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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4대 문명] 페르시아의 그리스 원정. 마라톤 전투 BC 490

Buddhastudy 2023. 8. 16. 19:25

 

 

 

기원전 550년에 태어나

30세가 되기 전인 기원전 522년에

페르시아의 왕이 된 다리우스 1세는

쿠데타로 왕위에 오른 인물로

정통 페르시아 왕족의 핏줄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등극 과정에서 엄청난 반란을 겪어야 했고

수많은 반란을 모두 제압하며, 왕권을 강화하였죠.

 

정복 군주로서 카스피 해에서 인도,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거대한 영역을 정복한 다리우스 1세는

아케메네스 왕조의 범위를 넓혀갔습니다.

 

그러던 중, 재위 20년이 지날 무렵인 기원전 499년에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 밀레투스에서

아리스타고라스를 중심으로 소도시 연합군들이 반란을 일으켰죠.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병력을 보냈고

5년 뒤인 기원전 494년에는

이오니아 소도시를 모두 점령하게 됩니다.

 

이오니아를 차지한 다리우스 1세는

반란을 일으킨 각 시마다 여전히 자치를 맡겼으나

그들에게는 속주의 시민으로서

페르시아 제국에 막대한 세금을 바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오니아 반란을 도와주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공격하는 데 있어

이참에 그리스를 모조리 정복하려고 했죠.

 

기원전 492, 다리우스 1세는

자신의 딸과 결혼한 사위 마르도니우스를 사령관으로

그리스 북쪽에 있는 타리키아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마르도니우스가 이끈 함대는

헬레스폰트 해협을 통과한 후 아토스 곶에서 폭풍을 만나 난파하였죠.

아테네로서는 페르시아군을 만나지도 못한 채

그들의 병력 전함 300척과 20,000명의 군사를 막아냈습니다.

 

이를 두고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이라 일컫는 학자들도 있으며

혹은 페르시아 전쟁에 포함시키지 않는 학자들도 있죠.

 

아테네 원정을 떠나보냈으나

폭풍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다리우스는

그래도, 페르시아의 병력이 대단했다는 것만은

그리스가 인지했을 것이라 판단을 합니다.

 

이에, 뿔뿔이 흩어져있던

다수의 폴리스들에게 사절단을 보내

복종의 의미로 그리스의 흙과 물을 바치라고 요구하죠.

 

많은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의 위세에 눌려

페르시아에게 복종의 뜻을 보였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사절단을 때리거나 죽임으로써

저항 의사를 밝힙니다.

 

영화 <300, 테르모필레 전투를 묘사한 영화>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죠.

아테네 등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던 다리우스 1세는

이번에는 히피아스를 선두로 군대를 출동시킵니다.

 

히피아스는 얼마 전까지 아테네의 독재 참주정 시절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장남이자 후계자이며

2대 참주로서 아테네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클레이스테네스와 스파르타의 협공으로

아테네에서 추방당하였던 자였죠.

 

이 사건을 계기로 아테네는 민주정으로 바뀌게 되었고

히피아스는 페르시아로 망명하여 다리우스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번 그리스 원정에서 길잡이가 되어

다시 아테네의 정권을 꿈꾸면서

페르시아군과 함께 아테네로 진격했죠.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반란 때 반란군을 도운

에레트리아와 아테네를 응징하고자

지상군 25,000명과 600척의 함대로 구성된 원정군을 파견하였습니다.

이 원정군은 로도스, 사모스, 낙소스를 거쳐

1주일 만에 에레트리아를 초토화시켰죠.

 

페르시아의 공격으로 순식간에 쑥대밭이 된 에레트리아를 보며

아테네에서는 비상이 걸렸습니다.

심지어는 페르시아군이 91일 아테네 근처였던

마라톤 평원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했죠.

 

이에 아테네는 페르시아 저항의 뜻을 비친

스파르타에게 구원요청을 합니다.

하지만, 이 기간은 스파르타에서 가장 중요시 여기는 종교 행사인

카르네이아 제전으로 인해 지금 당장은 도와줄 수 없고

15일이나 되어서야 출발할 수 있다고 답했죠.

이러한 스파르타의 반응에 대해서도 단지 제전 행사뿐만 아니라

원래부터 스파르타는

불리한 전쟁에는 그리 참여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아무튼, 아테네는 금방이라도 침략할 것만 같은

페르시아를 맞아 머리를 맞대고 고심했죠.

아테네만으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어불성설인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항복하는 게 낫겠다는 목소리도 나오던 중에

한 장군이 나섰습니다.

 

그는 평소 반페르시아를 표방했던 자로

밀티아데스라는 장군이었는데요.

페르시아군이 아테네로 진격하기 전에

먼저 마라톤에서 페르시아에 맞서 싸우자고

아테네 시민들에게 주장합니다.

 

 

--

93일 아테네는 마라톤에 도착한 후

아테네 식민도시의 지원병들과

아테네를 돕기로 한 플라타이아이인들과 합류하였죠.

 

또한, 페르시아의 2만 대군과 맞서기 위해

아테네도 총병력을 동원하여 1만 명 가까이 병력을 모았습니다.

아테네는 자유민뿐만 아니라 노예들에게는 자유를 약속하고

외국인들에게는 아테네 시민권을 제시해가면서

영끌해서 모은 병력이었죠.

 

총지휘관은 칼리마코스였으며

그 외 지휘관으로는 밀티아데스와

추후에 활약상을 보이는 테미스토클레스 등이 있었습니다.

 

아테네군은 대다수가

호플리테스라 불리는 중장보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요.

이들의 장비는 모두 개개인이 사비로 구입하는 방식이라서

어느 정도 경제력이 갖춰준 사람들만이

제대로 장비를 갖출 수 있었습니다.

 

장비의 기본 구성은 청동으로 만든 투구와 흉갑

그리고 정강 받이를 착용하였고

무게는 30kg 가까이 나갔다고 하네요.

하지만 사비를 들여서 준비를 해야 하는 장비였기에

모든 병사들이 중무장을 하진 못했습니다.

가난한 농민 병들은 창과 방패,

그리고 투구 정도를 착용하는 수준이었죠.

 

호플리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전사들로

기원전 8세기 후반에 출현했습니다.

초기에는 말을 타고 전쟁터로 나가는 귀족 중심이었지만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는 부유한 평민들이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는 광범위하게 중소 시민들까지 장갑 보병이 되었죠.

 

이에 비해, 페르시아군은 영화 300의 모습을 참고하면

특정한 체계가 없이 마구잡이로 대군을 이끌고 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영화 300의 전투는 이때부터 10년 뒤인

기원전 480년 테르모필레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인데요.

영화가 아무래도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묘사하다 보니

페르시아는 그저 야만족처럼 그려진 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광활한 오리엔트 지역에서

수많은 전투 경험을 쌓아왔던 페르시아 군대의 체계가 없을 리는 만무했죠.

페르시아의 군사 체제는 10진법에 근거한 군사 체제를 운용했는데

최소 단위인 10명의 다타밤

다타밤이 10개가 모이면 100명의 사타밤

그리고 1,000명 단위가 하자라밤

10,000명 단위가 바이바라밤이라는 조직이었습니다.

또한, 병종별로는 궁병과 방패병, 정예 창병, 도끼병 등으로

고도로 복잡한 전술을 구사했죠.

그리스와의 전쟁 이전의 페르시아는

주로 넓은 평야에서 전투를 치루었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 장점을 보이는 궁의 활용도가 높았습니다.

하지만 이 때문에 마라톤 전투에서는

큰 약점으로 작용하게 되었죠.

 

2만 명이 넘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1만 명의 아테네가 불리하게 시작할 뻔했던 마라톤 전투는

양군이 만났을 때 수적으로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절반의 군사는 함선에 태워

아테네를 우회 공격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기병 전체와 보병 절반은 마라톤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이죠.

 

페르시아군은 중앙에 지휘관과 정예 보병들을 배치하였고

좌우 바깥쪽에는 궁병과 일반 보병을 배치했습니다.

이에 반해, 아테네는 되려 중앙이 얇은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양 측면에 병력을 두껍게 배치하였죠.

 

양군 간의 거리가 1.6km에 이르렀을 때

아테네의 밀티아데스는

양측면 병사들의 전진 속도를 빠르게 증가시켰습니다.

그리고 중앙은 서서히 전진하도록 명하였죠.

 

이에, 페르시아에서는 기병도 궁병도 없는 아테네군이

빨리 진격하는 것을 보며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은 멀리서도 맞출 수 있는 궁병이 있는 데 반해

아테네군의 진격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것처럼 보였죠.

 

하지만 200m 거리가 될 무렵부터

아테네의 군사들은 갑자기 뛰어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페르시아 중앙에 위치한 정예군은

얇은 아테네 중앙을 돌파하는가 싶었지만,

어느새 아테네군의 양 날개가

페르시아 궁병들을 밖에서부터 감싸기 시작했던 거였죠.

페르시아 좌우에 있던 궁병들은 멀리서는 그 이점을 발휘했지만

가까이서는 활을 준비도 하기 전에

아테네군의 칼에 무참히 당했던 겁니다.

 

양 측면에서 우세했던 아테네의 병력들은

페르시아군 대열을 부수기 시작했고

그리스군의 빠른 속도를 보며 당황한 페르시아군의 보병들은

손도 쓰지 못하고 도망가기에 바빴죠.

 

밀티아데스는 병력은 열세하더라도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여

적을 유인해서 공격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와의 마라톤 전투에서

양익 포위 전술 대형을 창안했죠.

양익 포위는 적의 후방이나 측면에 있는 목표를 공격하기 위해

전 진지의 양 측방으로 기동하는 포위 기동 형태라고 합니다.

 

 

 

페르시아군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리스 군의 전술에 도주를 하기 시작하는데요.

지형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터라

후방의 대습지 방향에서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됩니다.

살아남은 페르시아군은

정박했던 함대를 타고 도망을 가는데

그 과정에서 페르시아의 함선 7척이 손실되었죠.

 

하지만 아테네군은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빠져나간 페르시아군의 함대가

아테네로 우회해서 공격할 것이라 짐작하여

30kg에 육박한 중장비를 맨 채로 아테네까지 달려가기 시작했죠.

그 거리는 30km 정도였는데

이는 운동장 한 바퀴가 200m라고 가정했을 때

운동장 150바퀴에 해당하는 거리였습니다.

아테네군은 페르시아를 막기 위해 30km가 되는 거리를

중장비를 맨 채로 3시간 만에 달려갔죠.

 

한편, 배를 타고 아테네에 도착한 페르시아 함대는

아테네군의 방어가 갖춰진 것을 확인하고서는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마라톤 평원에서의 전투는

아테네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으며

아테네군은 192명의 전사자

페르시아군은 6,4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죠.

참고로 아테네 전사자 집계에서는

플라타이아이인과 노예는 제외되었습니다.

 

아테네는 이 승리로 소수의 병력으로도

얼마든지 더 큰 병력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고

민주주의를 지켜냈다는 기쁨도 만끽했죠.

하지만 이때 다리우스가 동원한 병력은 아주 일부에 불과하여

10년 뒤에는 대규모로 그리스를 공격하게 됩니다.

 

마라톤 평원 전투에서 당연히 패배를 할 것만 같았던 아테네는

페르시아군을 이긴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보냈는데요.

그는 마라톤에서 약 40km 떨어진 아테네에 승전보를 알리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갔고

아테네에 도착해서는

기뻐하라, 우리가 정복했다라는 한마디를 하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42.195km라는 마라톤 거리는

이를 기리기 위해 전해지고 있죠.

 

예전에는 방금 말씀드린 페이디피데스 이야기가

마라톤의 유래로 감동 실화로 알려졌으나

최근 들어서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많이 알려졌습니다.

 

페이디피데스는 마라톤에서부터

승리를 알리기 위해서 아테네에 뛰어간 것이 아니라

스파르타에게 긴급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240km를 뛰었다고 하는데요.

왕복으로는 450km가 넘었으며 4, 5일 정도의 시간이 걸렸는데

원래부터 전령은 뛰어다니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고 합니다.

 

마라톤 전투의 승리를 알리기 위해 달리고 죽었다는 병사 이야기는

기원전 2세기경 소설작가 루키아노스에 의해 처음 언급되었고

세월이 지나서는 근대 올림픽이 부활할 무렵에 다시 등장했죠.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남작의 지인이었던

언어학자 미셀 브레알이 마라톤에 관해 젊은이들에게

감동을 심어주려 페이디피데스 이야기를 지어냈던 겁니다.

 

19세기에서 20세기가 될 무렵의 유럽은

사회주의, 군국주의, 전체주의가 성행했기 때문에

마라톤 전투에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애국 청년의 죽음을 만들었던 거죠.

 

그렇다면 마라톤 경기의 거리가 42.195km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라톤의 처음 길이는 출발 지점을 주 경기장으로 해서

42km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19084회 런던 올림픽 영국 황실의 귀빈석에서

우리가 편하게 출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출발선을 황실 육아실의 창 아래로 옮기라고 요청하였죠.

이로 인해 195m가 늘어나 42.195km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912년 스톡홀럼에서는 40.2 km였으며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에서는 42.75km

주최 측에 따라 길이가 변경하자

1924년에 들어서 당시 세계 권력의 중심이었던

영국의 뜻으로 42.195km로 결정되었던 것이죠.

 

마라톤 전투의 패배로 인해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은

이 전투의 치욕을 되새기고 싶지 않아

마라톤을 금기시한다고 하지만

이도 약간은 과장된 이야기라고 합니다.

 

실제로는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이란 선수가 출전했으며

88 서울 올림픽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이란 선수들이 출전했고

최근에는 2016년 리우데자이루 올림픽에서도 출전하였죠.

다만, 자신들이 개최한 1974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서 마라톤을 뺐다고 하니

최소한의 자존심 정도를 지키는 정도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오니아 반란 때 반란을 도와주었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징벌하기 위한

페르시아의 1차 원정에 대해 다루어보았는데요.

 

1주일 만에 에레트리아를 점령한 페르시아는

다음 타킷으로 아테네를 노렸으나

결국 마라톤 평원에서

밀티아데스의 양익 포위 전술대형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페르시아는 더 이상 그리스인들을 얕보지 않고

수년 동안 훨씬 더 거대한 규모로 대원정 준비에 착수하였죠.

 

다음 세계사 영상에는 좀 더 본격적인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시청해 주셔서 감사드리며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