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역사, 세계사

[세계사, 4대 문명] 다리우스 1세의 반란

Buddhastudy 2023. 8. 2. 19:53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3대왕 다리우스 1세는

샤한샤로 불리기도 하는데요.

샤한샤는 왕중왕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는 인더스강부터 리비아,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시키며

그리스 본토 정복도 꿈꾸었죠.

징세를 위해, 균일한 도량형을 정하여 금화를 주조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드넓은 영토의 통신망을 설치하기 위해 도로망을 정비하여

각 도시를 연결하는 역전제도를 확립하기도 하였죠.

 

그의 명성은 현대 시대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에서

그 이름을 본떠 만든 다리우스 캐릭터도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유명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리우스 1세가 활동하기 이전에

페르시아 정세부터 먼저 살펴볼까요?

 

기원전 6세기경, 오리엔트 지방은

공포정치로 패권을 쥐고 있었던 아시리아의 멸망 이후

리디아, 메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의 4강국이 패권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기원전 550년경

메디아의 속국이었던 페르시아가

키루스 2세의 주도로 독립에 성공하며

지배국이었던 메디아, 이웃나라였던 리디아, 신바빌로니아를 차례대로 점령하였죠.

이에 관해 자세한 내용은 재생목록 내 10분세계사 코너

페르시아 키루스 대제편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키루스 2세는 강대국들을 점령하며 아케메네스 제국의 초석을 마련하였고

기원전 529. 키루스 2세가 사망하게 되면서

왕위는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에게 물려주었죠.

 

키루스 2세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가 캄비세스 2

둘째는 바르디야 또는 다른 이름으로 스메르디스라고 불렀습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가 페르시아의 왕이던 시절에는 바빌로니아를 통치하였고

키루스 2세의 사후에는 후계자 자리를 이어받아 페르시아 제국의 왕이 되었죠.

 

하지만, 동생 스메르디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지

제국의 동쪽을 지키던 스메르디스는 모반을 일으키게 됩니다.

 

캄비세스 2세는 통치 초반기에는

그래도 형제라 화해정책을 추구했지만

모반까지 일으키게 되자 부하에게 암살명령을 내리게 되죠.

 

암살을 담당했던 자는 페르시아 전역에 전파되었던

조로아스터교 사제 가우마타라는 설도 있고

혹은 가우마타는 암살 사실에 대해 알고만 있어

이를 이용하여 스메르디스를 사칭하기만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잠시 뒤에 다시 다루기로 하구요.

 

캄비세스 2세는 동생의 암살을 명령한 후

아버지 키루스 2세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이집트 공격을 실행하게 됩니다.

 

기원전 525. 캄비세스 2세는 왕위에 오른지 4년 만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죠.

그가 재위 초기부터 이집트 원정의 대규모 군대를 준비할 수 있었던 건

이미 키루스 2세가 사전준비 작업을 마쳤다고 역사학자들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멀리 떠날 수 있는 물품 보급 시스템과

수많은 병력을 통솔할 수 있는 군대체계 준비 등

키루스 2세의 영향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었죠.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의 첫 방어선인 시나이 사막을 금새 뚫고

이집트의 동부 전선의 가장 중요한 요지였던 펠리시움을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러자, 이집트군은 수도를 버리고 퇴각하여

고대 수도였던 멤피스까지 도주를 하게 되죠.

 

하지만, 페르시아의 군대는 멤피스까지 진격하여

결국 이집트 제 26왕조의 파라오, 프삼티크 3세를 격파하게 됩니다.

이로써, 페르시아는 캄비세스 2세 대에 이르러

결국 이전 시절 강대국이었던 4개국을 모두 점령하게 되었죠.

 

키루스 2세의 3개국 점령과 캄비세스의 이집트 정복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가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가 페르시아의 병력을 막는 과정에서는

용병을 고용하여 맞서 싸웠는데

그 용병들은 그리스로부터 고용한 군대였는데요.

이 무렵부터 일어나는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에 갈등은

수십년 뒤에 발생하는 페르시아 전쟁을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현재 이집트의 명물인 낙타는

이집트 제27왕조 시대에 페르시아 인들이 가져온 동물이었죠.

 

이집트를 정복한 캄비세스 2세는 군대를 나누어

리비아 원정과 에티오피아 원정 등

더 많은 영토확장을 시도하는데요.

하지만, 군대는 사막 폭풍에 휘말리기도 하고

현지 군대들의 힘에 이기지 못하여

더 이상의 확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됩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이집트 정복에는 성공했으나

이후의 영토확장에는 모두 실패하자

슬슬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했죠.

 

그러던 중, 이집트까지 멀리 나온 그에게

들려온 국내 소식은 화병을 더욱 돋게 하였습니다.

바로,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한 동생 스메르디스가 세력을 모아

왕좌를 탈취하였다는 소식이었죠.

이에 서둘러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캄피세스 2세는 귀국 도중 화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저서에서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 키루스 2세와는 달리

점령지에서 이집트인들에게 많은 잔혹한 행위를 했다고 비난했는데요.

하지만, 당시 이집트 사료에 따르면

그러한 비난들은 대부분 근거가 없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합니다.

 

캄비세스 2세가 죽자, 페르시아에서는 그의 동생 바르디야

, 스메르디스가 새로운 왕으로 등극하였죠.

하지만, 스메르디스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스메르디스는 예전에 죽었고

지금은 페르시아 핏줄이 아닌 조로아스터 승려인 가우마타가

스메르디스를 사칭하고 있다는 이야기였죠.

 

 

 

페르시아의 대귀족 오타네스는

자신의 딸을 왕의 왕비로 시집보냈었는데

결국 딸을 통해 지금의 스메르디스는 가짜라는 확증을 얻어내게 됩니다.

이에 오타네스는 자신과 가깝게 지내는 대귀족들을 불러 모았고

그중에는 본래의 왕실과 가까웠던 다리우스 1세도 있었습니다.

 

다리우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속국이었던

파르티아 태수의 아들이었는데요.

그는 캄비세스 2세를 도와서

페르시아 군인으로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던 자였습니다.

 

캄비세스 2세를 따라 원정길을 나섰지만

왕은 돌아오는 길에 죽고

새롭게 왕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는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오타네스, 다리우스를 포함한 7명의 대귀족들은

최근의 왕족의 움직임들이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습니다.

캄비세스 2세의 무모한 영토확장이라든가

스메르디스의 명문 귀족들의 사형 등

왕권강화에 힘쓰는 페르시아의 정국에 불만이 많았죠.

 

이에 다리우스는 자신을 포함한

7명의 대귀족들과 함께

가짜 스메르디스를 없애고

페르시아를 손에 넣을 음모를 꾸몄습니다.

 

이들은 모두 페르시아에서도

권위 높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왕궁 출입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았죠.

 

하지만, 왕의 침실에서는

호위병들과 실랑이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럼에도 군인 출신인 다리우스와 대귀족들은

각자 몸에 숨겨온 단검으로

가짜 스메르디스를 제거하였습니다.

 

가짜 스메르디스를 없앤 7명은

이제 제국을 어떤 정치체제로 이끌어갈지 토론하였죠.

 

딸을 왕에게 시집보냈었던 오타네스는

군주제가 이런 독재 부작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우리도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시절 아테네서는 민주정치의 창시자, 클레이스테네스로 인해

민주주의가 싹트고 있던 시점이었죠.

하지만, 다리우스는 대중들의 수준이 높지 않다면

되려 중우정치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며

전제군주제를 유지하자고 주장하게 됩니다.

 

갑론을박을 벌이다 결국 7명은

전체 군주정치로 국가를 통치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고

다음 문제는 누가 왕이 되자고 하는 문제로 접어들었죠.

 

왕을 뽑는 방식은 7명의 말 중 누구의 말이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에 가장 먼저 우는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7명 중 오타네스는 기권을 하고

나머지 6명은 모두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갔죠.

밤에 성을 빠져나간 말을 탄 귀족들은 아침 해가 떠오르길 기다렸습니다.

이에 다리우스는 성밖을 나서기 전

자신의 하인에게 암말의 냄새를 재취해놓으라고 했죠.

그리고, 해가 뜰 때 냄새가 풍기게 하여

흥분한 다리우스의 말이 울면서

결국 다리우스가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함께 나갔던 나머지 다섯 명의 귀족은

즉시 말에서 내려 새로운 왕 앞에 엎드렸죠.

 

현대 시대 접어들어, 가짜 스메르디스를 암살했던

다리우스 1세와 귀족들이 죽였던 왕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 스메르디스를 죽였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가짜가 진짜 행세를 7개월이나 했다는 것도 어렵다거나

혹은 가우마타가 원래부터 진짜 스메르디스였다고 하는 주장들도 있죠.

 

한편, 베히스툰 암벽에 새긴 다리우스 1대 연대기에는

가짜 스메르디스라고 명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는, 최소한 다리우스가 자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진짜 스메르디스였다 하더라도

가짜 스메르디스였다는 명분을 만들었는 것일 수도 있었죠.

 

아무튼, 키루스 2세의 후계자들인 캄비세스 2세와 스메르디스는 모두 죽었고

새로운 왕 자리는 쿠데타를 일으킨 다리우스 1세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다리우스는 즉위하자마자

수많은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되었는데

이는 다수의 페르시아인들이 새로운 왕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였죠.

 

신하였던 귀족들이 모여 왕을 시해했다는 행위 자체가

용납받지 못할 행위로 보였고

이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여러 민족들이 독립을 하기 위한 불씨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전 전투에 잔뼈가 굵었던

군인 출신의 다리우스에게는

소규모의 민족 독립운동들은 그 적수가 되지 못했는데요.

 

다리우스는 2년 동안 19번의 내전을 통해 모두 진압하게 되었고

전쟁을 일으켰던 9명의 주요 인물들을 처단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는 바빌로니아의 부흥을 꿈꾸었던

네부카드네자르 3세도 있었죠.

신바빌로니아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 시절

가장 번영했던 국가였습니다.

 

세월이 지나 그의 후손이라 일컫는 자가 나타나

페르시아의 정권 교체로 혼란을 틈타 반기를 들었지만

다리우스의 벽을 넘지는 못했죠.

 

다리우스가 큰 제국의 혼란을 잠재우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습니다.

우선적으로는 그의 집안은 다른 영향력 있는 대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군사력과 재력이 있었으며

아울러 기존 권력자들의 협력을 받고 있었죠.

또한, 다리우스에게는 최정예병인 불사의 1만 부대가 있었는데

이 부대는 한 명이라도 죽으면 또 다른 선발 요원을 채워서

계속해서 1만 명을 유지하는 부대였습니다.

 

이러한 집안 배경과 평소 신경 쓰던 귀족들과의 연계.

그리고 막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던 다리우스 1세는

거대 제국 페르시아의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1835, 영국 동인도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군인이자 외교관 헨리 롤린슨

이란의 서쪽 케르먄사 지방에 있는 베히스툰 바위산 정상에 올라갔는데요

그는 바위산의 정상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와서 비문을 일일이 복사하기 시작했죠.

 

지상에서 약 100미터 높이의 절벽 위 암반에 새겨져 있는 거대한 크기의 비문은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의 기록을 새겨놓았던 비문이었던 겁니다.

 

헨리 롤린슨이 살던 시기의 영국은

3차에 걸쳐 아프가니스탄과 전쟁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전쟁에 참여하고 난 후에도 이 비문의 연구를 계속 이어갔죠.

워낙 높은 절벽에 새겨져 있던 가로 18미터, 세로 7미터 크기의 비문 복사는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한 번에 전체 비문을 복사하지는 못했습니다.

 

롤린슨은 연구를 계속 이어가다

1846년에는 베히스툰 비문을 거의 전부 해석하며

출판까지 이어지게 되었죠.

 

내용은 당연히, 다리우스 1세의 명으로 제작되었던 비문인 만큼,

다리우스에 대한 찬양과 페르시아 제국의 강성함에 대한 내용이라고 합니다.

 

비문에는 고대 페르시아어와 바빌로니아어

그리고 엘람어 세 가지 문자로 기록되어 있는데요.

이 작업으로 인해,

인류는 설형문자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고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성서에서 단편적인 존재로만 나왔던

오리엔트 강대국들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뿐만 아니라

신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더욱 오래된 수메르인 등

범위가 넓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를 공부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죠.

 

 

 

기존에 고대 이스라엘 중심으로 쓰여진

구약 성경 내의 오리엔트 역사에 대해서는

유대인 민족들이 피지배민들 입장에서

강대국들에게 억압당한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에 반해, 베히스툰 비문에서는

강성했던 국력을 갖고 있었던 나라들의 시점에서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 차이점이 있죠.

 

베히스툰 비문에서는 반란을 주도했던 9명이

다리우스 왕 앞에 줄줄이 묶여 있는 그림이 있으며

왕의 발밑에는 가짜 스메르디스가 밟혀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은 대체적으로 다리우스 1세가

왕위에 오른 과정과 업적, 그리고 페르시아 제국을 재통일한 내용이 있는데요.

이 비문을 발견하고 해독함으로써 페르시아의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국내 반란들을 진압한 후

그동안 혼란을 틈타 독립했던 리디아와 이집트도 다시 제압하였죠.

그리고 그는 지방분권화를 막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을 20여 개 주로 나눈 뒤

각 주마다 왕의 대리인 사트라프를 두었습니다.

 

사트라프는 왕족이나 귀족 중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 대제국을 중앙집권화하려는 시도라는 것을 의미했죠.

 

본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는

가짜를 제거한다던가 혹은 왕권의 독재타파의 명분으로 왕을 몰아냈지만

권력이라는 게 다 내로남불이란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또한, 사트라프가 지방통치를 제대로 하는지

왕의 눈, 혹은 왕의 귀라 불리는 감찰관을 파견해서 사트라프를 감시했는데요.

사트라프는 지방통치와 더불어

각주에서 세금을 걷어 왕에게 바치는 역할을 했죠.

 

다리우스 1세는 사트라프에 힘이 집중되지 않게 하기 위해

주의 군대는 왕이 직접 임명한 사령관이 맡도록 했습니다.

각 주는 사프라트, 감찰관, 사령관으로 권력이 분산되었죠.

 

 

오리엔트 지역의 초기 패권국가 아시리아 제국 시절에는

거대한 영토가 된 제국을 관리하는 방식에 있어

힘으로만 통치를 하려다 결국 반란 연합군으로 인해

제국이 멸망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다리우스는 상업 활동을 활발히 하고

세금을 걷기 위해 화폐를 만들었죠.

그리고, 군대와 상인들의 이동경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도로망을 정비했습니다.

또한, 왕이 직접 명령을 빠르게 전달하기 위해

2수도인 수사에서 지중해에 가까운 사르디스까지는 왕의 길을 만들었죠.

왕의 길 사이에는 111개의 숙소가 있었으며

상인이 3개월 걸리는 2,400km의 길을

왕의 사자는 단 일주일 만에 달렸다고 합니다.

이집트 쪽으로는 나일강과 홍해 사이에 운하를 파서

이집트까지는 4일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전 오리엔트를 통일하여 효율적으로 관리하고자 했던 다리우스에게

자신의 명성에 방해가 되는 세력은 이제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등의 도시국가들이 모여있는

고대 그리스라 할 수 있는 헬라스였죠.

 

다리우스는 소아시아를 정복하여 그리스의 식민지를 압박하긴 했으나

기원전 499년부터 이오니아 주의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반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흑해 연안과 에게해 동쪽에서 무역을 하던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의 압박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죠.

원래는 밀레토스의 통치를 맡고 있던 아리스타고라스가

다리우스에게 군대를 빌려달라고 했었습니다.

그리스의 낙소스섬을 공략하여 한 방 먹이고자 했죠.

 

하지만, 아리스타고라스는 낙소스 공격을 실패했고

그 책임을 물을까 두려워 그리스 쪽에 붙게 됩니다.

이에 아테네 시와 에리트라이 시가 밀레토스를 지원하며

페르시아를 공격하기 시작했죠.

이것이 바로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이 된 배경입니다.

 

 

오늘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2세와

스메르디스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다리우스 1세에 대한 정리를 해보았습니다.

 

다리우스는 쿠데타로 정권을 차지하고

페르시아를 더욱 강력한 대제국으로 만들었죠.

하지만, 영향력을 뻗쳐가던 도중

서쪽에서 식민지건설을 만들어가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포함한

도시 국가들과 부딪힐 수 밖에 없었습니다.

 

채널에서는 최근까지

재생목록 10분세계사 코너에서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이야기를 다루었는데요.

이제 페르시아 전쟁을 앞두고는

잠시 비슷할 무렵의 고대 아테네 발전과정을 살펴볼까 합니다.

 

기존 그리스 영상 중에

민주정치의 발전과 스파르타까지 다룬 적이 있으나

그리스가 발전되는 과정을 좀 더 짚어본 후

페르시아 전쟁으로 연결해볼까 싶네요.

 

그럼, 오늘도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평안한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