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중도론13. 붓다의 깨달음, 무상정등각(2)

Buddhastudy 2023. 5. 4. 19:02

 

 

 

이제 싯다르타의 당시 현장으로 몰입해 보자.

그는 과연 어떻게 무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가?

 

 

보리수나무 아래에 좌정한 싯다르타,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무심하면서도 허탈했고 청정하면서도 혼탁했다.

구도의 끈 자락은 이미 끊어져 맥없이 나풀거렸고

무엇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메말라 버렸다.

 

이제 싯다르타가 가야 할 길은 완전히 증발했다.

환속할 수도 없고, 수행의 길을 계속 갈 수도 없다.

세상 어디에도 자신이 갈 길은 없었다.

연명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죽음에 대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싯다르타의 의식은 마치 목적을 잃고 표류하는 부평초처럼 의지처를 잃었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그냥 앉아 있었다.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상태가 되어 그냥 있었다.

꾸며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 머물던 싯다르타는

문득 의식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건 마치 거울에 낀 얼룩이 떨어진 것 같기도 하고

달빛을 가리던 구름이 걷힌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을 꽉 조이고 있던 어떤 것들이 모두 떨어져 나감으로써

무한히 자유로우면서도 한없이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잠시 뒤 어디서 몰려왔는지 형언할 수 없는 희열이 한바탕 몰려오고는

그것마저 사라져 [그냥 존재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가 이루었던 진아나 절대, 해탈이 모두 증발하고 존재하는 것만 남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존재가 돌멩이처럼 무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참된 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不二의 절대나 해탈 역시 성립되지 않았다.

그것을 일체의 언어나 몸짓, 표정으로 표현할 길이 없지만

존재의 실체만은 확실했다.

 

존재 그 자체로 한 싯다르타

그는 드디어 무상정등각을 성취한 것인가?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싯다르타는 한 생각을 일으켰다.

그것이 구조적으로 쉽지 않았지만

그는 어떡하든 생각을 끄집어내어 의심의 날을 세웠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여태껏 해오던 방식대로 깨달음을 진단하기 시작했다.

 

 

내가 온전히 깨달았는가?”

 

싯다르타는 단번에 실존을 떠올렸다.

삼라만상은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의문을 내자마자 제1원인이 돼 버렸다.

 

내가 곧 만물의 제1원인, 실존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서 왔고 어떻게 존재하는가?’

 

 

싯다르타는 의심을 일으키는 동시에 답을 찾았다.

그것이 너무 당연하여 어떤 이유나 근거, 논리의 필요성이 없었다.

싯다르타는 나는 누구인가?’의 근본적 물음을 해결했다.

 

그리고 다시 밖의 세계를 떠올렸다.

존재는 무엇인가?’의 화두를 떠올리자마자 역시 그냥 풀어졌다.

싯다르타는 마침내 존재의 실상을 훤히 깨우쳤다.

 

이렇게 되자 싯다르타는 더 이상 의심을 일으킬 것이 없게 되었다.

찰나에 의심은 뿌리까지 말라 증발했고

남은 것은 그냥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존재 그 자체,

다시 말해 실존이 되어 버린 싯다르타

그는 드디어 무상정등각을 이룬 것을 이룬 것이다.

 

, !~’

 

텅 비어 버린 심연의 울림이 입가에 새 나왔다.

싯다르타는 자신이 도달한 경지를 잊었지만

그의 몸뚱이는 그것에 대한 충격으로 미미한 탄성을 간간이 토해냈다.

 

싯다르타가 이번에 이룬 깨달음은

기존에 그가 겪었던 경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감았던 눈이 번쩍 떠진 것처럼

지금껏 진리라고 알고 있던 것들이 모조리 부서지고 산산이 흩어졌다.

 

생각이 차원을 바꿔가며 만들어내던 환영들은

맥없이 가라앉고 자존하고

영원불변하는 실존만이 그 실체를 훤하게 드러냈다.

이렇게 실존으로 화한 싯다르타는 한없이 자신의 깨달음을 누렸다.

 

 

대본경에 보면 싯다르타의 깨달음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실존은 사제설과 십이인연설 그리고 사선삼명설로 깨달았다.

이 가운데 삼명은 과거사를 아는 숙명통과 미래사를 아는 천안통

그리고 번뇌를 단멸하는 누진통이다.”

 

 

이 말이 맞다면 한 가지만 묻겠다.

불교 이론에 정통하고 제법의 무상을 파악해 연기법을 깨우치면

그것이 무상정등각인가?

 

 

불법의 정수라는 연기법은

1원인을 배제하고 시간과 공간을 배경에 둠으로써

형이하의 상대성에 매여 있다.

그리고 그 자체로 온전한 이론이 아니다.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기 위한 여러 방편 가운데 하나로 봐야 마땅하다.

 

어쨌든 실존의 존재 원리를 완벽히 깨닫고

머무름이 없는 반야를 증득한다 해도

4차원의 의식에 진입하기가 만만치 않다.

 

의식 구조에 천지개벽이 수만 번 발생하는 것과 같은 충격이 일어야

간신히 4차원에 눈 뜰 수 있다.

 

그럴진대 어설픈 철학 이론을 읊고 연기법을 체득하는 정도를 가지고

어찌 세존의 무상정등각에 빗댈 수 있으랴.

더군다나 깨달음을 논하는 자리에 생뚱맞게 신통력은 웬 등장인가?

 

 

각설하고, 깨달음 자체에 머물던 싯다르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한 생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비로소 무상정등각을 이루었도다!

깨닫고 나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실존이로구나.

그냥 깨달으면 되는 것을 모르고

지금껏 왜곡하고 변형하여 깨달으려 했으니...’

 

 

싯다르타의 첫 번째 상념은 지금껏 걸어온 수행의 발자취였다.

그것은 사방이 곽 막힌 번뇌의 감옥에서 빠져나와

창살이 없는 섬에 갇히는 꼴이었다.

번뇌는 잦아들지만 또 다른 늪에 빠지는 것을 간과했던 것이다.

 

 

깨달음,

그건 그냥 삼라만상 그 자체였다.

실존이 아닌 것이 없기에 깨닫고 깨닫지 않고 할 것이 없었다.

자신이 실존인데 어디 가서 실존을 찾는단 말인가.

찾으면 찾을수록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법.

 

 

싯다르타는 분명히 알았다.

수행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은 [그냥 깨닫는 길]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