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본질과 이해
- 법신과의 관계
- 깨달음과 체험의 중요성
- 생명과 불성
예수는
내가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내가’를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의 인격성에 국한시키지 않고
‘법신 자리’라고 바꿔본다면
법신= 길= 생명이
모두 같다는 등식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재가 관념에 오랜 시간 중독되어서 ‘생명’이라 말해도
자기가 알고 해석한 대로만
그것을 바라보고 이해합니다.
우리는 결코 생명의 본질이나
정체성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몸이 아직 죽지 않은 채
살아 움직이는 것을 생명이라 생각하지만
사실 참 생명이란
모든 삼라만상을 다 탄생 유지시키다가
수거 귀납시키는 알지 못할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실 생명이 생사 이전에 먼저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야
난자, 정자도 만들어질 수 있고
세포 분열도 일어날 수 있으며
사람이 만들어져 나오고
성장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생명은
곧 법신자리가 가진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법신을 깨닫기가 어려운 분은
그래서 생명 자체를 보고 느낀다면
많이 도움이 될 수가 있습니다.
선사들이 엄지를 세우고
손가락을 들거나
또는 소리를 지르고
몽둥이를 쓰는 것도
결국은 살아있는 이 자리를 말합니다.
하지만 재관념 속에서
여전히 생각으로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자기 생각, 감정, 느낌 등을 못 벗어나는 것이니
결코 생각 세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진짜 참생명 자리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0자리를 먼저 체험해야 합니다.
아공과 법공이 진리로 가는 법이라 하는 것은
생명 자리엔 나도 없고 법도 없기 때문이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라
법신의 활동 현상인
생명 현상 자체가
눈앞의 수식어로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눈앞 세상을 비추고 있는 이 자리
보고 듣고 느끼며 아는 이 자리가
바로 영원한 참 생명인 법신의 활동 현상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체험하고
하나로 계합하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참 생명인 내가 이 자리를 알든 모르든
이미 그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만물이 이미 다 불성을
두루 갖추고 깨달아 있다 하는 것입니다.
몸이 있고 난 후, 생명이 있는 게 아니라
항상 이 생명자리가 먼저입니다.
그것을 법신, 혹은 불성이라고 따로 이름 붙인 것뿐입니다.
생명과 법신 자리가 다른 점은
무정물도 불성 있다는 것이지만
이는 마치 무지개색 바깥에도
보이지 않는 자외선과 적외선이 있는 이치와 같이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잠자는 존재차원이 따로 있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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