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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고대 이집트 역사 12: 이집트 비밀무덤, 네페르티티

Buddhastudy 2023. 5. 17. 20:17

 

 

 

고대 이집트의 역사는 시기에 따라 그리고 왕조에 따라

여러 구간으로 나누는데요.

 

신왕국이 접어드는 시기는 기원전 16세기 무렵

150년에 걸친 힉소스인들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면서

신왕국 시대가 열렸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던 이집트로서는

신왕국 시대가 열리는동안 커다란 정치적 격변기를 겪으며

무덤에서도 피라미드 상태에서 벗어나 변화가 생겼고

갖가지 예술면에서도 개화기가 도래하게 되었죠.

 

이전에는 많은 인력을 동원하여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건축물을 쌓아 올리는데 평생을 바치는 파라오들이었다면

18왕조의 3번째 파라오인 투트모세 1세 때부터는

지상에 무덤을 세우는 대신, 골짜기나 절벽에 암반을 뚫어

비밀의 분묘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암벽 무덤뿐만 아니라

나일강 계곡을 따라 신전과 사당 등이 세워지기도 했죠.

 

왕실의 무덤은 10분 세계사 고대 이집트 역사 6편에서도 다룬 적이 있는데,

이른바 왕들의 계곡으로 불리는 곳에서

석회석 암벽을 깊이 파서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무덤 입구의 암벽 표면에만 표시를 해두고

눈에 띄는 외부 구조물은 없는 비밀장소가 되었죠.

 

계곡의 밑바닥을 파거나, 깎아지르는듯한 암벽 위의 굴을 파며 만들어간 무덤들은

내부 장소가 길게 들어서 있는 편으로

입구에서 가장 깊은 곳까지는 약 100m가 되기도 했습니다.

 

암벽 무덤은 왕족뿐 아니라 귀족계급에서도 사용하게 되었는데

도굴을 피하기위해 복잡하게 미궁을 만들거나

혹은 회랑 내부에 가짜 문이 달린 사당을 만들기도 했죠.

이집트 파라오들에게는 항상 도굴꾼들이 골칫거리였는데요.

고왕국 시절 후기 때는 대다수의 피라마드들이 전문 도굴꾼들에게 거의 다 털렸다고 합니다.

 

훔쳐간 부장품들은 되찾기가 어려웠지만

파라오들은 자신의 무덤을 건설하는 임무와 함께

털린 피라미드에 대해 수선하면서

헝클어진 미라를 다시 수습하고 재봉인 하는 일도 추진하였죠.

 

하지만, 피라미드를 수선하고, 미라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도

돈과 인력이 많이 소요되면서

결국 복잡한 절차는 포기하게 되고,

차라리 아직 부서지지 않은 미라를 한곳에 모아서

땅속에 석실을 세워, 그냥 공동묘지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선대 파라오, 왕비, 왕족 등의 미라들을 거둬들이고

다시 재봉인하며

부장품들이 없이 미라들만, 은신된 공동묘지에 묻었죠.

 

시간이 지나며 도굴꾼들에게는 귀중품들과 부장품들이 없는 시신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묘지화된 은신 무덤은 현대 시대까지 살아남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도굴꾼들이 기존에 파헤쳐간 왕족의 미라는

, 다리가 없어지거나

가슴벽이 무너져 내부가 드러나기도 했는데

이는, 미라 속에 보물이 있나 마구잡이로 찾아보기도 했던 거죠.

 

결과적으로는 귀중품이 없어 도굴가치가 없었던 공동묘지화 미라는

오랜 세월 동안 보존할 수 있게 되었고

현시대의 시대의 박물관에서 많은 미라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시, 파라오의 명령에 따라 미라의 공동묘지화 작업을 주로 맡았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들이었으며

미라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부장품들은

국가 재정으로 쓰거나

사제들이 관리하며 사제들 개인의 부가 축적되기도 했죠.

 

신왕국의 막바지인 기원전 1000년쯤에 가서는

20왕조 마지막 파라오 람세스 11세 때

자신의 무덤도 왕가의 계곡에 만들긴 했지만

정작 본인은 그곳에 묻히지 않게 됩니다.

 

버리게 된 KV4 무덤은 이후, 파라오들의 미라를 새로 염습하고

남은 부장품을 국가 재정으로 활용하기 위한 작업장으로 쓰이기도 했고

오랜 세월이 흘러서 기원후에 접어들어서는

은자들의 은거지로도 활용되었습니다.

 

은자라는 말은 사막에 사는 자를 의미하는데

초기 그리스드교에서 3세기에 이집트나 팔레스타인에서 고독한 수행을 하는 자들을 뜻했죠.

 

 

 

고대 이집트의 중왕국 시절 이후,

2중간기 동안 100년 이상 이민족인 힉소스인들에게 지배당했던 이집트인들은

저항전쟁을 하는데 있어, 파라오들의 군사훈련과 함께

정신적으로는 아몬신을 내세워 전투력을 결집시켰습니다.

 

신앙을 내세우며, 다시 권력을 차지한 순수 이집트인의 제 18왕조는

지속적으로 아몬신을 통한 이집트인들을 결집시킬 시각적인 효과가 필요했으며

그로 인해, 신전 건축에도 공을 들이게 되었죠.

 

이집트의 옛 영토를 회복한 파라오들은

이제는 그 영역을 팔레스타인, 시리아 등의 서아시아로 영토를 넓혀가게 됩니다.

신관들은 전쟁의 승리에 대한 위대함을 더욱 더 아몬신의 공으로 돌리며

전쟁터에서 가져온 전리품들을 신전에 바치게 하였죠.

 

이로 인해, 시간이 지날수록 제사장의 권력이 커져 갔고

이는 신전의 화려한 내부시설, 웅장한 크기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신전은 거대한 현관으로 시작해,

신전 내부 깊은 공간에는 파라오와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요

마당에는 열주가 늘어섰는데

열주는 지붕 아래 대들보를 받히며 일정한 간격으로 줄지어 세워진 많은 기둥을 의미합니다.

 

신전의 벽, 그리고 기둥과 교각에는

화려한 색으로 칠해진 상형 문자와 회화 벽화들의 조각 등이 있었는데요

이집트 장식의 주제는 독수리와 같은 상징적인 주제들과

종려나무 잎, 파피루스 식물, 연꽃의 꽃봉오리들도 나타나 있어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떻게 생활했는지

어떤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했었는지에 대한 추측을 할 수 있기도 했죠.

 

신전 건축은 크게 예배용 신전과 장례용 신전으로 구분되는데요

예배용 신전은 예배의 대상인 신상을 모신 곳으로

기술적, 미적으로도 당시 수준에서 고도로 발전된 형식을 이루었고

장례용 신전은 죽은 왕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의 역할로

대부분 서부 테베의 변두리 사막지대에 건축되었죠.

 

유명한 신전들로는 아멘호테프 3세 치세 때 착공된 룩소르 신전과

건축물 짓기를 좋아하던 람세스 2세 때 지어진 아부심벨 신전이 있습니다.

 

룩소르 신전, 다른 말로 룩소르 사원은

오늘날 룩소르로 알려진 나일강 동쪽에 위치한 거대한 고대 이집트 사원 단지입니다.

아멘호테프 3세 때부터 시작되어서, 투탕카멘, 람세스 2세에까지

확장 작업이 진행되었던 곳이죠.

 

룩소르로 알려진 도시는 기원전 2100년경부터 오랫동안 이집트의 수도였는데

그리스식 이름에서는 테베로 알려졌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 작품에서

테베는 백 개의 문을 지닌 도시라고 묘사되기도 했죠.

 

이곳은 세월이 지나서, 기원 후의 로마에서도 중요한 장소로 간주하였고

룩소르 신전 중 몇 개는 기독교 교회로 개조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나폴레옹이 정복 활동을 펼치는 중에서도 이집트에 왔을 때

룩소르에서 고고학적 흥미를 일깨운 곳이기도 했죠.

 

아부심벨 신전은 천연의 암석을 파서 지은 신전인데,

신전 정면에는 거대한 좌상이 위치하고

기둥이 있는 회랑 2개가 현관으로 이어져 있으며

거대한 조상과 수많은 오벨리스크 등으로 구성되어 있어

이전 시기의 건축 및 조각품들을 집대성한 커다란 규모의 신전으로

현재는 관광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고왕국 피라미드 시절부터 신왕국 비밀무덤과

신전에 이어지는 벽화의 이집트 회화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변화가 이어져 왔는데요

고왕국 시절만 하더라도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문자를 쓰는 기술을 잘 구사하는데 중요성을 두어

왕권을 상징성을 잘 나타내고 정해진 약속을 잘 따라야만 했기 때문에

독창성은 필요치 않았죠.

 

하지만, 신왕국 시기에 접어들며

회화와 조각은 좀 더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며

고전적 규범에서 조금씩 탈피되기도 했습니다.

 

신왕국 시대 제18왕조 시기였던 기원전 1400년경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풀 속의 새 사냥이라는 작품에서는

사람의 모습은 이전 작품들처럼 그려져 있으나

새를 묘사한 부분에서는 그 정교함이 상당히 세심했죠.

 

당시, 예술가들의 대단한 관찰력으로 보여진 디테일은

오늘날의 조류학자들이 이 새를 보고 을 알아맞힐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 년전의 화가들도

관찰력과 테크닉, 그리고 표현력들이 상당한 수준이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이집트 미술 작품 중, 또 다른 유명한 작품을 소개하기 전에

잠시 현대 사회의 우리나라 이야기를 해볼까요?

2018년 서울 용산구에 지어진 아모레 퍼시픽 본사는

세계적인 건축상 세계 최고의 고층건물상으로

국내 건축물 최초로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이 건축물을 디자인한 건축가는

영국 건축가 데이비드 치퍼필드라고 합니다.

 

그는 2007, 베를린의 노이에스 박물관을 보수공사 이후

재개관하여 유명세를 보이기도 했는데

이 박물관이 더 유명한 이유로는

바로 네페르티티 흉상이 있기 때문이죠.

 

네페르티티는 제18왕조 후반기 파라오 이크나톤의 왕비였으며

그녀가 살았던 시기는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큰 변혁을 보여준 시기였던

18왕조의 이크나톤 왕이 재위한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크나톤이 건설한 새로운 수도 아케트아텐을 중심으로

미술에서도 반전통적 경향을 짙게 보였는데요.

아케트아텐의 현재 이름을 따서, 그 시기를 아마르나 시대라고 하는데

아마르나 시대 때, 가장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는 그의 치세는 후대 왕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예술에서만큼은 발전된 형태를 보였죠.

 

아마르나 미술의 대표작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아름다운 왕비의 모습을 화려하게 재현한 조각인 네페르티티 흉상인데요

이크나톤 시대 때는 오랜 세월 동안 통일된 양식으로 계승된 이집트 미술을 깨뜨리고

인물상에는 초월적인 신의 모습이 아닌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했습니다.

 

네페르티티 흉상에서는 인체의 비례와 조화를 대표하는데

뚜렷한 윤곽선과 날렵한 콧날

신이 아닌 인간 모습의 여인의 아름다움을 나타내었죠.

 

네페르티티 라는 이름은 미인이 왔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

그간 근친혼으로 일관해왔던 이집트인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온 이방인임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 이집트 왕가의 전통적인 혈족이 아닌 고위층의 딸로 추측하고 있죠.

 

네페르티티 흉상1912년 독일 고고학 탐사팀이 발굴했는데

이를 두고 당시 히틀러는

투탕카멘을 발굴했던 영국 고고학팀에 비교하는 의미로

독일인의 영광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현재는 이 작품의 소유권을 두고서

독일과 이집트의 신경전이 펼치고 있습니다.

 

전 이집트 대통령인 무바락 대통령은

독일에 국빈방문 중 노이에스 박물관에서 이 작품을 보고서는

이집트를 알리는 위대한 외교관이라는 찬사를 남기도 했었죠.

 

오늘은 고대 이집트 역사 12번째 시간으로

지난 시간에 이어, 이집트 유물과 미술작품에 대한 이야기로 꾸려봤습니다.

 

역사와 미술의 관계는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어

많은 건축물들과 회화, 조각들의 발전은

그 나라의 역사, 정치와 그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죠.

 

고왕국 시절, 피라미드 건축과 같이 경직된 시대부터

신왕국 시절의 획기적인 아마르나 시대까지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