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올라마음학교

[현대선105] 앎의 자리 / 피올라 현대선 16강 "정견으로 깨어있기" 4회

Buddhastudy 2025. 6. 9. 20:16

 

우리가 아기로 태어났을 때의 경험을 예시로 들며, 생각과 느낌이 없이도 편안함을 느꼈던 순간을 언급합니다 [00:08]. 이는 우리의 육식 활동이 그림자와 같은 환영이며, 진정한 '앎'은 분별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하나가 됨을 강조합니다 [01:01].

이어서 당근 명상 실습을 통해 참가자들이 스스로 20번의 당근을 세도록 지시합니다 [02:47]. 이 실습을 통해  "당근을 세는 놈은 누구였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는 바로 '생각이 분별하는 것을 지켜보는 놈', 즉 '아는 놈'임을 설명합니다 [05:14]. 이 '아는 놈'은 우리의 기억 속에 무시무적(無始無的)으로 존재해 왔으며, 지금도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06:24].

이 '앎'이 욕계(몸뚱아리), 색계(분별 생각), 무색계(스스로 빛나는 앎) 중 무색계에 해당한다고 설명하며, 우리가 평생 분별에 가려 이 앎을 보지 못하고 살아왔음을 지적합니다 [08:08]. 하지만 이 '앎'은 생명의 필요 조건일 뿐 충분 조건은 아니며, 이 앎이 끝이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10:03].

깨달음에 도움이 되는 반야부 경전, 특히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언급하며, 모든 것이 이름과 모습에 불과하다는 금강경의 내용을 설명합니다 [11:44]. 그는 '상'에 붙들리지 않을 때 비로소 법신 자리와 하나 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부처라고 강조합니다 [12:15]. 또한 반야심경의 '관자재보살'을 예로 들어, '스스로 있음을 보는 보살 존재'가 바로 우리 자신임을 역설합니다 [13:12].

마지막으로  우리가 물질 세상에서 사물에 이름을 붙여 약속하지만, 이것이 본질이 아님을 '죽비'를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14:04]. 우리는 평생 이러한 착각 속에서 살아가며, 해탈과 열반을 통해 극락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15:14]. 이 '앎의 자리'에 깨어나야 하지만, 깨어난 이후부터가 진정한 공부의 시작이며, 그 전까지는 몸부림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강의를 마무리합니다 [16:02].

 

 

, 여러분 잘 생각해 봐요.

여러분이 갓난아기, 태어나서 한 사흘 됐어.

그때 여러분이

, 나는 태어나서 이렇게 잘 누워 있구나하고 생각합니까?

, 내 몸은 편안하다고 느낍니까?

느껴요? 그래요 안 해요?

그때 여러분 뭐였어?

생각이 있어요? 느낌이 있어요?

뭐 전생을 생각하고 있어요? 뭐예요 그때는?

그게 이거야. 그냥

 

이거는 왜 여러분이 어떻게 입만열면 개구집착이고

표현하려고 하면 벌써 다 틀린 소리가 되냐면

우리 육식행동은

전부 다 이것에서 나온 아지랭이 같은 환영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림자가 햇빛을 지금 정의하겠다고 나서는 거야.

내가 햇빛을 붙잡아서 이거를 뭐라고 내가 설명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사라져.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이것과 하나 되는 방법은

이 번뇌, 망상, 분별을 내려놓으면 이미 하나거든요.

이미 하나야.

옛날부터 하나였어.

 

그러니까 깨닫기 전에, 깨어나기 전에는

이 눈 밝은 선생을 찾아가서

자꾸 귀찮게 굴든지, 다리 붙잡고 늘어지든지

나를 깨닫게 해주기 전에 넌 집에 못 간다

아니면은 정말 제 말대로

끝까지 물고 늘어지든지, 자기의 육식 활동을.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한번 실습을 한번

여러분이 정견되고 있는 자리를 제가 한번 좀 더 구체적으로 느껴보기 위해서

실습을 하나 하겠습니다.

 

당근 좋아하시는 분? 먹는 당근

싫어하시는 분?

싫어하는 분이 다행히 없기 때문에 당근명상을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렇게 이걸 치면

눈을 감고

당근을 20번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손가락 발가락을 쓰면 안 돼요.

20번 해야 돼요.

21번도 안 되고 19번도 안 돼

20번을 하는데 어떻게 하냐면 이렇게 하시면 돼.

 

당근 하나

당근 둘

당근 셋 ...

이렇게 외우시면 20번까지 착오 없이 될 거 아니야.

그렇게 천천히

근데 어떤 사람은 하도 성격이 오도방정이라

당근 하나 둘 셋 당근 하나 당근 막 이러면서

막 빨리 무슨 그거 100m 달리기 1등 해서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당근 하나 하고

당근을 한번 딱 이렇게 이미지를 연상을 해봐.

그럼 당근 둘

이번에는 또 당근을 다른 당근을 이미지로 연상하고

이렇게 해서 천천히 20번을 하시는 거예요.

그다음에 끝난 다음에 조용히 손을 들었다 내리세요.

그래야 내가 끝난지 알 거 아니야.

안 그러면 오늘 밤 샐 수 있어 아시겠죠?

네 자 시작해 봅니다.

.

.

.

 

 

좋습니다.

자 여러분이 이 당근을 20번 동안 새는 놈은 누구였을까?

저요 시간입니다.

점수 100점 맞으신 분은 이따 김밥을 두 줄 드리겠습니다.

누구였을까?

아 그건 너무 포괄적이고.

아이 뭘 어려워요?

여러분 생각이지.

생각이 분별한 거 아니에요?

 

그러면 이 생각이 분별하는 걸 지켜보는 놈이 있지 않았어요?

지켜보고 내가 지금 새고 있다는 걸 알았잖아.

 

근데 보는 놈이 있고 아는 놈도 있었죠.

봐요.

당근 하나 이미지 그리고.

다 알고 있었잖아.

당근 둘 알고 있으니까 둘이 있어서 셋으로 넘어가지.

그 아는 놈이 지금도

내가 말하는 거를 여러분이 듣고 알고 있잖아.

지금도 그 아는 놈이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그럼 이 아는 놈은 언제부터 있었어?

적어도 여러분의 기억 속에는

이건 언제부터 있었는지 몰라

무시무종이야.

지금도 있어.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이것에 재빨리 분별심이 따라가서

그 아는 앎이 지금 여기 있는 걸 몰라요.

이게 앎이 있어? 없어?

있죠.

근데 이거 들었다 내렸다는 생각에 이미 가려서

이 앎을 못 보면서 살아온 거예요.

근데 지금 이 강의를 통해서 여러분은

전부 이 방 전체가 다 앎으로 꽉 찬 거를

이제 체험하게 됐어.

 

이 칠판이 칠판이기 위해서는

먼저 그 앎이 있어야 돼? 없어야 돼?

있어야 되죠.

제가 교장 선생이 되기 위해서는

그 앎이 먼저 있어야 교장 선생님도 될 수 있어요.

안 그래요?

 

여러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볼 때

여러분의 몸뚱아리는

그 앎이 먼저 있어야

이 몸뚱아리가 얼굴이 부었네. 뭐 오늘은 이쁘네 못생겼네

이런 분별이 시작돼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그 앎이야? 몸뚱아리야?

 

그러면 여러분들은 한순간에

욕계, 색계, 무색계에서 무색계로 올라갔네.

-욕계는 몸뚱어리 가지고 사는 세계고

-색계는 분별, 생각하는 의식의 세계예요.

-무색계는 이 앎이 이 스스로 찬란하게 빛나는 세계거든.

 

적어도 욕계하고 색계는 해탈했네.

근데 아직 무색계에서 해탈을 못 했어요.

 

근데 여러분이 저 방문 나서는 순간

이 앎도 또 사라질걸.

?

분별의 마왕들이거든.

평생 해온 그 분별이

여기서 여러분을 아듀오하고서 사라져 줄까?

절대 안 가요. 또 시작할 거야.

 

이 앎, 크기가 있어요?

없죠.

이게 줄었다가 늘어났다 하나?

아니죠

더러워요? 깨끗해요?

그래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런 소리 하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이

, 이 앎이구나

벌써 생각 동원한 눈동자들이 수두룩해요.

자기 분별에 빠져서 알았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진짜 이 자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이 엄청난 이 업습을 어찌하리오.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가 못 되는 거야.

왜냐하면 이 앎이 끝이 아니거든.

아시겠죠?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자기가 있어요? 없어요?

이건 생각하기 전에도 아는 거 아니에요?

어떤 직관적으로 아는 거잖아.

그게 앎이거든.

 

근데 그 앎이 스스로에 있을까? 무엇에 의지해 있을까?

이것은 생명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모든 생명은 알고 있어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게 안다는 얘기예요.

 

강아지도 내가 주인이 가면은

반갑다고 꼬리 치는 것도 보는 순간 아는 거야.

강아지가 한번 생각하나?

, 우리 주인이 왔구나.

근데 쟤가 왜 눈이 애꾸가 됐어?

아 안과 다녀왔구나?”

이런 거 생각 안 해.

그런데 그게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여하튼 그래서 우리는 끝까지 봐라, 이거야.

그러면 내가 여러분들에게 궁금증을 하나씩 딱 놔두는 이유는

그래야 여러분이 공부하지

알았다고 또 분별 속에 떨어져서 돌아갈까 봐, 걱정이 돼서 그래요.

 

자 그래서 우리는 사실 반야부 경전이 깨달음에 가장 큰 도움이 되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게 금강경하고 반야심경이잖아요.

근데 사실 둘이 같은 얘기야.

근데 금강경은 뭐라고 하냐면

모든 게 이름과 모습에 불과하다

이런 얘기를 자꾸 하는 거예요.

 

그래서 약견제상 비상이면 즉견여래라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이 아닌 것으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뭐 이런 게 다 뭐냐 하면

제발 상 좀 붙들지 말아라이 얘기 아니야.

그럼 상을 안 붙들면 뭘 어쩌자는 거야?

그래야 여러분의 법신자리, 생명자리를 보고

하나 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이게 부처거든.

 

부처가 딴 게 아니에요.

이게 부처야

이게 부처고

이게 부처라고요.

 

반야심경에 관자재보살이하니까

벌써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이지

그 관세음 보살이야하고 또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어.

벌써 자기 분별 속에 한참 빠져 있는 거야.

 

1구 소식은 내가 말도 안 하고

2구로만 얘기해도

_ 보는

자제_ 스스로 있음을 보는

보살_ 존재

 

여러분 아니야.

그러니까 여러분이 관자재보살이야.

그 왜 하필이면 관자재 보살을 거기에다 갖다 써놨는지 생각해 봐요.

 

자재_ 스스로 있어.

그걸 관하고 있어. 알고 있잖아.

그런 존재가 또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거야.

행심반야 바라밀다를 하는 거야 또.

할 필요도 없는데.

그래갖고 또 조견오온 개공을 또 해야 돼.

 

그러니까 여러분 봐요.

드디어 이거 써 먹을 때가 왔네.

이거 이름이 뭐예요?

이거 이름이 뭐냐고 했더니

여러분 죽비라고 그래요.

 

우리가 이 물질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

이거를 죽비라고 다 우리는 약속을 한 거잖아요.

근데 만약에 저 아프리카 토인을 하나 여기 데려다 놨어.

이 사람이 이거 처음 봐.

그러면 그 사람이 이걸 뭐라고 그럴까? 죽비라고 할까?

저게 뭘까? 막대기를 들고 저러네그럴 거 아니에요.

 

그 사람한테는 막대기야.

그러면 여러분은 순식간에 뭐에 떨어진 거야?

자기의 분별에 떨어진 거예요.

저것은 죽비다라고 하는.

 

근데 여러분 잘 봐요.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저것은 뭐다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었던 적이 있어요? 없어요?

그럼 뭐에 갇혀 떨어져서 그 착각을 일으킨 거야?

자기 생각에.

 

근데 무서운 것은

우리가 평생 이짓을 하면서 사는데

그걸 모르고 있다라는 사실이에요.

자기는 이 육체다

살다가 죽는다.

세상은 살기 험하고 걱정, 근심, 고해 속에 있다.

 

그런데 부처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제행무상 제법무상

끝에 뭐야? 상낙아정이 있다고 그랬잖아요.

해탈 열반하면

상락아정이 뭐예요?

극락이라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이 같은 정말 복음이 없어요.

기독교에서 복음 복음 하는데

복음 중에 왕 복음이

바로 백천만겁 난조우의 불법이라.

 

우리가 이 자리에 깨어나야 되지만

그러나 깨어나고 난 다음에

이제는 여러분들이

이 완벽히

깨어난 것은 사실 공부의 시작인 거야.

 

이 자리를 보기 전에는

이 자리에 깨어나기 전에는

그건 공부도 아니야.

몸부림이지.

좀 심한 말로 지랄을 한 것뿐이에요.

근데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거야.

 

아 가만히 있어 봐.

이게 몸부림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이게 이거구나.”

그럼 이제부터는 정상적인 공부를 해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게 깨어난 이후에 공부법입니다.

지금부터 10분 쉬고 2부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