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불교와 양자역학 3. 마음 공부에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Buddhastudy 2023. 8. 15. 18:18

 

 

 

실체론의 부정, 인과론의 부정과 같이

불교와 양자철학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에 가장 첨단의 과학 이론은

우리의 마음공부에 시사점을 주고 격려해 준다.

 

양자역학은 미시우주에서 적용되는 것이고

마음공부는 마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탐구하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측정(인식)에 의해 우주가(현실이) 창조된다는 것도 유사한 생각이다.

마음공부의 두 측면에 양자역학은 기여한다.

하나는 나에게 펼쳐진 세상은 인식된 (내가 인식한) 세계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괴로움의 제거에 있어서 순서와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실과 접촉하는 마음이 공성에 익숙해져서

인식은 있으나 걸림은 없게 되어야 하는 것이고,

통증은 있으나 번뇌는 없는 두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있게 되기까지 해야

흔들리지 않는 불퇴전에 이르렀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대의 과학이 마음공부를 크게 격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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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불교와 양자역학 세 번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왜 양자역학을 얘기하느냐 라고 하면

1, 2번에서 설명드린 것처럼 약간 유사성이 있거든요.

 

불교가 세상을 보는 그 관점하고

양자역학이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에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비교해 보는 것이죠.

비교해 보면서 서로가 어떤 함축적인 느낌을 줄 수 있는가를 보는 겁니다.

그게 우리 마음공부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양자역학은 미시 우주에서 적용되는 거거든요.

거시 우주에서는 여전히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우주론이 맞죠.

그리고 이 미시 우주와 거시 우주를 완전히 관통시켜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삶도 그와 같은 유사성이 있죠.

우리도 현실에서 밥을 벌어먹고 살아야 되지만

또 내면세계라고 하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지 않습니까?

배를 곯으면 고통이 있지만 마음이 상하면 괴로움이 있죠.

 

그래서 고통과 괴로움이라고 하는 두 가지

통증과 번뇌라고 하는 두 가지 요소를 다 가지고 있다.

즉 양자역학처럼 중첩되어 있다.

입자성과 파동성을 함께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그 유사성에 대해서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그것이다. 이런 의미는 아니고요.

 

그래서 양자역학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을 다시 짚어보면

첫 번째는 실체론을 부정하는 거잖아요.

독립적인 물리적 실체가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어떤 관계 속에서 확률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다

이렇게 된 것이죠.

 

불교에 보면 연기법이 있는데

그것은 이것이 있으면 반드시 저것이 있다라고 하는 관계론 속에서

존재가 튀어나온다, 존재가 확정된다라고 하는 거하고 비슷하다 이거죠.

그러니까 세계관이 뒤집어지는 것이죠.

독립적인 원자 중심의 뉴턴의 우주관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두 번째는 이게 점점 더 심각한 건데

우리가 이전에는 어떻게 생각을 했냐면

몰라볼 수 있잖아요, 있는데 몰라볼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측정하기 전에는 뭐가 없다라고 생각되는 것은 마음속의 일이고

실제로는 세상에 뭐가 있는데

우리가 그걸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적인 상식 아닙니까?

 

근데 양자역학적으로 증명된 미시 세계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측정하기 전에는 뭐가 정해진 게 없었다는 겁니다.

실체가 있는데 우리가 그걸 못 알아봤을 뿐이다, 이게 아니고

측정하기 전에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죠.

없다, 그거는 원래 없었다.

있었는데 우리가 못 알아본 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한 것이죠.

 

되게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어쨌든 파동 함수는 그런 식으로 증명이 다 수학적으로 되어 있고

모든 전자공학은

우리 스마트폰에 다 적용이 되고 있기 때문에 이걸 부정할 수도 없거든요.

해석만 안 되는 것이죠.

소화가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파동 함수가 측정하는 순간에 붕괴되면서 입자화된다, 현실화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게 대단히 어려운 스토리인데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식의 얘기를 많이 하죠.

바람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다.

즉 마음이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보인다.

이런 일체유심조 얘기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세 번째는 이건 치명적인 것인데

인과율을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양자역학은.

그러니까 뭐냐 하면 개별 사건에 대해서 근본적인 인과율은 없다 라는 거죠.

그래서 확률적인 얘기는 해줄 수 있지만

반드시 이게 이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근본적인 인과율이 성립한다고 할 수 없다 라고 하는 뉘앙스를

우리가 너무나 강하게 받게 되는 거죠.

그러면 다 우연이야? 다 인위적인 거야?

이렇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세 가지

실체론을 부정하고, 그다음에 존재론도 부정하고. 인과율도 부정하고

이 세 가지를 완전히 180도 뒤집는 것 같은 양자역학의 우주관은

불교, 특히 대승불교의 일체유심조 라고 하는 것과

또는 공사상과 매우 유사성이 있다

이런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근데 문제는 양자역학 이론은 과학 이론이잖아요.

과학 이론을 다루는 과학자들은 우주관에 대해서 말을 안 하거든요.

그건 자신의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본 것이죠.

 

그래서 이것이 우리 인생이 어떻다는 거냐?

우리가 사는 우주가 어떻다는 거냐?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말해봤자

그건 별 의미가 없다, 과학적이지 않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건 과학자의 몫이 아니다.

뭐 원한다면 해석해 보시오이렇게 되는 거죠.

 

근데 마음공부하는 우리는

상당히 뭔가 유사성이 있는 이론 체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것의 키워드는 역시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화엄사상

혹은 유식학에서 말하는 얘기와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근데 일체유심조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뭐겠습니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내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사실은 있는 세상이 아니고

내가 만든 세상, 내가 인식한 세상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거를 대단히 세속적으로는

우리가 그냥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에게는

다 마음먹기 나름이야. 긍정적인 면을 봐

이렇게 얘기하기도 하고

조금 더 철학적으로 들어가면

우리 바깥의 세계는 없다라고 하는 거죠.

이 바깥에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을 품고

그럼, 그건 뭐가 있느냐?

오직 의식만이 있다, 식만이 있다.

인식만이 있다, 마음만이 있다, 그것만이 존재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은 그러니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이런 모든 것은

즉 나를 포함한 세상은 환상이다.

실제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낸 것이니까 환상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이건 소극적인 표현이고 적극적인 표현은 뭐냐 하면

나를 포함해서 우주 전체가 마음이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하죠.

이건 어느 쪽으로 표현하든지 간에 표현의 문제일 뿐이죠.

 

그래서 일체유심조, 마음먹기 나름이거나

내 관심 따라서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두 개를 한번 섞어보자.

그러면 우리가 경험한 데서 오는 최소한의 공감대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는 거죠.

 

그러니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마음의 반영, 마음의 투사라고 하는 불교의 설명과

그다음에 양자역학적인 설명이 유사하다는 거죠.

 

양자역학은 뭡니까?

있으니까 보이는 것이 아니고

측정, 즉 내가 보니까 비로소 그 순간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존재가 확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다만 이것은 아까도 얘기한 것처럼

아직까지는 뉴턴 물리학, 중력이 지배하는 거시 우주에서는 안 되고

양자 수준에서 그렇다 라고 하는 걸로 돼 있지 않습니까?

 

근데 우리는 현실세계와 마음의 세계를 동시에 살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우리의 마음의 세계에서는

이 양자역학적인 원칙이 통하는 것 같다.

이렇게 얘기를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세계에서는 마음이 중요하죠.

뭐냐 하면

만약에 어릴 때 객관적으로 가난한 현실 속에서 자라났지만

가난하다이런 느낌을 못 받고 자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거는 부모가 잘 대해줬다든지 이렇게 해서

자기는 결핍을 모르고 자랄 수도 있겠죠.

 

그다음에 또 뭐가 있겠습니까?

아주 두메산골에 살아서 전쟁이 났는데 아예 정보를 못 받아서 몰랐어.

그러면 또 실제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든 내 마음의 세계는

그런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있는 것을 우리가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기 때문에 그것이 마음에 들어와서 작용을 일으킨다 라고 하는 부분이

어느 정도는 그럴 수도 있다.

마음의 세계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

또 조금 더 나아가서 마음의 세계에서는 그것이 주가 된다.

그런 식으로 마음은 펼쳐진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미시 우주인 양자 세계나 또 마음의 세계에서는

이 측정에 의해서 세상이 드러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이 측정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보는 것이죠.

그러니까 내가 이 우주를 어떻게 보면 만들었다.

내가 이 우주의 창조자다.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겠죠.

 

그럼 이게 뭡니까?

일체유심조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는 그걸 현실에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가 관심이 있어야 인식되지 않습니까?

관심이 없는 거는 그냥 무심코 넘기지 않습니까?

 

엄마가 아이들이 많이 모여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어도

자기 아이 울음소리를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관심이 매우 강력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죠.

그게 객관적인 건 아니란 말이죠.

내가 알아낼 수 있단 말이죠.

 

두 번째는 만약에 안중에 없으면

내가 거기에 중요성을 부여하거나 그런 것을 하지 않아서

내 관심이 없다, 안중이 없다 그러면 인식도 안 되는 것이죠.

이건 유명한 검은 고릴라 실험이라고 심리학에서도 많이 나오는 것이죠.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으면

실제로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죠.

우리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도로 대단히 주관적이고 그러하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이 한참 일어나고

우크라이나 전쟁 아니더라도 세계 곳곳에서 분쟁과 기아와 비참한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는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큰 관심을 안 가지지 않습니까?

나는 오늘의 일상을 편안하게 즐겁게 지내는 거죠.

그건 뭐겠습니까?

나한테는 그게 없는 거죠.

이때 나한테라고 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는 그게 없다.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쳐서

내가 투자한 회사의 주가가 주식이 곤두박질치면

그때는 나는 현실에서는 또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겠죠.

 

하지만 그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관심이 없는 것은 인식이 안 되고

인식이 안 된 것은 내 마음속에서 작용하지 못함으로

나에게는 없는 것과 같다.

이런 정도는 우리가 공감해 줄 수 있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적인 그런 곤란한 우주관들

이해하기, 받아들이기 선뜻 받아들이기 참 난처한 이런 관점을

마음공부에 어떻게 써먹을까 적용할까 하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능엄경에 보면

생은 식으로부터 생겨나나

멸은 색으로부터 제거된다라고 하는 말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양자 역학하고 똑같은 얘기죠.

 

생은 식으로부터 생겨난다.

그러니까 이건 마음의 문제인데

내가 인식하는 순간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뭔가 생겨나 버렸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미 생겨난 것은 인식을 안 하면 되냐?

그게 안 되잖아요. 이미 생겨났는데.

그러니까 그것은 색으로부터 제거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하나 현실을 다스려 나가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색으로부터 제거된다 라고 하는 말은

예를 들면 내가 빚이 있으면 빚을 갚아야 된다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빚을 져서 살림이 쪼들린다 라고 하는 이 현상은

이 현상 또한 공하기 때문에

내가 두 번째 화살까지 맞을 필요는 없다.

이런 의미가 되는 겁니다.

빚을 갚아야 해결된다 이런 의미가 아니죠.

이건 마음의 문제니까.

 

그래서 양자 역학하고 관련해서

생은 식으로부터 생겨난다 라고 하는 얘기는

바로 측정이 존재를 낳는다, 측정해야 존재가 확정된다.

이 말과 똑같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하는 것이

결정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양자역학의 측정이 우리 인간으로 따지면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생각하고 측정하는 것이

사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또 두 번째 문제입니다.

 

이건 우연적인 거다. 임의적인 거다.

즉 내가 통제할 수 없다.

즉 내가 가져올 수도 없고, 내가 버려버릴 수도 없다.

생각은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거다라고 하는 것에 대한 통찰이 매우 또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생각하는 기능을 가지고

입자 현실에서는 매우 생존성을 높이지만

행복을 위한 파동의 현실에서는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물론 나쁜 생각보다는 좋은 생각이 좋겠지만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생각은 뭐다?

망상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모든 생각은

우연적이고 인위적으로 세상을 현실을 창출해내기 때문에

그것은 없는 것보다 못하다.

아무 생각이 아무 측정이 없는 것보다 못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망상이 사라져야

즉 임의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생각에 우리가 끌려가지 않으면

그게 해탈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능엄경의 가장 중요한 구절 중에 하나라고 생각되는데

이즉돈오(理卽頓悟) 사비돈제(事非頓除) 이런 표현이 있죠.

그러니까 이치라고 하면 돈오가 가능하지만

, 현실은 여기서 말하는 현실은

아까 이야기한 빚을 갚는 현실이 아니고

빚 때문에 내가 번뇌하는 마음의 현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현실은 사비돈제라

깨달았다고 해서, 공성을 깨달았다고 해서 금방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에 밴 습관 같은 것

즉 그것이 색이든, 수든, 상이든, 행이든, 식이든

우리 몸과 마음의 작용 모든 것들에는

이것은 습관이 배어 있기 때문에 금방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깨달음 이후에도

즉 공성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한 뒤에도

익숙해지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죠.

 

그래서 증득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 증이라고 하는 것은 아 그렇구나라고 하는 깨치는 것이고

득이라고 하는 것은 체화하는 것이니까

적용한다, 뭐 익숙해진다, 흔들리지 않는다.

또는 잠시 흔들렸다가 바로 제자리로 돌아온다.

뭐 이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증득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심리학, 뇌과학, 물리학, 생물학

심지어는 역사, 철학, 배척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우리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이죠.

 

특히 이 시대의 과학의 첨단이라고 하는 것이 암시하는

세계관, 우주관은

우리 마음공부를 매우 격려해 주는 그런 경향이 있다.

이런 말씀을 드리고

 

뉴턴 물리학은 뉴턴 물리학대로, 양자역학은 양자역학대로

그 과학적 진실이 주는 어떤 울림이 있고

그것이 우리 마음공부에 굉장히 도움이 된다.

 

그래서 양자역학이

모든 사물의 공성 공함을 깨우치는 데 굉장히 격려를 해준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서

세 번째 시간을 마감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