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불교와 양자역학 2 - 인과율을 둘러싼 긴장

Buddhastudy 2023. 8. 14. 20:36

 

 

불교와 양자역학은

독립적 실체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관점을 가지지만

차이점도 크다.

 

인과율을 두고 대립되는 측면이 있다.

불교는 삼세인과 육도윤회라는 8글자 위에 성립하고 있다.

그러나 양자적 비국소성은 두 입자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작용에 있어서 인과성을 부정하는 요소가 있다.

 

물리적으로 정보와 힘이 전달될 수 없는 충분히 격리된, 멀리 떨어진 공간에서도 관계된 입자는 동시에 상호작용한다.

이 동시성이 전후관계라는 인과성을 파괴한다.

 

양자역학과 불교 모두

실체나 주체를 상정하지 않고

현상(운동, 윤회)을 설명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는 점에서는

최소한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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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불교와 양자역학 두 번째 시간인데

불교와 양자역학이 공통점이 있죠, 강력한.

독립적인 실체는 없고 어쩌면 관계가 본질이다 라고 하는 공통점이 있지만

또 불교와 양자역학은 종교와 과학이기도 하고

또 그 각각의 고유한 도그마가 달라서 긴장과 갈등이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늘은 불교와 양자역학의 갈등의 국면이 있는데

그것을 인과율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불교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불교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삼세인과 육도윤회 이렇게 8글자로 정리할 수 있겠죠.

과거, 현재, 미래가 인과율에 의해서 묶여 있고

그래서 그 사람은 그것에 따라서 결과로서 육도에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뭐 이런 식으로

이 육도에 윤회한다 하는게 근본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인과응보라든지 자업자득이라든지

또는 모든 사람은 자기 업의 상속자다

이런 표현이 있는 것이고

그래서 불교 입장에서는

오늘 내가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내일의 내가 달라진다.

뭐 이런 격려도 할 수 있고

여러 가지 이점이 있는 아주 근본적인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 입장에서 보면

이 부분에 대한 얘기가 조금 애매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양자역학에서 비국소성의 원리라고 하는 게 있지 않습니까?

 

비국소성의 원리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고전물리학이라고 하는 것은

이 물체가 충분히 떨어져 있어서

그 물체와 물체 사이에 어떠한 물리적 힘, 중력이라든지 등등

거의 무시할 정도로 혹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또는 빛의 속도보다 훨씬 더 먼 곳에 있어서

서로 전혀 정보를 주고받을 수 없다면

이 두 개는 독립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양자역학에서는

그런 고전물리학적인 가정들을 다 깨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관계가 있는 입자들은

거리가 아무리 멀어도 동시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더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근데 동시적이라고 하는 말이 결정적인데

동시적이라는 얘기는 뭐냐 하면은

전후 관계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어떤 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때는 밥을 먹으면 배가 부르다라고 하죠.

반드시 A가 앞서고 그다음에 B가 나오는 거죠.

AB가 앞서는지 뒤서는지 그 관계를 모를 때 우리는 상관관계라고 하죠.

근데 인과관계는 반드시 A가 있고 그다음에 그에 따른 결과가 B가 나타나는

전후 시간의 차이가 존재한단 말이죠.

 

그런데 고전물리학의 이런 시공간의 원칙을 다 깨버리고

속도의 원칙 이런 거 다 깨버리고

양자역학에서는

서로 관계가 있는 입자들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분리되어 있어도

동시에 상호작용을 하더라 라고 실험 결과가 나오는 겁니다.

 

그럼 이건 어떻게 해석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과학적인 기존의 상식으로

과학적 상식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이 아니라

어떤 과학적인 지금까지 상식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비인과적 방식으로

즉 비인과적 방식으로 통합되어 있는 것 같다.

 

그건 왜 그런지는 모르고,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모르는데

근데 이게 수학적으로 증명이 되어 있고

실제로 적용하면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부정할 수는 없다 라고 한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양자역학은

개체, 물체의 독립성을 부정하는 것 같긴 하지만

인과관계도 부정하는 것 같은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 입장에서는 되게 불편하죠.

인과응보라든지, 자업자득이라든지 그다음에 이런 삼세인과, 육도윤회라고 하는 개념들이 다 깨지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약에 이런 인과율이 작동하지 않는다면

불교 입장에서 보면

누가 수행해서 깨달으려고 하겠는가 이런 거죠.

 

그럼 다른점, 우연이라면

그다음에 사회적으로 보면 책임의 문제도 있죠.

만약에 막 사는 사람에 대해서 어떠한 얘기도 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냥 랜덤한 거야. 인과관계라고 하는 것은 없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불교에서 제시하는 지혜와 자비 이 두 개가

인과율이라고 하는 것을 배제해버리고 나면

해체되어버릴 수가 있는 그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역학을 열렬히 환영도 하지만

또 이런 인과율을 부정하는 듯한 측면에서는 긴장과 갈등도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양자역학이 말하는 비국소성이라고 하는 걸 아까 제가 설명했잖아요.

물리적으로 절대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없는

힘이나 정보가 유통될 수 없는 곳에 있는 입자라 하더라도

동시에 상호작용하더라.

이게 뭘 의미하는가 하는 비국소성의 원리와

 

두 번째는 진화라고 하는, 생명체의 진화라고 하는 생물학적인 것도

인과율하고는 조금 다른 얘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불편하거든요.

 

진화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보면은

이렇게 뭔가 조금 조금씩 좋아지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이렇게 통념적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생물학적인 의미는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변화해서 적응한 결과에 살아남은 걸 진화라고 하잖아요.

정확하게는 적응 생존 이런 정도의 내용이 맞겠습니다.

 

그런데 진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돌연변이에 따라서 이루어지거든요.

이 돌연변이라고 하는 것은 병신... 병신이라고.. 오작동

하여튼 뭐 고장난 거거든요.

그것도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DNARNA가 전사 복사를 하지 않습니까?

복사 오류거든요, 작업 불량이거든요.

 

대규모의 전사 오류가 일어나고

그래서 뭐 비슷, 정확하지 않게 복사된 건데

그게 생존에 적합해서 어쨌든 살아남으면 재복사되면

이게 진화인 거거든요.

 

그래서 이런 대규모 전사 오류, DNA 복제라고 하는 것은

대단히 양자역학적인 현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양자역학적인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존재가 확실하지 않고 확률적으로 부여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걸 또 인문학적인 용어로 이야기하면

우연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생명체의 진화라고 하는 것은

돌연변이, 과학적인 용어로는 돌연변이

인문학적 용어로는 우연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영적 진화라고 하는 깨달음의 추구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불교 입장에서는

이게 좀 황당한 얘기가 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진화라고 하는 것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원인을 가지고

시험에 합격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그런 인과 과정 또는 인과율의 과정이 아니다라고 하면

불교 입장에서는 상당히 긴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래서 긴장이 있지만, 그러나 또 조금 더 들어가서

양자역학과 불교라고 하는 것은

인과율 문제에 대해서조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공감대는 있는 것 같다 라고 하는 얘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 공감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과학도 인과관계를 그렇게 단순하게는 보지 않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씨앗이 커서 식물로 자라려고 하면

그게 토양도 필요하고, 수분도 필요하고, 햇볕도 필요하고 뭐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된 원인과 보조적인 원인

이거를 불교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과 연이라고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주원인과 보조원인의 복잡한 매트릭스, 복잡한 상호작용에 의해서

현상은 생성하고 소멸한다, 현상은 일어난다라고 하는 것을 인과율로 보면

과학도 인과율을 그렇게 간단하게 보는 건 아니거든요.

특히 현대과학은 다 복잡계로 표현하지 않습니까?

복잡계라고 하는 것은

무수한 인과관계의 연쇄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간단하게 ‘A 다음에 반드시 B가 온다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대단히 편하게 수용하는 얘기가 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그 공이라고 하는 개념

텅 비었다라고 하는 것은

특히 중간 사상에서는

공을 설명하는 방식이 연기법이거든요.

연기하기 때문에 공하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거든요.

 

그럼, 연기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너무나 많은 의존 관계

과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보조 원인이죠.

너무나 많은 의존 관계 연, 연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들은 발현되니까

독자성이 있다고 말하기가 어렵지 않느냐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자성이 없다.

스스로 존재하는 성질은 없다.

그것을 공이라고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공인 이유는

어떤 현상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많은 인과 연의 그 연들이 모여서 결합해서

함께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고유한 실체가

어떤 게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게 과학에서 말하는 복잡계적인 차원에서

무수한 직접 원인과 간접 원인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하는 것의 실체성은

충분히 개념적으로는 부정할 수 있는, 의심할 수 있는 그게 되니까

최소한의 공감대가 있을 수는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역학적인 그 과제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이렇게 고전물리학처럼 원자 A, 그다음에 원자 B

이렇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물질적인 실체를 상정하지 않고도

뭔가 지속적으로 스스로 작동하는 양자 시스템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느냐

이게 어떻게 보면 양자역학적인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증명됐고 적용되고 있는데

우리가 설명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래서 그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가 과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과제는 또 비슷한

아직까지 속 시원하게 해결되었다라고 보기 어려운 과제가 있는데

무아와 윤회의 관계죠.

양자역학처럼 독립적인 실체를 상정하지 않고도 무아죠

윤회라고 하는 것은 양자역학처럼 뭔가 시스템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이죠

이 윤회라고 하는 것은 작동하는데

그 윤회의 주체는 없다 라고 하는

모순처럼 보이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 내느냐

이게 양자역학의 과제와 똑같습니다, 구조적으로.

 

주체가 윤회하는 것이 아니고

주체는 없으니까 독립적인 실체는 없는 거니까.

그러나 업은 윤회한다,

이렇게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업의 윤회를 불교에서는 얘기하기도 합니다.

 

인과응보의 주체, 상과 벌을 받는 주체는 없어도

윤회라고 하는 현상은 일어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그거는 끊임없이 연쇄 작용을 일으킨다라고 하면서 하는 말이

상속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상속받는다는 의미도 되지만

서로서로 이어진다, 연속해서 이어진다

이런 표현을 할 수 있겠습니다.

 

보통 촛불의 경우를 많이 들죠

A와 초 B가 있는데 촛불 A에 불을 붙였어.

그럼 초 B는 불이 안 붙었어.

근데 촛불 A를 촛불 B에 이렇게 기울여서 이렇게 불을 붙이면

촛불 B에도 불이 붙지 않습니까?

근데 초 A와 초 B는 같은 주체는 아니죠.

AABB.

근데 불은 옮겨붙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업이 윤회한다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는 설명하는

하나의 예시로 많이 생각 등장합니다.

 

그래서 초는 그대로 있지만

그게 주최라는 것은 아니고 어쨌든 주체의 문제가 아니고

그 불은 옮겨붙는다.

그러니까 윤회는 한다.

그러나 AB로 다시 태어나고 이런 건 아니다 라고 하는 얘기로

일단 이런 설명을 아쉬운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자역학도 불교도 어떤 의미에서는

독립적인 실체를 가정하지 않고 어떻게 현상을 설명할 거냐?

근데 양자역학계에서는 증명되고 이미 적용하고 있다고 했죠.

다만 우리가 사람의 논리로 설명을 못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불교에서도 통찰과 깨달음으로 무아와 윤회는 문제가 없다.

무아와 공은 확립이 되었죠.

하지만 이것을 어떻게 사람의 언어로 설명할 건가 라고 하는 부분은

여전히 조금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교와 양자역학은

인과율을 두고 약간의 긴장과 대립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둘 다 존재의 실체 없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상의 설명

이것을 하는 부분에 있어서 공통된 과제를 가지고 있고

그 과제의 핵심에 연기법

주된 원인과 보조 원인의 복합적인 관계라고 하는 연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라고 하는 점에서는 또 최소한의 공감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그러면 이 양자역학적인 관점

혹은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이런 공의 관점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주는가라고 하는 것을

한번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