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107] 생각에 갇힌 사람 / 피올라 현대선 16강 "정견으로 깨어있기" 6회

Buddhastudy 2025. 6. 16. 19:28

 

 

  • 자기 중심적인 의식 세계: 우리는 자기 중심으로 세상을 인식하며, 다른 사람이나 사물도 결국 자신의 눈과 앎을 통해 나타난 세상으로 본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영상은 이 세상에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으며, 다른 사람의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 깨달음과 분별: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지 않고 중생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는 것처럼, 진정으로 깨달으면 '깨달았다'는 생각조차 사라진다고 설명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분별하고 내용에 떨어져 생각할 때 차이가 생긴다고 이야기하며, 본질적으로는 모든 것이 생명의 움직임일 뿐임을 강조합니다.
  • 생명의 본질: 영상은 우리가 오감(안이비설신의)이 만드는 내용물에 떨어지지 않고 본질, 즉 생명의 활동을 보는 안목으로 깨어나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실제한다고 믿는 생각의 함정에 빠져 있지만, 깨달으면 모든 것이 환영임을 알게 된다고 덧붙입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자기 생각에 갇혀 있냐면

사실 불교의 일부일승이라는 말이 있어요.

일부일승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지금 여기 여러분들의 의식이 이렇게 딱 떠 있어.

보름달처럼 떠 있어요.

그리고 여기에 여러분이 이렇게 있어요.

서 있든 앉아 있든, 여러분이 이렇게 있다고.

그럼 자기를 중심으로 이렇게 의식세계가 딱 벌어져 있잖아요.

 

물론 이 안에 다른 사람도 있지.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산도 있고, 해도 있고, 건물들도 있을 수 있어요.

집도 있고, 뭐 차도 있을 수 있지.

 

근데 여러분, 사실은 이 모든 게

자기의 눈과 앎을 통해서 이렇게 나타난 세상이에요.

 

다시 말하면

이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나는 상을 보는 거지

그 사람이 내 세계 안에 실재하는 게 아니라고.

근데 내가 실재한다고 믿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이 세상은 나 혼자밖에 없어요.

여러분은 절대 다른 사람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

 

그러니까 부처 눈에는 부처가 안 보인다라는 말이 있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부처가 되면

모든 게 부처가 되고

자기가 부처와 하나 되면 부처가 없어지지

왜 내가 부처니까.

근데 중생 눈에는 부처가 있어.

?

내가 아직 부처가 아니니까.

대상으로 부처가 있단 말이에요.

 

여러분이

-깨달음이 뭐다

-나는 깨달았다

이런 헛소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그 사람은 아직 중생이야.

?

진짜 깨달으면 깨달음이 없어져요.

?

자기가 깨달음이니까.

 

근데 여러분이 없어진다는 말에 또 빠져갖고

또 몽선생 또 이렇게...

아유 참 어떻게...

 

자 그래서 항상 여러분

이 안에서 넋을 잃지 말고

이 동그라미를 지켜야 되는 거예요.

이게 보림이라는 거예요.

 

근데 이 동그라미를

동그라미요?” 하고 있으면

벌써 동그라미에 떨어진 거야.

 

동그라미가 아니고 이거예요. 이거.

어떻게 대상화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동그라미라고 그려놓은 거지

진짜 동그라미라고 하시면 안 돼.

네모라면 어떡할 거야.

 

그래서 여러분 이거를 앞으로는 열심히 보는 연습을 하셔야 돼.

이 세상이 다 내 마음이구나

이거 다 내가 본 거예요.

여러분이 그렇게 본 세상인 거야.

 

그래서 부처 눈엔 부처만 보이고

중생 눈엔 중생만 보인다는 게

부처가 되면 다 부처로 보일 수밖에 없지

부처 아닌 게 없으니까.

자기가 보는 세상에 이렇게 나타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저 사람이 실재한다고 믿는 거야.

그래서 여러분이 수십 년 같이 산 배우자도

그 사람 속을 완전히 다 모르는 이유가

내가 그 사람이 아니잖아.

자긴 자기 속을 알아요? 자기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여러분은 모든 게 실재한다고 믿고 사는

그 자기 생각의 함정 속에 빠져 있는 거예요.

근데 부처가 되면, 진짜 여러분이 깨달으면

아무것도 실재하지 않아요.

다 환영이야.

 

내가 있다라고 분별하면 있게 되고

내가 없구나 환영이구나하면 환영이 되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 잘 생각해 봐.

여러분은 이미

자기 가족은 있다고 잘 이렇게 리얼하게 만들어 놓고

한 몇 년에 한 번 보는 친구는

저거는 거의 송장이야, 허깨비 같아.

여러분 이미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기 마음속에 살고 있는 거죠.

 

동그라미하고 화살표 얘기를 내가 했지만

예를 들어

부처가 뭐냐?”고 누가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조주선사가 뜰앞의 잣나무다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뜰 앞에 잣나무다 하면

깨닫지 못한 스님은

뜰 앞에 잣나무를 생각하거나 쳐다볼 거야

그 앞에 만약에 잣나무가 있었으면

 

그러니까 여러분도 왜 뜰 앞에 잣나무라고 했을까?’라고

또 누가- 무엇을- 어떻게-

이런 논리 속으로 빠져들어갈 거예요.

근데 이게 전부 분별이거든.

 

물론 거기 뜰 앞에 잣나무가 있었겠지.

그러니까 저거다라고 말했을지 모르지.

 

근데 진짜 깨달음의 자리에서는

-뜰 앞에 잣나무라고 하든

-네 앞에 마룻바닥이라고 하든

-천장에 풍뎅이가 기어가는구나라고 하든

다 똑같은 답변이에요.

 

?

*!

이거랑 아무 차이가 없으니까.

자기가 내용에 떨어지는 차이를 만들어.

근데 내용이 안 떨어지면 다 그냥 뭐야? 화살표들이야.

그냥 생명의 움직임일 뿐이야.

 

여러분 내가 팔을 흔든다고 이게 춤이에요?

아니죠.

근데 내가 멋있게 흔들면 춤이 될지 몰라.

그러면 우리는 분별해.

저 사람은 손을 들었다.

저 사람은 춤을 춘다.

 

근데 사실은 화살표로 보는 안목에서는

춤이구나 아니면 손을 흔드는구나라는 건

다 자기 분별이라는 게 훤히 보이는 거예요.

 

그냥 더 베이직한 바탕에는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라는 화살표만 보는 거야.

화살표는 원래 날아다니잖아. 살아 움직이잖아.

 

이렇게 내용물에 떨어지지 않는 안목에 깨어나는 거예요.

안이비설신의가 만드는 내용물에 떨어져서 따라가지 않는 거야.

본질을 보는 거예요.

본질은 뭐죠?

생명이 활동하고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