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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페르시아 전쟁 이전, 아테네의 분위기

Buddhastudy 2023. 8. 9. 19:47

 

 

 

기원전 6세기 중반, 메디아에 종속되어 있던 페르시아는

키루스 2세를 중심으로 메디아를 무너뜨리고

이어 오리엔트의 강대국이었던

리디아와 신바빌로니아까지 멸망시키게 됩니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세월이 흘러

키루스의 뜻을 이어간 다리우스 1세가

동쪽으로는 인더스강, 서쪽으로는 이집트,

북쪽으로는 소아시아와 트로키아까지 차지하였죠.

 

다리우스 1세가 통치했던 페르시아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개 대륙에 걸친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오래전 오리엔트를 지배했던 아시리아와는 달리

피지배 민족에게 관용 정책을 펼치며 약 200년간 지속되었는데요.

하지만, 기원전 499년경, 소아시아 서남쪽의 이오니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명분 삼아 그리스 본토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스 지역에서는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대두로

폴리스 연합체로 도시 국가들 간에 델로스 동맹체를 맺게 되는데요.

당시, 오리엔트의 수많은 국가들을 멸망시키고

대제국으로 건설된 페르시아와 작은 소도시 국가들의 연합체인 폴리스들 간에는

그 힘의 차이가 너무나도 명백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에게 멸망할 뻔했던 폴리스들은

델로스 동맹을 중심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해서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게 되죠.

 

그리스의 수많은 폴리스 중에서도

이 전쟁을 통해 급부상하게 되는 곳이 바로 아테네였습니다.

 

 

이번 영상에서는 과연 거대 제국 페르시아와 맞붙어

눈부신 활약을 한 아테네의 국가 분위기와

당시 상황은 어땠는지 짚어볼까 하는데요.

일개 도시 국가가 페르시아 제국과의 전투에서

우위를 점령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래도 역시 물질적으로도 제도적으로도

준비가 되었던 상태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도시국가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에서도 가장 유명한 도시국가인데요

신화는 물론 철학의 발달과 토론이 자유로운 곳

지금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긴 하지만

기원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에서 발달된 민주주의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는 아테네는

모든 유럽 국가들의 문명의 발상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유명도가 높아진 아테네도

그리스 역사 초기에는 별로 존재감이 없었던 도시였는데요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미케네 문명 시기에도 중소 도시로 존재는 했으나

언급이 거의 되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1100년경, 도리아인들의 남하로

미케네를 비롯해 여러 도시들이

연이어 파괴되어 암흑시대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암흑시대에도 아테네는 살아남으면서

아테네인들은 큰 자부심을 갖게 되었죠.

 

기원전 7세기 무렵, 아테네는

아직 민주주의가 발전되지 않아

귀족정 형태로 국가 통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 귀족들 중심의 관습법에 불만을 품은 아테네 민중들이 개혁을 요구했고

이에 기원전 621년 드라콘이 최초의 성문법을 제정하였죠.

 

이 시기에 오리엔트에서는

오랫동안 패권을 차지하고 있었던 아시리아가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동맹으로부터 멸망해가던 시기였습니다.

 

서아시아시아는 국가들끼리 조용할 날이 없이 전쟁이 이어졌는데 반해

아테네에서는 문명의 발달과 함께 사회적 관심을 보이는 법 개정 등의

시민의식이 발달하고 있었죠.

 

하지만, 아테네를 위해 만들었던 드라콘법이라 불리는 최초의 성문법은

부작용이 많았던 법이었습니다.

초기에 만들었던 성문법이었던 탓인지

그 기준이 너무나 엄격하여

중범죄뿐 아니라 경범죄에도 시도 때도 없이 사형을 부과하게 되어

피로 쓰여진 법이란 평가를 받기도 했죠.

이로 인해 영어단어 엄격한, 가혹한이라는 뜻을 지닌

‘Draconian'의 어원도 드라콘 법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범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나오는 사형제도로 인해

아테네의 민중들은 다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고

그러던 중 그들을 대변하고자 조정자 솔론이 집정관이 되는데요

솔론은 조정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만큼

귀족과 평민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솔론은 그리스 7현인 중 한 사람으로서

살라미스 섬을 둘러싼 메가라인과의 싸움에서 명성을 얻어

기원전 594년 집정관 겸 조정자로 선정되었죠.

그는 장군이면서 동시에 시인이었는데

현실적인 감각과 정서적인 감각을 두루두루 갖춘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솔론이 집정관이 되던 시기인 기원전 600년경에 오리엔트 지역은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메디아, 이집트 4강국이 힘을 겨루던 시기였고

신바빌로니아를 번영케 했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활동한 무렵이기도 했죠.

 

여기서 잠깐, 채널 내 재생목록 10분세계사에 있는 영상 중

키루스 대제 영상에서 솔론이 등장했던 부분을 기억하시는 분들도 계실 텐데요.

오리엔트의 4강국 중 메디아 속국이었던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메디아에 이어 리디아를 점령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리디아가 점령당하기 직전

솔론은 당시 강대국이었던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 만나 대화를 나누었죠.

현자로 소문난 솔론에게 부를 자랑하던 크로이소스는

세상에 자신보다 더 행복한 사람이 어딨냐고 물었고

솔론은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일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솔론과 크로이소스와의 행복 토론은

연대 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논란도 있기도 한데요.

이처럼, 특정 일화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마다 그 의견이 다르다는 점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시, 아테네 이야기로 돌아가서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8세기에서 기원전 6세기 동안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죠.

 

가장 먼저, 폭발적인 인구 변화가 있었으며

그다음으로는 인구 변화에 따른 경제적 변화

그리고 사회와 문화적으로도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미케네 문명이 멸망한 후 그리스 지역은 암흑시대를 맞이했으나

다시, 인간은 새롭게 태어나고 평화 시기가 다가오며

기원전 8세기쯤에는 인구 증가가 일어나게 되죠.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다량의 식량을 필요로 하였고

이로 인해 농경도 더욱 발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인구 증가는 개간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었고

이에 규모가 커진 마을들은 서로 연합하며

약한 지역을 침범하는 등 식민지 개척으로 방향을 잡죠.

고대 그리스인들은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마르세유

동쪽으로는 터키 연안까지 식민지를 넓혀갔습니다.

 

기존에 살고 있었던 그리스인들의 영역은

농사를 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 활동으로 보다 수월한 농작물을 공급받게 되었죠.

 

또한, 본래의 그리스인들이 거주하던 땅에는

올리브기름과 포도주를 수출하면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를 축적한다는 의미는

모두가 부유해진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았죠.

그중에서도 아테네는 빈부격차를 비롯하여

총체적 난국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아테네가 위치했던 아티카 일대는

만성적으로 농경지와 수자원이 부족한 일대였는데요.

농경지는 일부 권력자들이 차지하는 쏠림현상이 있었고

평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에도 힘들어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갈 정도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역에서도

정치경제적인 불안정한 이유로 인구가 유입되어

아테네 인구는 늘어만 갔습니다.

 

같은 시기 오리엔트 지방에서는

강대국들이 어느 정도 체제를 잡은 뒤

힘싸움에 의해 페르시아가 통일하면서 더욱 체계를 잡아가는 과정이 있었는데요.

그에 반해, 그리스인들은 질서있는 국가 체계라기보다는

점성적으로 세력이 뿔뿔이 흩어져 있는 형태였습니다.

 

아테네로 유입된 많은 인구들로 의해 아테네의 빈민층도 크게 증가하였고

빈민층은 빚을 갚을 여력이 없어

결국 노예로 전락하거나 도주하기 일쑤였죠.

 

시간이 지나 아테네는 빈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산악파와

귀족 지주들이 있는 평야파, 해안파가 대립하는 구조가 성립됩니다.

 

아테네에서는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의 증가로

자국민들의 계급차와 빈부격차로 인해

내적으로 사회가 붕괴되는 것을 막고자 했는데요.

이에, 부족한 농경지를 확보하고자 살라미스의 경작지를 노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내부적으로 양분되어 있던 시민들은

전쟁참여도 미적지근하게 이루어졌으며

결국 살라미스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죠.

 

이렇게 아테네는 아무런 외부압력이 없이도

내부적으로 혼돈 상태였다고 할 수 있었는데

이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솔론이었습니다.

 

솔론은 살라미스를 둘러싼 메가라와의 전투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데요.

그는 메가라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무력감에 휩싸였던

아테네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세력이 약했던 아테네를 일으킨 전쟁영웅에

국내 분쟁을 종식시키며

외교적 영향력까지 과시하게 된 솔론은

아테네의 슈퍼스타로 떠오르게 되었죠.

 

솔론은 태생부터 아테네가 왕이 있던 시절

최후의 왕 코드로스 왕가의 핏줄이었으며

평민들에게도 매너 있기로 소문난 인망 높은 자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솔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아테네의 정치인이 되어 아테네를 속 시원하게 바꿔주길 바랬죠.

하지만, 문제는 귀족 계층과 평민 계층에게

두루두루 잘해왔던 솔론을 두고서

모든 계층은 이제 솔론은 우리 편이기 때문에

앞으로 자기 편의 요구를 들어줄 것이라고

기대를 한가득 하게 됩니다.

 

정치 이야기를 너무 깊게 이야기하면 점점 내용이 복잡해지니

한가지 사례만 들자면

솔론의 대표정책이라 할 수 있는

세이사크테이아가 있었는데요.

 

세이사크테이아는 무거운 짐 덜어주기라는 뜻으로

솔론은 당시 아테네에 있던 모든 부채를 탕감해주고

신체를 담보로 한 대출을 금지시키게 됩니다.

또한 부채로 노예가 된 사람들을 모두 해방시켜주기도 했죠.

 

하지만, 빚을 탕감해준다는 이 정책은

부유층과 빈민층 양측에게 반발을 사게 됩니다.

우선, 귀족 계층으로서는 자신들이 갖고 있던 채권이 없어지니

큰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또한 빈민층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는데

빚을 탕감해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국가 토지를 전면적으로 개편하여

자신들에게도 균등하게 나누어질 수 있도록 바랬지만

솔론은 귀족들의 모든 재산을 재구성하지는 않았죠.

 

당시 다른 폴리스 스파르타에서는

부유층의 토지를 몰수해 전면적인 토지재분배를 한 상태다 보니

아테네의 빈민층에서도 귀족층의 땅을 모두 몰수하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솔론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자

빚을 탕감해주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던 것이죠.

 

양측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솔론이 행했던 세이사크테이아는

당시 기준으로 계급이라는 신분의 틀을 깨는

혁신이었다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솔론은 정치 참여 면에서도

귀족정으로만 행했던 전통을 깨며

평민도 경제적 수준에 따라 정치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금권정치를 시행하였죠.

 

솔론은 자신이 제정한 법률에 대해

10년간 시범시행을 갖기로 한 뒤 외국으로 떠나게 됩니다.

공부 겸 여행의 목적으로도 볼 수 있으나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인 만큼

외국에 대한 외교 역할도 동시에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솔론은 이집트와 키프로스, 리디아 등을 10년 동안 다녀온 후

아테네에 귀국했지만

그는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여전히 고국의 상황은 계층 간의 세력다툼이 그대로였습니다.

사실, 빈부 격차는 고대 그리스뿐 아니라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도 해결되지 않는 대립이라 할 수 있죠.

 

어쨌든, 솔론은 혼란을 상황을 중재하고자 했으나

여기서 뜻하지 않는 복병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지지해주었던

동료인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이 없는 동안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었고

그동안 민중파의 지지를 얻으며

현재의 아테네는 잘못 되었다는 선동을 일삼았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서

반대파에게 습격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죠.

이에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사기극을 벌이고 있다고 했지만

이미 민중들은 솔론의 말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민중대는

정치깡패로 불리는 자들로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을 진압하였고

결국 모든 많은 이들은 폭력이 두려워 정치 참여를 피하게 되었죠.

기원전 560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를 차지하며

독재를 의미하는 참주에 등극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을 보고 참지못한 솔론은

참주정에 맞서 싸울 것을 주변인들에게 설득했지만

이미 정권의 공은 페이시스트라토스에게 넘어간 상태에서

아무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하고 싶진 않아했죠.

 

결국, 모든 이들의 조화를 꿈꾸고자 했던 솔론은

정계에서 은퇴를 하게 되었고

아테네는 독재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권력을 잡고서

자신의 안위를 위해 열심히 아테네의 개발에 힘쓰게 되는데요.

비록 동기부여는 자신을 위해서였다고 하나

결과적으로는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하고

아테네의 경제를 번영시키게 됩니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올림픽 등의 정책을 펼치며

아테네인들의 단합을 이끌게 되죠.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킨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중앙집권의 강화를 통해

아테네인들의 민족성을 고취시키면서 동시에 국가번영을 이룩하게 됩니다.

 

하지만, 독재의 장점이 추진력과 효율성이 있다면

단점은 분명 이에 원한을 사는 자가 많이 나타나기 마련이죠.

 

결국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죽고 난 후

그의 아들 히파르코스는 암살되고 히피아스는 국외로 추방당합니다.

히피아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추후, 아테네를 공격하는 데 앞장서죠.

 

다시, 아테네는 귀족과 민중 간의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고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약 20년 전인 서기 508년에는

클레이스테네스가 민주적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그는 정치적 활동을 하는 동안

페이시스트라토스 참주정 타도에 힘썼던 인물이었으나

여러 차례 실패하다 스파르타의 힘을 빌어

기원전 510년에 성공한 인물이었죠.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그간 특권의식이 강했던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고

모든 시민들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습니다.

 

데모스라 불리는 촌락공동체가 정치의 기본 단위가 되었는데요.

남자들은 18세가 되면 데모스에 등록하여

재산과 혈연에 관계없이 시민의 권리와 지위를 보장받았습니다.

 

또한, 앞으로 독재의 출현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제를 도입해

독재의 야망이 있는 자라면 국외로 추방시키기도 했죠.

물론, 도편추방제도 그저 정치싸움으로써

상대편 진영의 두각이 나타나는 자를 축출해내는 부작용이 있기도 했으나

특정한 권력이 한 사람에게 쏠리는 현상은 막아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아테네에서는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과정을 거쳐오며 정치적 분쟁이 있었으나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은 민주정이 발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죠.

 

귀족들만이 아닌 평민들이 가지는

아테네 시민으로서 자신에 대한 정체성은

이후, 마라톤 전투에서 그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

아테네의 역사에 대해 정리 해 보았는데요.

고대 도시국가 아테네도 처음부터 민주정은 아니었으며

여느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계급 차이와

빈부격차에 따른 갈등이 존재하던 국가였습니다.

 

다른 국가들과의 차이점이 있었다면

갈등을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한 사람의 힘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닌

여러 사람의 의견이 서로 이해와 충돌이 존재했던 점이었죠.

 

전혀 상대가 되지 못할 것 같은 그리스의 작은 도시 국가들이

거대 세력 페르시아와 맞붙는 페르시아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 세계사 시간부터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