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세에 궁을 떠난 싯다르타는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고(苦)에서 빠져나와 해탈에 이르는 법을 설파하고 있었는데
제자들 뒤로 앉아 있던 한 남자가 싯다르타를 보고는 깜짝 놀랍니다.
그 사람이 왕자였던 싯다르타를 알아본 거죠.
그는 싯다르타에게 아내 야소다라의 죽음과 아들 라훌라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싯다르타는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지만
아내의 죽음이 떠올라 슬프기도 했습니다.
이 만남을 계기로 싯다르타의 모든 것이 바뀝니다.
싯다르타는 처음으로 아주 오래 괴로움에 시달리기 시작했지요.
아들이 너무 보고 싶었거든요.
간절한 마음으로 인도 전역을 돌아다녔지만
1년이 지난 후에도 아들을 찾지는 못했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밤마다 휴식을 취하면서 성찰을 하다 보니,
전에 쌓아놓은 마음의 훈련이 더디긴 했지만 확실하게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고요함이 그의 마음에 다시 자리 잡기 시작한 거죠.
기억하세요.
배운 것은 모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을요.
일시적으로 잊는다 해도
결국에는 마음에 도로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방식이죠.
진리를 잊었다가도 다시 생각이 나고
이걸 반복하다 결국에는 절대로 잊지 않게 됩니다.
싯다르타와 라훌라는 둘 다 끈기가 있었어요.
알다시피, 영성의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바로 끈기에요
그들은 반드시 서로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대단했죠.
라훌라가 아버지를 찾아나선지 3년쯤 되던 어느 날
작은 연못을 지나던 라훌라는 불현 듯 가슴이 벅차오르는 게 느껴지면서
너무나도 친숙한 누군가가 주변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 싯다르타가 서 있었습니다.
둘은 서로를 알아봤어요.
하지만 얼싸안거나 기뻐 날뛰는 행동은 하지 않았어요.
당시엔 품위 없는 행동이었거든요.
대신 둘은 예를 갖춰 맞절을 했고
싯다르타의 눈에서는 기쁨의 눈물이 흘러나왔습니다.
한적한 곳에 자리 잡고 앉은 두 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그동안 살아온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단지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죠.
몇 주 후 그들은 자신들의 전생과 그때 배웠던 모든 것들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렇게 수 세기에 걸쳐 서로가 서로에게 누구였는지 기억해낸 둘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립니다
이번 생에서 남은 시간 동안 함께 지내며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다면 무엇이든지 다 배우고
자신들의 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배운 것을 적용하자고요.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구원을 성취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 결심은 배움에 박차를 가했고
이로써 둘은 깨닫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알게 되었으며
또 이를 적용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에고가 완전히 지워져야 한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꿈을 실재화하지 않는 연습도 계속했죠.
싯다르타의 고통도 곧 치유되었고요.
깨달음의 퍼즐 조각 중 하나는
꿈이 실재가 아니라면 그것을 욕망할 필요가 없고
욕망이 없다면 고통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불교의 교리를 한층 더 발전시킵니다.
몸이 꿈의 일부에 불과하다면 몸은 실재가 아닌 것이고
이 말은 자신이 느끼는 고통 역시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죠.
정말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꿈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 마음을 바꿀 수 있는 것이고요.
자면서 꿈을 꿀 때 당신의 육체는 없고
오직 당신의 마음만이 있듯이
인생이라고 부르고 또 소위 ‘깨어있는’ 시간이라고 부르는 이 꿈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당신의 육체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아요.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것 또한 투사의 한 부분일 뿐이죠.
싯다르타와 라훌라는 그들의 인생을 용서했습니다.
궁에서 느꼈던 외로움을 용서했고
야소다라에 대한 그리움이 남긴 상처도 떠나보냈습니다.
그렇다고 둘이 야소다라를 그리워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뭔가를 완전히 용서하고 나면
그것이 마음에서 사라져 다시는 생각나지 않게 된다는 건데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용서를 하고 나면
과거에는 고통스러웠던 무엇이 생각나더라도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됩니다.
더 이상 상처로 다가오지 않는 거죠.
고통스럽지 않고 중립적으로 변해버리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그 일을 용서했는지 안 했는지를 알 수 있어요.
물론 당시에 그들이 용서라는 관점으로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꿈에 불과하므로 실재화하지 않겠다는 식으로 생각했고
이것이 용서를 할 때 알아야 할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빠트린 단계가 하나 남아 있었는데
둘의 인식이 확장되다 보니
이것이 무엇인지도 자연스럽게 깨치게 되었고
이 단계는 그들의 마지막 생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 중 하나가 됩니다.
그들은 물론 팔정도를 포함해서 사성제도 이해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불교가 종교화된 것은
나중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세요.
붓다였던 싯다르타는 불교신자가 아니었어요.
종교로서의 불교는 그를 따르려고 했던 이들에게서 비롯된 거죠.
싯다르타가 인생 후반부에 다시 몇몇 제자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 제자들도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비이원성을 고수하는 데에는 꽤나 애를 먹었죠.
이런 점까지 다 고려한다고 해도
불교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 바깥에서 마음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돕는
위대한 진실을 많이 담고 있음을 인정해야 해요.
싯다르타와 라훌라는, 몸이 그들에게 뭘 느낄지 명령하는 대신
마음이 몸에게 뭘 느낄지 명령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를 때까지
수행해나갔어요.
둘은 결과의 자리를 벗어나
원인의 자리로 온전히 돌아갔습니다
이제 세상은 그들에게서 나오는 무엇이었고
그들은 브라흐만의 상태에 도달했으며
비이원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둘은 자신들에게 한 번의 생이 더 남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둘에게 그 생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그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둘은 지금 생에서 자신들의 과제를 완전히 마치기로 선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각본이 쓰여 있다는 것을 알았고
각자가 해야 할 더 큰 역할이 계획되어 있다는 것도 알았죠.
때때로 완전한 스승은
단지 사람들에게 바른 방향을 제시해주려는 목적으로
이 꿈의 세상에 오기도 합니다.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외관상 한두 개의 묵직한 과제를 가르치려고 오는 것일 수도 있고요.
그들은 자신들이 외관상 지상에서 보낼 마지막 생 동안에
운명을 경험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어요.
신이 마지막 발걸음을 옮겨주시어
마침내 그들이 근원인 일체성으로 돌아오게 할 것임을요.
고맙습니다.
개리 레너드의 <예수와 붓다가 함께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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