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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THATch] 관념 기계의 이해 (2/2)

Buddhastudy 2025. 4. 9.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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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관념 기계'로 비유하며,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얼마나 기계적인 반응에 익숙해져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기계성을 어떻게 자각하고 초월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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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지에프를 인용해

관념기계를 이야기하려고 한 이유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실상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기계적 반응을 의식할 수 있어야

각성 수행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기계적인 반응으로 일상을 채우고 있는지

그 퍼센테이지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기계적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계적 반응 자체를 의식하지 못하면

거기에 무엇을 더해도 모두 기계의 재료와 구조가 될 뿐입니다.

 

자각을 더하면 자각을 추구하는 기계가 될 것이고

지혜를 더하면 지혜를 탐구하는 기계가 될 것입니다.

마음공부를 더하면 마음공부를 하는 AI가 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마음공부를 하면서

쉬운 말로는 에고로부터의 해방,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죠.

에고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기계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는 기계

어쩐지 좀 스산한 느낌이 들죠.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마음공부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풀린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관념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

실제로 알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알아보려면 자신이 기계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거기서 최소한 반 발짝 벗어나야 가능합니다.

 

우리가 깨달음의 단계를 말할 때

이 수준이 바로 상사각입니다.

그전까지는 모두 관념적 이해에 불과합니다.

 

AI가 스스로 저는 ChstGPT입니다라고 한다고 해서

자기가 AI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일까요?

 

사실상 기계인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의식하기 위해서는

현재 자기라는 존재를 구동하는 기계적 작동에 대해

관조적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구도자들이

자신의 에고만 제쳐두는 방식으로

자신의 기계성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그 구도자들은 구도 기계로 남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생물과학의 발전 덕분에

인간 유기체의 구조와 기능 법칙을

그 어떤 시대보다 많이 알고 있죠.

또한 사회과학과 심리학의 발전 덕분에

인간기계가 어떤 식으로 사회나 개인과 연결되고 의존해 기능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과학적인 방법은

바로 의식을 통한 관조의 길입니다.

수천년의 전통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결과를 만들어 온 깨달음 전통의 방법을

과학이라고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이나 종교와 달리

깨달음 전통은 분명한 목표와 경로, 방법을 제시합니다.

동일한 방법을 동일한 조건에서 적용하면

동일한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과학입니다.

 

대승불교의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는

인간이 그 기계성을 벗어나 의식성으로 진보하는 데 필요한

기초지식과 적용방향, 실행방법에 대한 과학 이론입니다.

 

그것을 종교적인 교훈이 아니라 과학으로 본다면

많은 것들이 달리 보일 수 있습니다.

기계라는 말처럼 과학이라는 말도

우리 시대의 인류에게는

매우 편협한 선입견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고통을 자각함으로써

인간이 수도의 길로 들어선다고 합니다.

그냥 그런가 하고 바라보면 제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기계는 고통을 알지 못합니다.

고통을 자각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신의 기계성에 대한 통찰입니다.

 

인간의 삶이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에 대한

진지한 자각, 주체적 자각은

막연한 고통, 일반적인 관념과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그 시작을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요?

유식학에서는 다문훈습으로 시작한다고 합니다.

불교의 수행을 문- - 수라고도 하죠.

듣고,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어쩔 수가 없죠.

왜냐하면 우리가 기계, 특히 관념기계이기 때문입니다.

 

인쇄기나 전자기기에 물을 부어서는 안 되듯

사람은 생각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실존의 전환, 자신에 대한 이해는

맨 처음 언어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일상의 우리들은

언어 체계의 그물에 포박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그 언어로 진리를 전할 수밖에 없지만

그 언어란 관념기계의 구조이자 재료인 것이죠.

 

우리의 언어 체계의 가장 강력한 특징이자 핵심적인 특징은

언어가 그에 대응하는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하도록 설계되었고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관점에서는 실체라고 하는 것이 없는데

우리 언어는 실체를 전제함으로

존재의 진실을 은폐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언어 체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계성을 이해하려고 했는데

우리는 전자기기나 인쇄기가 아니고

관념 기계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른바 세상의 언어가 갖는 특성은

우리의 기계성을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세속이라는 말의 인도 원어인 쌍브리띠는

덥다’, ‘감추다라는 뜻을 지닌 말이기도 합니다.

 

언어와 관념을 해체해야 자기 기계성을 알 수 있다는 건데

이쯤 되면

인간보다 AI가 깨닫기 쉽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보자면

우리가 기계성을 벗어난 의식성으로서의 진리를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실체적 관념에 미혹당하고

그 필연적 결과로 카르마와 괴로움이 생깁니다.

결국 몰라서 괴로움을 당합니다.

시작을 또다시 관념을 듣고, 생각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한다면

벗어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깨달음 전통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스러운 언어에 자주 친숙해짐으로써

그 사람의 심층 심리를 기계적으로 제어하고 있는 세속의 언어 체계

그 자체를 다른 체계로 바꿔 나간다.

기계의 작동 원리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가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실체적 사고에서 연기적 사고로 바꾸는 방법이 바로

문사수, 듣고 이해하고, 적용하기입니다.

 

사람이란 욕망과 생각,

그리고 그 결과로 나오는 행위들의 어떤 정해진 유형입니다.

몸은 하나의 물질적 사물이고

변하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마음은 정신적 습관들, 생각과 감정의 방식들이

어우러진 하나의 틀에 불과합니다.

 

관념기계는 그것을 바꾸려면

표면으로 끄집어 올려서 조사해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금까지의 습관과 방식의 틀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마음이라는 소프트웨어를 작동하는

전기 에너지라는 배경을 찾아내려는 것입니다.

움직이는 마음 너머의 자각을 발견하려는 것이죠.

 

깨달음 전통은

마음 너머의 자각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작동하는 유일한 하나의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본래의 우리라고 합니다.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 목표를 잊지 않아야 하고

오늘 인간기계, 관념기계를 이해하려는 이유도

다시 명확히 짚어야 합니다.

 

인간기계

인간을 기계로 통찰할 수 있는 용기가 첫걸음입니다.

관념기계

인간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것을 제대로 고쳐서 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빼고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탐구하는 자기 관찰, 즉 이해와 자각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제쳐둘 수 없는 필수 과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