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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UN이 인정한 세계최초 대왕, 페르시아 키루스 대제

Buddhastudy 2023. 7. 27. 19:59

 

 

 

이란은 멕시코 정도의 큰 면적을 갖고 있는 국가로

대부분의 인구는 페르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란은 오랫동안 외부에서 페르시아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는데

1935년 팔라비 왕조의 레자샤가

국호의 명칭을 공식적으로 페르시아에서 이란으로 바꾸었죠.

 

이란의 역사는 아주 오래전 엘람과 메디아를 거쳐

기원전 550년경에는 지금까지도 그 이름이 유명한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이란의 고대 왕조인 페르시아 제국의 탄생과

세계최초의 대왕이라 불렸던 키루스 대제에 대해 다루어 볼 건데요.

기원전 6세기 중반, 오리엔트 사회는

공포의 아시리아가 멸망한 후

4개의 강대국을 중심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중 바벨탑으로 유명한 신바빌로니아가

네부카드네자르 2세 통치시기 때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으나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사후에는

신바빌로니아의 위세가 한 풀 꺾이게 되었죠.

 

신바빌로니아에서는 금융업으로 영향력이 강해진 은행가와

정치적 기둥인 신관 세력 간의 다툼이 시작되었고

이를 두고 보고 있었던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혼란을 틈타 군대를 일으키게 됩니다.

아스티아게스가 신바빌로니아의 상업 요충지인 하란을 뺏으려 하자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도스는

때마침 메디아로부터 독립을 꾀한 페르시아에게 동맹을 요청했죠.

 

메디아의 왕 아스티아게스는 하란을 공격하려다

페르시아의 역습으로 허를 찔리게 됩니다.

 

속국으로 있던 페르시아의 왕은

다름아닌 자신의 외손자 키루스 2세였죠.

이 둘은 핏줄이었지만 서로를 공격하는 사이가 된 자세한 경위는

채널 내 재생목록 10분 세계사에 있는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 편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메디아의 왕은 외손자와 맞대결을 벌였지만

한창 혈기왕성하고 뛰어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던

키루스 2세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죠.

 

이로써,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닦은 메디아 왕국은

130여년간 존속하다가 키루스 2세의 페르시아에게 통째로 헌납하게 됩니다.

 

한편, 오리엔트 4대 강국 중 메디아의 우호국이었던

리디아의 국왕 크로이소스는

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는데요.

예전에는 메디아와 리디아가 사이좋게 지냈기 때문에

리디아의 왕녀가 아스티아게스에게 시집을 갔지만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좀 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싶어했습니다.

 

소아시아의 남서부, 지금의 터키에 위치한 리디아는

에게해 지방의 통상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부유한 나라였는데요.

리디아인들은 고대 최초의 철기문화로도 알려진

히타이트의 후손이라고도 합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재위 시절

에페소스를 시작으로 이오니아와 아이올리스를 비롯한

그리스 도시 국가를 차례대로 정복하기도 했는데요.

강대국이었던 리디아에는

그리스의 현인들이 크로이소스를 자주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부를 축적하여 부자나라로도 유명했던 리디아에서

왕인 크로이소스는 부자나라 왕답게

그리스에서 찾아온 온 손님들에게 막대한 부를 자랑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그중 고대 그리스 민주정의 기초를 닦은

솔론과의 대화에서 금의 가치에 대해 부정당하기도 했습니다.

 

크로이소스가 나보다 부자고 행복한 사람이 어딨냐고 물었을 때

솔론은 금보다 중요한 것이 있으며

죽을 때까지 지금의 행복이 계속되진 않을 거라 했죠.

 

그러던 중, 크로이소스는

메디아가 페르시아에게 먹혔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는 리디아 출신의 왕녀가 있던 국가가 쿠데타를 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침공을 해도 된다는 구실을 만들게 됩니다.

 

크로이소스는 페르시아를 공격하기로 하고

그 결과에 대해 델포이 아폴론 신전에 가서 신탁을 받았는데요.

신탁의 답변은 강력한 제국이 무너질 것라는 내용이었고

이에 크로이소스는 강력한 페르시아가 무너질 것이라 확신을 하게 됩니다.

 

크로이소스와 키루스 2세의 부대는

하류스 강 부근에서 대치했고

전황은 일진일퇴하는 양상을 보였죠.

양국의 왕들은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

상대방의 야무진 군사력에 대해 감탄을 하기도 했습니다.

계절이 지나 겨울이 다가왔고

리디아군은 봄까지 결전을 미루기 위해 철수를 결정하는데요.

페르시아의 군사력이 너무나 막강하여

리디아군은 또 다른 강대국들인

이집트, 신바빌로니아와 동맹을 맺게 됩니다.

 

얼마전까지만 하더라도 신바빌로니아는

페르시아의 편을 들어주며

메디아를 멸망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외교란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이 되기도 했죠.

 

 

 

리디아의 동맹국인 이집트와 신바빌로니아는

4개월 뒤인 봄에 결집하기로 했는데

이는 당시 서아시아의 전투에서는

대체적으로 추운 겨울에는 전쟁을 벌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키루스 2세는 한겨울의 추위를 뚫고

크로이소스의 뒤를 쫓아 수도 사르디스를 공격하는데요.

겨울에 전쟁을 하는 녀석이 어딨냐고 놀란 크로이소스였지만

이내 리디아의 자랑 기병대를 보내

페르시아군의 전멸을 꾀하였습니다.

 

리디아의 막강한 기병대는

그 수가 페르시아의 말들보다 훨씬 많아 수적 우위로 밀어붙일 심산이었죠.

리디아의 기마병들은 기세좋게 페르시아군에게 덤벼들었으나

갑자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말들이 도망을 가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요.

리디아에 쳐들어온 페르시아의 말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말이 아니고 낙타들이었던 겁니다.

 

키루스 2세는 막상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까지 왔을 때

기마병들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내심 두려움을 느꼈었는데요.

이때 메디아 점령의 1등 공신이었던 하르파고스가

키루스 2세에게 낙타를 활용하자고 제안을 했었죠.

키루스 2세는 하르파고스의 말을 듣고서

그동안 짐을 싣고 다니기만 했던 낙타들의 등 위에

기병의 장비를 갖춘 후 병사들을 태웠던 겁니다.

 

크로이소스의 군마들은 이상하게 생긴 상대방의 낙타들과

생전에 맡지 못했던 낙타 냄새로 인해 진격하지 못하고

되려 돌아서 도망을 가기 시작했고

결국 이 전투에서 크로이소스는 참패를 당하였죠.

 

그 후, 크로이소스는 리디아군을 이끌고 농성전을 벌렸으나

2주 뒤 페르시아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했고

크로이소스는 키루스 2세의 포로가 되고 맙니다.

 

그가 델포이 아폴론 신전으로부터 받았던

강력한 제국이 무너질 것이라는 답변에서

자신이 통치하던 리디아도

강력한 제국이었다는 사실을 잊었던 거죠.

신바빌로니아 나보니두스 연대기에서는

이때 크로이소스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하지만,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서에는

크로이소스는 키루스 2세에게 우대를 받으며

왕의 조언자로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키루스 2세는 추후 페르시아가 제국으로 발돋움하여

거대한 제국을 통솔할 때도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는 이념을 가졌던 만큼

점령지에 대해 억압하지 않기로도 유명했었는데요.

 

그는 메디아를 정복한 후, 리디아까지 삼키며

다음 목표로는 오리엔트의 남은 지역인

신바빌로니아 정복을 목표로 삼게 됩니다.

 

당시 신바빌로니아의 6대왕 나보니두스는

시리아의 명문출신으로 바빌로니아 국민들에게는

큰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종교가 중시되던 고대사회에서

오랫동안 바빌로니아의 주신이었던 마르두크를 밀어내고

나보니두스는 시리아의 달의 신을 숭배했었습니다.

 

물론, 역사의 기록이란 아무리 객관적이라 하더라도

기록하는 사람의 주관이 담겨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페르시아 건국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점령했던 지배지들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는데요.

신바빌로니아의 국민들이 나보니두스를 싫어했다고

페르시아 측에서는 말하고 있으나

그 시대에 직접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모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신바빌로니아의 국민들은

나보니두스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국내에서는 금융업이 고리대금업으로 변질되는 등

국민들의 분위기가 암울했다고 하네요.

 

페르시아 입장에서는 메디아와 리디아를 정복하게 되면서

이제 그 어느 곳보다 국력은 강해졌지만

메소포타미아의 비옥한 농토와 막대한 재물이 탐이 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을 공격하였으나

거대한 바빌론의 문과 성벽들

그리고 해자 역할을 하고 있는 유프라테스강은

키루스 2세에게 애를 먹이는 영역이었죠.

 

이에 키루스 2세는 바빌론의 내통자를 심어두어

몰래 유프라테스강의 수문을 열어 흘려보냈고

강바닥이 마르자 그 곳을 통해 군사를 보냈습니다.

 

결국 손쉽게 바빌론 시내로 들어간 페르시아의 대군은

압도적인 병력 차이로 변변한 싸움도 없이 도시를 함락하게 되었죠.

 

또한,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서는

나보니두스의 아들이자 바빌로니아 최후의 왕 벨사살이

이날 바빌론 시의 축제일을 맞아 연회를 즐기다가

연회가 끝날 때 나라가 망한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 키루스 2세가

신바빌로니아 왕국의 수도 바빌론에 입성한 것은 기원전 539년으로

신바빌로니아는 키루스 2세에 의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죠.

 

이후 바빌로니아를 계승한 국가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바빌로니아인들의 정체성은 살아남아

현재는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등지에서

아시리아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바빌로니아에 대해 조금만 더 언급하자면

세월이 지나 나보니두스의 또 다른 아들이라 주장하는

자칭 네부카드네자르 3가 반란을 일으키는데요.

하지만, 그 무렵의 페르시아 왕은 다리우스 1세였는데

그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벌벌 떨게 한 강력한 왕이었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3세는

다리우스 1세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패배를 맞이하게 되었죠.

 

메디아의 속국으로 출발했던 페르시아는 메디아를 점령하고

이어 리디아를 점령한 후,

신바빌로니아까지 차지하게 되면서

오리엔트 4강국 중 3개의 나라를 멸망시켰습니다.

 

이제 남은 강대국은 이집트만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키루스 2세는 흑해 북안의 스키타이 원정 중에 사망하게 되죠.

이후, 키루스 2세는 아들 캄비세스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이집트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키루스 2세의 사망은

원정 중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평화롭게 죽었다는 주장도 있는 만큼

여러 가지 설로 나누어지게 되는데요.

그의 말년은 정확하게 알려지진 않았으나

군주로서의 행보는 그에게

키루스 대왕 혹은 대제라는 명칭을 안겨주게 됩니다.

 

현대 사회 기준에서는 이미 정복 전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도덕적인 잣대에서 나쁜 행위로 간주되지만

그가 살아가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볼 때

그의 행동은 파격적인 일들이 많았죠.

 

키루스 2세가 살던 시절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을 만큼

시도 때도 없이 무력이 존재하며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발생했습니다.

 

키루스 2세는 더 이상의 전쟁을 없애기 위해

세상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페르시아보다 더 강력한 왕국들을 제압해갔죠.

 

그는 모든 종교들을 존중하여

다른 종교에 대해 탄압하지 않았으며

당연시 여기던 노예제를 폐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복지의 민간인에 대해

전리품이라는 이름으로 약탈하는 행위들을 금지시켰으며

제국이 성장하면서 상업화가 된 지역에서는

노동자의 급여를 제대로 지불할 것을 명했죠.

 

정복지에 대한 이러한 정책들은

이전 공포정치로 인해 반란이 끊이지 않았던

아시리아와 대조되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 UN 본부에는

키루스 원통의 내용을 담고 있는 복사판이 있는데요.

UN에서는 키루스 대제가 인권을 지키고

세계평화와 모든 사람들의 평등한 공존을 추구하는

국제연합의 정신을 잘 나타낸다고 여기고 있죠.

 

키루스 원통, 다른 말로 키루스 실린더는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문이라 불리는 페르시아 제국의 유물입니다.

길이 23cm, 지름 10cm의 원기둥 형태의 돌로

키루스 2세의 통치 이념이 적혀있죠.

돌 겉면에는 여러 민족의 종교 자유를 허용하고

정복지였던 바빌로니아 주민의 생계를 향상시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한, 오래전 바빌론 유수를 통해

신바빌로니아로 끌려왔던 유대인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낸다는 내용이 쐐기문자로 쓰여 있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를 상징하는 키루스 실린더를 둘러싸고

현대 사회에서는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이란과 영국이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키루스 실린더는 최근까지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요.

이는 1879년 영국인 호르무즈드 라삼이

이라크 바빌론 신전 벽안에서 발견하였기 때문이었죠.

 

이 때문에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인 이란이

지속적으로 반환 요청을 했으나

영국은 반환은 거부하고 대여의 형태만 갖춰왔습니다.

 

영국입장에서는 수많은 고대유물들이

평소, 내전을 일삼고 불안한 정국을 보이고 있는

중동 지역의 관리수준으로는 미덥지 못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요.

하지만, 세계적인 여론에서는

제국주의 시절의 약탈물들로 대영박물관을 채우고 있다는

따가운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결국, 20209월 대영박물관에서는

이란과의 문화교류를 위해

이란국립박물관에 키루스 실린더를 대여해주는데요.

이 유물은 이란 국립박물관에서 전시되었는데

유물이 넘어간 순간 다시는 영국으로 반환되지 않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란 측에서는 이제야 우리 것이 돌아왔다며

이참에 대여가 아니라 자신들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죠.

 

이에 대영박물관 측에서는

자신들이 발굴한 키루스 실린더에 대해서

유물이 훼손되지 않도록 최고 수준의 관리를 하고 있다며

불안한 중동 정세에 문화재가 유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비치고 있습니다.

 

한 예로 2003년 이라크 전쟁 중 바그다드가 함락되었을 때

당시 국립박물관이 무방비 상태로 약탈당하기도 했었죠.

 

이로 인해 미술사에서 주요한 작품 중 하나로 인정받은

사르곤 1세의 청동 두상이 행방불명되기도 했으며

여러 작품들이 훼손되기도 했습니다.

 

키루스 2세의 업적이 기록된 키루스 실린더에는

사람은 누구나 생각과 선택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으며

모든 개인은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죠.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경 기준에서는

상당히 깨어있는 군주의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키루스 실린더에서는

억압과 싸우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보호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할 것을 강조하고 있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들이 부풀려진 것이라 주장하기도 합니다만

현재 UN에서는 키루스 실린더를 인권 헌장으로서 인정하고 있죠.

 

 

오늘은 이란의 고대 왕조인 페르시아 제국의 탄생과

세계최초의 대왕이라 불렸던

키루스 대제에 대해 정리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