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Danye Sophia] 말장난으로 도통한 수행자들! 공空으로 현혹한 2천년 세월!

Buddhastudy 2021. 11. 12. 18:47

 

 

 

불교철학의 대표적인 것으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제법공상(諸法空相)이 있습니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라고 직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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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텅 비어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공이란 단어는 한자로 풀이하면

형태는 있지만 그 속은 비어 있다가 됩니다.

 

마치 축구공처럼 거죽은 있지만

그 속이 비었다는 얘기입니다.

 

입자물리학의 예를 들면

원자핵과 전자 사이의 공간이 비어있는 것을 말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삼라만상이 뭔가 형상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성질이 공하여 무상하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러면 질문을 하나 해보겠습니다.

우리의 눈앞에 축구공이 있는데, 이건 있는 겁니까?

아니면 없는 겁니까?”

 

분명히 보고 만져지니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축구공이 오랜 세월을 지나 분해될 것이어서 공하다는 건가요?

아니면 축구공을 소립자로 쪼개면 공하다는 건가요?

그것도 아니면 가죽과 화학물질의 일시적 인연에 의해 존재하므로 공하다는 건가요?

도대체 축구공의 어떤 점이 공하다는 건가요?

 

공하다는 표현은

대승불교의 모든 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공, 법공, 구공으로 방대한 대승철학을 결론짓고 있으니까요.

 

나도 공하고 만물도 공하고, 이런 공하다는 것도 공하여

무상하고 무주한 경지를 지향합니다.

 

이처럼 대승불교는 공을 만능키로 삼아

철학과 수행을 풀어나갑니다.

 

나를 비롯해 삼라만상 모든 것이 공하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 견성하고

마음이 공과 같아질 때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진아나 불성은

바로 공화된 마음자리를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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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싯다르타는 생전에

공하다는 표현을 즐겨 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가리켜 공아(空我)라 하지 않고

무아(無我)로 단정 지었습니다.

 

다시 말해 싯다르타는 논리의 근간인 유와 무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무아를 알 수 없었던 수행자들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공을 끌어왔습니다.

공으로 풀어야 설명이 되는 까닭입니다.

 

나는 없다는 무아를 공아로 바꿔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로 해석해야 연기론과도 맞고

이 위에 방대한 불교철학을 쌓아 올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무아를 고집하면

존재의 문제와 수행의 문제에서 막혀 버립니다.

 

유물론의 흑백논리에 의해

철학과 수행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어쩔 수 없이

무아에 해석을 가미했고

이때 가장 적합한 공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수학의 공리에 문학을 넣은 것과 같은

커다란 오류입니다.

 

이 실수에 의해 수행자들은

수천년 동안 아공, 법공, 개공의 희론에 속아

세월을 낭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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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단적으로 말해

1원인을 찾아 실존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가 풀립니다.

 

공한 상태가 되어

열반과 해탈을 아무리 오간들

그냥 무심한 돌멩이에 불과합니다.

 

가령 축구공이 있을 때

이것을 가장 단순하게 파악하는 방법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즉 유와 무로 나누는 것이지요.

 

유와 무로 따져 들어가면

존재란 어디서 왔는가?”라는 본질적인 물음이 나오고

결국 제1원인에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실존이 화두로 잡히면서

나는 누구인가에 초점이 맺히게 됩니다.

 

1원인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구조입니다.

그래서 공같은 모호한 단어를 쓰면 안 됩니다.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유와 무를

1원인의 측정 도구로 써야 합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무와 유보다 더 단순한 구조를 탐구해야 합니다.

 

과거엔 유무보다 단순한 것을 떠올릴 수 없었지만

1920년대에 시작한 양자역학으로부터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고 있습니다.

 

소립자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상태중첩과

이것을 이용한 양자컴퓨터는

유무보다 더 단순한 구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유와 무의 경계가 사라진 제3의 존재 형태

여기서 제1원인의 문고리가 드러납니다.

 

만일 공이란 단어를 꼭 쓰고 싶다면

바로 유무에서 자유로워진 제3의 존재 형태로 정의하는 것이

적합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공은 문학에서 탈피해

수학적 논리를 띠는 것은 물론이고

차원의 한계마저 뛰어넘는 깨달음의 단초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시점에

싯다르타가 왜 무아의 화두를 던졌는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싯다르타는 왜 무아를 던져

수행자들이 그토록 싫어하는 유와 무를 끄집어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