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과 마음 공부에 대한 가르침을 제공하며, 특히 '오온개공(五蘊皆空)'의 개념을 중심으로 설명합니다.
- 깨어남의 시작 [02:04]: 깨어나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며, 이는 식물이 싹을 틔우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 자리 깨닫기 [03:41]: '여기'라는 개념에 대한 흔한 오해를 지적하며, 진정한 '여기'는 생각이 튀어나오는 본래의 자리라고 강조합니다.
- 오온개공의 이해 [04:25]:
- 색(色) [04:37]: '몸'을 의미하며, 현대 사회에서는 몸을 '나'라고 여기도록 강요받지만, 실제로는 생각과 느낌의 조합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몰입하는 순간 '나'를 잃어버리는 경험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 수(受) [08:22]: '느낌'을 의미하며, 사람들이 좋은 느낌을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삶의 방식을 지적합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개념을 통해 좋은 일이든 힘든 일이든 항상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 상(想) [10:40]: '생각'과 '이미지'를 의미하며, 사람들이 생각과 이미지로 인해 비교하고 규정하며 스스로를 한정 짓는 경향을 비판합니다.
- 행(行) [11:39]: '하고자 하는 충동' 또는 '의지'를 의미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려 드는 탐심(貪心)과 욕망에 대해 언급합니다.
- 식(識) [12:43]: '분별하는 마음'을 의미하며,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끊임없이 분별하는 것이 사람을 까탈스럽게 만들고 상처 입게 한다고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오온이 공함을 보고 그에 얽매이지 않을 때 자유로울 수 있음을 강조합니다 [13:42].
십우도라는 걸 아시잖아요.
십우도를 보면
처음에 막 소를 찾아서 헤매다가
발자국을 보고, 또 소를 보고
봐도 궁뎅이부터 보지, 머리부터도 안 봐요.
꼬리부터 봐.
소고삐 붙잡고
그거 하고 실랑이하다가
소를 이렇게 키우고
뭐 어쩌고
또 올라타고
뭐 이런 얘기들이 쫙 있잖아요.
근데 우리가 이 자리를 열어보니
이 자리라는 게 별게 아니에요.
보통 사람은 이렇게 흔들면 여기에 떨어져 버려요.
그런데 이 자리에 깨어난 사람은
이걸 통째로 보는 거야.
그러면 여기 뭔가 살아서 움직이고 있잖아.
이걸 통째로 보는 거야.
근데 그게
“이걸 내려놔도 있구나” 그걸 보는 거예요.
여러분 아침이 되면 세상이 딱 나타나죠.
네 그게 이거거든.
이게 있으니까 나타나지.
이거라고 하는 이거는
어떤 정해진 어떤 부분이 아니에요.
모든 것이기 때문에 이거라고 하는 거야.
모든 것이라는 개념이나 생각에 떨어져도 안 돼.
요거에도 있고 우주 전체에도 있기 때문에.
왜냐?
자기가 여기에 집중하면 요거에만 있고
이런 걸 놔버리면 우주 전체에 있는 거지.
자, 그래서 이 자리에 깨어나도
이제 그것부터가 공부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식물로 치면 싹이 난 거야.
여태까지는 그냥 땅에도 심지도 않은 거야.
또 심었어도 싹도 안 난 거고.
근데 이제 비로소 싹이 땅 위로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럼 이걸 잘 키워서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고, 해야 되잖아요.
그게 깨어난 이후에 정견법을 말하는 거예요.
이 얘기를 여기 처음 오신 분들도 있는데, 왜 하느냐 하면
여기 깨어난 분들이 상당수 계시기 때문에
그분들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마음학교에서는 이 얘기를 자주 해요.
화살표 얘기를 자주 한다고.
그러니까 뭐냐 하면
사실 동그라미라고 하면
절에 가면 동그라미 계속 그려져 있잖아요.
그리고 십우도도 보면은
십우도가 10개의 동그라미 안에 그려져 있는 그림이에요.
그럼 15도에서 제일 중요한 게 뭐예요?
동그라미에요, 소가 아니고, 동그라미라고요.
왜냐하면 이걸 발견하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
근데 그게 지금 어디 있어요?
여기 있잖아, 여기.
여기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디 생각해?
여기? 여기?
그게 아니에요
여기 ‘여’하는 여기 있어요.
왜?
여기 하는 생각이 튀어나오는 이 자리
‘여’하는 이 자리에 있다고
그게 이 자리인 거예요.
생각이 어디서 나와?
이 자리에서 나오지.
살아 있으니까 나오지, 죽었는데 나오겠어요?
자,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는 오온개공이 살면서 돼요? 안 돼요.
잘 안되거든.
자, 오온이 뭐예요?
첫 번째 색수상행식인데
[색]이 뭐라고 그랬죠?
자기 몸이야.
그럼 여러분이 몸을 나라고 여기면서
현대물질생활은 몸을 나라고 여기고 전제하고
언행을 해야 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아요.
어디 가서 줄을 섰어
그럼 몸이 나라고 해야만 그래야만 번호표를 받지.
“난 이 몸이 아닌데요.”
그럼 번호표 안 줘.
“어, 그래? 그럼 딴 데 가 보시오.”
일단 이 현대생활은 몸이 나라고 해야 모든 일이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이 안에서는 우리가 분별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야.
오온을 나라고 분별하는 걸 강요하는 세계에 살고 있다니까.
우리는 자기가 이 세상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여러분 역발상으로 생각하셔야 돼요, 앞으로는.
이 세상이, 현대 물질문명이 나를 소비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소비 당하고 있어.
열심히 돈 벌어서 써라잉.
그래야 자본주의 사회 경제가 돌아가지.
그러니까 여러분은 이 자본주의 사회경제가 돌아가기 위해서
열심히 뛰고 있는 다람쥐들하고 같은 거예요.
여하튼 몸을 나라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이 몸을 나라고 안 하기가 참 어렵지만
여러분이 끝까지 정견을 해보면
순간적으로 이 자리에 깨어나면
결국 몸이라는 것은 생각 + 느낌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돼요.
여러분 지금 자기 몸을 한번 봐봐요.
이게 익숙한 이미지 아니에요?
이미지는 생각이잖아.
그다음에 여기에 따른 느낌이 있잖아.
그거 말고 뭐가 있어요?
없어.
생각과 느낌이 조합돼서
나라는 게 가설무대로 있는 거야.
근데 내가 만약에
어떤 데 한눈을 팔고 있거나 집중하고 있으면
그때 이 몸이 나라는 생각과 느낌이 어디로 가요?
없어지잖아.
그 순간은 어떻게 된 거죠?
몰입한 순간에 나는 나를 잃어버려.
그래서 여러분이 영화관에 가서
넋을 잃고 영화를 볼 때는 여러분은 없는 거야.
그럼 어떻게 돼?
그 주인공한테 자기를 투사해서 자기가 주인공 역할을 하는 거죠.
그래야 재밌지.
그러니까 이미 우리는 이렇게
자기라는 걸 여기저기로 옮겨 원숭이처럼 옮겨 댕기고 있는
그 마음 속에 살고 있는 거예요.
근데 지금은 여기로 또 돌아왔지.
이런 걸 끝까지 정결하면 어떻게 되냐면
이것이 환상, 환영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있다고 하지만 있는 듯 없구나, 환영과 같구나.
왜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에
몸을 나라고 여기지 않고
있는 듯하지만 없다 라고 자꾸 얘기를 하냐면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
이게 뭐냐 하면
있는 듯 하지만 없다, 없다고 봐라 이 말이에요.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없다고 보라는 얘기지
그것도 해석을 잘해야 돼.
없다고 한번 해봐.
그러면 뭔 일이 일어나
그게 깨달음이야 이 소리예요.
‘없다’에 떨어지시면 안 되는 거야.
그다음에 [수], 수는 뭐예요? ‘느낌’이죠.
그럼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느낌에 또...
그 대표적인 게 뭐야?
식욕.
맛있는 집 찾아 가지, 맛없는 집 일부러 찾아가는 분 있어?
“아, 나는 마음공부를 해서 맛없는 집을 일부러...”
“비싸고 맛없는 집도 어디 있습니까?”하고 가는 분이 있냐고
없잖아요.
그러니까 벌써 그것도 욕망이야.
“이 커피는 되게 맛없네. 다음에 이거 사지 마”
이거 뭐예요?
느낌 아니야.
부부 사이에도 무슨 여러 가지가
느낌이 좋고, 이 사람하고 좋은 느낌을 공유해야 사이가 좋지
그냥 말 한마디라도 느낌이 그냥 막
복수의 불타는 언행이 오고 그러면 그거 어떻게 살아, 안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끝없이
좋은 느낌을 찾아서
이 깡통 하나 들고 동냥하러 다니는 거지와 같이 산다는 거예요.
제 말은.
근데 이러면 여러분에게 상락아정이 없다는 거예요, 문제는.
상락아정은 뭐냐하면
그 어떤 오온의, 오온 육식의 자극이
좋든 나쁘든, 이렇든 저렇든 항상 상관없이
나쁘면 나쁜 거를 아는 이 앎의 신비로움에 취해서 좋고
좋으면 또 좋아서 좋고
힘든 일이 있으면
이 힘든 일이 허공처럼 비어 있다는 것을 봐서 가벼워서 좋고
좋은 일이 있으면 또 좋아서 좋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거야.
근데 우리는 어때요?
힘든 일이 있으면 힘든 일에 휘둘려서 힘들고
좋은 일이 있으면 또 좋다고도 방방 뜨다가
오래 안 가니까 또 떨어져서
“다시 좋은 일은 언제 오나?”
또 기다리느라고 힘들고.
그다음에 [상]을 봅시다. 상이 뭐야
생각이에요. ‘생각’, ‘이미지’.
우리는 생각 이미지 갖고
얼마나 많은 분별하고
또 툭 하면 비교하지.
“아무개 신랑은 월급이 얼만데 이걸 월급 봉투라고 가져왔냐?” 라든가
또 온갖 생각으로 규정하고 한정하고
빨리 깨달으시려면
제발이지 나 자신에 대해서
그 어떤 규정이나 한정도 하지 말으셔야 돼.
그래야 자유하지.
왜 자꾸 한정하고 규정하는 데 익숙한 거예요.
“아, 쟤가 뭐, 몸도 약하고, 머리도 나빠서...” 뭐 어쩌고저쩌고.
그럼 벌써 그 소리 하는 사람은
‘나는 불행하다’는 얘기야. 안 그래요?
더 이상 물어볼 것도 없어.
왜 이렇게 자기를 빨리 한정하고 규정하길 좋아하죠?
그다음에 [행]을 보면
행이라는 게 내가 뭐라고 그랬죠?
뭔가 하고자 하는 ‘충동 의지’예요.
자꾸 가만히 못 있어
의지, 의도
왜?
가만히 있으면 지금 내가 더 행복할 것 같지가 않아.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아.
특히 한국사회 이런 사람들 많아요. 아주 병이야, 병.
그래서 열심히 주식투자를 해서 다 들어 먹어.
내 주변에서 많이 봐서 그래요.
주식만 해? 코인까지 해.
가만히 못 있어요.
근데 여러분 잘 봐요.
여러분이 탐진치를 멀리해야 깨닫는데
탐진치에 빠지지 말아야 되는데
뭔가 하려고 한다는 건 벌써 탐심 아니에요?
탐심이 있으니까 뭔가 하려고 드는 거지.
뭔가 욕망하고 있잖아요.
그다음에 [식]이라고 하는 거는 뭐냐 하면
자꾸 ‘분별’하고 있는 거예요.
저건 이거지, 아니다 저거다
좋다 나쁘다,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계속 분별하게 되면은 사람이 까탈스러워져요.
그리고 자꾸 닫히는 거야.
오로지 아주 최고의 마음에 드는 거에 대해서만 조금 열려 있고
나머지는 다 닫은 게 분별의 결과예요.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돈을 벌고, 부유하게 사는 걸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 세상이기 때문에
자꾸 분별을 해야 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돈을 더 벌기 위해서 이런 걸 합니다.
근데 설사 그거를 먹고 살기 위해서 한다 하더라도
그것에서 자유로우려면
그런 것들의 공성을 봐라, 이거예요.
쓰지만 그 쓰는 것에 매어 있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거기에 갇혀 있지 않는 거야.
이렇게 오온이 개공함을 보게 되면
결국은 지금 우리가 얼마나 자기 생각에 갇혀 있냐면
사실 불교의 일부일승라는 말이 있어요.
일부일승이라는 말이 뭐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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