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금강경

제 5.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 이치대로 실다이 본다.

Buddhastudy 2013. 1. 18. 04:27

출처: 정토회

 

안녕하세요. ~ 37페이지 펴 주세요. 금강경 5번째 시간이 되겠습니다. 5. 여리실견분.

如理實見分 여리. 이치와 같이, 이치대로 이 말이죠. 이치대로 실다이 본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 이런 얘기에요. 여리실견분. 이치대로 있는 그대로 실다이 본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는가.

可以身相見如來不 가이_몸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

 

不也世尊 볼 수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不可以身相得見如來 가이 몸 모양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이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如來所說身相卽非身相 여래가 설하신바 몸 모양이라고 하는 것이 몸 모양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佛告須菩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되

凡所有相皆是虛妄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함이니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만약에 모든 상을 상 아닌 것으로 상 없으므로 볼 수 있으면 곧 여래를 본다고 하리라. 여래를 볼 것이니라. 이렇게 돼 있어요.

 

선에서는 금강경의 요지가 1분에 있다. 이렇게 말하지마는 그러나 우리가 문자로 이루어진 가르침의 차원에서 볼 때는 요지가 제3분에 있다. 이렇게 말했죠? 3, 4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3분에서는 마음을 다스리는 법, 항복 받는 법에 대해서 얘기하고. 4분에서는 마음을 가지는 법, 머무르는 법에 대해서 얘기를 했죠? 이 두 군데서 답을 하시면서 그것을 정리해서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뭐다? 5분의 여리실견분이란 말이오. 그러니까 금강경의 가장 핵심 된 요점이 바로 이 5분에 있다. 이렇게 말 할 수가 있겠죠. 그것을 한 싯귀로 표현한 게 뭡니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다. 이것을 금강경의 앞으로 매 자주 나오는 사구게라고 하는 거죠.

 

그럼 여기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은 질문이 이래요. 몸 모양으로 여래를 볼 수가 있느냐? 즉 수보리에게 지금 네 앞에 서 있는 이 32가지 거룩한 상호를 가지고 있는 이 육신 말이에요. 이것이 여래냐? 이렇게 물었단 말이오. 그러니까 수보리가 그때야 알아차리고. 아니옵니다. 이 육신으로서, 이 몸의 모양으로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단 말이오. 그러면 앞에서 지금 4분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함이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을 행하라. 즉 형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더 나아간다면 아무런 바람이 없이 보시를 행하라.

 

즉 보살은 그 어떤 형상에 집착해서도 안 되고. 그 어떤 바람이 있어도 안 된다. 이런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보살은 육도 중생을 구제해서, 육도 중생을 구제하는 것으로 한량없는 복을 짓고, 그리고 그 복을 받아서 결국은 거룩한 32상의 몸을 붓다의 몸을 받게 되고, 그래서 부처를 이룬다. 이렇게 보통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죠? 부처님은 과거세로부터 세세생생이 한량없는 중생을 구제하시고, 그 중생을 구제하시면서 갖가지 복을 지으셨고, 그러한 공덕으로 3280종호의 거룩한 몸매를 받으셨다. 이 말이야. 그래서 성불을 하신다. 이렇게 알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다 구제했다고 하더라도 한 중생도 구제를 얻은 바가 없다면 그럼 붓다가 복을 지을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보살이 복을 지을 수가 없죠. 중생이 본래 다 부처라서 한 중생도 구제할 바가 없다면 부처가 중생을 구제했다 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죠? 그렇게 의심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뭐라 그랬느냐? 바로 상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했다는 생각을 내지 않고 행한 그 복덕이 한량이 없다 이렇게 말했단 말이오. 그리고 상에 집착하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 그래야 그 공덕이 한량이 없다.

 

그러니까 수보리가 또 그 얘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의심이 생겼단 말이오. 그렇다면 부처님의 저 거룩한 몸은 무슨 인연으로 저런 거룩한 몸매를 받았느냐 이 말이야. 아무런 과보를 받은 바가 없고, 행한 바도 없다면 저런 거룩한 몸매는 그럼 무슨 인연으로 저렇게 받았느냐? 이렇게 그 법문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의심이 났다. 이거야. 그러니까 그 수보리의 의심을 부처님께서 금방 아시고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물었다 이거야. 이게 네가 바라보고 있는 이 몸이 부처냐? 이렇게 물었단 말이오. 그러자 수보리가 깜짝 놀랐다. 아이고 아니올시다. 이랬단 말이오.

 

부처님은 육신이 부처님입니까? 아니죠. 깨달음의 지혜가 붓다란 말이오.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도 뭐라고 그랬어요? 그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다 하니까 아난다 존자가 울었단 말이오. 슬퍼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뭐라 하셨어요? 아난아. 슬퍼하지 마라.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이건 대승경전에 나오는 게 아니라 소위 아함경, 원시경전에 나오는 얘기란 말이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다. 육신은 지금 너의 곁을 떠나지마는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히 너의 곁에 남아 있으리라 이렇게 말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똑같은 몸뚱인데 한 생각 사로잡혀서 깨닫지 못할 때는 중생이라 부르고, 그 한 생각 내려놓고 깨닫게 되면 뭐라고 부른다? 보살이다. 부처다 이렇게 부르죠? 우리가 원효 대사가 똑같은 몸으로, 똑같은 바랑을 지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이 잠을 잤는데. 그 전날 해골바가지 물을 먹고도 아주 감로수라고 느끼고 있는 그때까지는 우리가 그냥 중생이라 이 말이오. 그런데 아침에 그 해골바가지를 보고 구역질을 하면서, ~ 일체가 다 마음 가운데 있구나. 일체가 다 마음이 짓는 바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거요. 그러니 똑같은 물인데 그 전날은 깨끗하고 오늘은 뭐다? 더럽죠. 이게 물에 있는 거에요? 내 마음에 있는 거요? 내 마음에 있는 거다. 이 말이오. 물은 본래 청정했다. 이거야.

 

그것을 깨달았을 때도 마찬가지죠. 원효의 몸은 그 전날이나 깨달았거나 못 깨달았거나 똑같은 몸이죠. 똑같은 조건에 있다. 이거야. 마치 물이 똑같은 물인데. 그 전날은 내가 감로수로 느꼈고 오늘은 더럽다고 구역질을 했다. 이거야. 법은 본래 공한데. 한 생각 일으켜서 더럽다고 내고, 한 생각 일으켜서 깨끗한 것을 내서 내가 거기에 매어 산다 이거야. 그러니까 한마음이 일어나니 만법이 생겨나고, 한마음이 사라지니 만법이 사라진다. 이렇게 노래했단 말이오. 그러면 이러한 물만이 아니라 이쪽 원효대사를 보자 이 말이야. 원효대사도 똑같은 육신을 가지고, 똑같은 밥을 먹고, 똑같은 물건을 하고, 똑같은 사람인데. 그걸 깨닫기 전에는 중생이라 하더니 그것을 깨닫고 나서 그 이후는 뭐요? 보살이라고 한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여래가 육신에 있습니까? ? 아니죠. 깨끗하고 더러운 게 물에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여래가 육신에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어떤 모양이 있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 마음을 깨닫느냐? 못 깨닫느냐에 있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도 우리는 그 거룩한 3280 종호가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단 말이오. 그래서 수보리도 그런 의심이 들은 거요. , 지은 보살은 한량없는 복을 짓고 그 과보로 거룩한 몸매를 받아서 붓다를 이루는데.

 

그러면 아무런 지은 바도 없고, 받을 과보도 없다면 저 거룩한 몸매는 도대체 어디서 생겨났는고. 이런 의심이 들었다. 그때는 저 거룩한 몸매가 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의심이 생겼다? 붓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의심이 생겼다. 이거야.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그것을 아시고 바로 이 몸뚱어리가 부처냐? 이렇게 탁~ 물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수보리가 화들짝 놀랐단 말이오. 아이고 내가 또 상에 집착했구나. 내가 또 망상을 피웠구나. 그래서 금방 아이고~ 아니올시다. 몸의 모양으로는 여래를 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정리해서 말씀을 하신다. 이 말이야.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이랬는데. 여기서 허망이라는 뜻을 오해하시면 안 돼요. 허망하다는 말은 그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그것은 어떤 고요한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허깨비 같고, 그것은 꿈같고, 그것은 아지랑이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가 허망입니다. 우리가 아이고~ 인생이 허무하다 할 때 그런 허무의 개념이 아니에요. 인생이 허무하다 할 때는 뭔가 낙담이 서려 있단 말이오. 이해하시겠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인간의 주관이 아니고. 그냥 객관적인 하나의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이것을 우리가 소승불교, 즉 원시불교에서 말한다면 무슨 말이 될까?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다. 이 말이오. 무상하고 무아인 것을 여기서는 즉 영원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실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그것은 마치 꿈같은 거다. 있는 거 같았는데 깨보니까 사실은 없었던 거다. 그래서 이것을 허망이다. 이렇게 언어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허망하니까 집착할 바가 있어요? 없어요? 집착할 바가 없지. 그러니까 허망한 데도 허망한 줄 모르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 실망하게 되고 낙담을 하게 되죠. 그래서 허무한 감정이 드는 거요. 왜 허망한 것이 여러분들에게는 허무하게 느껴지느냐?

 

뭔가 잡을 것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하는데 잡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때 허무하게 느낀다. 이거야. 있는 줄 알았는데 없으니까 허무하게 느끼는 거지. 이 잡을 것이 없다는, 그 실체가 없다는 것을 여기서는 허망하다. 그러고. 그 허망한 것에 대한 우리들의 마음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이 말이오. ~ 잡을 것이 없으니 그걸 깨닫고 나니까 인생이 자유로워지는 사람도 있고. 잡을 것이 있어야 된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잡을 것이 없는 줄을 알았을 때는 어때요? 허무하게 느껴진단 말이오.

 

그러니까 여기서 허망하다는 것은 허무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존재 자체가 실체도 없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마치 도깨비나 물거품처럼 돼 있어서 있는 줄 알았더니 자세히 보니 없고, 영원한 줄 알아서 보니까 금방 아침이슬처럼 사라져 버리는 그런 무지개 같은 것이더라. 이런 얘기요. 그러니까 이 허망하기 때문에 허무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고 허망한 줄을 알고 바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이 말이오. 그런데 아직도 우리가 실체가 있어야 된다고 하는 망념을 갖고 있을 때 잡을 것이 없어지면 허무하게 느껴진다. 이 말이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모양 지어진 것은 다 허망하다. 이 말이오. 그 모양 지어졌다 하는 것은 뭘 말합니까? 지난번에 갖가지 말씀을 드렸죠? 어떤 물질의 색깔과 모양, 이런 의미도 있고. 또 우리들의 어떤 고정관념, 선하다 악하다. 깨끗하다 더럽다. 옳다 그르다. 이렇게 우리가 모양 지어진 것도 사실은 다 거기에 깨끗하다 할 것도 없고, 더럽다 할 것도 없고, 악하다 할 것도 없고, 선하다 할 것도 없고. 옳다 할 것도 없고 그르다 할 것도 없다 이런 뜻이에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범소유상 개시허망. 범소유상.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뒤에 반야심경 논리대로 하면 제법. 이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이오. 아시겠습니까?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든 형상 있는 것은 이 말은 제법은 이 말이에요. 또는 제상은 이렇게 해도 되겠죠? 모든 상이 있는 것.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모든 법은 이 말이오. 제법, 제상. 이렇게 되는 거요.

 

개시허망. 모두 허망하다. 이 말은 모두 공하다. 이 말이오. 허망하다는 말이 공하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제법은 모두 공하다 해서 제법개공. 이렇게 말 할 수가 있고, 제상개공.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죠? 아주 줄여서 말하면. 그런데 이 금강경에서는 아직도 공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있다. 공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그 공의 단어를 아직 만들지 않고, 그런 글자를 쓰지 않고 텅 빈 그것을 여기서 뭐라고 했다? 허망하다. 이렇게 말했다. 이거요.

 

이 모든 형상 있는 것. 즉 제상이 다 허망하다. 개시허망하다 하는 것을 뒤에 가면 조금 더 자세하게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게 뭐냐? 일체유위법. 일체의 모든 함이 있는 법은 이 말이 뭐요? 범소유상. 이게 같은 말이에요. 아시겠어요?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일체 모든 함이 있는 법, 유위법은 이 말이오. 여몽환포영. , (같은 여). 몽 꿈같다. 꿈은 꿈속에 있을 때는 확실히 있었는데 깨보면 어때요? 없죠. . 환상이란 말이오. 헛 거를 보는 거 말이오. 헛 거 본 상태에서 환을 볼 때는 분명히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는데 깨보면 없죠? 이걸 우리가 헛깨비를 본 것 같고, 또는 신기루를 본 것 같고.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신기루 같고, 헛깨비 같고. 이렇게 말하는 거요. 환상이다. 이 말이오.

 

. 포는 뭐요? 물거품이죠. 물거품이 확~ 부풀어 있으면 뭔가 가득 찬 거 같은데. 사실은 만져보면 아무것도 없단 말이오. 그다음에 그림자. 그림자도 뭔가 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죠. 그러니까 비유를 들어서 이렇게 말한 거요. 제행이 또는 제상이 제법이 허망하다. 공하다 하는 것을 비유를 들어서 공한 것이 어떤 것을 말하느냐? 허망하다는 게 무엇을 말하는 거냐? 그것이 마치 꿈같은 거고, 아지랑이 같은 거고, 신기루 같은 거고, 환상 같은 거고. 이런 얘기에요. 그다음에 물거품 같은 거고. 그림자 같은 거다. 여로역여전. 아침이슬 같고, 로는 이슬이죠. (이슬 로). 이슬 같고. , 번갯불 같다. 이거야. 아침이슬 같고 번갯불 같다. 이 말이 다 무엇을 비유를 들어서 설명을 한 거다? 허망하다는 것을 비유를 들어서 설명한 거고. 나중에 가면 이 말을 한 단어로 공하다 이렇게 쓴단 말이오.

 

응작여시관. 마땅히 이와 같이 봐라. 이와 같이 보라는 게, 그게 바로 어떤 사물을 어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 무슨 말이에요? 여리실견하는 것이에요. 아시겠습니까? 있는 그대로 본다. 실견이란 말이오. 정견, 바르게 본다. 반야심경 표현으로 하면 조견. 비추어 본다. 뭐가 있었던 거 같은데 깜깜한 데서는 뭔가 있었던 거 같은데. 불을 확 비추어 보니까 아무것도 없었어. 눈에서 일어난 어떤 환상이었다. 이 말이오.

 

범소유상은 개시허망이다. 모든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거다. 다시 한 번 정리하면 모든 상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무엇인가 실체가 있다고 착각하면서 그려진 고정관념. 이것을 여기서는 상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우선 깨끗하고 더러운 게 있다 하는 것도 상이고. 아름답고 추한 것이 있다 하는 것도 상이고. 선악도 상이고. 신성하다 부정하다 하는 것도 상이다. 이런 것뿐만 아니라 모든 상이라고 말하는 거요. 모든 상.

 

모든 모양 지어진 것. 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다 공하다. 그런 것 같았는데 자세히 보면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모양이 있는 것 같은데 자세히 보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깨끗한 게 있는 거 같은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깨끗하다 할 것이 없고, 더럽다 하지만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럽다 할 것이 없다. 이 말이오. 이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 말을 여기서는 뭐라고 했다? 실견. 반야심경에서는 조견. 또 소승불교에서는 관. 아시겠어요? . 개시허망이다. 모두 다 허망하다. 이런 얘기요.

 

약견제상비상. 그러니까 모든 형상 지어진 것은 다 허망하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모든 형상 지어진 것에는 그 고정된 어떤 상. 실체가 없다. 이 말이오. , 소승불교의 교리로 말하면 영원한 것도 없고, 실체도 없다. 즉 무상하고 뭐하다? 무아이다. 그것을 한 번 더 얘기하는 거요. 제상은 모든 상은 이 말이오. 모든 상에는 비상이다. 그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모든 상은 상이 아니다. 이 말은 모든 상에는 상의 실체가 없다. 모든 상은 예를 든다면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게 상인데. 거기에는 선이라고 할 만한 실체도 악이라고 할 만한 실체도 없다. 이것을 여기 용어는 뭐라 했다? 비상이다. 상이 아니다. 이렇게 표현했단 말이오. 이 비상. 상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

 

이것을 뒤에 가서는 뭐라고 표시한다 그랬어요? 무상. (없을 무)자에서 상을 해서 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고. 그것을 한 단어로 공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단 말이오. 제상이 비상인 줄 알면, 모든 형상 지어진 것에는 형상의 실체가 없는 줄을 알게 되면. 약견, 견을 여기서 본다 했는데. 안다. 이 말이죠. 만약에 모든 상이 상 아닌 줄을 보게 되면, 모든 상에는 상의 실체가 없는 줄을 깨닫게 되면 이 말이오. 즉견 여래라. 곧 부처를 본다. 곧 부처를 본다. 이 말이 뭐요? 그것이 곧 깨달음이다. 이 말이오. 그것을 깨닫게 되면 곧 부처가 된다. 부처를 본다 이 말은 법의 실체를 보는 거고, 법의 실체 존재의 진실상을 보는 자를 뭐라 한다? 즉 부처라고 한다. 이 말이오. 부처를 본다는 것은 법의 실상을 본다는 얘기도 되고. 부처를 본다는 것은 깨달았다는 얘기도 되고. 부처를 본다는 말은 내가 곧 그걸 깨달은 자하고 뭐다? 부처가 된다는 말도 된다. 곧 부처다. 이런 말이오.

 

여기서 우리가 공부할 때 늘 오해가 생기는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진실상. ~ 이것은 선이다, 이것은 악이다, 이것은 옳다, 이것은 그르다 하는 이런 것들은 그게 있는 그대로 진실상이라고 우리가 착각하고 있다. 이거야. 마치 꿈속에 있는 사람이 꿈이 현실인 것처럼 현실로 착각하는 것처럼. 그런데 깨보니까 그것은 사실이 아니더라. 그것은 꿈이더라. 꿈이라는 말은 헛거더라 이 말이오. 그러니까 가상을 가짜배기 상을 진짜 상. 실상인 줄 착각을 하고 봤다. 이 말이오. 깨고 나니까. 그게 아이고~ 가상이었구나. 그게 헛거였구나. 이렇게 알았어. 그럼 여기서 우리의 오해는 헛거였구나. 그럼 알면 그걸로 끝이란 말이오.

 

그러면 여기 또 어떤 생각을 하느냐? 그건 헛거고 헛게 없어지면 그 밑에 또 뭐가 있다? 진짜가 있을 거 아니야. 이게 가상이라면 뭐가 있어야 된다? 실상이 있을 거 아니냐? 그래서 이게 가상인 줄 알면 그 아래 실상이라는 게 또 따로 있다.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내가 이제까지 본 거. 이건 진짜배기지만은 그 가짜배기를 없애면 그 아래 진짜배기가 또 따로 있을 거 아니냐? 이런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해탈의 길에서 자꾸 멀어지는 거요. 내가 이제까지 여기에 진짜배기라고 생각을 하고 했기 때문에 거기에 뭘 했다? 집착했는데. 그게 보니까 꿈같은 허망한 것이다 하는 걸 알아버리면 집착할 바가 없어져 버린단 말이오. 집착할 바가 없어지면 곧 자유로워지는 거요. 모든 괴로움은 사라져 버린단 말이오.

 

그런데 이 뭔가 의지하고 싶은 생각, 뭔가 잡으려고 하는 이 생각을 안 버리는 거요. 이걸 안 버리니까 이제까지 잡고 있었던 것이 보니까 헛거라는 것을 아니까. ~ 집착할 바가 없구나. 이렇게 탁 가면 그걸로 끝나는데. 이 잡을 거리, 의지하고 싶은 이 마음을 그대로 쥐고 있는데 이제까지 의지했던 게 의지처가 못되니까 허무해진단 말이오. 그러니까 또 어떤 걸 찾아야 된다? 새로운 의지처를 찾아야 된다. 지금까지 의지했었던 건 버리지마는, 이것 말고 그럼 또 새로운 의지 처를 찾겠다고 또 나선단 말이오. 그러니까 이것 말고 진짜배기 또 따로 있어야 된단 말이오. ? 의지해야 되니까. 뭔가를 잡아야 되니까. 이래서 또 가상을 실상이라고 또 만들어서 또 집착하는 거요.

 

그러니까 우리는 이 얻으려고 하는 마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 무엇인가 잡으려고 하는 이 마음이 버려지지 않으면 공하다 하면 허무하게 느껴지는 거요. ? 잡아야 되는데 잡을 게 없으니까. 그러면 또 생각이 나아가죠. 그래 이거는 허무하다 치고. 이제까지 내가 이걸 좋다고 잡았는데 가만 보니 이거는 허망하다고 치고. 그럼 이거 말고 진짜배기 딴것도 진짜 잡아야 될게 있어야 되지 않느냐? 이런 생각을 내기 때문에 무아다 하면 아라고 할 것이 없는 줄 알면 무상이다. 항상 함이 없는 줄을 알면 이미 해탈을 해 버리는 거요.

 

이제까지 실체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걸 죽기 아니면 살기로 잡으려고 했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것이 꿈같고 아지랑이 같은 줄을 알면, 즉 꿈에서 탁 깨면, 아이고 꿈이었구나. 이걸로 끝난단 말이오. 꿈속에서 여러분들이 겪었던 괴로움은 꿈을 깨면 끝납니까? 안 끝납니까? 끝난 거요. 그런데 그 꿈을 가지고 또 해몽하러 다닌단 말이오. 그러니 이것은 꿈을 깼다고 하지만 아직도 꿈속에 놀아요? 안 놀아요? 놀아요. 논단 말이오.

 

그러니까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미망 속에 논단 말이오. 이것으로 인해서 또 새로운 어떤 진실상이라는 걸 만드는 거요. 그럼 진실상을 만든다면 사실은 그건 또 실체가 있는 거죠? 그죠? 가상을 떠나서 실상을 찾았다 하면 그건 또 실체가 있다는 얘기 아니오. 그러니까 그것은 벌써 교리에 어긋나는 거요. 왜 불교가 자꾸 이렇게 무상과 무아다. 오온으로 쌓였다. 하면 이미 탁! ~ 가합상이구나. 여기는 진실하고 믿을만한 게 없구나. 이것으로 끝났는데. 가합상인데 그 가합상이 사라지면 그 밑에 뭔가 진짜배기가 있어야 된다. 이런 생각을 자꾸 하기 때문에 이게 또 왜곡되고 또 왜곡된다. 이 말이오.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이게 대승불교 후반에 나온 얘기란 말이오. 그러면 여러분들 일체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 이 말을 어떻게 듣느냐? ~ 지금 나에게 나라고 하는 이건 가짜 나고, 이 밑에 그 밑바닥에 본질의 진짜 나가 있다. 그 진짜 나를 불성이라고 하는데 그걸 찾고 그걸 잡아야 된다. 이렇게 착각을 한단 말이오. 우린 다 꿈을 꾸면서 그 꿈속을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웠는데. 눈을 탁 뜨니까 어떤 꿈을 꾼 사람이든 다 눈을 딱 뜨면 괴로움에서 벗어납니까? 안 벗어납니까? 벗어날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니 모든 중생이 지금 괴로운 건 다 꿈꾸는 것과 같다 이거야. 그런데 모든 중생은 다 눈을 뜨면 그 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처럼. 중생이 이 미망에서 벗어나게 되면 다 깨달음을 얻을 수가 있다. 이 말이오. 그러니 모든 중생은 다 뭐가 될 수 있다? 부처가 될 수가 있다. 왜 그러냐? 모든 중생은 본래 부처였기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해서 단어가 자꾸자꾸 바뀐다. 이 말이오. 제법이 공한 줄을 알게 되면 곧 내가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다는 걸 이름 하여 부처라 하고. 그러니 모든 중생은 다 부처가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지. 계유불성이라는 말이 불성이라고 하는 뭔가 종자가 이 밑바닥에 들어있다 이런 얘기가 아니란 말이오. 그리되면 무아사상하고 또 어긋난단 말이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꿈을 깨면 그걸로 끝나야 되는데. 꿈을 깬 뒤에 또 뭐 한다? ~ 이제까지 한 건 꿈이고. 그럼 진짜배기 삶은 뭔가 또 찾으러 다닌단 말이오. 꿈을 깨면 이미 허망한 줄을 알아버리면 모든 고는 끝나 버린단 말이오. 모든 상이 모든 모양이 지어진 것은 비상이다. 모양이 아니다. 모양이 아니다가 뭘 말하느냐? 모양이라고 할 것이 없다. 즉 실체가 없다. 이 말이오. 그 모양 지어진 것. 내가 모양 지어진 그것이 진실 상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진실 상이란 말은 영원하고 실체가 있는 것을 말하죠. 영원하고 실체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까 그는 허망한 거다. 이 말이오. 허망한 줄을 알면 집착할 것이 없고. 집착 것이 없어지면 모든 괴로움은 그냥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공부를 여기까지 하니까 다행이지 공부를 잘못해서 가짜 나를 없애고 진짜 나를 찾는다. 이렇게 해서 산천을 헤매고 다니면서 자기가 찾았느니, 못 찾았느니. 깨달았느니, 못 깨달았느니. 이렇게 하고 다니는 병자가 굉장히 많다 이거야. 승속을 불문하고. 찾으러 다니고 헤매는 게 그게 그냥 헤매는 거요. 그게. 헤맬 게 뭐가 있어? 일체가 마음 가운데 있고, 마음이란 게 본래 공한 줄을 알면 그냥 해탈하는 거지.

 

제상이 비상인 줄을 견. 제상이 비상인 줄을 보면 알면 이 말이오, 뭐다? 즉견여래다. 제법이 공한 줄을 깨달으면 어떻게 된다? 그 반야심경 똑같은 논리 아니오. 조견오온개공. 오온이 모두 공한 줄을 깨달으면, 도일체고액.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일체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말을 여기서 뭐라 그랬다? 즉견여래다. 이렇게 말했단 말이오. 그러니 공부를 하면 이 경전, 저 경전, 글자가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설명방법이 다르고 비유가 다를 뿐이지. 내용은 다 같은 얘기요.

 

다시 말합니다. 약견재상비상. 모든 상이 상 아닌 줄을 알면, 모든 상의 실체가 없는 줄을 알면, 모든 상이 공한 줄을 알면 이 말이죠? 그러니까 약견제상비상 이 말이 반야심경에서는 뭐라고요? 조견오온개공 이 말이오. 오온이 모두, 오온이라는 게 뭐요? 여기서 말하면 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죠? 오온이 모두 공하다. 이 말이오. 상이라고 할 게 없다. 이 말이오. 그러면 즉견여래다. 곧 부처를 보는 거다. 곧 부처가 되는 거다.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다. 도일체고액이다. 이랬단 말이오. (37:29)

 

~ 한 번 더 보겠습니다.

須菩提於意云何 수보리야. 저 뜻에 어떠하냐?

可以身相見如來不 가이 몸의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있느냐? 없느냐?

不也世尊 不可以身相得見如來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몸의 신상으로는 여래를 얻어 볼 수 없습니다.

何以故 어찌한 까닭이냐?

 

如來所說身相卽非身相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신상이라고 하는 것은 곧 신상이라고 할 만한 실상이 없습니다. 여래가 말씀하시는 몸의 모양, 몸모양, 몸모양이라고 하는 것에는 몸모양이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다 이 말이오. 다만 이름 하여 뭐라고 한다? 몸모양이라고 할 뿐이다.

佛告須菩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하되.

凡所有相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함이니 모든 상을 상아닌 것으로 모든 상에 실체가 없음을 볼 수 있다면 즉견여래라, 곧 여래를 본다.

 

~ 그러면 경전의 말씀을 갖고 이것을 한 번 보겠습니다.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에서 아주 신분이 높고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살이에서는 완전히 호의호식하고 살았다 이 말이오. 그런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모든 귀한 신분과 그 많은 재산도 뒤로 하고 출가를 해서 부처님의 제자가 됐다. 이거야. 그 부처님의 제자가 되면 우선 어떻게 됩니까? 나무 밑에서 잠자야 되고, 다 떨어진 옷 입어야 되고, 길거리에서 얻어먹어야 되고. 거지가 되는 거니까 그죠? 그 이렇게 하다 보니까 몸에 병이 났어. 몸에 병이 나서 거의 죽게 됐다. 이 말이야.

 

우리가 이렇게 되면 후회합니까? 안 합니까? 후회하게 되죠. ~ 공연히 출가해서 멀쩡한 육신 병들고, 음식 제대로 못 먹고, 그저 일찍 죽게 됐단 말이오. 그러면 자기 신세를 한탄하고 수행이고 뭐고 나발이고 간에 어때요?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든지. 집으로 돌아갈 형편이 못되면 인생을 후회한단 말이오. 그런데 이 제자는 그런 상황이 돼도 아무런 후회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곳에 잠자고. 갖가지 사람들과 어울려 놀아도 거기에 인생에 늘 불안이 있고 괴로움이 있었는데. 이렇게 다 떨어진 옷 입고, 나무 밑에서 잠들고, 길거리에서 얻어먹고, 외로이 있어도 마음이 고요하고, 두려움도 없고, 불안 초조 공포도 없다. 이거야.

 

자기가 목숨이 다할 즘에도 가만 생각해 봐도 출가한 게 참 잘했다. 만족스럽다. 이거야. 이렇게 자기 생에 만족스러우니까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죠. 그런데 친구에게 말하기를 나는 지금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다. 나는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하나의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스승님이신 부처님을 한 번 더 보는 거다. 그 거룩하신 그 스승님을 내가 죽기 전에 한 번 만 더 뵙고 죽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한테 소원이 있다면 딴 건 없고 그거 한 가지가 있다.

 

그런데 나는 이미 몸이 병들어서 움직일 수가 없고, 그분은 먼 곳에 계시고. 그분이 나를 찾아오기도 어려운 일이죠. 그러니 소원이 있다면 그게 소원인데 이 소원은 들어질 수가 없다. 이렇게 생각을 한 거요. 그래서 그 친구가 즉 도반이 그 얘기를 듣고 부처님께 전했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이 수행자를 병문안을 왔다. 이 말이오. 누워있던 이 수행자는 부처님이 오셨으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래서 힘들지만 일어나려고 하니까 부처님께서 그냥 누워있어라. 그래 부처님의 손을 딱 잡고는 이 수행자가 말하는 거요. 저는 세상에 있을 때 참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온갖 것에 다 대우를 받았다. 이거야.

 

그러나 인생에 늘 그래도 불만이 많고, 부족함이 많고, 괴로움이 많고, 걱정이 많았는데. 부처님 법을 만나서 저는 그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제 몸이 병이 들고 이렇게 죽게 됐지마는 제가 제 살아온 인생을 돌아볼 때 한 점 후회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에게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부처님을 뵙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 같은 일이 오늘 일어났다 이거야. 이제 부처님을 뵈었으니 저는 죽어도 아무런 한이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 이 말이야. 만약에 나 같으면 어떻겠어요? 아이고 착하다. 그래그래그래그래. 이랬겠죠. 얼마나 기특합니까?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했어요. 비구여. 이 허물어질 육신을 보아서 무엇을 하겠다는 거냐? 당신이 출가할 때 이 육신을 보기 위해서 출가를 했느냐? 이거야. 왜 출가를 했느냐 이거야.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줄을 깨달아서 그 어디에도 집착할 바가 못 된다는 것을 깨달아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출가한 게 아니냐? 이거야. 그런데 자네는 어찌하여 이 허물어져 갈 육신을 보려고 하느냐 이거야. 그때 이 제자는 확연하게 깨친 거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는 자기 육신에 대해서 환상을 갖고 집착하는 사람에게도 용납을 안 했던 거요.

 

그렇게 그가 정말 제행이 무상인 줄을 깨닫고 제법이 무아인 줄을 깨달아서 완전한 니르바나에 들게 하는 게 여래의 목적이었단 말이오. 부처님의 법을 따라서 지키고 수행하는 걸 원했지. 부처님의 법을 추앙하는 사람을 원한 게 아니고. 부처님 법에 집착해서 법상을 만드는 걸 원한 것도 아니고. 여래를 따르는 그런 어떤 맹목적인 추종자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부처님의 육신에 대한 집착도 이렇게 단호하게 부정을 하셨는데 하물며 돌로 만들고, 종이로 만들고, 흙으로 빚고, 쇠로 만들고, 플라스틱으로 만들고, 나무로 깎은 불상에 집착하는 것을 용납했겠어요? 안 했겠어요? 안 했겠지.

그런데 어찌하여 불교인들이 왜 부처님께서 가르침대로 안하느냐 이거야. 안되더라도 넘어지고 자빠지더라도 그렇게 하려고 자꾸 애를 써야 될 거 아니냐 이거야. 그런데 경전에도 근거도 없고 아무 근거도 없는 걸 가지고 자꾸 주장한단 말이오. 이 제자가 얼마나 기특합니까? 기특하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부처님은 중생을 깨우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기 때문에 깨우쳐 주는 것이 가장 큰 중생을 돕는 일이죠? 여래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여래를 위해서 온 게 아니에요. 대중이 부처님을 떠받들어 주는 것을 여래가 원하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까 최후의 유언에 여래가 열반에 들 즈음에 저 하늘의 신들이 갖가지 노래를 부르고. 사라수가 때아닌 때 꽃을 피워서 여래의 열반에 공양을 올릴 때도 부처님은 뭐라 그랬어요? 아난아. 저것들을 보느냐? . 그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란 말이오. 다른 종교에서 이런 일이 있다면 이건 엄청나게 기록이 되겠죠. 그런데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뭐라고 그랬어요? 저 모든 공양은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이다. 그러나 저것은 제일의 공양이 아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제 일의 공양은, 최고의 공양은 여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했단 말이오.

 

그러니 여기 대승경전이 부처님의 육성이냐 아니냐 이런 진의를 떠나서 이 가르침은 원시경전하고 딱 일치를 합니까? 안 합니까? 하죠.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 이 말이오.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한 거다. 이 말이오. 그 형상 중에도 거룩한 부처님의 32상 마저도 다 뭐하다? 허망한 거다 이거야. 살아있는 부처님의 육신도 허망한 거다. 살아있는 부처님의 육신도 허망하다. 거기에는 집착할 바가 못 된다 하는데. 그걸 화장해서 나온 뼛조각을 숭상하고 난리를 피우면 되겠어? 돌로 유리로 만든 흙으로 빚고 나무로 만든 것을 마치 영험이 있느니 없느니 이래서 되겠어요? 무릇 형상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이거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다 허망하다. 이랬단 말이오. 여기 예외가 있어요? 없어요? 없어. 어떤 예외도.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여기 와서 공부하면 뭘 깨달아야 되느냐? 제행이 무상인 줄을 알고 제법이 무아인 줄을 깨쳐야 되고, 제법이 다 공한 줄을 깨쳐야 된다. 이거야. 그걸 알고 인생을 살아야 된다. 이거야. 남편이 나쁜 사람이다. 하지마는 나쁘다고 할 만한 실체가 없는 줄을 깨쳐야 되고. 애가 말을 안 듣는다. 애가 문제다. 하지마는 애에게 문제 될 만한 것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각도에 따라서 문제가 있고 문제가 없는 거 다 내 마음에서 생긴 거다.

 

이걸 여러분들이 깨닫게 되면 바로 내 괴로움이 없어지고, 부부간에 화합이 이루어지고, 부모 자식 간에 화해가 일어난다. 이거야. 화해해야 된다는 당위가 아니다. 이 말이야. 부부니까 이렇게 살아야 된다. 하는 윤리가 아니란 말이오. 거기에 나쁜 것이 없는 줄을 알아버리면 나쁘다는 전제하에 생겼던 갖가지 시비와 갈등이 사라져 버린다. 이거야. 이렇게 될 때 여러분들의 개인이 행복해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좋아진다. 이거야. 그러면 인생이 행복해 지죠. 행복하려고 애쓴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러니 돌이켜 보면 부처님으로 인해서 내가 많은 은혜를 입었어요? 안 입었어요? 입었지. 그러니까 부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이 고마워해 달라는 게 아니란 말이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 이런 가르침을 따르니 내가 부처님의 제자다. 그러니 부처님은 위대하신 분이고, 부처님 법 만난 것이 정말 기쁘고. 부처님 법대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정말 자랑스럽구나. 이걸로 끝나야 돼.

 

그런데 이런 바른 법을 나에게 설해주신 우리 스님 참 좋으신 분이구나. 이걸로 끝나야 된단 말이오. 그런데 스님 얼굴을 보거나, 스님 몸뚱이를 보거나, 스님의 지식을 보거나, 이래 가 스님 추종자가 되면 안 된다. 이거야. 스님의 신도가 되면 안 된다. 이거야. 법륜스님의 신도가 되면 안 된다 이거야. 부처님의 형상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가르치는 게 불법인데. 어떻게 한 스님의 추종자가 돼서 되겠어요?

 

이 설법이 여러분들이 이해하기 쉬웠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법은 이보다 더 쉬웠는데 우리가 지금 불법을 잘못 알고 있다가 이제 조금 바르게 할 수 있는 다만 기회를 가졌을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일불제자라 그러죠? 다 부처님의 제자다. 여러분들은 종파의 제자가 되면 안 되고, 어느 사찰의 제자가 되도 안 되고, 어느 스님의 제자가 되도 안 된다. 일불제자라. 오직 부처님의 제자다. 그 부처님마저도 우리가 어떤 형상에 집착해서 붓다를 찾으면 안 된다. 살아있는 붓다에 대한 경배도 거절하셨는데. 너 내 육신 보려고 출가했니? 너 이놈. 이거 봐서 뭐하니? 곧 늙어서 없어질 건데. 이렇게 말해서 네가 출가한 것은 이 붓다의 육신마저도 허물어져 늙어서 사라진다.

 

그런데 하물며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 영원한 것이 없다면 붙들고 매달일 일이 뭐가 있겠느냐 이거야. 이렇게 해서 깨닫게 해 주셨단 말이오. 우리가 뭘 깨달아야 됩니까? 법을 깨달아야 돼.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보시하는 것은 깨닫고 나니 너무너무 행복해. 다른 사람도 좀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이런 법당도 있어야 되고, 그러려면 이런 책도 찍어서 줘야 되겠다. 그러니까 현실적으로 뭐가 필요하다? 돈이 필요하다. 이런 일을 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니 돈을 내고, 음식이 필요하니 음식도 공양을 올리고 이렇게 하는 거요.

 

자기가 이미 실천자가 돼 버린다. 이 말이오. 그렇게 해서 보시를 할 때 그게 무슨 보시가 된다? 무주상 보시가 되는 거요. 뭘 바라고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게 아니라. 기쁨에 의해서 자기도 뭔가 그 은혜를 갚겠다 하는 마음에서 보시하게 된다. 이렇게 나아가게 될 때 우리는 그 보시한 물건이 뭐가 되냐? 청정하다. , 그런 보시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은 그런 용도로 쓰여져야 된다 이거야. 그런데 지금 절 안에서 오직 세속에서 상거래처럼 장사만 이루어진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아이고 부모님이 내 키운다고 알게 모르게 많은 업을 지었을 거다. 그러니 내가 유산을 받았으니 우리 부모님을 위해서 세상에 좀 베풀어야 되겠다. 그래서 재산을 반을 뚝 자르던지. 1/3을 자르든지 해서 이 돈을 배고픈 사람이 먹도록 하고, 병든 사람이 치료받도록 하고, 아이들이 배우도록 해서, 또 공부하는 스님들이 공부하도록 해서. 우리 부모님이 지은 업장이 소멸 됐으면 좋겠다. 이렇게 해서 천도재가 생긴 거요. 아시겠습니까? 천도재 할 때 끝에 있는 재자는 제사 제자가 아니에요 (베풀 재)자란 말이오. 이렇게 베풀면서 해서 업장이 소멸되는 거란 말이오.

 

그 음식 차리는 건 언제 생겼느냐? 이것은 제일 가난한 사람들이 당시에는 걸사, 비구들이었다 말이오. 그러니까 해재를 하고 나오면 그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렸다 이거야. 공양을 올린 것도 뭐요? 재의 하나겠죠? 음식을 베풀었다. 이 말이오. 그러니 스님들은 그 음식을 받아서 부처님이 계시지 아니하지만 늘 수행자는 부처님이 옆에 계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산다. 이거야. 그래서 부처님의 형상을 조각해 모셔놓고 마치 부처님이 살아계시는 것처럼 그 앞에서 조심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산다. 이거야. 그래서 공양을 잠시 부처님 전에 올려서 부처님이 살아계셨다면 부처님께도 드려요? 안 드려요? 드리지. 그래서 잠시 내려와서 먹었다. 이 말이오. 이래서 음식이 나온 거요.

 

그런데 우리나라에 들어오니까 이제는 조상 전에 제사지내는 풍속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있었죠. 그러니까 그것과 결합을 해서 다시 내려서 조상 전에 다시 놓았다가 내려먹었단 말이오. 귀신이 먹는 거 봤어요? 정말 먹으면 제사 지낼 사람 있을까? 그런데 한 상에 얼마냐? 돈을 얼마나 냈는데 왜 음식을 이것밖에 안 차렸느냐? 무슨 그래 비싸냐? 절에서 돈 좀 적게 받고 하지. 깎고, 요새 물가가 얼만데. 인건비가 얼마나 드는데. 이렇게 해서 거래가 이루어진단 말이오.

 

이것뿐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돈을 얼마 내고 기도를 해 달라. 뭘 해 달라. 그래서 돈 많이 내면 축원도 길게 해주고, 적게 내면 적게 해주고. 이게 다 나쁘다는 뜻이 아니에요. 그냥 하나의 세속적인 뭐다? 상거래에요. 이것은 본래 가르침과는 많이 멀어져 있다. 이 말이오. 그렇다고 이게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 세상이 다 이렇게 거래로 이루어집니까? 안 이루어집니까? 이루어지지. 그러니까 여기서도 그런 세속의 물이 들어와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말이오. 그러나 이것은 참모습은 아니다. 참모습은 아니다. (58:12)

 

이 상에 집착한다. 이 상에 집착을 우리로서는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죠? 이게 글은 쉽지마는 늘 한 생각 일으켜서 모양에 집착한단 말이오. 그러면 저도 이렇게 이 상에 집착해서 내가 저지른 실수를 하나 얘기해 볼게요. 제가 경주에서 있을 땐 데. 어느 절에서 포교당이었어요. 그래 있는데. 절에 살면 사시에 불공을 드립니까? 안 드립니까? 드리죠. 그 절은 시내에 있는 포교당이니까. 제가 거기 있으면서 포교를 열심히 하려고 그랬으니까. 어린이부도 있고, 그다음에 중고등학생부도 있고, 대학부도 있고, 청년회도 있고 이래요.

 

그런데 일반 신도는 별로 없어요. ? 예를 들면 불공을 올려주고 뭐 이런 일을 안 하니까. 일반신도는 어쩌다가 개인적으로 자기 불공할 사람들 오래 다녔던 사람이 몇 명 있지마는. 이런 사람들은 다 딴 절에 가버리고 청년들하고 아이들만 있어요. 청년들하고 아이들만 있으면 절이 유지가 됩니까? 안됩니까? 안 돼. 돈 쓸 일만 있지 수입은 없다. 이 말이오. 불전함에 일주일 내내 가봐야 일이만 원도 안 들어오고 일주일 수입이 절에 십만 원도 안 된단 말이오. 그럼 그거 갖고는 전기세하고 전화세하고 이런 거밖에 처리가 안 돼요.

 

그러니까 먹을 음식을 구할 수가 없을 정도로 빈한하단 말이오. 이런 포교당에는 큰절에서 본사에서 지원해서 유지를 해야 되는데. 본사에서 또 생각은 어떠냐? 절이란 건 다 독립해라. 독립해서 그게 운영이 돼야지. 자꾸 도와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냐? 여러분들도 북한에 대해서 식량주자 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고 생각하듯이. 주는 사람은 늘 그리 생각해. 그러니까 한 번 줘도 되는 게 아니고. 그러면 계속 줘야 되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냐? 이래서 포교비가 안 나온단 말이오. 원래 이런 포교당은 포교비가 나와서 그걸 가지고 대중에게 봉사하는 건데. 그러니까 우리 먹고 살길도 없단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아르바이트해서 벌어 와서 먹고, 또 어디 가서 식량 같은 거, 양식 같은 거 큰 절에 가서 얻어서 먹고, 반찬도 형편없고 이러죠. 그런데 사시에 예불을 드리는데 사시불공을 드리려면 천수경을 치고 이래 하지 않습니까? 천수경을 독송하고 있는데 누가 문짝을 딱딱 때리는 거요. 한번을 이렇게 똑똑 두드리는 게 아니라. 무슨 쇠토막이나 나무토막을 가지고 문을 때려 부수듯이 그리 때리는 거요. 기도 중이니까 신경 안 쓰고 기도하는데 자꾸 때리니까. 겉으로야 말았지만 속으로는 짜증이 나요? 안나요? 나죠.

 

어떤 놈이 와서 문짝을 저리 때리나? 이거야. 참고 기도를 하는데도 자꾸 때리니까 그냥 목탁을 탁 놔 놓고 나갔단 말이오. 아니 어떤 놈인가 싶어 문을 탁 열었어. 이래 떡 보니까. 애들이 그랬으면 야단을 쳤을 거 아니오. ~ 이놈들아. 그럼 문 부러지는데 왜 이리 장난하느냐? 이렇게 얘기를 하려고 문을 탁 열었는데. 떡 서 있는 사람이 지팡이를 하나 떡 집고 다리가 하나 없어서. 그리고 팔도 하나 없어서. 이렇게 떡 해가지고 있는 거요. 그러니까 다리 하나 없고, 팔 하나 없는 사람이오. 얼굴은 이렇게 툭 부어서 커다란 사람이 떡 서 있는 거요. 야단을 칠 수 있어요? 없어요? 없죠.

 

왜 그랬냐 하면 이쪽 팔이 없는데다가 그 쇠갈퀴 있잖아. 그죠? 그걸로 이렇게 쳐놓으니까. 그걸로 자기 딴에는 문을 똑똑한다고 그걸로 때리니까 쇳소리가 난 거요. 그래서 내가 보고. 딱 선입관에 내가 속으로 어떤 생각이 들었겠어요? 아이고 돈 얻으러 오셨구나. 이런 생각이 든 거죠. 그 모양만 보자, 보자마자 아이고돈 얻으러 왔구나.’ 그런데 지금 내가 뭐 하는 중이에요? 기도 하는 중이잖아. 그죠? 그래서 내가 아이고 여보 좀 기다리시오. 나 지금 기도 중이니까.” 이러고 들어왔단 말이오. 난 너무나 내가 당연한 일이죠.

 

그래서 다시 천수를 치는데. ~ 더 세게 또 두드리는 거요. 그러게 아까보다 화가 속으로는 훨씬 더 났단 말이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이런 생각이 드니까 목탁을 탁 놓고 나가. “아이 당신 왜 그리 자꾸 문을 두드려. 당신 보다시피 내가 바쁘지 않느냐고. 조금 기다리면 되지 뭘 그래?” 내가이랬어. 그랬더니 이 사람 얘기가 당신만 바빠? 나도 바빠.” 이래. 그래서 내가 기가 차서 말이오. “그래 아무리 바쁘지마는 내 호주머니 지금 돈도 하나도 없는데, 당신 좀 기다려야 될 거 아니냐. 돈을 가지러 저쪽 편에 가가지고 요 사이 가서 찾아서 와야 되는데.” 이렇게 얘기했더니 이 사람 딱 쳐다보더니 내가 언제 돈 얻으러 왔다 그랬어?” 이러는 거요.

 

그러니 나는 당연히 돈 얻으러 왔을 거라고 생각하고 주는 자에 어떤 교만이죠. 너는 얻으러 왔으니 네가 답답한 놈이니까 좀 기다려야 된다. 이리 생각해서 했는데. 내가 언제 돈 얻으러 왔다. 그랬냐는 거요? 그러니까 내가 정신이 번쩍 든 거요. 사실 이 사람 아직 한마디도 안 했단 말이오. 그냥 거기 서 있었을 뿐인데 그 모습을 보고 동냥 얻으러 왔구나. 난 지금 바쁘니 니 좀 기다려라. 그래 또 자꾸 재촉하니까. 야 이놈아 내 바쁜 줄 알면서 왜 그러냐? 그러니까 니만 바쁘냐? 나도 바쁘다 이러니까. 아무리 바쁘지만 얻으러 온 놈이 좀 기다려야지. 그럼 내가 지금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생각이 자동으로 흘러 간 거란 말이오. 내가 언제 돈 얻으러 왔더냐? 그러는 거요. 그 얘기를 떡 듣고 나니 이 사람 아무 얘기도 안 했는데. 내가 다 지어가지고 이미 내가 다 했단 말이오.

 

그래 왜 왔소?” 이랬어. 그랬더니 나 중 되러 왔어.” 이러는 거요. 겨우 마음이 안정됐다가 또 짜증이 확 일어나는 거요. 아 이게 아무리 중이 시세 없지만, 이거 뭐 아무나 중되는 줄 아냔 말이야. 그런데 그 해가 82년도니까. 그 전에 10.27 법난이 있어서 스님들을 경찰이 잡아가서 재산 축재했느니, 여자 관계해서 난리가 나고 신문에 많이 났잖아요. 그래서 불교인들이 얼굴을 못 들고 살 때니까. 불교가 세상으로부터 시세 없이 이렇게 당하지마는 아 턱도 없는 사람이 와서 중 되러 왔다는 거요. 그러나 내가 너 같은 사람이 어떻게 중되? 이렇게 말할 수는 차마 없잖아. 그지? 내 속마음은 중이 뭐 쥐나 개나 다 되는 줄 아나? 이런 생각이 들었단 말이오.

 

그래서 내가. “~ 여기는 당신 보다시피 시내 포교당이지 않느냐? 그러니까 여기서는 중이 될 수가 없다. 저기 산속에 이렇게 조용한 절에 가서 출가하라.”. 내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이 분이 하는 얘기가, 자기가 몇 군데 가 봤다는 거요. 몇 군데 가 봤는데 가는 데마다 다 딴 데 가라더라는 거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나도 좀 찔리는 거요. ? 이 사람이 신체가 불구니까 어떤 절에 가도 아이고 우린 사정이 어떻고 하고 딴 절에 가라 그랬겠죠. 나 또한 우린 포교당이라는 핑계를 대고 여기는 학생들하고 어린애들 가르치는 데니까 딴 데 가라고.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왜 중 되려고 그러는데?” 이렇게 물었더니. , 내가 지금 마음이 답답하다는 거요. 그래서 중 되려는 거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는 거요. 내가 그때만 하더라도 마음이 답답한데 어떻게 해야 되느냐는 데 할 말이 꽉 막혀버렸어.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될지. 그러니까 그때까지 내가 알던 교리나 여러 가지 애들 가르치던 이런 거 갖고는 이 사람이 마음이 답답하다는데 그냥 그래? 그러면 염불하시오. 그럼 교리 공부해할 수가 없잖아. 당장 마음이 답답하다는데. 입도 뻥긋 못 했어. 그래 꽉 막혀 가지고. 그래 왜 중 되려고 그러는데요? 물어봤어. 그랬더니 이 사람이 결혼을 한 뒤에 월남전쟁에 갔다는 거요.

 

그때는 왜 돈 번다고 월남 자원해 많이 갔잖아요. 그죠. 그래서 거기서 부상을 입고 다리가 하나 날아가고 팔이 하나 잘리고 이렇게 해서 상이군경이 된 거죠. 그래 연금을 좀 받고 집에 사는데 생활이 어려울 거 아니겠어요? 그죠? 애 둘이 있는데. 그래 당연히 생활을 누가 하게 됩니까? 부인이 하게 된다. 부인이 생활하게 되니까 무슨 보따리 장사를 한다고 바깥에 나오니까 늦게 들어오고 그럴 거 아니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자꾸 부인한테 신경질을 낸 거요. 왜 늦게 들어오느냐? 오늘 뭐했나? 이렇게 의심이 자꾸 생기죠. 그리고 부인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자꾸 생각하게 되는 거요. 내가 병신이니까 저것도 나를 무시한다. 이렇게 되니까 고함을 치고, 또 술을 먹고, 주정하고 자꾸 이래. 그래 부인은 억울하겠어요? 안 억울하겠어요? 억울하지. 억울하니까 부인은 또 어떠냐 하면 항의를 하겠죠. 그러니까 작대기 갖고 두들겨 패고 살림 때려 부수고 이렇게 된 거요. 이렇게 해서 집안이 엉망이 돼 버린 거요.

 

그런데 이렇게 해서 한 번 부인이 도망 나와 버리고. 그러면 자기가 애들 데리고 어렵게 살다가 부인이 오면 자기가 잘못했다. 그러고 또 같이 살다가, 또 이렇게 자기를 무시한다 싶으고 이러니까 술 먹고 행패를 피우고. 이러면 부인이 또 도망가고. 이게 십몇 년을 계속했단 말이오. 도저히 할 짓이 아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이렇게 하지 말아야 된다고 생각을 해도 한 잔 먹으면 그게 안 된다는 거요. 속에 울화가 터지니까, 그러니까 자기 신체 불구가 돼, 멀쩡한 사지가 갑자기 불구가 되니까 화가 나겠죠.

 

그리고 또 자기가 이렇게 되면 남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니까 또 그런 열등의식이 생기고. 이래서 이 분이 죽어야 되겠다. 나 같은 놈이 죽어 버려야 이 집안이 제대로 되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죽으려고 약을 사 와서 했는데, 차마 아무리 죽으려고 해도 못 죽겠다는 거요. 그래서 죽는 것과 똑같이 이 사람이 죽지는 차마 못 하니까 없어져야 되겠다고 생각한 게 옛날식으로 생각하면 뭐에요? 중이 돼 버리자. 중이 되어 버리며 없어지는 거니까. 그죠? 그래서 자기가 중이 되겠다는 거요. 그러니까 늘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하고 행패를 피우고 이러니까. 그래 중이 되겠다. 그래서 자기가 몇 개의 절을 다녀봤다는 거요. 그런데 다 안 된다. 그러더라는 거요. 그래서 내가 궁금하잖아요. 이런 절에 왜 왔는가 싶어서.

 

그래서 여기는 어떻게 알고 왔소? 아 누가 소개해 주더라는 거요. 그래 내 생각할 때 누가 소개해 줬을까? 이런 절에. 여긴 애들 가르치는 절인데. 그래서 누가 소개했어요? 이러니까. 여 안주머니에서 꺼내 종잇조각을 하나 꺼집어내서 나를 떡 주는 거요. 그래 떡 받아보니까 내가 보낸 초청장이오. 그걸 딱 보는 순간. 큰 망치로 내 뒤통수를 딱! 때리는 것처럼 멍해졌어. 그게 뭐냐 하면 내 포교 팸플릿이거든요. 그 포교 팸플릿에 내가 뭐라고 적어 놨느냐 하면은 제일 안면에다 크게 마음이 불안하고 답답한 자여. 여기 부처님께서 마련한 좋은 안식처가 있으니 다 이리로 오시오.’ 이렇게 써 놓고. 밑에다가 어느 사찰해서 전화번호 쓰고. 안 페이지 넘기면 그 안에다가 어린이는 며칟날 법회, 중고등학생은 며칟날 법회, 대학생은 며칟날 법회. 청년회는 며칟날 법회 이리 쓰고. 이쪽은 또 교리강좌. 무슨 강좌, 무슨 강좌 쓰고 제일 또 뒷면에는 보왕삼매론 이렇게 해서 이천 장을 만들어 시내 뿌렸단 말이오. 이런 사람 오라고.

 

그런데 진짜 내가 오라 했던 사람이 딱 맞는 사람이 찾아왔죠? 그죠? 그런데 나는 이 사람을 보는 순간 지금까지. 요 직전까지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내 보내느냐? 하는 오직 이 한 생각밖에 없었단 말이오. 처음에는 뭐 줘가지고? 돈 좀 줘서 내 보내려 그러고. 그다음에는 이 우리 절이 애들 가르치니까 출가하기 곤란하다 이렇게 내보내려고 그러고. 어떤 이유로든 이 사람을 내 보낼 생각만 했다는 거요. 그러니 이게 모순 아니오? 그죠? 이율배반이잖아요. 그런데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느냐? 내가 양심적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오. 그런데 내 자신이 이렇게 모순투성이요. ~ 괴로운 사람 다 이리로 오라. 이리로 오라. 이렇게 정말 나는 그런 사람의 괴로움을 들어주는 사람이다. 이렇게 믿고 있었는데. 알고 봤더니 정말 그런 당사자가 오니까 쫓아내기에 급급했단 말이오. 시종일관.

 

그런데 내가 얘기했던 게 다 거짓말이라는 게 그 사람을 통해서 밝혀 진거요. 즉 어린애, 중고등학생, 뭐 대학생, 청년. 이런 사람 사실은 내 없어도 잘 살아요? 못살아요? 잘 살죠. 내 없어도 잘 사는 사람들은 불러 모아가지고 내 없으면 마치 너그가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가르치고. 인생이 괴로운 줄도 모르는 애들 붙들어 놓고 인생이 뭐냐? 고다. 고가 원인이 뭐냐? 이래가지고 매일 교리를 가르치고 그랬는데. 정작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왔을 때는 그냥 대문 밖으로 쫓아 내려고만 생각했단 말이오. 그러니 내가 뭐에요? 여러분들 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기 나름대로 의지처가 있잖아요. 의지처가 뭐에요? 어릴 때는 부모가 제일 큰 기둥이고, 형제가 작은 기둥이고, 이렇게 해서 기둥을 갖고 살고, 결혼하면 남편이나 아내가 큰 기둥이고 또 이리되죠?

 

그런데 저는 부처님 법을 만나서 기둥을 다 없애 버렸단 말이오, 즉 세속적인 가족관계 이런 거를 다 끝내 버렸잖아 그죠? 기둥을 다 없애버리고 기둥 큰~ 걸 하나 만들어서 부처님의 기둥을 하나 만들어서 그걸 움켜쥐고 살았단 말이오. 그러니까 나는 늘 거기에 대해서 자랑스러움이 있었겠죠. 그리고 또 내가 큰 기둥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다른 스님들에 대한 엄청난 소위 비판을 했단 말이오. 이런 중들이 말이야. 포교는 안 하고 돈 갖고 저거 흥탕망탕 쓰고 이러면서 말이야.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고 비난을 하고 비판을 하고 개혁을 한다고 하고 데모를 하고 그랬단 말이오.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이 어때요? 그 사람보다 더한 모순을 하고 있잖아. 자기 혼자 청정한척하고, 자기 혼자 정법을 하는 것처럼 하고 지금까지 살았는데. 알고 봤더니 이렇게 모순투성이란 말이오. 부처님이 필요해서 온 사람은 대문 밖으로 쫓아내고,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돈 몇 푼주고 쫓아 내든지. 무슨 이유를 대 쫓아내든지. 여기는 스님들이 있을 때가 아니라고. 여기는 출가 할 때가 아니라고. 이런 것도 다 모순이오.

 

? 내가 그동안에 주장한 게 뭐요? 불법은 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책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삶속에 있고. 이렇게 생활불교를 가르쳐 놓고는 마침 쫓아내기 위해서는 옛날 불교가 마치 부처님 도는 산속에 있는 것처럼 내가 말하죠. 산에 가서 출가하시오. 여기는 시내에서 애들 포교하는 데라고 안 된다고. 그런데 그 의지했던 그 큰 기둥이 이렇게 무너져 버리니까 혼 빠진 사람이라는 거 있죠. 멍해져 버렸어. 여러분들도 남편만 의지하다 남편 죽으면 어떻게 살까 싶어 멍하잖아. 그죠? 부모가 죽어도 멍해지고 그러잖아요. 자식이 죽어도 멍해지잖아. 그런데 그 여러 가지 기둥 중에 한 기둥만 무너져도 인생이 멍해지는데. 나처럼 외 기둥만 딱 쥐고 있던 사람이 무너져 버리면 어떻겠어요? 완전히 혼 빠진 사람처럼 돼 버려.

 

제가 이게 조금 일을 할 때, 좀 조리 있게 합리적으로 하는 편이에요. 책임감이 굉장히 강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절에서 어디 외출을 가거나 출장을 가도. 후배들 불러서 누구는 연탄불 갈고, 누구는 전깃불 어떻게 끄고, 어떻게 하고, 누가 예불을 하고 딱 정해놓고 시키는 쪽이라서 빈틈없이 하는 쪽이거든요. 옛날에는. 요즘은 빈틈이 많아요. 방 청소 할 때 이렇게 물방울 하나 안 닦은 것도 다 체크 할 정도로 이렇게 해 놓고 사는 사람이니까. 그런데 자기가 무너져 버리니까. 자기가 무너지면요. 절이 망하든지 흥하든지 이런 생각일 들까? 안 들까? 아무 생각도 안 들어. 자기가 무너져버리면. 그게 다 알고 보면 자기가 있고 그런 게 있는 거지. 자기가 탁 무너지면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멍해져버려.

 

그렇게 해서 그냥 절에 온다간다 말도 안 하고 관심사가 없어진 거죠. 멍해지니까. 자기가 이런 엄청난 이 자기모순을 자기가 보니까. 그래서 제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간 게 저 남산 칠불암으로 간 거요. 그 남산 칠불암은 제가 학생 때 절에 들어와서 거기서 열심히 기도도 하고 정진도 하고 스승님 모시고 참선도 하고 그런 어쩌면 나의 정신적인 고향 같은 곳인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그리로 간 거란 말이오. 거기서 칠불암 부처님 앞에서 턱 엎어져 쓰러져 버렸어.

 

그러니까 이건 뭐 그냥 어두워도 어두워지는지 날이 밝아도 밝은지. 배가 고픈지 안 고픈지. 추운지 더운지 이런 생각이 없어집니다. 이건 다 자기가 있고 그런 생각이 들지. 자기가 이렇게 막 허무해져 버리니까. 아무런 마치 미친 사람처럼 혼 빠진 사람처럼 그리돼서 쓰러져 있었던 거요. 그런데 한 삼일쯤 됐나 봐요. 그러니까 가서 하루 지나고 그 이튿날인데. 그때 약간 정신이 들고 이렇게 생각이 돌아오면서 자리를 털고 거기서 일어났단 말이오. 일어나서 보니까 벌써 어제 그저께 여기 온 거요. 여기에.

 

그때 내가 혼 빠진 것처럼 해서 이 칠불암으로 갈 때 마음속에 어떤 결심이 생겼느냐? 내가 다시는 이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 이런 결심을 했어요. 내가 나 자신을 확연하게 깨닫기 전에는 이 세상에 나와서는 안 된다. 포교를 하네, 뭘 하네, 뭘 하는 게 이게 사실은 다 위선적인 행동이에요. 그렇게 딱 결심을 하고 내가 들어갔단 말이오. 죽어버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다신 나오지를 말든지.

 

그런데 내가 거기서 삼일 있으면서 정신을 차리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그건 뭐냐? 이제까지 내가 십 년 동안 정말 쓸데없는 짓을 했다. 이렇게 이 모순에 부닥치면서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내가 그렇게 십 년 동안 열심히 미쳐서 했고, 그 팸플릿을 위선으로 뿌려. 그 팸플릿을 그렇게 뿌렸기 때문에 그 거지를 만나서 내가 모순이 있다는 것을 뭐하게 됐다? 발견하게 됐다. 이 말이오. 과거에 공덕이 있다는 게 아니라. 내가 만약에 산속에 가서 있었으면 나는 영원히 내 자신이 모순 속에 있다는 걸 모르고 죽었을 거다. 이 말이오. 이 세상에 살았으면, 그렇게 안 했으면.

 

그 팸플릿을 안 내고 그 거지를 만났으면 내가 그런 대화를 하면서도 내가 모순 속에 대화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 수가 없었다. 이 말이오. ? 내가 그전까지는 다 내가 잘한다고 했지 내가 이 사람한테 거짓말 한 거는 아니었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 팸플릿을 탁 내놓는 순간 마치 꿈 깨듯이 내가 엄청난 이율배반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요.

 

그러니까 지난 10년은 어떻게 보면 허송세월이고, 또 어떻게 보면 내가 어리석은 자라는 거를 깨닫게 해 줬다 이 말이오. 깨달아서 지혜로운 자가 됐다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이 참 어리석은 자고 무지 목메 한 자였구나. 그런데 나는 내가 굉장한 존재인 줄. 내가 인생의 갖가지를 다 포기하고 부처님 법을 위해서 내가 목숨을 바친 자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나를 정당하게 대우를 해야 된다? 안해야 된다? 해야 된다. 이거요. 그런데 왜 너희는 부처님 법, 밥을 먹으면서 월급까지 받아가면서 왜 제대로 안 하냐? 이러니까 내가 비판의식이 굉장히 강했죠.

 

나는 내가 돈 벌어서 이 젊은 아이들 가르친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너희들은 절에서 나오는 돈 가지고도 왜 공부를 제대로 안 가리키냐? 이런 비판이 있었단 말이오. 그러니 지난 10년 동안 헛된 길이었지만 오늘 그 헛된 길을 통해서 나는 다시 내가 헛됐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이것을 깨닫게 되니까. 그동안에 내가 막 비난했던 비판했던 스님들에 대해서 미움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 나는 그 사람들만 출가해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본분에 어긋나게 제멋대로 살았다고 비판을 했는데 그 사람들만 그랬어요? 나도 그랬어요? 나도 그랬다. 이거야.

 

그 사람들은 잘못되고 나는 바른길을 가는 줄 알았는데. 지금 돌아보니까 나도 미망에 사로잡혀 가지고 마치 나만이 바른길을 가는 양, 그렇게 해서 했는데 알고 봤더니 그 포교라는 것도 이렇게 내 지식의 욕구, 내 필요, 내 생각을 사람들에게 주입한 것이었고, 정작 그 사람을 필요로 한 거지가 왔을 때는 쫓아내기에 급급했다 이거야. 그러니 그들만 그들의 생각대로 부처님 법을 안 따르고 그들의 생각대로 산 게 아니라. 나 또한 부처님 법을 안 따르고 내 생각대로 살았다. 이거야.

 

어쨌든 그렇게 이게 생각이 돌아가면서 나는 세상에 안 나오겠다고 했지만. 바로 내가 세상 속에서 이렇게 헤매고 산 거 자체가 오늘의 이 나를 내 모습을 내 모습이 거룩하다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별 볼 일 없는 인간이구나. 모순 속에 살았구나 하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 이후로, 그래 난 그날 바로 내려와서 활동했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그 전날이나 그 이후에나 아무 차이가 없는 삶이었어요. 그러나 나 자신한테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거야. 그 전에는 이 강의를 할 때요. 만약에 연기법을 가르치거나 무슨 교리를 가르치거나 설법을 하려면 경전을 보고 거기에 밑줄을 긋고, 다른 사람 해석한 걸 봐서 누구는 뭐라 그랬고, 누구는 뭐라 그랬고, 누구는 뭐라고 했다. 이기영 박사님 책 내서 공부해서 메모를 하고, 거기 또 어떤 이동화 스님 쓴 거 보고, 불교 사전 찾아서. 이렇게 해서 늘 강의를 했단 말이오. 그러니까 준비를 딱 해서 강의를 하니 사람들도 좋아했어요. 잘 가르친다고.

 

그러고 또 한쪽은 내가 그때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불교도 개혁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사회도 개혁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도 바로 잡아야 된다고 생각하고, 친일 잔재도 청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노동자들의 또는 농민들의 권익도 옹호돼야 된다고 생각하고. 한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과 소위 개혁의식을 갖고 있었단 말이오. 그런 행동을 막 물불 안 가리고 할 땐데. 대부분 그때 그런 활동 한 사람들은 기독교인이었어요. 종교적으로 보면.

 

그럼 그 사람들은 보면 성경에 말이오.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게 아귀가 딱딱 맞게 설명이 되어 있단 말이오. 예를 든다면 마태복음 25장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일으켜 세워놓고 왕이 와서 심판할 때 말이오. 너희들은 영원히 지옥에 가거라. 너희들은 영원히 천당에 갈 거다. 왜 우리가 지옥에 가야 됩니까? 너희들은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갇혔을 때 나를 영접하지 않았다. 언제 우리가 주가 그런 적도 없었고, 또 주가 그렇다면 우리가 그렇게 안 했을 리도 만무하다 이거야.

 

그랬더니 이 세상에 가장 작은 자에게 안 한 것이 곧 나에게 안 한 것이다. 이거야. 또 이쪽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이거야. 그러니 이걸 딱 읽으면 아~ 천당에 가느냐? 지옥에 가느냐 하는 기준은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경제적으로 열악한 자. 신체적으로 열악한 자, 정신적으로 열악한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 이게 바로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뭐가 됩니까? 기준이 되니, 교회 다닌다고 천당에 가는 것도 아니고, 성경책을 많이 읽는다고 가는 것도 아니고, 정말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간다.

 

그러면 이것은 어떤 가난한 자를 돕고 어려운 자를 돕는데 이 중요한 지침이 됩니까 안 됩니까? 지침이 되지. 그러니 이런 것은 운동하기에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불교는 읽으면 중생이 중생이 아니오, 이러니까. 아 이걸 갖고 무슨 힘이 나겠어요? 그래서 이 마음 닦는 데는 참 좋은 점도 있지마는, 이 불교는 자~ 이 어떤 세상을 새롭게 하는 데는 뭔가 부족하다 이거야. 이런 내 속에 남한테는 말을 안 하지만 불만이 있었어요. 그러니까 어떤 경전을 봐도 이게 추상적이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탁 행동할 수 있는 게 없단 말이오.

 

그랬는데 이 이후로 경전을 읽으면 어떠냐? 성경에서 쓰여진 그런 거 하고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정말 어떻게 일을 해야 되느냐? 어떤 관점을 봐야 되느냐 하는 게 경전 속에서 다 보이는 거요. 그래 얼마나 참회가 되겠습니까? 내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해놓고, 공연히 경전만 나무라고 불교만 비판했다. 이거요. 그러니까 어쨌든 이후로는 제가 단어를 모르는 게 있으면 사전을 찾을까. 그러지 않고는 그냥 한문을 잘 모르니까 해석본을 읽어야 되겠죠.

 

보면 그 글자 이면에 숨겨져 있는 뜻이 가슴에 다가오게 됐어요. 그러니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똑같은 경전을 그 전에 수도 없이 읽었는데도 무슨 말인지 모르거나, 알아도 내 깜냥대로 알았다. 이거야. 그런데 이게 한 번 이런 사건이 나고 경전을 읽으면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이라는 건 무궁무진하게 다가오게 되는 거요. 그러니 이러한 중생이 중생이 아니오. 이것도 글자로 보니까 무슨 소린가? 중생이 중생이 아닐 바에야 구제할 것도 없다는 얘기 아니냐? 그러면 뭐 세상을 바꿀 필요도 없다는 얘기네. 그러니 이거는 세상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기득권층의 입장을 옹호하는 교리 아니냐?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 의미가 그런 게 아니었던 거 에요.

 

보살행을 하는 사람들이 즉 세상을 위해서 세상을 장엄하는 사람들이 어떤 자기 생각, 남을 위해서 한다는 그런 생각가지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생각을 갖고 하게 되면 결국은 아집의 소산이 된다. 전혀 다른 식으로 이걸 이해하게 됐다 이거요.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가 상에 집착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리고 상이 상인 줄, 내가 상에 집착했을 때 아~ 이게 상에 집착했구나 하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 뭐다? 상이 상이 아닌 줄을 아는 거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여러분들 나름대로 다 생각을 가지고 세계를 본단 말이오. 각자 다 자기는 안경을 벗고 세계를 본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꿈속에서는 다 현실이라고 장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안경을 벗고 보면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안경을 끼고 봤다는 걸 알게 되고, 꿈을 깨야 아~ 내가 꿈속에서 헤맸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여러분들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야. ~ 내가 정말 내 식대로 아이를 보고, 내 식대로 남편을 보고, 내 식대로 자식을 보고 내 식대로 세상을 봤구나.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고, 그것이 타인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준거냐를 알게 될 때 거기에는 참회의 눈물이 있고, 동시에 이제는 무엇인가 조금 알았다는 깨달음의 기쁨의 눈물이 함께 있다 이 말이오. 참회의 눈물만 있고, 깨달음의 눈물이 없으면 후회하는 걸로 가게 되고, 뭔가 얻어서 기쁜 것은 참회의 눈물이 없다 이 말이오.

 

그런데 이 깨달음은 그동안 어리석은 거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 있고, 깨달음에 대한 기쁨이 있기 때문에 탁 울고 눈물이 뚝 그친단 말이오. 다시 말하면 울기는 우는데 얼굴에 눈물은 줄줄줄 흐르는데, 얼굴은 환하게 된다. 그런 거 봤어요? 그런 경험 있어요? . 이게 뒤에 나오는 涕淚悲泣체루비읍 이백불언 희유세존 이렇게 나간단 말이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그 깨달음의 기쁨이 얼굴에 환하게 나타난단 말이오. 이거는 후회하는 거 하고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깨달음의 길이라는 게 어떤 건지를 한 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제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겠어요? .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상의 사로잡힘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눈을 떠서 세상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행복하게 되도록 베풀어 주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이지. 어떤 세력을 형성하거나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아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다 불교이름으로 일색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다 꿈 깨듯이 깨어나서 기독교라는 이름이든, 불교란 이름이든, 종교가 없는 이름이든, 그건 우리는 상관 할 바가 못되고.

 

그러나 다 바른 눈을 떠 이렇게 미망에 사로잡혀서 부모형제간에 부부간에, 사회 이웃 간에, 나라 간에 다투고. 이런 거는 깨달으면 막을 수 있어요? 없어요? 막을 수 있다 이거야. 여러분들이 그걸 지금 증명해 보여야 되요. 도저히 못살겠다는 사람. 도저히 못 하겠다는 일을 여러분들이 능히 해낼 수 있을 때 이게 바로 증명되는 거다. 체득 되는 거란 말이오. 그러면 그런 게 딱 체득이 되면 사회적인 문제도 우리가 해결할 수도 있다는 자신이 생기고, 남북 간의 문제도 환경문제도 아~ 이거 이렇게 하면 해결될 수 있겠다 하는 이런 자신이 생겨요. 자기 개인의 문제도 자기 이웃과의 문제도 해결 못하고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니. 세상 문제는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는 불가능해 보인단 말이오. 무모하게 보인단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서 무엇인가 개혁을 한다고 할 때는 아까 저 같은 꼴이 나기가 쉽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일을 할 때도 늘 자기를 돌아보고 경계하고 참회하면서 해야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자기도 모르게 또 이런 상에 사로잡힐 수가 있다. 이거요. 그러니 이 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제상이 비상인 줄 알면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인 줄 알면 뭐 된다? 즉견 여래가 된다. 이 말은 진실을 보게 된다 이 말이오. 진실을 본 위에서 우리가 인생을 살게 되면 개인에게는 괴로움이 없고, 적어지고. 우리는 이 세상을 위해서 정말 그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일을 할 수가 있다. 이거요. 자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