자체가

바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못 가질까 봐 두려워한다.

그래서 이원성 안에 갇히고 만다.

 

애초부터 추구하는 나와 추구할 대상이라는

분리에 초점이 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는다.

그저 허용할뿐이다.

 

예를 들어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강하게 들 때,

만일 내가 그것을 공격적으로 추구한다면

그로 인해 나는 우주 에너지와 맞서 싸우게 될 것이다.

 

그것을 손에 넣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나는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더 많이 알게 된다.

 

그에 반해 허용하는 것은 힘이 들지 않는다.

허용이란 놓아버림에 가깝다.

 

놓아버린다는 건

모든 것이 하나이므로

내가 얻고자 하는 그것이

이미 내 것임을 깨달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허용의 과정은

먼저는 신뢰하는 데서

그다음은 자기 자신에게 늘 진실해지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할 때 나는

오직 진실로 내 것인 것을 끌어당기게 되며

모든 것은 내가 편안하게 느끼는 속도로 일어난다.

 

나는 걱정되는 것

혹은 내가 부족하거나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만

계속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내 삶이

내가 경험하고 싶어 하는 쪽으로는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은 지금 모습 그대로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새로운 경험을 신뢰하고 허용함으로써

내 의식을 넓히기보다는

내가 두려워하는 것, 나를 화나게 하는 것

뭔가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얼마나 빨리 걱정들을 놓아버리고

그 과정에서 이완되기를 원하느냐에 따라서

그림을 현실화하는 것을

더 느리게도 할 수 있고 더 빠르게도 할 수 있다.

 

특정 사고방식이나 결과에 더 집착하면 할수록

혹은 새로운 모험을 겁내면 겁낼수록

그 전개는 더욱 느려질 것이다.

 

내가 과정에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 에너지가 나를 통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허용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가만히 앉아

그 모든 선택이나 가능성을 일일이 따진다는 것은 아니다.

매 순간 내가 진실로 하는 것은

그 자리에서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외부적으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바깥에는 내가 추구해야 할 것도 없고

끌어당겨야 할 것도 없다.

 

우주가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내 안에서 경험하는 것은

무엇이든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모든 시간의 태피스트리는 이미 짜여 있고

따라서 내가 내 삶에서 일어나기를 바랄 수 있는 모든 것은

저 무한한 비물질적 차원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

 

내가 할 일이라곤

이 무한한 영역으로 흘러들 수 있도록

지구 차원에 있는 내 자아를

확장시키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뭔가 바라는 게 있다면

밖으로 나가서 구하려고 할 게 아니라

자신의 의식을 확장해

우주 에너지가

여기 내 현실 속으로

흘러들도록 해야 한다.

 

내가 바라는 걸 애써 추구하면

오히려 분리만 강화할 뿐이다.

 

그와 달리 허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모두 하나이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따라서 내가 바라는 것이

이미 내게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고요하시고 현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